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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신성 모독 죄 (요한10,31-42)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3-26 조회수1,709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3월 26일 금요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신성 모독 죄 (요한10,31-42)

  

 

1독서<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십니다.>(예레20,10-13)

10 군중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기 마고르 미싸빕이 지나간다그를 고발하여라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가까운 친구들마저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속아 넘어가고 우리가 그보다 우세하여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1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그들은 성공하지 못하여 크게 부끄러운 일을 당하고 그들의 수치는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이다.

12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13 주님께 노래 불러라주님을 찬양하여라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화답송 시편 18(17),2-3.3ㄴㄷ-4.5-6.7(◎ 참조)

◎ 곤경 중에 주님을 불렀더니 내 목소리 들으셨네.

○ 저의 힘이신 주님당신을 사랑하나이다주님은 저의 반석저의 산성저의 구원자시옵니다

○ 주님은 저의 하느님이 몸 숨는 저의 바위저의 방패제 구원의 뿔저의 성채시옵니다찬양하올 주님 불렀을 때저는 원수에게서 구원되었나이다

○ 죽음의 오랏줄이 나를 두르고멸망의 급류가 나를 삼키며저승의 오랏줄이 나를 휘감고죽음의 올가미가 나를 덮쳤네

○ 곤경 중에 나 주님 부르고하느님께 도움 청하였더니당신 성전에서 내 목소리 들으셨네부르짖는 내 소리 그분 귀에 다다랐네

 

복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요한10,31-42)

31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33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하고 대답하자,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35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36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37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38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39 그러자 유다인들이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40 예수님께서는 다시 요르단 강 건너편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

41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와 서로 말하였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42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

 

 

 

 

 사순 제5주간 금요일제1독서 (예레20,10-13)

 

"저기 마고르 미싸빕이 지나간다." (10) 

마고르 미싸빕(magor misabip)의 뜻을 알아야 한다. '마고르'(magor)는 '두려워하다'는 뜻을 지닌 동사 '꾸르'(gur)에서 유래한 명사로 '공포', '두려움'을 뜻한다. '미싸빕'(misabip)은 '주변', '사방'을 뜻하는 명사 '싸비브'(sabib)에 전치사 '민'(min)이 결합된 형태로 '사방으로부터', '주변으로부터' 뜻이다. 따라서 '마고르 미싸빕' '사방으로부터의 공포' 뜻을 나타낸다. 

구약에서 시편 31장 14절을 빼놓고는, 모두 예레미야 예언자가 사용하고 있다. 말하자면 시편 31장 14절에서 예레미야가 전용해서 쓰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정녕 저는 많은 이들의 비방을 듣습니다.  사방에서 공포가 밀려옵니다.(마고르 미싸빕 ; magor misabip).  저를 거슬러 그들이 함께 모의하여  제 목숨 빼앗을 계교를 꾸밉니다." (시편 31장 14절)

 

다윗의 애가인 시편 31장 14절에서 시작된 이 표현은 생명의 위협을 받는 사면초가의 매우 곤란한 처지와 상황에 놓여 있음을 지적하는 관용적 표현이다. 이 말은 원래 예레미야 예언자를 박해했던 주님의 집(성전) 총감독인 파스후르 사제에게 예레미야가 한 말이었다.(예레20,1-6참조)

 

"주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파스후르가 아니라 마고르 미싸빕이라 부르실 것이오." (예레20,3) 

'파스후르'(pashehur)는 '비옥한'이란 뜻을 지닌 아람어 '푸쉬'(push)의 분사형인 '파쉬'(pash)와 '주위를 둘러서', '주변에'란 뜻을 지닌 아람어 '쎄후르'(sehur)라는 단어의 유사음을 지니고 있다. 원래는 '파스후르'가 '찢다', '조각내다'란 의미를 지닌 '파솨흐'(pashah)에서 유래한 단어로 여겨지는데, '자유' 내지는 '자유롭게 하다' 의미를 지닌 것으로 추측한다. 

따라서 '마고르 미싸빕' 즉 '사방으로부터의 공포'란  바뀌어진 이름이 들려 졌을때, 즉각적으로 '주변의 비옥함'이란 뜻의 '파쉬 쎄후르'가, '파스후르'란 이름에서 연상된다. 이는 곧 그 이름의 개명이 주는 저주와 심판의 이미지 보다 생생하게 전달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 유희를 통해 예레미야는, 자신이 갖고 있는 세속적 권세로 하느님의 말씀의 선포를 막으려는 '파스후르'가 '주변의 비옥함'을 누리는 삶의 자리에서 '사방의 공포'가 밀려오는 비참한 상황에 떨어지게 될 것임을 선명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대언하며 '파스후르'가 '마고르 미싸빕'이라 불리어질 것이라 예언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대적자들이 예레미야에게 '마고르 미싸빕'이라 부르며 그를 조롱한다. 그리고 예레미야를 넘어뜨리고 해치려고 사방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사실을 들었다고 하느님께 자신의 암울한 처지를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게 할 수 있는 분, 자신이 처한 이러한 위기 가운데서 의지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10)

자신들의 죄를 고발하는 예레미야에 대해 그의 허물을 찾아내어 맞고소하겠다는 적대자들의 위협이다. 지금 적대자들은 예레미야를 참 예언자가 아니라 거짓 예언자라고 단정하고 그를 참소하며 깎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가까운 친구들마저,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10) 

'가까운 친구들마저'에 해당하는 '에노쉬 쉘로미'(enosh shelomi)는  '내 평화의 사람', '내게 평안을 기원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아주 가까운 친구' 가리킨다.(시편41,10) '제가 쓰러지기만' 해당하는 '찰르이'(tsali)는 '절뚝거림', '넘어짐'(시편38,18)을 뜻하는 '첼라으'(tsela)에 1인칭 대명사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이다.

평소에 자신의 평화를 빌어주던 가까운 친구들마저도 자신의 넘어짐을 바라며 기다리고 있다는 이 고백은 예레미야가 얼마나 고독한 상황에 처해 있으며 격려도 위로도 없이 예언직을 감당하고 있는지를 반증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그의 친한 벗들도 예레미야가 쓰러지기를(실족하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그들이 믿음을 배신했다는 뉘앙스를 함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제가 믿어 온 친한 벗마저, 제 빵을 먹던 그마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듭니다." (시편41,10)

 

"그가 속아 넘어가고 우리가 그보다 우세하여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0) 

예레미야에게 원수를 갚고자 하는 그 적대자들이 그를 속여서 이기려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결말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것은 이미 예레미야 예언자가 예레미야 20장 7절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이 주 하느님께 완전히 졌음을 선언했기 때문이다.(예레20,9)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를 꾀셨고, 예레미야는 그 꾐에 넘어갔다.(예레20,7) 또한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이기셨고,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느님께 사로잡힌 완전한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을 말하지 않으리라.'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겠습니다." (예레20,9)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이 때문에, 그 적대자들은 결코 예레미야를 유혹할 수도, 이길수도 없게 된다. 이처럼 예레미야는 다섯번째 고백의 전반부에서(예레20,7-10) 하느님께 불평을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하느님의 승리를 암시하는 복선을  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본절 이하부터 11-13절에서는 예레미야 자신에게 승리를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며 구원의 확신을 선언한다.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12)

앞에 11절에서 자신과 동행하시고 지켜주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적대자(원수)가 패망하고 자신이 승리할 것이란 예레미야의 선언이 소개되었다. 이제 12절과 13절에서는 적대자에 대한 복수를 간구하고, 이것의 실현을 통한 구원을 확신하는 예레미야의 선언이 소개된다.

예레미야 17장 10절에는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일에 따라, 제 행실에 결과에 따라 갚는다." 라고 소개하면서 주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심장을 살피시며 폐부를 시험하시고, 각각 그의 행실대로 보상하시는 분으로 말씀하신다. 그러나 여기 본문에서는 특별히 '의인(의로운 이) 곧 예레미야 자신에게만 그러한 주님의 보살피심을 적용하고 있다.

하지만 본절과 병행 구절인 예레미야 11장 20절의 표현을 감안할 때, 실제로 그 적대자들의 마음까지도 주님께서 꿰뚫고 계심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본절은 사실상 예레미야 11장 20절의 반복으로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꿰뚫어 보심의 대상을 '의인'인 예레미야 자신에게만 한정시키는 것은 '제 곁에 계시니'(11절)란 표현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듯이 특별히 주 하느님과 예레미야 자신과의 관계성에 촛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심장(마음)과 속(폐부)를 보셨다. 다시는 하느님을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그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쳐 견딜 수 없었던(9절참조) 예레미야의 마음을 보셨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시고, 악인들에게서 건지실 것임을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이것이 악인들의 속(중심)까지 살피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악인들은  패망을 당하게 되는 주님의 복수를 겪게 될 것이다. '복수', '보복'을 뜻하는 '네카마'(neqamah)는 구약 성경에서 인간의 복수를 언급하는 경우는 드물다. 종종 인간은 복수의 이차적 원인이고, 반면에 하느님께서 그 일차 원인자로 계신다.

 

"내 백성 이스라엘의 손으로 에돔에게 원수를 갚겠다.내 분노와 내 화에 따라 에돔에게 보복하겠다.그러면 그들이 나의 복수를 알게 될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에제 20,14) 

"내가 번뜩이는 칼을 갈아 내 손으로 재판을 주관할 때 나의 적대자들에게 복수하고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되갚으리라."(신명32,41)

본문의 복수의 요청은 예레미야 개인의 원한에 찬 복수의 요청이 아니다. 이는 하느님께 범죄한 자들을 심판하심으로써, 하느님의 공의가 실현되기를 염원하는 신실한 예언자로서의 기원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복수의 주체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당신께서 ...복수하시는 것을'(주님께서 ...보복하심을)로 번역된 '니크마테카' (niqmatheka)는 '네카마'에 2인칭 남성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로 '당신의 복수'란 뜻이다.  이처럼 '나의 복수'가 아니라 '당신의 복수'라고 예레미야는 언급함으로 하느님의 공의(정의)에 호소하고 있다.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하늘입니다.

(요한10,31-42)

31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왜요?

앞절로 가보면~~

26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이 말씀 때문에 돌을 던지려 합니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좋은일(토브),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알려주는 일,~그래서 듣는 이들이 하늘의 생명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아들이 되도록 하는 일이 좋은 일입니다그 하느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 모독입니다.

 

33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하고 대답하자,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35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36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37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38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나를 통하지 안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하신 것이

 

(요한3,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일뜻이었습니다.

 

(요한6,40) 내 아버지의 뜻은 또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아들을 구원(생명)의 진리로 믿는 것입니다.

 

(요한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어떻게?

(요한6,53-54)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죽은 이들을 다시 살려 하늘의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살과 피는십자가의 대속으로 얻는 구원을 위한 용서그 새 계약입니다.

 

(루가22,20)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요한6,63) 영은 생명을 준다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육을 위한 것이 아닌 하늘의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사랑구원의 약속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그 사랑의 약속새 계약으로 먹고 마셨을 때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그 영광을 드러내셨고 성령께서는 그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요한16,13)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그분의 십자가의 길을앞으로 올죄인들이 앞으로 받게 될 용서 구원의 진리로 깨닫도록 이끄십니다.

그렇게~~

(요한16,14)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예수님께서 받아 그대로 전하셨고 성령님은 그 사랑을 그대로 또 우리에게 전해 주십니다.(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을 영광스럽게성령님은 그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우리도 그 삼위의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영광(히브리어-독사)은 하느님의 신성과 본성인 사랑이 드러나 나타난 것을 말합니다그 하느님의 이타적 사랑그 영광이 오롯이 드러난 것이 십자가입니다.

내 모든 죄의 대속으로 죽으신 그 예수님 앞에 내 모든 죄를 인정하며 십자가가 없었으면 큰일날뻔했습니다하며 진심의 마음으로 감사하는 것그리고 그 십자가의 길을 진리로 믿고 의탁하며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영광 드리는 것입니다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일만 하셨습니다그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러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 하느님 나라를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그러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을 그리고 그 두 분의 성령으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들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그 깨달음이 우리가 해야 할 좋은 일입니다구원은 그 좋은 일로 이루어집니다사람의 규정교리계명그 나의 좋은 행실로 구원에 이르겠다는 생각으로하느님이 규정법규계명인 주님의 십자 나무그 구원의길말씀을 거부하는 것모독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그 의로움을 인간의 의로움으로 대신 하려는 것용서 받지 못할 모독입니다.

그 말씀에 돌을 던지지 맙시다아멘.

 

39 그러자 유다인들이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40 예수님께서는 다시 요르단 강 건너편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 41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와 서로 말하였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42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

 


 

 

 사순 제5주간 금요일 복음(요한10,31~42)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34)

본문은 시편 82장 6절을 70인역(LXX)에서 정확하게 인용한 말씀이기에 따옴표 역할을 하는 '호티'(hoti)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시편 82장 6절은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인데, 여기서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며'(I have said you are gods)이 인용되었는데, 시편 82장 6절의 문맥은 원래 '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재판장들에 관한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사제들 및 재판장들은 하느님의 권한을 대행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백성들과 관련된 그들의 공적 업무에 신적(神的) 권위가 부여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재판장들은 백성들을 다스리고 재판을 진행함에 있어서 사사로운 감정이나 임의성이 개입되어서는 안되고 철저하게 하느님께서 명하신 기준을 따라야 했다.

여기서 '신'으로 번역된 '테오이'(theoi)는 문자적으로 '신들'(gods)로 번역된다. '신'을 의미하는 '테오스'(theos)의 복수형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것이 '엘로아'(eloa)의 복수로 간주되는 '엘로힘'(elohim)인데, '엘로힘'(elohim)이 하느님의 고유 명사가 아닌 일반 명사로 쓰일 때에는 '재판관들'(judges), '천사들'(angels)과 같은 복수형의 의미로 번역된다. 

이같은 용어가 사용되는 것은 그들이 하느님을 대신하여 직무를 수행하는 자들임을 나타낸다. 

그들은 자신들의 직무를 하느님을 대신하여 수행하는 것이므로 모든 일에 있어서 어느 것 하나도 자기 중심적으로 처리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언급된 '신'은 하느님 자신을 가리키기 보다는 하느님을 대신하여 하느님의 일을 대신 수행하는 자를 가리킨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요한 복음 10장 35절, 36절과 더불어 생각해 볼 때, 하느님의 대리자를 신이라고 부른다면, 하느님께서 몸소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당신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칭하는 것은  조금도 하느님을 모독하는 일이 아니시라는 주장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절대시하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그들의 경직되고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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