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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5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3-22 조회수1,341 추천수1 반대(0) 신고

 

이 세상 어떤 사람도 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미 우리 몸에는 죄를 지을 수 있는 DNA가 내장된 채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이미 죄인이라는 걸 인식해야 할 겁니다. 자신에게 죄가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라고 성경은 전합니다.

 

오늘 복음은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간음한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당시의 법에 의하면 돌에 맞아 죽게 될 처지였지만 요즘 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신의 한 수를 발휘하셔서 단죄를 하지 않으시고 용서를 해 주시는 이야기입니다. 이와 아울러 우리도 남을 단죄하지 말아야 한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내용만 놓고 보면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의 행동이 어떠했는가요? 실제 그들에게는 간음한 여인이 간음한 사실 그 자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었었습니다. 그들은 그 여인을 이용해서 예수님께 올무를 씌울 궁리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이런 자세로 예수님께 다가올 때 예수님의 시선의 초점은 여인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의 죄를 통해 그 죄가 죽을죄라고 한다면 그 죄로 생명을 죽여야 한다는 논리를 가지고 예수님을 대했습니다. 율법을 이용해서 귀중한 생명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죄가 죽을죄라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근데 예수님의 모습은 어떤가요? 예수님은 그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일단 여인을 살리고 봐야 된다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시선은 간음한 여인에게 초점이 우선 쏠려 있는 것입니다. 같은 죄인인데 한쪽은 죽여야 한다는 논리이고 예수님은 비록 죄인이지만 살리고 싶으신 마음입니다.

 

복음의 초점을 어디에 포커스를 두느냐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남의 죄는 잘 본다는 것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같은 눈인데 이렇게 시력이 들쭉날쭉하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 몰린 간음한 여인을 살릴 수 있었던 묘안이 어디에 있었을까요? 복음에 나오는 돌은 어떤 걸 상징할까요? 죄를 응징하는 도구와 같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여인에게 던지려고 한 돌을 그들의 양심에 돌을 던졌던 것입니다. 그들이 그런 돌을 맞을 거라곤 전혀 예상을 하지 못했을 겁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돌을 던져라고 하셨습니다. 근데 왜 던지지 못하였습니까? 조건이 달려 있었습니다. 죄가 없는 사람만 던져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누구 한 사람도 던지지 못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들에게도 죄가 있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입니다. 차마 죄가 없다고 우기기는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던 모양처럼 보이는 듯하지만 애초에 그런 정도의 양심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그 여인을 단죄하려고는 하지 않았을 거라고 봅니다.

 

그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들도 죄를 지을 수가 있고 그래서 죄가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겠지만 실제로는 그걸 잘 인식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의 양심에 돌이 되어 던져졌을 때 비로써 그때 자신도 남의 죄를 단죄할 처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씩 그 자리를 피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난 후였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개신교 성경은 이런 의미에 다음과 같은 번역이 첨가된 걸 발견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고가 이어져 있습니다. 아무튼 원어에 이게 나와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그들은 번역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마치 자신 속에 잠들어 있는 죄성을 깨우는 돌로 변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이 주는 교훈은 남을 단죄할 수 있는 사람은 죄가 없는 사람만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은 단순히 죄라고 표현이 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을 보면 좀 더 엄격한 의미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 어떤 죄도 이런 의미의 표현입니다. 조금의 죄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그런 의미일 겁니다. 그런 사람은 존재하기 힘듭니다. 결국 사람은 엄격하게 말하면 누구든지 남을 단죄할 권한이 없다는 것이 될 겁니다. 예수님께서도 단죄를 하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그럼 예수님께서 죄가 있으셔서 단죄를 하지 않으신다는 뜻일까요? 그건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죄를 단죄할 권한을 가지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으셨고, 그들은 그런 권한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했습니다.

 

좀 더 깊이 들어가 본다면 예수님 자체가 하느님이신데 그런 권한은 하느님만 사용하실 권한인데 자기들이 그 권한을 사용했다는 건 분명한 월권행위입니다. 엄격하게는 하느님의 자리에 있게 되는 무서운 결과를 낳게 되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들은 실제 그 여인을 향해서 살인죄를 저지른 것과도 같습니다.

 

살인은 꼭 살인을 해서만 살인이 되는 건 아닐 겁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알량한 지식이나 권위를 이용해서 그 힘으로 사람들을 옥죈 것입니다. 살인과 맞먹는 죄를 이미 지은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마음이 없는 것처럼 인식을 할 수가 있지만 실제 우리도 자세히 우리 자신의 모습을 꼼꼼히 성찰하면 누구나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한 해석을 해서 합리화하지만 남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로 제단을 하는 성질 말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점에 대해 다시 한 번 더 깊이 그런 걸 성찰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 자신에게도 그런 면이 있다는 걸 솔직히 인정합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 여기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마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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