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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4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3-19 조회수1,297 추천수0 반대(0) 신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의 최대 관건은 성경에서 이미 언급한 메시아의 탄생지에 대한 예언의 말씀에 있습니다. 이걸 가지고 설왕설래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건 사실 표면적인 이유이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혹시나 예수님으로 인해 자기들의 기득권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겁니다. 그들도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그 가르침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배경에는 예수님을 무시하는 부분이 상당 부분 작용했습니다. 사회적인 신분이나 배경 같은 걸로 일단 예수님을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목수의 신분이기 때문에 목수가 알면 얼마나 안다고 하는 식으로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들이 봤을 때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움을 표현하는 것은 여기서 중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일단은 가르침이 탁월하다는 뜻에서 놀라움을 표하는 것도 있을 테고 또 하나는 상대적으로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배우지도 못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어디서 그런 해박한 지식을 얻게 되었는지.” 의구심을 가지면서 놀라워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해서든지 인정을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군중들이 예수님 말씀에 포섭되어 가는 모습에 그들의 입지에도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성전 경비병들에게 예수님을 체포해오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성전 경비병들이 그냥 되돌아오게 됩니다. 왜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느냐고 추궁을 하니 지금까지 예수님처럼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면서 예수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요즘 현대판 버전으로 이야기하면 피의자를 체포하려고 갔는데 막상 체포하려고 하는데 피의자에 대해 체포할 근거가 되는 피의사실이 없기 때문에 체포를 할 수가 없었다고 항변 아닌 향변을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리사이들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속은 것이 아니냐고 말을 하면서 하는 말이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언급을 합니다. 이들이 하는 말의 근거를 보면 참으로 한심한 판단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메시야를 인정하는 건 그들이 메시아라고 인정하는 여부에 따라 메시아가 된다는 그런 이상한 논리를 전개하는 것입니다. 이건 말이 되는 말이 아니잖습니까? 자기들 입으로도 모순을 드러냅니다. 예언자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성경을 연구하라고 하는 말에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출생지가 베들레헴인지만 조사를 하면 예수님이 메시아로 인정될 뒷받침이 되는 근거가 충분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은 것만 봐도 그들은 애써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실제 그들은 율법과 성경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니코데모가 등장해서 하는 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니코데모는 바리사이입니다. 니코데모는 이미 이전에 예수님을 밤에 한번 찾아뵌 사람입니다. 아마도 주위 다른 바리사이들의 눈을 의식했기 때문에 밤을 이용했을 겁니다. 니코데모는 예수님에 대해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자기가 판단했을 때 예수님이 뭔가 평범한 분은 아니라는 것을 어느 정도 직감했을 겁니다. 예수님에 대해 좀 더 비밀리에 알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밤에 남몰래 찾아 갔기도 했기 때문에 우회적으로 예수님에 대해 변호를 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 51절에서 니코데모가 하는 말을 보면 율법에서는 뭔가 심판을 하려면 우선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 판단을 해도 판단을 해야 한다고 율법에 규정되어 있지 않냐고 하니 오히려 공격과 핀잔을 줍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성경을 연구하라고 합니다. 이미 그들은 여기에서도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누구보다도 율법에 대해서는 해박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남에 대해 의문점이 있으면 심문을 해야 했는데 오히려 율법에 규정된 그 사항을 준수하지 못하는 모순을 드러낸 것입니다. 49절에서 그들이 하는 말을 보면 율법을 모르면 저주받은 자들이라고 그들 스스로가 한 말입니다. 결국 그들은 자기들 입을 통해 자기들을 스스로 저주하는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율법을 제대로 알았다고 한다면 니코데모가 한 말대로 어떤 조치를 했어야 하는데 그들은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자기들 상황에 맞게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로 이용해 사회에서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오히려 율법을 악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쩌면 요한 복음사가는 니코데모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들의 추악한 모습을 고발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한 가지 그들이 우를 범한 사실을 하나 지적한다면 고향이라는 뜻이 예수님께서 오랜 시간 유년기와 공생애 기간 동안 주로 활동하신 생활 근거지를 바탕으로 해서 예수님의 고향으로 간주했다는 사실입니다. 메시아를 인정하는 요소 중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판단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판단만 잘했어도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알아볼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들은 실제 예수님을 직접 뵙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처럼 자신의 아집이라든지 자아를 포기하지 않으면 저희도 실제로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들처럼 예수님을 거부하거나 그들이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해서 박해를 하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잘 모르면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박해아닌 박해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니코데모도 처음엔 예수님의 말씀을 잘 못 알아들었지만 결국 나중에는 예수님의 마지막을 지켜드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니코데모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보려고 노력을 했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일 수가 있었지만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에 대해 그들이 조금만 더 마음을 열고 열린 자세를 견지했더라면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니코데모가 신앙의 롤 모델이 되었으면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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