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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4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3-15 조회수1,322 추천수1 반대(0) 신고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사마리아 시카르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이 나눈 대화 이후에 이어지는 복음입니다. 사마리아를 떠나셔서 갈릴래아로 돌아가셨는데 이때 발생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내용입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카나로 가셨습니다. 카나하면 생각나는 게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화는 기적이 일어난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돌아오셨을 때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였다고 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있기 전 말씀은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는 언제나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맞아들였다고 한 근거를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축제 때 예루살렘에서 하신 일들을 목격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범상치 않은 표징을 드러내신 걸 자기들의 눈으로 보긴 봤지만 인정을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향에서 어릴 때부터 예수님의 모습을 봤고 공생애를 하시기 전에는 그저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 생활을 하셨기 때문에 도무지 예수님의 모습이 매치가 되지 않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왜 요한 복음사가 이 내용을 미리 전제를 하고 했을까를 전에는 잘 몰랐는데 오늘은 제 나름 고민을 해보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전개 과정을 이해하시면 이해가 되실 거라 사료됩니다. 카나로 가셨는데 마침 그곳에 카파르나움에 살고 있는 한 왕실의 관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기 아들이 중병에 걸렸는지 예수님께 자신의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청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지도를 보면 카나에서 카파르나움까지 직선거리가 20킬로미터 남짓되는 거리입니다.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거리로 환산하면 대략 30킬로미터라고 가정을 한다고 하더라도 상당히 먼 거리에서 왔습니다. 그 당시 교통수단을 감안하면 상당히 먼 거리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신분상으로 봤을 때 왕실의 관리이면 배경이 상당히 좋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될 겁니다. 그럼 자신의 아들이 중병에 걸렸으면 백방으로 모든 수단을 강구했을 겁니다. 치유할 방법이 막막했던 차에 어떻게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는지 예수님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왔을지 모를 일입니다. 마음은 절박했지만 과연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통해서 아들의 병이 나을 수가 있을지는 확신을 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을 겁니다. 자신이 직접 왔다는 것은 그만큼 상황이 급박한 사정이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눈여겨봐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행하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여기서 예수님과 관리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너희라는 복수를 사용하신 걸로 봐서는 주위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요한 복음사가가 이렇게 기술한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통해서 지금 그들을 향해 뭔가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관리에게 말하시는 것처럼 하시면서 양쪽 모두에게 던지는 말씀이십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마음에는 무조건 어떤 믿음을 표징이나 이적을 봄으로써 예수님을 하느님으로부터 오신 예언자라는 걸 인정하겠다고 하는 심산이 깔려 있었던 걸 지적하는 면이 있는 듯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의 마음에 한방 일격을 가한 것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지금 한시라도 다급한 사람은 관리였습니다. 관리 입장에서는 표징이나 이적을 보고 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는 사정입니다. 자기 아들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그런 상태라고 판단을 했는지 그가 하는 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동행을 하지 않고 관리에게 돌아가면 그냥 아들이 살아날 것이라고만 말씀하시면서 돌아가라고만 하십니다. 관리는 이 말씀을 들은 후 믿음을 가지고 돌아가긴 갑니다.

 

복음을 보면 이 과정에서 어떤 말도 없습니다. 먼 거리를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왔는데 그냥 돌아가면 살아날 것이라고 하는 말씀을 들으면 실제 보통 상식적으로 그 사람 입장에서 봤을 때 얼마나 예수님의 말씀이 신뢰가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뭔가 한마디 말이라도 했을 겁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기대가 절망으로 바뀌었을 겁니다. 하지만 일단 믿고 가지만 온전히 믿은 것은 아닐 겁니다. 왜냐하면 돌아가면서 자기 종들과 도중에 마주쳤는데 자신의 아이가 살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가 낫기 시작한 시간을 확인하고 그 시간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시간과 일치하는 걸 알은 후에 아들의 치유가 예수님의 권능으로 나았다는 걸 생각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돌아왔다면 처음에 종들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바로 그런 확인절차 없이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면 완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확신했다고 인정을 할 수가 있었을 겁니다. 물론 복음에서는 이 사람이 예수님의 힘으로 나았다는 걸 인정하고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잘 된 것이지만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이왕 결과가 이렇게 나왔다면 처음부터 순전히 종으로부터 들었을 때 어떤 확인도 하지 않았더라면 더 진실한 믿음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런 걸 바라는 것도 어쩌면 욕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워낙 간사해서 화장실 갈 때 마음과 올 때 마음이 달라서 그때 은혜를 입고 나았지만 혹시 모르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치! 말 한마디로 치유를 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부인을 할 수도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은 것만 봐도 완전히 믿음이 없다고는 볼 수 없는 일입니다. 여기서 나름 묵상해봐야 할 것은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은혜나 기적을 체험한 후에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믿음과 먼저 믿음의 눈으로 인정을 하고 그런 진실한 믿음을 바탕으로 해서 은혜를 입는 기적을 체험한다면 이왕 똑같은 결과라면 후자의 모습이 더 보기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런 점을 우리의 믿음과 신앙에 접목해서 묵상해본다면 우리의 믿음은 과연 점수로 환산을 한다면 몇 점이 될까요? 저는 아마 과락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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