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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 Epistemology(그리스도교 인식론) (요한5,31-47)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3-18 조회수1,055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3. 18. 도란도란글방

 

Epistemology(그리스도교 인식론) 

 

(요한5,31-47)

31 '나 자신의 일을 내 입으로 증언한다면 그것은 참된 증언이 못 된다. 32 그러나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이가 따로 있으니 그의 증언은 분명히 참된 것이다. 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냈을 때에 요한은 진리를 증언하였다. 34 나에게는 사람의 증언이 소용없으나 다만 너희의 구원을 위해서 이 말을 하는 것이다. 35 요한은 환하게 타오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한때 그 빛을 보고 대단히 좋아했다. 36 그런데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훨씬 더 나은 증언이 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성취하라고 맡겨 주신 일인데 그것이 바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증거가 된다. 37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 너희는 아버지의 음성을 들은 적도 없고 모습을 본 일도 없다. 38 더구나 아버지께서 보내신 이를 믿지 않으므로 마음속에 아버지의 말씀이 들어 있지 않다. 39 너희는 성서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을 알고 파고들거니와 그 성서는 바로 나를 증언하고 있다. 40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41 '나는 사람에게서 찬양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42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43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지만 너희는 나를 받아 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아마 딴 사람이 자기 이름을 내세우고 온다면 너희는 그를 맞아들일 것이다. 44 너희는 서로 영광을 주고받으면서도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은 바라지 않으니 어떻게 나를 믿을 수가 있겠느냐? 45 그러나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말라. 너희를 고발할 사람은 오히려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46 만일 너희가 모세를 믿는다면 나를 믿을 것이다. 모세가 기록한 것은 바로 나에게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47 너희가 모세의 글도 믿지 않으니 어떻게 내 말을 믿겠느냐?'

 

우리는 앞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과 우리 주님께서 하실 더 큰 일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루실 더 큰일은 21절과 22절에 설명되어 있는 것처럼 심판과 생명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었고 그 더 큰 일은 구원을 얻은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진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 의미는 그렇게 하느님의 은혜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의 더 큰 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성도에게는 선한 일이 나타나게 되는데 성도에게서 나타나게 되는 그 선한 일은 구원을 얻은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거룩하게 지어져 가는 길에 그들 속에 나타나는 열매들이며 그러한 열매들은 반드시 십자가를 지는 복음의 삶으로 나타나게 되고, 바로 그 복음의 삶과 복음의 전파가 성도의 삶 속에서 구원과 심판의 더 큰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했지요

이렇게 주님께서 벳지타 못가에서 38년된 병자를 일으키신 사건은 소경이요 절뚝발이요 중풍병자들인 죄인들에게 주님께서 찾아가셔서 그들에게 선물로 영생을 선물하시는 은혜의 복음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표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주님께서 안식일날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몰랐고 그 일을 행하신 주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도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급기야 주님께서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다 증거물을 제출하시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장면이 바로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아니 그들은 하느님께서 안식일을 왜 지정하셨는지조차 모르고 안식일 운운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시작하셔서 하느님께서 마치시는 새 창조의 완성을 성경은 참 안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창세기에서부터 안식과 안식일 준수를 명하셨던 것입니다. 참된 안식인 새 창조는 하느님께서 시작하셔서 하느님이 마치실 것이며 그 안식은 반드시 완성될 것이라는 하느님의 계약이 그 안식일 속에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 안식일에 참된 안식의 완성을 위해 아버지의 일을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안식을 완성하고 계신 주님께 안식일을 어겼다는 죄목을 붙여 죽이려 한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구약의 안식일과 그 안식일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희년, 그리고 유대인들의 절기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 시대에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그야 말로 사활을 걸어야 할 만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출애20:8-11)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9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생업에 종사하고 10 이렛날은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서 쉬어라. 그 날 너희는 어떤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 너희와 너희 아들 딸, 남종 여종뿐 아니라 가축이나 집 안에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 11 야훼께서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이레째 되는 날 쉬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훼께서 안식일을 축복하시고 거룩한 날로 삼으신 것이다.

 

십계명의 제4계명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그들의 문학 양식에서 중요한 어떤 것들을 나열할 때 정말 강조하고 싶은 것들은 활자의 양을 많이 할애를 해서 썼어요. 우리는 여기서 유대인들은 십계명 중에서도 안식일에 관한 계명에 아주 특별히 촉각을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출애굽기에 창세기의 단어들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하느님께서 안식일에 복을 주셨다고 하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셨다고 하십니다. 그 말씀은 창세기에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반복하신 말씀입니다.

 

(창세2:1-3) 1 이리하여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 2 하느님께서는 엿샛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3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새로 지으시고 이렛날에는 쉬시고 이 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시어 복을 주셨다.

 

이렇게 어떠한 날, 시간에다가 하느님께서 복을 주시고 그 시간을 거룩하게 만드셨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에 확인을 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 안식일을 어기는 것에 대해서 대단히 진노하셨음을 구약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출애31:14-15) 14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안식일은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다. 이 날을 범하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 그 날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겨레에서 추방당해 목숨을 잃을 것이다. 15 엿새 동안 일하고, 이렛날은 야훼를 섬기는 거룩한 날이니 철저하게 쉬어야 한다.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단호하게 안식일을 범하는 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여러가지 율법이 있지만 그렇게 그 율법을 어긴 사람이 처형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그려진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은 의도적으로 안식일이 상징하고 있는 어떠한 것이 범해 질 때 그렇게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임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어기는 것에 대해 엄청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이스라엘이 계명을 어기고 하느님 앞에 敗易한 일을 할 때마다 너희가 안식일을 어겼다라고 율법을 지키지 않은 행위의 대명사로 유독 안식일을 강조해서 그들을 책망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제20:10-13) 10 그래서 나는 그들을 이끌고 에집트에서 광야로 나왔다. 11 거기에서 규정을 정해 주고, 내 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것을 지키기만 하면 누구나 복되게 살 수 있다고 하였다. 12 또 안식일을 정해 주었다. 그것을 나와 그들 사이의 표로 삼아 그들이 야훼의 것이 되었음을 깨닫게 해 주려는 것이었다. 13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광야에서 나에게 반항하였다. 내가 정해준 규정을 따르고 내가 세워 준 법을 지켰으면 살 수 있었을 텐데 굳이 거절하였다. 그들은 나의 안식일을 무엄하게도 욕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광야에서 없애 버리고 싶었다.

 

(레위25:2-5) 2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일러 주어라. '너희는 내가 주는 땅으로 들어 가서 야훼의 안식년이 되거든 그 땅을 묵혀라. 3 너희는 육 년 동안 밭에 씨를 뿌리고 육 년 동안 포도순을 쳐, 그 소출을 거두어라. 4 칠 년째 되는 해는 야훼의 안식년이므로 그 땅을 아주 묵혀 밭에 씨를 뿌리지 말고, 포도순을 치지도 말라. 5 너희가 거둘 때 떨어진 데서 절로 자란 것을 거두지 말고, 순을 치지 않고 내버려 둔 덩굴에 절로 열린 포도송이를 따지 말며 땅을 완전히 묵혀야 한다.

 

안식일과 안식년이 담고 있는 내용은 정확하게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안식년을 어겨도 이스라엘은 혼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가 되게 하신 이유가 성경은 이스라엘이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500여년 동안 그들이 지키지 않은 안식년 70번을 한꺼번에 지키게 하시기 위해 그들을 포로로 보내신 것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바벨론에 잡혀가게 되면 땅이 저절로 안식을 하게 되니까요.

 

(2역대36:20-21) 20 느부갓네살은 칼에 맞아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을 바빌론으로 붙잡아다가 페르샤 시대가 되기까지 대대로 종으로 부렸다. 21 이리하여 이 땅은 긴 세월 동안 황폐되어, 밀렸던 안식을 다 찾아 누리며 칠십 년을 채우리라고 야훼께서 예레미야를 시켜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안식년을 지키는 것에 관해 지나치다 생각될 만큼 집착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식일과 안식년의 개념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 희년제도입니다. 이 희년제도를 살펴보면 안식일과 안식년이 담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가 희미하게 드러납니다.

 

(레위25:8-12) 8 너희는 또 일곱 해를 일곱 번 해서, 안식년을 일곱 번 세어라. 이렇게 안식년을 일곱 번 맞아 사십 구 년이 지나서 9 일곱째 달이 되거든 그 달 십일에 나팔소리를 크게 울려라. 죄벗는 이 날 너희는 나팔을 불어 온 땅에 울려 퍼지게 하여라. 10 오십 년이 되는 이 해를 너희는 거룩한 해로 정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지킬 해이다. 저마다 제 소유지를 찾아 자기 지파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11 오십 년이 되는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지낼 해이니, 씨를 심지도 말고 절로 자란 것을 거두지도 말며 순을 치지 않고 내버려 두었는데 절로 열린 포도송이를 따지도 말라. 12 이 해가 희년이니, 이 해를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 너희는 밭에서 난 소출을 먹고 지낼 수 있을 것이다.

 

희년은 모든 빚이 다 탕감이 되고 생활이 어려워 땅을 판자들은 다 되돌려 받게 되는 해입니다. 이스라엘은 토지 매매를 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땅은 하느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활이 정말 어려워서 땅을 팔았을 때는 중간에 돈이 마련되면 다시 찾아 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인이 그런 능력이 없을 때에 가까운 친족 중에 한 사람이 돈을 주고 그 땅을 찾아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 것을 고엘 제도라고 합니다. 그렇게 빚을 진 사람이 자기가 상환할 능력이 없을 때 누군가 나서서 그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 이스라엘의 율법이었고 누구도 그 빚을 상환할 능력이 없을 때는 하느님께서 희년을 주심으로 모든 빚을 탕감하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희년을 설명하는 구절에 등장하는 단어가 참 재미있습니다. 레위기 2526절을 보겠습니다.

 

(레위25:26-27) 26 그것을 되돌려 살 친척이 없을 경우에, 그가 나중에 스스로 힘이 생겨 되돌려 살 길이 트이면, 27 판 다음에 지나간 햇수에 해당하는 값을 빼고, 나머지를 그 땅을 산 사람에게 물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 소유지로 돌아갈 수 있다.

 

희년이 되기 전에 누군가가 대신 토지를 무르는 제도를 고엘 제도라 한다고 했지요? 그런데 그 고엘에 의해 토지를 무른다 할 때 무르다가알이라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구속이라는 의미입니다. 영어 성경에도 ‘redeem’이라고 번역 이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희년은 하느님의 구속과 연관이 있다는 뜻이 되지요. 희년이 되면 자연스럽게 구속의 결과가 오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희년이 되기 전에 희년의 효력을 보여 줄 수 있는, 다른 말로 구속의 이야기를 힌트하고 있는 고엘 제도라는 것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가알이라는 단어가 똑같이 쓰인 곳이 있습니다.

 

(욥기19:25) 나는 믿는다, 나의 변호인이 살아 있음을! 나의 후견인이 마침내 땅 위에 나타나리라.

 

여기서 후견인이라고 번역이 된 그 단어가 바로 무르다’ ‘가알입니다. 그러니까 희년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대속 되는 구원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안식일과 안식년도 역시 구속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제도였다는 것을 우리가 쉽게 알 수 있지요.

그래서 주님은 회당에서 설교를 하시면서 당신께서 희년을 선포하러 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루가4:16-21) 16 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난 나자렛에 가셔서 안식일이 되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 가셨다. 그리고 성서를 읽으시려고 일어서서 17 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마리를 받아 들고 이러한 말씀이 적혀 있는 대목을 펴서 읽으셨다. 18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19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들던 사람들에게 되돌려 주고 자리에 앉으시자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의 눈이 모두 예수에게 쏠렸다. 21 예수께서는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메시아가 오셔서 하실 일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사61:1-3) 1 주 야훼의 영을 내려 주시며 야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고 나를 보내시며 이르셨다. '억눌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찢긴 마음을 싸매 주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알려라. 옥에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2 야훼께서 우리를 반겨 주실 해, 우리 하느님께서 원수 갚으실 날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여라. 슬퍼하는 모든 사람을 위로하여라. 3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어라. 재를 뒤집어썼던 사람에게 빛나는 관을 씌워 주어라. 상복을 입었던 몸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어라. 침울한 마음에서 찬양이 울려 퍼지게 하여라. 그들을 이름하여 '정의의 느티나무 숲' 이라 하여라. 야훼가 자기의 자랑거리로 손수 심은 것,

 

2절에 나오는 야훼께서 우리를 반겨 주실 해가 바로 희년입니다. 이렇게 희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백성들의 죄가 대속이 되어 온전한 안식이 오게 되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안식일과 안식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절기도 역시 안식일의 내용이 투영되어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겠습니다. 창세기 2장으로 다시 가서 최초의 안식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우리에게 설명되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창세2:1-3) 1 이리하여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 2 하느님께서는 엿샛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3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새로 지으시고 이렛날에는 쉬시고 이 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시어 복을 주셨다.

 

여기에 안식일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가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일곱째 날에 복을 주셨다는 말과 하느님께서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은 어떤 목적을 위해 따로 구별해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별한 그 날에다가 하느님께서 복을 부어놓으셨다고 성경은 진술하고 있습니다. 잘 기억해 두세요.

이렇게 안식이라는 것이 처음 등장하고 오랜 역사 동안에 안식이라는 것이 등장하지 않다가 출애굽기 20장에 가서야 처음으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 계명으로 주어집니다. 아까 읽어보았던 출애굽기 20장의 제4계명이 바로 그 것입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출애20:10-11) 10 이렛날은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서 쉬어라. 그 날 너희는 어떤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 너희와 너희 아들 딸, 남종 여종뿐 아니라 가축이나 집 안에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 11 야훼께서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이레째 되는 날 쉬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훼께서 안식일을 축복하시고 거룩한 날로 삼으신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시면서 그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근거를 창조기사로 대십니다. ‘내가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칠 일째 쉬었다. 그러므로 너희도 안식일을 지켜 아무 일도 하지 마라그리고 딱 40년 후 신명기에서 다시 안식일을 명하시는데 신명기에서는 그들이 에집트 땅에서 구원을 받은 것을 기억하고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신명5:12-15) 12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너희 하느님 야훼가 분부하는 대로 해야 한다. 13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생업에 종사하고 14 이렛날은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서 쉬어라. 그 날 너희는 어떤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 너희와 너희 아들 딸, 남종 여종뿐 아니라 소와 나귀와 그 밖의 모든 가축과 집안에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 그래야 네 남종과 여종도 너처럼 쉴 것이 아니냐? 15 너희는 에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일을 생각하여라. 너희 하느님 야훼가 억센 손으로 내리치고 팔을 뻗어 너희를 거기에서 이끌어 내었다. 그러므로 너희 하느님 야훼가 안식일을 지키라고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창조를 하시고 일곱 째날 안식을 취하셨다는 것과, 이스라엘이 에집트에서 건짐을 받게 되는 것은 같은 내용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첫 창조와 일곱째 날의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게 될 이제 다시는 타락할 수 없는 새 창조와 그 새 창조의 완성으로 오게될 진짜 참 안식을 그림자로 보여주는 것이었고, 이스라엘이 에집트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된것 또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게 될 참된 안식의 땅 하느님나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은 하느님 백성들의 구원과 하느님나라의 완성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세기와 출애굽기에서 보았듯이 하느님께서는 안식일에 복을 주셨습니다. ’ ‘바라크가 하느님으로부터 피조물에게 부어지는 하느님의 생명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안식일에 복을 주셨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그 안식일에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생기게 된 죄와 수고로움에서 자유롭게 되어 우리가 누리게 될 진짜 안식, 영원한 생명이라는 씨앗을 심어 놓으셨다는 말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안식일에는 앞으로 긴 세월 후에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게 될 구원, 영생이라는 씨가 그 내용으로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복을 담아 두셨다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여섯째날 인간과 가축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 복은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복입니다. 이 물질 세계, 공간 세계, 감각 세계에 복을 주셨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일곱째 날에 복을 주셨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시간이라는 초월적인 영역에다가 복을 부어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시간이 뭡니까? 우리는 시간이 뭔지 잘 몰라요. 우리는 물질과 공간에 대해서는 아주 익숙합니다.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또 내가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아주 익숙합니다. 그런데 시간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시간은 전혀 우리가 통제할 수가 없어요. 공간과 물질은 우리가 마음대로 만들었다 부수었다 할 수 있지만 시간은 전혀 통제가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측정을 해야 하는지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그냥 뚝뚝 잘라서 우리가 이름을 붙여 놓은 것을 우리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1968년에 국제 도량형 위원회(CGPM)에서 세슘원자의 복사주기에 919천만 배를 곱해서 1초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전세계가 그것을 1초라고 부르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냥 막연히 그 시간이라는 것이 흘러가면 우리 인간이 늙고 병들고 약해져서 결국은 죽게 된다는 것 정도로 시간을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들은 시간을 두려워합니다. 그 시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물질과 공간속으로 숨어들게 됩니다. 우리는 시간 앞에서 그렇게 무력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 시간 중의 어떤 날을 거룩하게 만드셨고 그 거룩한 시간에 복을 부어 놓으신 것입니다.

 

거룩‘’카다쉬라는 단어가 제일 처음 쓰인 곳이 바로 창세기 2장입니다. 하느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주시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셨다 여기서 처음 거룩(카다쉬) 이라는 말이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거룩은 공간과 물질세계에 처음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시간에 처음으로 쓰였습니다. ‘거룩한 시간

하느님은 인간들이 물질과 공간, 감각 세계에 목숨을 걸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라는 시간에 복을 부으셔서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주시고 물질과 공간, 감각 세계에서 눈을 돌려 시간의 세계를 바라보라고 안식일을 주신 것입니다. ? 하느님나라라는 것은 공간적이며 장소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죄로 말미암아 끊어졌던 하느님의 생명력, 즉 복이 회복되어 영원히 하느님의 통치에 순종하며 하느님과 함께 하는 시간의 개념으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영원은 시간이 아닙니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한계 내에서 우리가 가진 단어들로 설명을 하려니까 시간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네요. 그렇게 천국은 장소적, 공간적 개념이 아니기에 이 지구라는 공간 속에서도 우리는 하느님나라를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나라는 시간의 개념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헬라(그리스)철학은 이데아와 현실, 공간적 이원론이지만 우리 그리스도교는 이 세상과 다가오는 세상의 시간적 이원론입니다. 우리가 고대하고 희망하는 것은 그 다가올 시간, 영적 세계를 희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렇게 그 안식일이라는 시간에다가 永生이라는 씨앗을 심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그 시간에 복을 주셨다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안식일이라는 시간에다가 복을 부어 주셨다는 것은 그 안식일이 하느님의 참 복인 영생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교회에게 주지시키시기 위해 그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좀 전에 읽었던 출애굽기 31장에 보면 하느님께서 안식일을 계약의 표징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출애31:16-17) 16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일을 대대로 지킬 영원한 계약으로 삼아야 한다. 17 야훼가 엿새 동안에 하늘과 땅을 만들고 이렛날은 쉬며 숨을 돌렸으니, 안식일은 나와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표가 된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계약의 표징으로 주신 것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가 할례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이 안식일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느님의 계약이 너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입니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 중에서 하느님의 백성들을 택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그들을 구원해 내시고, 그들에게 영원한 천국 생 명을 허락하시겠다는 것이 계약의 실체입니다. 그 계약의 표징이 할례와 안식일이라는 것입니다. 할례는 이 사람은 하느님에게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이다라는 symbol 이었지요? 계약의 축복의 보증으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할례를 행하라 명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아들의 할례를 행하지 않아서 하느님께서 죽이시려고 했던 장면이 성경에 나오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은 하느님의 계약 밖에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니까요. 안식일도 바로 그 계약의 표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계약의 밖에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는 사람들 이외의 나머지는 사망이죠.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계약의 표징인 안식일을 범하면 하느님께서 죽이라고 엄명을 내려놓으신 것입니다. 그 계약의 밖에 있는 자들은 이렇게 죽게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단지 그날, 토요일이 뭔가 대단한 날이라서가 아니라 그날이 상징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계약으로 얻게 될 영생이요, 구원이기 때문에 그 날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죽은 것입니다. 상징입니다. 복음의 설명을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할례를 받지 않거나 안식일을 어기면, 그 계약의 표징을 행하지 않으면 그 계약밖에 있는 사람으로 간주해서 죽이는 것입니다. 상징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될 하느님백성들의 구원과 하느님나라의 완성 그리고 그로 말미암게될 진짜 참안식과 영생을 상징하던 것이었습니다.

 

(골로2:16-17) 16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고 마시는 문제나 명절 지키는 일이나 초생달 축제와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로 아무에게도 비난을 사지 마십시오. 17 이런 것은 장차 올 것의 상징에 지나지 않고 그 본체는 그리스도입니다.

 

안식일의 실체는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정확해 졌죠? 그래서 안식일을 범하는 자를 죽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자들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독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세상의 죄와 수고와 질병과 고통, 갈등, 투쟁, 슬픔 이모든 것들이 전부 물러간 영생의 상태를 안식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그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진짜 안식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영생을 상징하는 안식일에 병자가 있다는 것은 그 안식일은 불완전한 안식일이죠? 그러니까 그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심으로 예수께서 그 안식일을 완전하게 하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게 안식이다. 바로 이게 영생이다

안식일에 일한 사람을 죽여 버리신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하느님나라는 인간이 스스로 성을 쌓고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를 지켜내야하는 그러한 나라가 아닙니다. 참 안식이 이루어진 나라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부어지는 영원한 생명력, ‘을 받아 행복을 누리는 나라인 것입니다. 안식일이 담고 있는 내용이 바로 그 온전한 하느님나라이기 때문에 안식일에 자기를 위해 일을 하는 자를 죽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게 될 하느님백성들의 구원과 하느님나라의 완성을 상징으로 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구원을 얻은 사람들은 이미 그 안식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히브4,3) 이것은 하느님께서, '내가 노하여 맹세한 대로 그들은 결코 나의 안식처에 들어 오지 못하리라' 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었기 때문에 그 안식처에 들어 가게 될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도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에 일을 다 마치시고 쉬셨습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믿는 자들이 안식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식에 들어간 자들은 자기의 일을 쉰다고 합니다.

 

(히브4:10)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 마치고 쉬신 것처럼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 간 이도 그의 일손을 멈추고 쉬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자기 일이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위해,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하느님이 아닌 이 세상의 힘을 추구하고 쌓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이제 하느님의 생명력, 복이 회복되어 부어지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자기 스스로 자기를 지키려 안간힘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바로 안식일날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인 것입니다.

그렇게 안식은 하느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안식에 들어간 자들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과 다른 선한일이 그들의 삶속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안식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지만 너희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4:11) 그러니 우리도 그 안식을 누리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옛 사람들처럼 순종하지 않았다가 낭패를 보아서야 되겠습니까?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보고 너희 삶 속에도 하느님에 대한 순종이 나타나지 않거든 두려워하라는 말입니다. 그게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의 진의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로 이 자리에 오게된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은혜이지만 그 은혜를 입은 자들은 절대 함부로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예전과 다름이 없다면 내 안에 선한 일이 시작이 안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안식일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될 하느님나라의 완성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담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도 몰랐을 뿐 아니라 그 안식일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도 몰랐고 그 분이 하신 일이 어떠한 것을 상징하고 있는 지도 몰랐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주님은 그러한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주님을 구세주로 믿어야 하는 세가지 증거를 대 주십니다. 그 첫 번째가 세례자요한의 증거이고 두 번째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그리고 세 번째 증거가 하느님의 증거인 성경 말씀입니다.

스스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실 수도 있으신 분이 스스로의 능력을 발휘하시지 않으시고 다른 증인과 증거물을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세 가지 증거를 대신 이유는 유대인들은 법정에서 어떤 사실을 확증하려면 율법에 의해서 반드시 증인을 두 사람내지 세 사람을 세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신명19:15) 어떤 나쁜 짓이든 어떤 잘못이든,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는 증언이 성립되지 않는다. 어떤 잘못을 저질렀든지 두세 사람의 증언이 있어야 고소할 수 있다.

 

주님은 그러한 유대 율법의 절차를 그대로 따라 세 가지 증거를 대신 것입니다.

 

(요한5: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냈을 때에 요한은 진리를 증언하였다.

 

먼저 주님은 세례 요한의 증거를 첫 번째 증거로 내 놓으십니다. 세례자요한은 예수님 앞에 보내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고 죽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습니다.

 

(요한1: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세례 요한은 메시아를 증거 하라고 하느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요한3:28)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 앞에 사명을 띠고 온 사람이라고 말하였는데 너희는 그것을 직접들은 증인들이다.

 

(마태11:10) '너보다 앞서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네 갈 길을 미리 닦아 놓으리라' 하신 말씀은 바로 이 사람을 가리킨 것이다.

 

주님은 지금 세례자요한이야말로 주님의 하느님 되심 메시아 되심을 증거 하기 위해 온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너희들이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했다고 시비를 거느냐? ‘하고 물으시는 것이지요.

그리고 두 번째로 주님께서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로 제시하신 것이 자신의 역사입니다.

 

(요한5:36) 그런데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훨씬 더 나은 증언이 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성취하라고 맡겨 주신 일인데 그것이 바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증거가 된다.

 

착한 일‘’선한 일에르곤 아가똔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하고 계시고 완성하실 그 에르곤은 주님께서 하느님의 일을 완성하시기 위해 지실 십자가의 사건과 그 십자가의 사건을 예표 하는 주님의 이적들을 모두 포함한 것입니다. 그 모든 이적 들이 예수님의 하느님 아들 되심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주님께서 그 것들을 증거로 제시하고 계십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을 통해 주님만이 혼인 잔치를 잔치답게 만드실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표적을 통해서 주님만이 죄를 이기시고 죄의 증상인 질병을 치유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38년된 병자의 치유를 통해서 영적으로 불능자인 죄인들을 주님께서 먼저 찾아오셔서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만 죄인들을 건져내시는 은혜의 하느님을 보여주셨고 오병 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주님께서 죄인들의 (이 세상의 제한된 자원으로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데서 오는) 고통과 결핍을 해결하시고 풍성한 하느님나라를 완성하시는 하늘의 빵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물위를 걸으시는 표적을 통해서는 자연 법칙을 극복할 능력을 가지고 계신 주님의 하느님 되심을 보여주셨고, 소경으로 난 자가 보게 되는 이적을 통해서는 영적 소경인 죄인들의 세상에 빛으로 오신 주님의 실체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 이 적인 죽은 나자로를 살리시는 사건을 통하여 주님은 죽음을 이기시는 영생의 원천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기적의 내용을 하나로 농축시켜 골고다 언덕 위에 박아버린 것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 십자가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 이지요.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서 죄인들과 연합하시고 그 죄인들의 죄를 몽땅 짊어지시고 저주받아 죽으심으로 그 죄인들의 죄가 전부 해지는 초유의 기적이 골고다 언덕 위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한 십자가의 결과로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비로소 잔치가 될 수 있었던 것이고, 모든 질병과 죽음의 증상들이 사라진 하느님나라가 완성된 것이고, 영적 소경인 자들이 눈을 떠 주님을 알아보게 된 것이고, 세상 속에서 곤고함과 결핍으로 고통을 당하던 죄인들이 이 시간 속에서 하늘의 풍성함을 누리며 살게 되었고,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이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바로 주님이 증거로 제시하신 , 역사’ ‘에르곤인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일은 바로 주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정확한 증거였던 것입니다.

세 번째로 주님께서 제시하신 증거가 하느님 아버지의 증거, 즉 성경입니다.

 

(요한5:39-40) 39 너희는 성서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을 알고 파고들거니와 그 성서는 바로 나를 증언하고 있다. 40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성경은 구약 성경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구약 성경이 하느님께서 예수님에 대해 증거해 놓으신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성경의 저자가 하느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고 그 저자는 자신에 대해서만 기록을 하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베드1:20-21) 20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성서의 어떤 예언도 임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21 예언은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령에 이끌려서 하느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아 전한 것입니다.

 

21절의 성령에 이끌려이라는 어구에 쓰인 감동하심을 입다‘’훼로메노이라는 단어는 원래 인도하심을 받다‘’이끌림 을 받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쓰인 구절을 몇 개 찾아보면 그 단어의 진의가 쉽게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사도27:14-17) 14 그런데 얼마 안 가서 섬 쪽에서 유라퀼로라는 태풍이 불어 와서 15 배가 바람에 휘말리게 되었다. 우리는 바람을 뚫고 나갈 수가 없어서 바람이 부는 대로 배를 내맡기고 *표류하기 시작하였다. 16 가우다라는 조그만 섬을 북쪽으로 끼고 가는 동안에 우리는 끌고 가던 거룻배를 간신히 바로잡을 수가 있었다. 17 선원들은 거룻배를 끌어 올리고 배가 부서지지 않게 선체를 밧줄로 동여맸다. 그대로 가다가는 리비아 해안의 모래바닥에 처박힐 염려가 있어서 돛을 내리고 계속 표류하였다.

 

여기서는 훼로메노이표류하다라고 번역이 되었지요? 그러니까 배가 바람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바람이 움직이는 대로 흘러갔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가 말하는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었다는 말은 성경을 성경의 기자들이 자신들이 속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전망을 가지고 기록을 하긴 했지만 그 성경기록의 주도권은 사실 성령 하느님께 있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게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다’ ‘훼로메노이라는 단어가 가진 참 뜻인 것입니다. 폭풍 속의 배가 자력 항해를 포기하고 바람에 의해 이리 저리 이끌려 다니듯이 성경의 기자들도 성령에 이끌려 성령하느님께서 기록하라는 것만 기록을 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저자는 하느님이십니다. 그 하느님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필연성과 그 분의 정체에 대해 기록해 놓으신 것이 구약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은 말할 것도 없고요.

이렇게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증거가 핑계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 분이 하시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에 참된 안식을 상징하는 일이 주님에 의해 벌어졌는데도 그들은 그 일로 인해 주님을 송사를 한 것입니다. 본문 37절로 가보겠습니다.

 

(요한5:37)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 너희는 아버지의 음성을 들은 적도 없고 모습을 본 일도 없다.

 

죄인들은 하느님께서 친히 주님을 증거 하셨음에도 그들은 주님의 음성을 분별하지 못했고 그 분을 알아보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알아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 앞에서 하늘을 난다든지 불말과 불병거로 무장한 천사들을 부르시든지 해서 그들에게 이해시키실 수는 없었을까요? 왜 그들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성경과 주님의 일과 그들이 잡아 죽인 세례 요한을 증거로 제시하십니까? 주님은 그런 식으로 당신을 증명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한5:31) '나 자신의 일을 내 입으로 증언한다면 그것은 참된 증언이 못 된다.

 

주님은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로서 해야 할 일을 하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증명하는 기적대신 당신이 하실 일을 예표 하는 일과 당신이 하실 일, 즉 십자가를 지시는 일만을 하고 가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오직 믿음의 원리에 의해서만 발생되고 주어지도록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이적 외에 그 것과 전혀 상관없는 자신을 증명해 보이는 이적들은 전혀 일으키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러한 것들이 전혀 하느님 나라의 전파나 완성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반증인 것입니다. 그래서 40일 단식 후에 마귀와의 대면에서도 주님은 전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증명해 보이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발생합니다.

 

(요한8:12-14) 12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또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 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13 그러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당신이 당신 자신을 증언하고 있으니 그것은 참된 증언이 못 됩니다' 하며 대들었다. 14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 하셨다.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으니 내가 비록 나 자신을 증언한다 해도 내 증언은 참되다. 그러나 너희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주님께서 오늘 본문 31절과 전혀 반대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 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13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531절 말씀을 들 어서 반박을 합니다. 주님이 그들의 반박에 대해 하신 말씀입니다.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맥을 잘 봐야 합니다.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내가 나를 증거 하는 것은 참된 증거가 되지 못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나는 내가 하느님의 아들인 것을 증명하러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시키시는 일을 하러 왔다라는 것을 강조해서 하신 말씀이고, 814절에 나오는 내가 나를 위해 증거 해도 내 증거는 참되다라고 말씀을 하신 것은 하느님과 예수님은 그 존재와 뜻에 있어서 하나라는 것을 강조하여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는 1516절을 보면 이 해가 가실 것입니다.

 

(요한8:15-16) 15 '너희는 사람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만 나는 결코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 16 혹시 내가 무슨 판단을 하더라도 내 판단은 공정하다. 그것은 나 혼자서 판단하지 아니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와 함께 판단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내가 나에 대해 증거 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다라고 말씀하신 후에 그 이유를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 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느님과 성자 예수님은 그 존재와 뜻에 있어서 하나이시고, 지금 주님은 그 하느님과의 통일성 안에서 자신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므로 자기가 자기 자신을 증거 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의 증거가 참되다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8장에서는 주님이 자신의 하느님의 아들 됨을 증거 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와 뜻이 존재와 뜻이 하나이신 하느님을 증거 하신 거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따라서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한 번도 스스로의 힘을 발휘하거나 스스로의 언변으로 자신을 증거 하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어떻게 그 분이 하신 일이 전부 하느님 백성들의 구원과 하느님나라의 완성을 상징하는 하느님의 큰일을 나타내는 것이었는지를 알게 되었고 구약의 내용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유대인들에게도 그 세 가지 증거가 제시되었음에도 그들은 그 것들을 전혀 알아먹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그 세 가지 증거가 다 참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까?

요한복음 52425절을 보시면 예수님의 하느님의 아들 되심을 알아보지 못하는 유대인들과 대조하여 등장하는 일련의 무리들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요한5:24-25) 24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생명의 세계로 들어섰다. 25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때가 오면 죽은 이들이 하느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것이며 그 음성을 들은 이들은 살아날 터인데 바로 *지금이 그 때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그렇게 모두 소경인 암담한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 자들이 생겨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24절에서는 그렇게 하느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이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인지를 설명해 줍니다. 24절의 듣고‘’아쿠온 믿는‘’피스튜온은 병행 구로서 같은 내용을 다른식으로 표현을 해놓은 어구들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하느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 것과 그 분을 보내신 하느님을 믿는 것을 같은 것으로 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하느님을 믿는 자들은 영생을 얻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입니다. 지금 주님은 어두운 세상 속에서 빛이신 주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주님을 송사하고 있는 유대인들에 빗대어 교회의 출현을 예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우리들인 것입니다.

루가복음 24장에 가면 그렇게 전혀 알아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자들 속에 있던 저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 분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 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는지가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루가24:25-27,31-32) 25 그 때에 예수께서 '너희는 어리석기도 하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그렇게도 믿기가 어려우냐? 26 그리스도의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 하시며 모세의 율법서와 모든 예언서를 비롯하여 성서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들어 설명해 주셨다. 31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는데 예수의 모습은 이미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32 그들은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서를 설명해 주실 때에 우리가 얼마나 뜨거운 감동을 느꼈던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엠마오 마을로 낙심하여 내려가고 있는 제자들에게 성경에 기록된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셨더니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31절의 열려라고 번역이 된 단어 디아노이고열다. 밝아지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단어는 수동태입니다. 그러니까 외부의 다른 존재에 의해 눈이 열려진 것입니다. 그 똑같은 단어가 32절의 성경을 풀어 주실 때라는 어구의 풀어 주다입니다. 그러니까 그 어구도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성경을 열어 주실 때에라는 말입니다. 조금 더 내려가면 44절에 또 똑같은 내용의 말씀이 나옵니다.

 

(루가24:44-47) 44 그리고 그들에게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말했거니와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한 말씀은 반드시 다 이루어져야 한다' 하시고 45 성서를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며 46 '성서의 기록을 보면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하였다. 47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기쁜 소식이 예루살렘에서 비롯하여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다고 하였다.

 

여기도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주시자 그들이 주님의 일과 성경의 내용을 그때서야 이해를 합니다. 그러니까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보고 마음이 열려 성경이 이해가 가려면 주님의 도우심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루가 복음 24장은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라3:23) 믿음의 시대가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의 감시를 받았으며 믿음이 나타날 때까지 갇혀 있었습니다.

 

여기도 보면 믿음을 마치 인격체처럼 믿음이 외부로부터 온다라고 표현을 하고 있지요? 이렇게 믿음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세 가지 증거를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는 세례 요한의 증거요, 다른 하나는 주님의 일(역사)이요, 다른 하나는 성경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증거를 대셨다는 것은 너희들은 왜 이러한 명백한 증거를 못 알아먹느냐는 책망이 함께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이제 주님께서 그렇게 전부가 소경인 가운데에서 일련의 무리들의 눈을 열고, 성경에 대한 이해를 열어서 하느님 아들의 음성을 듣고 하느님을 믿는 자들을 주님께서 만들어 내실 것임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안에 우리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보 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어요? 아울러 오늘 본문에는 그렇게 주님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성경이 이야기하는 바를 이해도 못하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징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44절을 보세요.

 

(요한5:44) 너희는 서로 영광을 주고받으면서도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은 바라지 않으니 어떻게 나를 믿을 수가 있겠느냐?

 

주님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는 자들의 특징은 자기들끼리 세상의 영광을 취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는 자들이 피조물로서의 사람입니다.

 

(요한12:28) 아버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소서.' 그 때에 하늘에서 '내가 이미 내 영광을 드러냈고 앞으로도 드러내리라' 하는 음성이 들려 왔다.

 

이렇게 주님은 그 분의 삶으로 또한 십자가의 죽음으로 아버지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다가 가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은혜에서 제외된 죄인들은 자기들의 영광을 위해, 다른 말로 자신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살더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절대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도 없고 하느님을 믿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사람들이 성당(교회)안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이 세상 것들로 예수를 믿는 유익을 얻고 싶어 합니다. 예수를 믿어 내가 남보다 뛰어난 인물이 되고, 예수를 믿어 내가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게 자신의 영광을 위해 예수를 믿는 가짜들의 신앙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이 땅에서 영광스러운 존재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하느님의 백성들을 만드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 에 보내셔서 죽이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당(교회)안에서 믿음의 증거를 이 역사 속에서 인간의 영역 안에서 찾으려 합니다. 내 삶에 어떠한 유익한 결과가 나타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삶의 조건이나 삶의 질이 개선되기를 원합니다. 혹은 종교 행위를 열심히 하는 것으로 믿음이 있고 없고를 측정합니다. 혹은 방언 이라든지 예언 같은 은사가 나타나는 것으로 믿음의 척도로 삼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모양으로든 예수를 잘 믿으면 이 세상 인간의 영역 안에서 나타날 수 있는 것들로 증명이 될 거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건 다 틀린 것입니다. 믿음은 하느님으로부터 은밀하게 하느님의 백성에게 뚫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늘의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유무는 이 역사 속의 어떤 것들이나 인간의 영역 안에 있는 것들로 증명되어지거나 지탱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전혀 없는 사람이 병을 고칠 수도 있고, 방언을 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믿음을 확실하게 소유한 사람이 그러한 외적인 은사를 전혀 받지 못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눈에 보이는 이 인간 영역 안의 어떤 것으로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그게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의 잘못된 신앙관입니다. 그 것은 정치적 경제적 풍요를 가져 다 줄 메시아를 기다렸던 바리새인들의 민속 메시아사상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주님께 독사새끼라는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빵점짜리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들, 선택된 백성들에게 땅에서 이 땅의 것들로 보상해 주세요, 그게 물질이든 신령한 은사든 상관없으니 이 땅의 것들로 나의 믿음 있음을 증명하게 해 주세요그게 민속 메시아사상이지 뭡니까? 성도의 믿음은 하느님의 은혜로 자연스럽게 맺혀지는 성령의 열매로만 측정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이 바로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 삶인 것입니다.

 

(요한15:8)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을 이용하여 우리의 영광을 구하고 있다면 우리는 절대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영광만을 구하는 자들에게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요한5:42)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지금 주님을 범법자로 몰고 있는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들의 삶 속에서 맺혀져야 하는 참 열매들이 아닌, 자신들이 종교적인 행위를 하고 있고,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인간 영역 안에서의 눈에 보이는 것을 근거로 내세우며 자신들이 하느님을 잘 섬기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우겼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러한 자신들의 행위를 자랑했습니다.

주님은 그러한 종교행위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닌 자신들의 자랑과 자신들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오히려 그들이 잘 지키고 있다는 모세의 율법이 그들을 고소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5:45-47) 45 그러나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말라. 너희를 고발할 사람은 오히려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46 만일 너희가 모세를 믿는다면 나를 믿을 것이다. 모세가 기록한 것은 바로 나에게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47 너희가 모세의 글도 믿지 않으니 어떻게 내 말을 믿겠느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모세가 기록한 성경 말씀을 모두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모두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요한9:28-29) 28 이 말을 듣고 그들은 마구 욕설을 퍼부으며 '너는 그자의 제자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이다. 29 우리가 아는 대로 모세는 직접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지만 그자는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른다' 하고 말하였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모세의 제자라 자처해 왔고 그 하느님께서 그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다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너희는 모세의 글도 믿지 않을 뿐아니라 모세도 믿지 않는다. 오히려 모세는 너희를 율법으로 고소하고 있음에도 너희는 모세의 제자라고 하는구나.’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이라는 것은 유대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잘 지켜서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라고 준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하느님의 요구를 절대 충족시킬 수 없는 자들이므로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메시아를 갈망해야 한다. 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 주신 것인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자신들 이 그 모세의 율법을 지켜서 하느님을 만족시켜 드릴 수 있다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갈라3:10-11) 10 성서에 '율법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꾸준히 지키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율법을 지키는 것에 의존하는 사람은 언제나 저주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11 그러니 *율법을 통해서는 아무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성서에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은 살 것이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야고2:10) 누구든지 계명을 다 지키다가도 *한 조목을 어기면 계명 전체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이게 바로 하느님께서 모세의 율법 속에 넣어 주신 하느님의 요구입니다. 따라서 죄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모세 오경 뿐 아니라 구약의 모든 말씀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필연성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말씀 속에서 자신들의 불가능함을 깨닫고 메시아 도래의 필연성을 깨닫기는커녕 자기들의 힘으로 하느님의 요구를 모두 이루어낼 수 있다고 착각을 한 것입니다. 그게 자기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들의 특징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주님은 전혀 불가능한 38년 된 병자와 같은 죄인들을 구하러 하늘로부터 오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527절을 보면 그와 정 반대의 표현이 등장합니다.

 

(요한5:27) 아버지께서는 또한 아들에게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다. 그는 사람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주님께서 자신을 인자‘’사람의 아들이라고 표현을 하십니다. 이 어구를 헬라어로 보면 호티 휘오스 안트로푸 에스틴입니다. 그 말은 사람의 아들이기 때문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27절의 말씀은 주님은 사람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다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여기 인자 앞에는 정관사도 없습니다. 정관사가 있으면 메시아를 가리키는 다니엘서의 그 인자라고 쉽게 알아 볼 수 있을 텐데 관사까지 없어서 이 구절의 해석에 많은 혼란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주님이 사람의 아들이기 때문에 심판하는 권세를 부여받았다라는 구절을 바꾸어 말하면 주님이 사람의 아들이 아니시면 주님은 심판하실 권세가 없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이외의 고등 종교들은 둘로 갈라집니다. 이슬람교와 같은 이신론과 불교나 힌두교와 같은 범신론으로 갈라집니다. 이신론은 초월적 신을 인정은 하지만 그 초월적 신이 이 세상에 전혀 관계를 하지 않는 것을 신론으로 하고 있습니다. 범신론은 모든 만물 안에 신이 깃들여 있다고 하는 신론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범신론에서는 초월적 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들이 처한 상태는 초월적인 신으로부터 공급이 되는 풍성한 생명력이 차단이 되어 이 땅에 갇혀 버린 상태입니다. 따라서 초월적인 존재로부터 오는 그 생명력의 공급이 회복되어지지 않으면 절대 인간이 당면한 문제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구원은 초월적인 존재이신 신이 인간들이 갇혀있는 땅으로 들어와야 비로소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초월적인 신은 인간들이 눈으로 귀로 도저히 감지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 초월적 신은 사람이 감지할 수 있는 모습과 신분으로 이 땅으로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을 구원하러오는 구세주는 온전히 초월적인 신이심과 동시에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완전한 인간이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신론과 범신론으로는 절대 이 땅에 갇혀버린 인간들의 구원이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구세주는 하느님이신 분이 사람으로 오셔야만 구세주가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범신론에서 이야기하는 초월과는 상관없는 이 땅에 갇혀 버린 신들은 인간의 구원에 전혀 관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신론에서 이야기하는 이 땅과 전혀 상관없는 초월적 신도 이 땅에 갇혀 있는 인간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세주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임과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셔야 하는 것입니다.

 

아람어나 히브리어에서 누구누구의 아들이라는 말은 부자지간이라는 의미보다는 그 사람의 특성을 공유한 동등한 존재라는 의미 로 쓰였습니다. 따라서 우레와 같은 성질을 소유한 자우레의 아들이라고 표현을한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것은 그가 바로 하느님이라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아울러 주님께서 자신을 인자,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신 것도 당신은 온전한 사람이셨음을 밝히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은 단순히 다니엘서의 메시아만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닌 것입니다. 인자는 다니엘서의 그 메시아 인자를 가리킴과 동시에 참 사람이신 사람의 아들 예수를 가리키는 단어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람을 대표하여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내야 하고, 사람을 대표하여 하느님이 요구하시는 모든 율법을 다 수행해 내야 하기에 그 분은 사람이셔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하느님의 백성들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그 모든 이들을 대신하여 죽으셔야 하기에 그 분은 그러한 자격이 있는 하느님이셔야만 한 것입니다. 그것을 신학에서는 내포적 대신’ ‘inclusive representative'이 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분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자가 되심으로 심판을 하시고 구원을 주실 수 있는 분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를 바라보는 그리스도교 인식론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을 이렇게 끝냈습니다. 잘 이해 하셨습니까? 잘 이해하셨다면 모쪼록 하느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엉터리 신자가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를 비우는 참 신자의 삶을 잘 경주하기를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자신의 믿음을 보상받으려 하지 말고. 그건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인간 영역 속의 것들로 주눅 들지도 말고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로 만드시기 위해 나에게 잠시 허락하신 역할이 이런 것이라는 올바른 인식을 하고 열심히 현재의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 하느님의 영광을 효과적으로 반사해 내는 삶을 잘 살아내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서 있으라면 서있으세요. 하느님이 기라고 하면 기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지 우리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시키는 대로 잘살아내야, 우리가 제 자리를 잘지키고 있어야 이 구속의 드라마가 아름답게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냥 우리가 처한 상황 속에서 많이 사랑하고, 많이 인내하고, 많이 용서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열심히 하느님께 부르짖으면서 그 삶을 잘 살아 냅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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