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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 하시다.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3-27 조회수1,206 추천수0 반대(0) 신고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성주간의 첫째 날인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교회는 오늘 성지축복과 행렬을 거행하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영광스럽게 기념하는 한편, ‘주님의 수난기를 통하여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장엄하게 선포한다. 성지를 들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것은 4세기 무렵부터 거행되어 10세기 이후에 널리 전파되었다.

 

 

 

 

1양식: 행렬

복음<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10<또는 요한 12,12-16>

예수님과 제자들이

1 예루살렘 곧 올리브산 근처 벳파게와 베타니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 둘을 보내며

2 말씀하셨다.

너희 맞은쪽 동네로 가러라. 그곳에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을 곧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을 풀어 끌고 오너라.

3 누가 너희에게 왜 그러는 거요?’하거든,‘주님께서 필요하셔서 그러는데 곧 이리로 돌려보내신답니다.’하고 대답하여라.”

4 그들이 가서 보니, 과연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바깥 길 쪽으로 난 문 곁에 매여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것을 푸는데,

5 거기에 서 있던 이들 가운데 몇 사람이, “왜 그 어린 나귀를 푸는 거요?”하고 물었다.

6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대로 말하였더니 그들이 막지 않았다.

7 제자들이 그 어린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어 놓았다. 예수님께서 그 위에 올라앉으시자,

8 많은 이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 또 어떤 이들은 들에서 잎이 많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깔았다. 또 어떤 이들은 들에서 잎이 많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깔았다.

9 그리고 앞서 가는 이들과 디따라가는 이들이 외쳤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10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서 주해

1

순례자들이 예리고에서 길을 나서면 베타니아와 벳파게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이 정상적 여정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순서를 거꾸로 서술했는데 이는 목적지 예루살렘을 중히 여긴 때문이리라.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예리고 방향으로 3키로미터 쯤 떨어진 동리로서 올리브 산 동쪽 기슭에 있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거기에 숙소를 정하셨다. 벳파게는 그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으나 예루살렘과 베타니아 사이의 어느 곳이다.

심부름꾼을 둘씩 보내는 것은 유다인들의 관례를 따른 것이다.(6.7;14.13)

 

2절 전승자는 예수님이 베타니아에서 벳파게로 제자들을 보낸 것처럼 이야기한다.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새끼나귀는 즈가9.9에서 비롯하는 표현인데, 히브리 원문의 암나귀의 망아지,새끼나귀나 칠십인역의 새 새끼나귀를 풀이한 것이다. 메시아의 행차를 예언한 즈가 9.9를 원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시온의 딸아, 한껏 기뻐하여라. 예루살렘의 딸아, 환성을 질러라. 보라, 네 임금님이 너를 찾아오신다. 그는 의롭고 당당하시다. 겸손하여 나귀 암나귀의 망아지, 새끼나귀를 타고 계시다.” 그리고 새끼나귀가 매여 있다는 표현은 메시아의 출현을 예언한 창세 49.11에서 따온 것 같다.

 

창세 49.11에서는 유다의 후예인 메시아가 오면 새끼나귀, 곧 암나귀의 망아지를 포도나무에 매어 두리라고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을, 곧 즈가 9.9와 창세 49.11의 메시아 예언을 실현하는 사건으로 평가했다. 예수님은 겸손한 메시아인지라 말을 타지 않고 그 대신 구약 예언을 따라 새끼나귀를 타셨다고 보았던 것이다.

 

3

임금은 왕권을 발동하여 아무것이나 징발할 수 있었다.(1사무 8.17). 이제 예수님은 만물의 주님이시므로(12.37) 새끼나귀 따위는 손쉽게 징발할 수 있으시다.

 

4절 예수님은 앞일을 훤히 내다보시는 분이라, 그분의 말씀대로 일이 척척 진행된다. 11.2-7과 매우 비슷한 이야기가 14.12-16에도 있다.

 

8

2열왕 9.13 참조.

 

9

유다인들은 순례 축제 때 소위 할렐 시편(113-118)을 외었다. 호산나는 할렐 시편 중 118.25에 나오는 청도인데 직역하면 “(하느님),구원하소서. 그러나 여기 입성사화에서는 청도이기보다 메시아를 환호하는 환성이라 생각된다. , “만세라는 뜻이다.

 

순례 축제 때면 제관이 성전 입구에 서 있다가 순례자가 오면 오시는 분은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받으소서라고 인사하는 법이다. 그 인사말이 시편 118.26에 들어 있다. 그런데 우리 입성사화를 만들어 전한 전승자는 비록 시편 118.26에 내포된 인사말을 고스란히 인용하고는 있으나, 그것을 단순히 인사말로 보지 않고 예수의 정체를 밝히는 그리스도론적 발언으로 재이해했다. 예수는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곧 하느님이 보내신 심부름꾼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유다교 제관의 인사말을 예수 메시아를 기리는 찬송으로 이해한 것이다. 전승자의 그리스도론적 이해를 존중한 나머지 우리말 역문에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축복받으소서라 했다.

 

10

10ㄱ절은 다윗의 왕정이 다시 수립되는 것을 기리는 찬송이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 다윗은 유다교인들에게는 생소한 표현이다. 그들은 민족사의 초창기 조상.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을 그렇게 일컫지 결코 다윗을 우리 아버지라 하지 않는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언어관습을 반영한다.

지극히 높은 곳은 하늘이리라. 10ㄴ절의 뜻인즉, 하늘에서도 천사들이 호산나 환성을 외치라는 것이다.

 

 

 

 

 

미사

1독서<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0,4-7

4 주 하느님께서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때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5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6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은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 않는다고 한다.

 

 

 

2독서(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셨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2,6-11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6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독서 주해

6

모습을 직역하면 형태. “하느님의 모습은 하느님으로서의 존재 양식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는 강생 전에 신성을 지니고 선재하셨다고 한다. 2.6은 신약성서에서 최초로 그리스도의 선재사상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노획물은 아무도 쉽게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하느님과 동등하게 되려는 욕심을 품었던 아담과는 달리 그리스도께서는 마땅히 받을 수 있는 신으로서의 대우를 미련없이 포기하셨다.

 

7

이 찬가의 작자는 그리스도의 강생을 소박하게 표현하여, 그분은 본래의 자신을 비웠다고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체적인 존재 양식을 가리킨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신이니 또는 초인간으로 나타나지 않고 평범한 인간으로 처신하셨다. 그렇다고 신성을 떠난 것이 아니라 바로 종노릇을 함으로써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드러내 보이신 것이다. 요컨대,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권리를 내세우지 않고 모든 영광을 성부로부터 선물로 받고자 하셨다.

사람들과 비슷하게”,“여느 사람 모양으로는 인간의 모든 조건, 특히 그 나약함을 함께 나누엇다는 뜻이다.

 

8

낮추시다3절의 겸손과 같은 어원에 속한다.

하강의 둘째 단계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함으로써 스스로 낮아지는 것이다. 아담의 불순종과는 반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철저히 순종하시어 끝까지 성부의 뜻을 따르셨다. 중죄인처럼 십자가에 처형될 때 이 순종은 극도에 이르렀다. 로마인들이 노예들에게만 집행하던 십자가형을 당했으니 그것은 가장 수치스럽고 사람들의 기대에 완전히 종말이었다. 이 사실을 바오로는 다른 데서 십자가의 걸림돌이라고 표현했다. 자기 비하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서 9-11절의 고양이 시작된다.

 

9

부활과 승천을 가리킨다. 여기서 주어가 하느님으로 바뀐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낮추셨지만 이제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높여 주신다.

이름은 한갓 명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상의 지위를 나타낸다. 예수께서 받으신 이름은 11절에 나오는 주님이라는 칭호다. 유다인들은 입에 올릴 수 없을 정도로 신성시한 야훼라는 말 대신에 하느님을 주님이라고 불렀으니, 예수께서는 이제 신으로서 모든 피조물보다 높은 지위에 계시다는 뜻이다.

 

10

우주의 총괄적 표현이다. 지하는 죽은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강생과 죽음과 부활.승천을 통해 이 모든 차원을 두루 거치어 만물의 주님이 되셨다(에페1,9-10참조).

 

11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다대신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하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앙고백의 핵심이다. “모두가 무릎을 끓고 입을 모아 고백한다는 말은 이사 45.23을 인용한 것이니, 여기 주님이라는 칭호가 하느님과 등등한 그리스도의 지위를 가리킨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리스도 사건들의 최종목표는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이다. 그리스도께 경배하는 이는 결국 성부를 존경하는 사람인 것이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가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입니다. 14.1-15,47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따옴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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