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마르15,1-39)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3-28 조회수1,189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3월 28일 주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마르15,1-39)

 

1독서<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이사50,4-7)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화답송 시편 22(21),8-9.17-18.19-20.23-24(◎ 2)

◎ 하느님저의 하느님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 보는 사람마다 저를 비웃어 대고입술을 비쭉거리며 머리를 내젓나이다. “주님께 의탁했으니 구하시겠지그분 마음에 드니 구해 내시겠지.” 

○ 개들이 저를 에워싸고 악당의 무리가 둘러싸제 손발을 묶었나이다제 뼈는 마디마디 셀 수 있게 되었나이다

○ 제 옷을 저희끼리 나눠 가지고제 속옷 놓고는 제비를 뽑나이다주님멀리 떠나 계시지 마소서저의 힘이신 주님어서 저를 도우소서

○ 저는 당신 이름을 형제들에게 전하고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주님을 찬양하여라야곱의 모든 후손들아주님께 영광 드려라이스라엘의 모든 후손들아주님을 두려워하여라

 

2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필리2,6-11)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복음<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마르15,1-39)

아침이 되자 수석 사제들은 곧바로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곧 온 최고 의회와 의논한 끝에예수님을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겼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묻자그분께서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수석 사제들이 여러 가지로 예수님을 고소하였다.

빌라도가 다시 예수님께, “당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소보시오저들이 당신을 갖가지로 고소하고 있지 않소?” 하고 물었으나,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그래서 빌라도는 이상하게 여겼다.

빌라도는 축제 때마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죄수 하나를 풀어 주곤 하였다.

마침 바라빠라고 하는 사람이 반란 때에 살인을 저지른 반란군들과 함께 감옥에 있었다.

그래서 군중은 올라가 자기들에게 해 오던 대로 해 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하였다.

빌라도가 그들에게 유다인들의 임금을 풀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오?” 하고 물었다.

10 그는 수석 사제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자기에게 넘겼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11 그러나 수석 사제들은 군중을 부추겨 그분이 아니라 바라빠를 풀어 달라고 청하게 하였다.

12 빌라도가 다시 그들에게, “그러면 여러분이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부르는 이 사람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 것이오?” 하고 물었다.

13 그러자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거듭 소리 질렀다.

14 빌라도가 그들에게 도대체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하자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외쳤다.

15 그리하여 빌라도는 군중을 만족시키려고바라빠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

16 군사들은 예수님을 뜰 안으로 끌고 갔다그곳은 총독 관저였다그들은 온 부대를 집합시킨 다음,

17 그분께 자주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서는,

18 “유다인들의 임금님만세!” 하며 인사하기 시작하였다.

19 또 갈대로 그분의 머리를 때리고 침을 뱉고서는무릎을 꿇고 엎드려 예수님께 절하였다.

20 그렇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나서 자주색 옷을 벗기고 그분의 겉옷을 입혔다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나갔다.

21 그들은 지나가는 어떤 사람에게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하였다그는 키레네 사람 시몬으로서 알렉산드로스와 루포스의 아버지였는데시골에서 올라오는 길이었다.

22 그들은 예수님을 골고타라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이는 번역하면 ‘*해골 터라는 뜻이다.

23 그들이 몰약을 탄 포도주를 예수님께 건넸지만 그분께서는 받지 않으셨다.

24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그러고 나서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는데

25 누가 무엇을 차지할지 제비를 뽑아 결정하였다.

26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때는 아침 아홉 시였다.

27 그분의 *죄명 패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쓰여 있었다.

28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강도 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하나는 오른쪽에 다른 하나는 왼쪽에 못 박았다.

29 지나가는 자들이 머리를 흔들며 그분을 이렇게 모독하였다. “저런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더니.

30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31 수석 사제들도 이런 식으로 율법 학자들과 함께 조롱하며 서로 말하였다.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32 우리가 보고 믿게이스라엘의 임금 메시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그분께 비아냥거렸다.

33 낮 열두 시가 되자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34 오후 세 시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이는 번역하면, ‘저의 하느님저의 하느님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35 곁에 서 있던 자들 가운데 몇이 이 말씀을 듣고, “저것 봐엘리야를 부르네.” 하고 말하였다.

36 그러자 어떤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을 신 포도주에 적신 다음갈대에 꽂아 예수님께 마시라고 갖다 대며,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봅시다.” 하고 말하였다.

37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

38 그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39 그리고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제1독서(이사50,4-7)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6)

  

본절은 주님의 종이 당할 극심한 고난과 더불어 그 고난 가운데서도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다 이겨낸다는 사실을 예언한다. 

그가 이런 극심한 고통을 인내로 견뎌낸 것은 그 고통이 죄인들을 대신해서 받는 고통이요 그 고통을 통해서 죄인들을 위한 속죄를 이루고 그들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주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함으로써 주님의 의(義)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종의 고난에 대한 예언은 주님의 종의 노래 가운데 마지막 노래인 52장 13절~53장 12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예언되며 그 고난이 죄인들을 대신해서 받는 고난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드러낸다. 

그 고난은 단순히 육체적 아픔만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굴욕과 치욕감을 깊이 느끼게 하는 고난이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옷을 벗긴 상태에서 채찍으로 과격을 당하고 수염을 뽑히고 얼굴에 침뱉음을 당하는 것은 인격을 철저히 무시하는 너무나도 크나큰 굴욕감을 일으키는 행위였다 (신명25,9; 2사무10,4; 느헤 13,25; 예례7,29; 마태26,67; 요한18,22).

그러나 주님의 종은 그 고난을 하느님의 구원의 경륜을 성취하는 통로로 여기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이를 묵묵히 그리고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본문에서 '나를 매질하는 자들에게' 해당하는 '레막킴'(lemakim)의 원형 '나카'(nakah)는 채찍으로 때리는 것을 의미한다. 

53장 4절에서는 그가 맞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느님께 맞는 것으로 오해한다고 예언된다. 그러나 그는 무죄하면서 무시무시한 채찍질을 감내해야 했으며 그런 가운데서도 전혀 저항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등을 그들에게 맡기신 것이다. 실로 주님의 종이신 예수님은 로마 병정들의 모진 채찍질을 묵묵히 참음으로써이 예언을 성취하였다(마태26,27; 27,26; 요한19,1).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다윗이 통치하던 시대에 암몬 임금 하눈은 그의 죽은 아버지께 조의를 표하고자 온 다윗의 신하들을 욕보이며 턱수염을 절반씩 깎아 버린 일이 있었다(2사무10,4). 이것은 극심한 모욕감을 일으키는 행위였다. 그래서 그 신하들은 다윗의 지시에 따라 턱수염이 다 자랄 때까지 예리코에 머물러 있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고대 사회에서 수염은 멋으로 기르는 것 즉 장식용이 아니라 남성의 인격을 상징하였다. 따라서 그것을 깎는다든지 뽑아 버리는 것은 그 사람을 인격적으로 완전히 깔아 뭉개버린다는 뜻이었다. 아울러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형벌(느헤13,25)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의 종은 이런 치욕적인 일,이처럼 무고한 모독과 형벌까지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즉 자기 턱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피하지 않고 도리어 그 뺨을 그들에게 맡기신 것이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는 가르침(마태5,39)을 그대로 실행에 옮기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모욕'으로 번역된 '켈림무트'(kelimmuth)는 주먹과 손바닥으로 얼굴을 맞는 것을 통해 주님의 종이 느끼는 인격적 상처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마태26,67).

또한 '수모' 번역된 '로크'(loq)는 구약에서 본문과 욥기 30장 10절 두 곳에서만 사용된 매우 희소한 단어인데,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 침뱉음 뜻하고, 얼굴에 침뱉음을 당한다는 것은 턱수염이 뽑히는 것보다 더 드문 일이고 더 굴욕적인 일임을 암시한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주님의 종은 그 굴욕을 피하기 위해 저항하거나 얼굴을 가리우지 않았다.이것은 그가 무기력해서가 아니라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이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일임을 잘 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을 안다."(7)

앞의 50장 4~6절에서는 주님의 인도하심에 의지한 주님의 종의 고난과 고난을 받는 중에도 전적으로 참고 순종한다는 사실을 노래하였다. 이제 50장 5~9절 까지는 주님의 도우심에 의지하는 종이 승리할 것에 대한 전적인 확신을 노래한다.

먼저 본절은 그토록 견디기 힘든 치욕과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의 종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그것은 자기를 종으로 세우신 주 하느님께서 자신을 돕는다는 확신과 그 하느님께서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하신 것 때문이다.


주님의 종은 극심한 수치와 모욕과 고난 가운데서도 자신이 잘못해서 그런 취급을 당한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주님의 종은 자기가 당하는 그 고난이 주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감당해야 할 사명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본절은 원문상 접속사 '와우'(wau; because, for 혹은 but)로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본절의 내용이 앞절과 긴밀하게 관련되는 사실을 말해 준다.

 

주님의 종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고 그 고난을 자기 혼자 당하는 것도 아니며, 그 고난 때문에 자신이 절망에 빠지지도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해 본절을 와우 접속사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진정한 배후에는 자신의 정당성을 지지해 주시는 주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도와 주시니' 해당하는 '야아자르'(yaazar)의 원형'아자르'(azar)는 4절에서 주님의 종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는 것을 언급할 때 사용된 표현과 동일하다. 주님의 종은 주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자신의 올바른 지식으로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며 하느님을 통해 고난의 때에 도움을 받는다.

여기서 '아자르'는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미완료형으로 사용되어 주님께서 종의 사명 전반을 지지하며 도와 주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한편 이에 이어지는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구절은 인과 관계를 나타내는 '알 켄'(al ken; therefore)이란 표현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주님께서 종을 도우신 결과, 그가 수치스런 고난 가운데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기서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사명의 의미를 앎으로써 고난과 모욕을 당하는 자신의 처지를 치욕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본문 역시 앞 문장과 같이 인과 관계를 나타내는 '알 켄'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주님께서 종을 도우시는 결과, 주님의 종이 자기 얼굴을 차돌같이 굳게 한다는 것 나타낸다. 

 

'만든다'에 해당하는 '사므티'(samthi)는 '두다','되게 하다' 의미를 지니고 있는 동사'숨'(sum)의 능동 완료형 1인칭 단수로서 본문의 행동의 주체가 주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즉 그는 자기 스스로 자기 얼굴을 차돌처럼 굳게 하였다는 것이다. 

'차돌'로 번역된 '할라미쉬'(hallamysh; flint)는 '아주 단단한 물건', '단단한 돌','부싯돌','바위'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 매우 단단한 돌 말한다(신명8,15; 시편114,8). 따라서 본문은 낯이 매우 두꺼운 것을 의미한다.

우리 말에도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낯이 두껍다고 하는데, 이것은 주님의 종이 주님의 도우심을 확신하고, 치욕스런 고난 가운데서도 자신의 처지를 전혀 치욕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것을 이런 직유법을 사용해서 표현한 것이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본문은 이중적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첫째는 주님의 종이 그런 치욕스런 상황 가운데서도 결단코 수치스럽게 느끼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둘째는 그가 비록 죄인들이 당하는 수난을 당하고 있지만 마지막 날에는 결코 심판에 처해지지 않고, 자신이 의로운 존재였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을 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수치를 당하다' 의미로 번역된 '에보쉬'(ebosh; shall be ashamed)의 중의성 때문이다. 이 단어의 원형'뽀쉬'(bosh)는 수치를 느낀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창세2,25) 최후 심판에서 단죄되어 치욕스런 상태로 떨어진다는 의미까지 가지고 있다(창세45,16).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신성 모독죄를 저질렀다는 고소를 당해 수난을 겪고 죽임을 당했다(마태26,65). 그러나 그들이 단죄한 그 신성 모독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혀 해당되지 않았다. 

 

그들이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진 분이라는 사실(요한1,1-3; 필리2,6)을 깨달았다면, 그들은 그를 신성 모독죄로 고소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를 결코 단죄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는 위치로 끌어 올려 주셨다(필리2,10). 이 사실이 본문에 나오는 주님의 종의 확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복음(마르14,1~15.47)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36)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부르시는 호칭이 '아빠! 아버지' 이다. '아빠'로 음역된 '압바'(Abba)는 '아버지'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브'(ab)에서 유래한 아람어이며, 특히 어린 아이들이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를 때 사용하던 단어이다.

유대인들은 불경스럽게 생각되어 하느님을 '압바'로 부르지 않았지만,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마태3,17) 그분을 '압바'로 자연스럽게 부르실 수 있었다.

 

사도 바오로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이 자녀가 된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친근하게 '압바'로 부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로마8,15; 갈라4,6). 

마태오 복음사가는 '압바'라는 친근한 용어를 하느님께 대하여 사용하지 않았던 유대의 배경 아래있는 독자들에게 복음서를 써 보냈기 때문에 '압바' 대신에 보다 중후한 용어인 '파테르'(pater)를 기록했을 것이고(마태26,39),  

루카 복음사가는 희랍의 배경 아래 있는 독자들에게 복음서를 써보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마태오와 동일하게 '아버지'를 뜻하는 순수한 희랍어 '파테르'(pater)만 기록했을 것이다(루카22,42).

 

한편, '이 잔'에 해당하는 '토 포테리온 투토'(to poterion touto; this cup)는 하느님의 선성(善性)에 누를 끼치고 성성(聖性)을 모독하며 공의(公義)를 거스르는 죄를 지어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인류에게 내려지는 진노의 잔이며, 그러기에 하느님 아버지와 같은 위격의 무죄하신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을 풀어 드리고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마셔야 하는 고난의 잔을 말한다.

그리고 '거두어 주십시오'로 번역된 '파레넹케'(parenengke; take away)는 '가지고 가 버리다', '지나가게 하다'는 의미를 지니는 동사 '파라페로'(paraphero)의 명령형이다.

기도문 중에 사용된 동사가 명령어이므로 그 잔을 옮길 수 있는 권한이 기도의 대상이신 하느님 아버지에게만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고백하고 있음 알 수 있다.

 

죄를 제외하고는 우리 인간과 똑같은 나약한 인성(人性)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께서 그 인성(人性)으로는 십자가상 죽음을 감당하기에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워 자신에게 예정되어 있는 그 의로운 분노(진노)의 잔을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린 아이가 아버지에게 애걸하듯 간청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이 간절한 간구에는 다른 방법이 있다면 십자가의 고통스럽고도 비참한 죽음만을 피하고 싶었던 예수님의 인간적 바람이 잘 드러나고 있다.

 

한편, 원문에는 '그러나'에 해당하는 접속사 '알라'(alla; but)가 두 번 쓰였는데, 십자가를 피하고 싶은 당신 자신의 의지를 꺾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 자세를 효과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으며, 더군다나  두 번이나 쓰임으로써 예수님의 순종적 자세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당신 지상 생애 동안 단 한번도 하느님의 뜻을 거역한 적이 없는 예수님께서는 (요한7,16.28; 10,37.38) 마지막 십자가 앞에서 극심한 심적 고통과 갈등 가운데 흔들렸지만, 비참한 죽음을 피하고 싶은 인간적 본능을 이겨내고 겸허히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할 것을 결심하고 계시는 것이다(마태16,24; 필리2,8; 에페2,1.3; 로마5,10; 로마8,14.16참조).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