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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안식일에 벳자타 못에서 이루어진 중풍병자 치유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3-15 조회수1,807 추천수0 반대(0) 신고

1독서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 47,1-9,12

그 무렵 천사가 1 나를 데리고 주님의 집 어귀로 돌아갔다. 이 주님의 집 정면은 동쪽으로 나 있었는데,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물은 주님의 집 오른쪽 밑에서,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려 갔다. 2 그는 또 나를 데리고 북쪽 대문으로 나가서, 밖을 돌아 동쪽 대문 밖으로 데려갔다. 거기에서 보니 물이 오른쪽에서 나오고 있었다.

 

3 그 사람이 동쪽으로 나가는데, 그의 손에는 줄자가 들려 있었다. 그가 천 암마를 재고서는 나에게 물을 건너게 하였는데, 물이 발목까지 찼다. 4 그가 또 천 암마를 재고서는 물을 건너게 하였는데, 물이 허리까지 찼다. 5 그가 또 천 암마를 재었는데, 그곳은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어 있었다. 물이 불어서, 헤엄을 치기 전에는 건널 수 없었다. 6 그는 나에게 사람의 아들아, 잘 보았느냐?” 하고서는, 나를 데리고 강가로 돌아갔다.

 

7 그가 나를 데리고 돌아갈 때에 보니, 강가 이쪽저쪽으로 수 많은 나무가 있었다. 8 그가 나에게 말하였다.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나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9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12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 에제키엘 예언자는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강을 이루는 것을 보고, 그 물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는 천사의 말을 듣는다.

 

 

 

복음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5,1-16

1 유다인들의 축제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 일반적으로 오순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긴다. 7장에서 초막절이, 10장에서 성전 봉헌절이, 11-12장에서 예수의 마지막 해방절이 언급되기 때문이다. 축제 이름이 명시되지 않은 것은 축제보다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 예수 자신의 계시 말씀과 행적에 더 역점을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게 된 동기를 시사하는 뜻에서 유다인들의 축제가 언급된 듯하다.

 

 

2 예루살렘의 양 문곁에는 히브리 말로 벳자타라고 불리는 못이 있었다. 그 못에는 주랑이 다섯 채 딸렸는데, 3 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

-. “양의 문은 예루살렘 성전 북쪽 성문(느헤 3.1.32;12.39참조)

벳자타는 어떤 사본에는 베레스다”(자비 또는 은총의 장소)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쿰란 문헌에 의거하여 이 명칭에 신빙성을 두기도 한다. 또한 벳자타가 히브리어보다는 아람어에 따른 표현으로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부 사본에는 3절의 상황설명이 추가되어 있다.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주의 천사가 때때로 못에 내려와 (일부 사본에는 목욕하여’) 물을 출렁거리게 했는데

물이 출렁거린 다음 맨 먼저 들어가는 이는 어떤 병이든지 낫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알려진 일종의 민간신앙에 따른 설명으로 여겨진다. 못에 새로운 물이 갑자기 흘러들어와서 물이 출렁거렸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4)5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38년간 헤맨 방랑생활과 관련지어 상징적인 뜻으로 해석하려는 학자들도 있으나, 오래된 고질병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즉 예수의 치유행위가 놀라운 기적임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6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하고 물으셨다.

-. “본다는 예수의 의도적 행동을. “안다는 예수의 신적능력을 가리킨다. 예수의 물음은 치유기적을 염두에 둔 의사표명이다. 예수의 주도권이 시사된다.

 

7 그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 예수의 의도를 깨닫지 못했음을 시사하는 반응이다. 병자는 예수가 자기를 재빨리 들어다가 못에 넣어 주겠다는 줄로 알아들었다. “주님은 신앙고백적 의미가 아니라 선생님에 가까운 존칭이다.

 

8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 공관복음의 중풍병자 치유사화(마르 2,9.11//)에서 언급된 예수의 권위적 말씀과 거의 같은 표현이다.

 

9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

-. 예수의 권위에 의해 치유가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가리킨다. 특히 즉시란 표현은 오로지 예수의 말 한마디로 치유되었음을 강조한다. 본문에 명시되지는 않았으나 침상을 들고서 걸어갔다라는 표현에 병자가 중풍병자였음도 시사된 셈이다(마르2,11-12 참조).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10 그래서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그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하고 말하였다.

-. 유다인들은 치유된 자가 침상을 들고 가는 것을 안식일 금지조항(39가지) 가운데 하나로 본다(예레 17,21-22참조).

 

 

11 그가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하셨습니다.”하고 대답하자,

-. 치유된 자는 자신을 고쳐준 분(예수)의 권위를 내세우는 듯하다. 단순히 책임전가만 뜻하지는 않는다.

 

12 그들이 물었다.

당신에게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한 사람이 누구요?”

13 그러나 병이 나은 이는 그분이 누구인신지 알지 못하였다. 그곳에 군중이 몰려 있어 예수님께서 몰래 자리를 뜨셨기 때문이다.

-. 이름을 몰랐다는 뜻이다(15절 참조)

사람들이 많이 붐벼서 빠져나갔다는 뜻이다(6.15 참조)

 

 

14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 예수의 이 경고는 죄가 병을 일으킨다는 당시 유다인들의 생각을 전제한다. 그러나 예수는 치유뿐 아니라 죄의 용서까지도 알리고자 한다. 또한 이 말은 하느님의 구원행위가 자신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도 시사한다. , 예수를 통해 이루어진 치유가 하느님이 죄를 용서하신 구원행위의 외적 표징으로 시사된다. 따라서 더욱 나쁜 것은 죄의 벌로서 육체적 죽음이나 영원한 멸망을 뜻한다. 한마디로 생명을 잃음을 가리킨다(12.25참조) 그러므로 더욱 나쁜 것은 문맥상 이보다 더 큰 일”(20)에 상반되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15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 치유된 자의 밀고(?!)로 인해 예수와 유다인들의 논쟁이 야기되었음을 시사한다. 치유된 자의 배은망덕도 시사된다고 볼 수 있다.

 

16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 예수 자신은 안식일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이 안식일에도 일하시니 자신도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일치하여 일할 따름이라고 대응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일치하여 함께 일한다는 계시 말씀은 19절에서도 거듭된다. 하느님과 동등한 예수의 정체. 곧 안식일 법을 능가하는 예수의 정체가 시사된다. 예수의 이 방어는 안식일 법에 대한 당시 유다인들의 사고를 배경으로 할 뿐(7,22-23참조),모세의 법(창세 2,2-3;출애 20.11;31.17)에 상치되는 언급은 아니다.

 

# 오늘 복음은 공관복음에도 나오는 중풍병자 치유사화를 안식일 논쟁사화와 더불어 확대보도한다. 이 두 사화가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9ㄴ절)는 설명으로 연결되어 있다. 예수의 치유행위가 이른바 안식일 논쟁에서 예수와 유다인들의 충돌로 발전된다. 특히 예수가 안식일법을 위반한 것으로 보도하는 대목이 구조상 예수의 치유행위와 안식일 논쟁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이와 흡사한 구조를 태생소경 치유사화에서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저자의 그리스도론적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따옴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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