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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왕실 관리 아들 치유 (요한4,43-54)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3-15 조회수1,075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3월 15일 월요일

[사순 제4주간 월요일왕실 관리 아들 치유 (요한4,43-54)

   

 

1독서 <다시는 우는 소리가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리라.>(이사65,17-21)

17 “보라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18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보라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움으로그 백성을 기쁨으로 창조하리라.

19 나는 예루살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나의 백성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그 안에서 다시는 우는 소리가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리라.

20 거기에는 며칠 살지 못하고 죽는 아기도 없고 제 수명을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으리라백 살에 죽는 자를 젊었다 하고 백 살에 못 미친 자를 저주받았다 하리라.

21 그들은 집을 지어 그 안에서 살고 포도밭을 가꾸어 그 열매를 먹으리라.”

 

화답송 시편 30(29),2와 4.5-6.11-12과 13(◎ 2ㄱㄴ 참조)

◎ 주님저를 구하셨으니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 주님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당신은 저를 구하시어원수들이 저를 보고 기뻐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주님당신이 제 목숨 저승에서 건지시고구렁에 떨어지지 않게 살리셨나이다

○ 주님께 충실한 이들아주님께 찬미 노래 불러라거룩하신 그 이름 찬송하여라그분의 진노는 잠시뿐이나그분의 호의는 한평생이니울음으로 한밤을 지새워도기쁨으로 아침을 맞이하리라

○ 들으소서주님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주님저의 구원자 되어 주소서.” 당신은 저의 비탄을 춤으로 바꾸시니주 하느님영원히 당신을 찬송하오리다

 

복음<가거라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4,43-54)

43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를 떠나 갈릴래아로 가셨다.

44 예수님께서는 친히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증언하신 적이 있다.

45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가시자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분을 맞아들였다그들도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갔다가예수님께서 축제 때에 그곳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기 때문이다.

46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적이 있는 갈릴래아 카나로 다시 가셨다거기에 왕실 관리가 한 사람 있었는데그의 아들이 카파르나움에서 앓아누워 있었다.

47 그는 예수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와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시어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였다.

48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49 그래도 그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 주님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5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51 그가 내려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이 마주 와서 아이가 살아났다고 말하였다.

52 그래서 그가 종들에게 아이가 나아지기 시작한 시간을 묻자, “어제 오후 한 시에 열이 떨어졌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53 그 아버지는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을 알았다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

5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로 가시어 두 번째 표징을 일으키셨다.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제1독서(이사65,17~21)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17)

 

이사야서 65장 17~25절까지는 주님께서 장차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 ('샤마임 하다쉼 와아레츠 하다샤'; shamaim hadashim waarets hadasha; new heavens and a new earth)에 실현될 종말론적 축복에 대한 예언을 다룬다.

이와같은 예언은 이미 메시야 왕국과 관련해서 이사야서 11장 6~9절, 25장 6~8절, 26장 19절, 35장 등에서 분명하게 혹은 어렴풋이 예언되었다.


또한 이것은 요한 묵시록 21장의 주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새 하늘과 새 땅의 예언이 남은 자의 보존과 악인의 심판을 예언한 이사야서 65장 8~16절의 단락 다음에 제시된다는 것은, 이 새로운 왕국이 주 하느님의 신실한 종들만 누릴 수 있는 의로운 왕국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곳은 어린양의 피로 구속을 받은 거룩한 자들만 머무를 수 있으며(묵시21,8.2),다시는 죽음이나 눈물이 없고(묵시25,8; 21,4참조), 주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할 것이므로(묵시11,9) 주님께서 그 왕국에 머무는 자들의 모든 소원을 다 알고, 그 소원대로 축복을 주시는 곳이다(이사65,24).

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에 대한 예언 궁극적으로 영원한 천국의 모습 (루카16,23; 요한14,2; 필리3,20; 1테살4,17; 묵시7,15~17; 22,1~5) 연상케하는 예언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바빌론에서 풀려나는 것이나 그리스도의 육화 (강생)로 이루어진 지상 교회의 아름다움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으로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본 단락의 예언을 종말과 직접 관련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왜냐하면, 본 단락에 열거된 내용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바빌론 포로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회복된 사건이나 죄악의 권세에 억눌린 자들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로 구원받아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축복을 훨씬 뛰어넘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본 단락에 제시된 축복들의 밑바닥에는 영원성과 완전성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는데, 이것은 현세에서 이루어질 축복과 관련된 바빌론 포로 귀환이나 그리스도의 대속에 근거한 성도들의 구원 사건에 직접 대입시키기 어려운 내용이라고 보인다.

 

그러므로 본 단락의 예언의 궁극적 성취는 요한 묵시록 21장의 내용과 더불어 그리스도 재림 이후 종말의 날, 모든 세대의 성도들이 영원히 누릴 궁극적 축복인 새 하늘과 새 땅의 환시와 관련된 축복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한편, 원문에는 이사야서 65장 17절이 이유 접속사 '키'(ki; for)로 시작된다. 이것을 고려하면, 본문은 앞절 후반절에서 제시된 내용, 즉 하느님의 백성들이 과거에 당하던 환난을 모두 잊고 고통을 완전히 벗어버릴 수 있게 되는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께서 이루실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에 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아담의 타락 이후 죄가 들어와서 오염된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상이 될 것이다. 

이것은 '창조하리라'에 해당하는 '보레'(bore; I will create)의 원형 '빠라'(bara)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신 주님의 창조 사업을 묘사한 단어 (창세1,1)와 동일한 동사라는 사실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여기서 예언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은 현재의 것을 바탕으로 새롭게 개조하는 것이 아닌, 본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세계에는 지금 이 세상에서 범람하는 죄와 고통, 또는 저주나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도 옛 세계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후의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였다(2베드3,12~13).

한편 본문에서는 '빠라'(bara) 동사가 임박한 미래를 나타내는 분사형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이처럼 새로운 창조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사야가 본 단락을 예언하고 있는 시점은 대외적으로 북부 이스라엘이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완전히 멸망당하고, 남부 유다 역시 아시리아에 의해 수많은 성읍들이 유린을 당하였고, 또 장차 바빌론 침공, 즉 남부 유다의 파멸의 그림자가 먼 발치에서 다가오고 있는 시점이었다. 


아울러 이 시기에 남부 유다는 내적으로 불의와 부정, 폭력과 우상 숭배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으며, 권력자들, 기득권자들이 저지르는 여러 가지 죄악과 폭력으로 말미암아 소외된 자들의 눈물과 고통과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급박한 위기 상황, 답답한 현실 상황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장차 하느님께서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을 예언하면서 창세기 1장 1절에서 사용된 '빠라'(bara) 동사를 분사형으로 표현함으로써, 이 놀라운 일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헀다.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본문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에 따른 결과 가운데 하나 대표적 현상을 말해준다.  여기에는 강한 부정의 의미를 나타내는 부정어 '로'(lo)가 두 번이나 사용되어 결코 기억되지도 않고 결코 생각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예전의 것들'에 해당하는 '하리쇼노트'(harishonoth; the former) 복수형 단어로서 직역하면 '이전 것들'(the former things)이 된다. 


이것은 이사야서 65장 16절에 예언된 '이전의 환난들'을 포함하여 옛 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고난들과 죄악들을 다 포함한다. 

그리고 '마음에 떠오르다'는 의미로 사용된 '타알레나 알 레브'(thaallena al leb; come into mind)는 문자적으로 '마음의 표면 위로 떠오르다' (ascend on the heart)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전혀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의 표면 위로 떠오르지도 않는다는 표현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를 다시금 힘주어 강조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루신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는 이전의 것과는 전혀 새로운 것이 될 것임을 나타낸 것이다. 

아울러 이것은 하느님의 백성들인 의인들에게 심령의 완전한 치유가 이루어질  것임을 나타낸 것이다.

 

환난에서 해방을 받았어도 과거의 그 생각이 자꾸 머리속에 떠오르면, 현재 축복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더 이상 그것을 축복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고난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고난 차원에서 해방될 뿐 아니라, 그 고난을 당했던 기억 자체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사순 제4주간 월요일 복음(요한4,43~54)

 

그래서 그가 종들에게 아이가 나아지기 시작한 시간을 묻자, "어제 오후 한 시에 열이 떨어졌습니다."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 아버지는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 집안은 믿게 되었다.(52~53)

 

왕실 관리가 자기 종들이 전하는 말을 듣고서 먼저 차도가 보이기 시작한 시간을 마치 수사관이 심문하듯 세밀하게 물었다.  이렇게 그가 자기 아들이 차도를 보이기 시작한 시점에 집착하는 이유는 이 일이 우연인지, 아니면 인술에 의한 것인지예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인지 확인하고자 하기 위해서 였다.

이러한 세밀한 확인을 통해서 그는 의심할 것 없이 예수님의 신적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확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결국 자연스럽게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53절)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리고 왕실 관리가 종을 통해 아들의 병이 낳은 시점으로 확인한 시간은 '어제 오후 한시'라고 나오는데, 유대인들의 시간으로는 '어제 제 칠시'이며, 여기서 '어제'라고 표현한 것은 일몰 시간을 기준으로 하루를 계산하는 유대인의 관습 때문이며, 그래서 카나에서 멀리 떨어진 카파르나눔으로 돌아가고 있던 왕실 관리가 종과 만난 시간은 오후 한시로부터 5시간 이상 지난 시간으로 보는 것이 전혀 무리가 없다.

 

요한 복음 4장 53절의 '알았다'에 해당하는 '에그노'(egno; knew) '기노스코'(ginosko)의 부정 과거 시제인데, 이 단어는 주로 관찰과 경험에 의해 아는 것을 나타낸다. 

이 왕실 관리와 그의 온 집안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그분이 행하신 기적을 체험하고서야 비로소 믿게 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관찰과 경험에 바탕을 둔 지식이 확실하기는 하지만, 주님의 말씀보다 표징과 이적에 더 관심을 두는 것은 적절한 믿음의 태도라고 볼 수가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 사건이 주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그것은 체험적인 신앙이 인간을 견고하게 세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

 

'믿게 되었다'에 해당하는 '에피스튜센'(episteusen; believed)은 '피스튜오' (pisteuo)의 부정 과거 시제로 사경을 헤매던 아들의 다시 살아남이 그 집안에 미친 결과를 나타낸다. 이처럼 이러한 이적을 체험한 결과로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당시 상류층 사람들이 예수님을 적대시한 경우가 많았던 사회적 분위기를 감안할 때 왕실 관리의 위치에서 결코 쉽지 않은 결단을 그가 내린 것으로 보인다.


'그의 온 집안이'에 해당하는 '헤 오아키아 아우투 홀레'(he oikia autou hole; all his household)를 가리키는데, '오이키아'(oikia) 건물로서의 집의 의미보다는 훨씬 많은 용례에서 '가족'(household)나 '식구'(family)를 나타낸다.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 그 왕실 관리가 소문으로 들었거나 한 두 번 본 일이 있는 예수님께로 자신의 절박한 문제를 가지고 감으로써, 그와 그의 온 집안에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축복이 찾아오게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께 관한 지식을 널리 알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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