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복음묵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3-27 조회수1,131 추천수0 반대(0) 신고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매일미사에 오늘이 어떤 날인지는 자세히 설명이 돼있습니다. 이제 드디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십니다. 이때 예수님은 개선장군처럼 말을 타고 입성하시는 게 아니라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이 세상에 오실 때에도 아주 초라하기 짝이 없는 마구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작 세상을 다스리는 정치적인 메시아로서의 왕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관심이 있었던 것은 당신, 한몸을 죄로 신음하며 죽어가는 이 세상 만민을 구원하시는 만왕의 왕인 구세주의 자격으로 등극하는 모습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생각과는 달리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기들을 해방시켜줄 정치적인 메시아가 되어 주시길 염원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처음에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호산나를 외치면서 환호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호산나를 외쳤던 그 입이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입에서 예수님을 향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라.”고 외치는 저주의 입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들이 생각했던 왕의 모습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희망이 절망이 되었던 것입니다.

 

호산나의 의미는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액면 그대로 의미만을 놓고 보더라도 그들의 마음은 먼 미래에 주어지는 구원보다는 지금 당장 자기들을 구원할 메시아가 그들에게는 절실히 필요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에도 그때의 군중과 같은 모습이 많이 있습니다. 죽었던 나자로가 다시 살아난 것을 통해 예수님이 세상에서 단순히 이적만 펼치시는 분이 아니라는 걸 알았던 사람들은 어느 정도는 세상의 왕이 아닌 것을 직감한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본 사람들입니다.

 

또 한 부류는 군중 심리와 같은 모습으로 그냥 남 따라 장에 가는 사람처럼 그렇게 환호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또 다른 부류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자기들의 통치체제에 위해가 될 소지가 있다고 생각해서 모의를 해서 예수님을 어떻게 해서든지 제거하려고 하는 데에만 혈안이 된 종교 지도자들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공식적으로 세상의 왕으로 인정하는 최초의 일이였는데도 왕을 인정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적어도 왕이라면 말을 타고 입성을 해야 어느 정도는 품위가 있고 왕으로서의 체면도 섰을 텐데 말입니다. 그마저도 예수님은 거부하신 것 같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나귀가 안되어 보이기도 하지만 또 달리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는 설사 세상의 왕으로 등극하는 자리라도 한다고 해도 힘으로 군림하는 왕이라는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어린 나귀처럼 힘없는 사람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그런 상징적인 의미도 있을 것 같다는 추측을 한번 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호산나 하면서 환호할 때 어떤 마음이셨을까요? 저는 그 호산나의 소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하는 말로 들리지 않으셨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맞이한 사람들을 세 부류로 나눌 때 우리는 첫 번째 부류의 사람에 속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걸 인정하고 또한 하느님이시라는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적어도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은 되지 않아야 할 겁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했던 예수님의 모습과 다르다고 생각해서, 어쩌면 자기가 생각한 예수님의 모습과 달라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준 사람들입니다. 자칫 우리도 그런 모습과 같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 신앙생활을 할 때는 호산나 하면서 환호하고 기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이미 세례를 받으면 신분에서부터 영적으로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으로 신분이 하루아침에 변화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이 계속 가느냐 하면 그렇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불가피하게 처음엔 몰랐는데 믿음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십자가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언제부터서는 신앙생활이 하나의 십자가처럼 아니, 짐처럼 여겨지는 순간이 올 때도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른 분들은 모르겠지만 저는 그랬습니다. 그럴 땐 왜 신앙을 가져가지고 이 고생을 하는지 하고 원망 아닌 원망을 하는 때도 있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은 엄격하게 따지면 2000년 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그 사람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모습과 비교해보면 자기가 생각했던 처음 예수님의 모습과 다르니 실망해서 일어나는 현상에서는 공통점이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더라도 이런 부류의 사람은 되지 않아야 할 겁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 군중 심리와 같은 분위기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이지만 이런 부류는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첫 번째 부류의 사람으로 변화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희망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기회를 하느님께서 주실 여지가 충분히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하기 나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건 회개의 문제가 될 것입니다. 처음엔 잘 몰랐지만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믿음이 남 따라 장에 가는 모습에서 나중에는 오히려 자기가 어느 순간에는 남을 리더하는 위치로 변화가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첫째가 꼴찌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고 하셨으니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실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지가지를 들고 마치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호산나 하면서 외쳤듯이 외칠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이 외침이 오늘 일순간의 외침으로 그칠 게 아니라 하늘 나라에 입성하는 날까지 이 외침이 한결같이 변함이 없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굳게 다짐하면서 호산나하고 외치는 주님 성지 주일이 되었으면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