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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주간 월요일] 마리아의 향유 (요한12,1-11)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3-29 조회수1,529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3월 29일 월요일

[성주간 월요일마리아의 향유 (요한12,1-11)

   

 

1독서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이사42,1-7)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내가 선택한 이내 마음에 드는 이다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하늘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펼치신 분 땅과 거기에서 자라는 온갖 것들을 펴신 분 그곳에 사는 백성에게 목숨을그 위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에게 숨을 넣어 주신 분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6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화답송 시편 27(26),1.2.3.13-14(◎ 1)

◎ 주님은 나의 빛나의 구원이시다.

○ 주님은 나의 빛나의 구원나 누구를 두려워하랴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 악인들이 달려들어 이 몸 삼키려 해도나의 적 나의 원수그들은 비틀거리다 쓰러지리라

○ 나를 거슬러 군대가 진을 쳐도내 마음 두렵지 않으리라나를 거슬러 전쟁이 일어나도그래도 나는 안심하리라

○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주님께 바라라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주님께 바라라

 

복음<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요한12,1-11)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5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많은 유다인들의 무리가 몰려왔다예수님 때문만이 아니라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도 보려는 것이었다.

10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11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성주간 월요일 제1독서(이사42,1~7)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1)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2)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3) ~~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4)  ~~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7)

 

첫번째 주님의 종의 노래(이사42,1~9)중에서 이사야서 42장 1절이하 4절까지는  주님께서 소개하시는 주님의 종의 선한 성품과 하시는 일들 제시된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1) 

'여기에'에 해당하는 '헨'(hen)은 '보라'라는 뜻으로서 동사가 아니라 감탄사이다. 당신이 소개하는 종에게 관심과 주의를 가질 것을 촉구하는 표현이다. 

 

'내가 붙들어 주는 이'에 해당하는 '에트마크'(ethmak) '붙잡다', '지지하다', '떠받히다','지키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타마크'(tamak)의 미완료형이다.

미완료형은 미래에 그렇게 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시간을 초월하여 항상 그렇게 하심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 동사는 하느님께서 그 권능의 손길로 이 종을 굳게 붙들어 흔들리지 않게 하시며,보호하시고 높이 세워주실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내가 선택한 이' 해당하는 '뻬히리'(behiri)의 원형 '뻬히르'(behir) 동사 '빠하르'(bahar)에서 유래한 표현으로서 임의적으로가 아니라 어떠한 일을 성취할 수 있는 자를 신중하게 선택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표현은 주님의 종이 구원사업을 능히 수행할 수 있기에 선택하였다는 뉘앙스와 이를 선택하신 하느님께서 주님의 종의 능력을 보증하신다는 함축적인 의미가 함께 있다. 

'내 마음에 드는' 해당하는 '라체타'(ratsetha)의 원형 '라차'(ratsa)는 '기뻐하다', '받아들이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특별히 제사규정을 다루고 있는 레위기에서 하느님께서 제물과 예물을 기쁘게 받으시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이다(레위1,4; 7,18; 19,7; 22,23).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 드려진 희생 제사라 할지라도 제물에 흠이 있거나 제사 드리는 자가 율법에 합당한 자가 아니면, 그 제사를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으셨다(레위10,1~11; 19,7; 22,23). 그런 점에서 본문의 마음에 든다(기뻐하신다)는 표현은 그가 인류 대속을 위해 드려질 제물로서 조금도 흠이 없다는 사실과 나아가 제사를 드릴 대사제로 완벽한 분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1)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I have put My Spirit upon him) 에서 완료 시제의 동사가 사용되었다. 완료시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첫째로 역사적 완료 본다면, 하느님께서 그의 종 메시야에게 인간으로 육화(강생)하기 전에 천상에서 말씀으로 존재하였을 때 (요한1,1; 필리2,6) 이미 영을 충만하게 부어 주셨음을 나타낸다.

 

둘째로 예언적 완료 본다면, 이 본문은 메시아께서 강생하신 후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성령이 충만하게 임한 사건을 내다보는 예언이 된다. 

따라서 본문의 완료 시제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고려하여 주님의 종이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능력을 가지고 임의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 즉 하느님의 뜻과 능력으로 구원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것임을 보여 준다. 

 

'공정'에 해당하는 '미쉬파트'(mishipath)는 '재판하다'라는 의미의 '샤파트'(shapath)에서 유래하며, '심판', '재판'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정의'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이것은 하느님의 본질적 속성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다스림과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진 상태를 의미한다.

다시말해서 하느님의 통치가 온전히 구현되고 인간이 하느님께 대해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인간들 상호간에 평화롭고 올바른 관계가 서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일 것이다.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2) 

거의 같은 의미를 전달하는 세 개의 부정 단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주님의 종이 이방의 열왕들처럼 폭력적이거나 강압적인 방법으로 사용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크게 드러내고자 하지 않으시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심을 나타낸다. 

또한 거짓 예언자가 자신을 과시하며 떠들어대는 것과 전혀 다르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사람들의 가슴에 조용히 그러나 호소력있게 진리를 전달하며 또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느님의 진리를 전할 것임을 암시한다. 이러한 모습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 그대로 성취되었다 (마태26,62.63; 27,14; 마르15,5; 루카23,9; 요한8,6; 14,30).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3) 

습지나 물가에서 자라나는 갈대는 유프라테스 강 하류와 나일강 주위 뿐만 아니라 성경의 주요 무대인 팔레스티나의 요르단 강 유역에서도 많이 자라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한 식물이었으므로, 고대 근동 문학과 성경에서도 상징적, 비유적 표현으로 자주 등장한다. 갈대는 연약하여 바람에 잘 흔들리므로 연약한 인간의 면모와 관련하여 종종 사용된다(1열왕14,15; 마태11,7). 


여기에서 '부러진 갈대'(상한 갈대)에 해당하는 '카네 라추츠'(qaneh ratsuts)는 문자 그대로 반쯤 부러진 상태의 갈대를 나타낸다. 비유적으로 사용되어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큰 타격을 입은 상태와 특별히 죄악으로 인해 영혼이 더러워진 인간의 상태 말한다. 

 '꺾다'는 의미에 해당하는 '이쉬뽀르'(yishibor)의 원형 '샤바르'(shabar)는 완전히 박살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레위6,21; 1열왕19,11). 사실 상한 갈대는 아무런 이용 가치가 없기 때문에 박살내 버려도 전혀 아깝지 않다.

 

이러한 상한 갈대조차 꺾지 않는다는 것은 주님의 종이 육체적, 정신적, 영적 상태 모든 면에서 절망적인 상황, 비관적인 상황에 처한 인간들을 세상의 왕들처럼 무자비하게 심판하는것이 아니라 그들을 치유하며 새 생명을 주실 것을 나타낸다.

한편 일상생활의 필수품인 등불 역시 갈대와 마찬가지로 고대 근동의 문학에서 비유와 상징으로 자주 사용된다. 

 

'꺼져가는 심지' 해당하는 '피쉬타 케하'(pishitah kehah) '희미한 심지'(꺼져가는 등불), '연기나는 심지'라는 의미이다. 즉 본문의 등불은 기름이 없어서 깜빡이면서 이제 막 꺼져버리려는 순간이나 혹은 꺼져서 연기가 나는 상태의 등불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경우 그 등불은 연기가 날 뿐, 등불로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이러한 상태의 등불은 꺼버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주님의 종은 이런 등불을 결코 끄지 않으신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필요없다고 꺼서 내버릴지라도 주님의 종은 이러한 상태의 등불도 소중히 여기신다. 


이것은 주님의 종이 그 어떤 사람도 거부하지 않고, 자비와 사랑으로 용납하여 주심을 보여준다. 이러한 주님의 종의 봉사는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에서 그대로 실현되었다.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4) 

'섬들'에 해당하는 '이임'(iyim)은 이사야서 40장 15절과 41장 1절, 5절에 사용된 표현으로 '가장 먼 곳'이라는 의미로서 세상 모든 나라들과 민족들을 다 포함하는 모든 백성들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이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교훈)에 해당하는 '울레토라토'(uletorato)의 기본형 '토라'(torah)는 율법을 나타내는 가장 일반적인 단어이다.

'고대하리라'에 해당하는 '예야헬루'(yeyahelu)의 원형 '야할'(yahal) 강조 능동형으로 사용되어 '기대하다', '기다리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우러를 앙(仰)'과 '바랄 망(望)'이 합쳐져서 '앙망하다', '우러러 바라보다'는 뜻이다. 

 

이처럼 세상 모든 백성들이 하느님의 율법의 말씀을 좋아하게 된다는 것은 그들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며, 동시에 주님의 종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하느님의 공의가 완전하게 이루어져서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하느님을 경외하고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의미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7)

주님의 종의 일은 아시리아나 바빌론 제국의 왕들처럼 수많은 민족들을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일이 아니고, 이 땅에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세속적인 기업을 세우는 것도 아니다. 주님의 종의 일은 고통과 괴로움에 처해 있는 자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보지 못하는 자들'(눈먼 자들)에 해당하는 '이우로트'(yiuroth) '이우웨르'(yiuwer)의 복수형으로서 '시각 장애인'이란 기본적 의미에 국한하지 않고, 정상적 생활을 할 수 없는, 지치고  피곤한 자들과 하느님 앞에 올바른 삶을 영위할 수 없는, 무기력하고 도덕적으로 무감각한 사람들을 말한다(이사56,10). 

이것은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어떤 생명력도 찾아볼 수 없는 자들, 아무런 소망없이 살아가는 자들을 나타낸다. 


'뜨게하고'(밝히고)에 해당하는 '리프코아흐'(liphqoah)의 원형 '파카흐'(paqah)는 닫혀 있는 것을 활짝 열어 젖히는 것을 의미한다(1열왕6,20).  이것은 메시야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놀랍고 획기적인 일을 통해서 절망과 고통의 삶을  살고 있는 자들에게 생명과 희망의 빛을 가져다 줄 것을 나타낸다.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갇힌 이들'에 해당하는 '앗씨르'(assir)는 '노예', '죄수', '포로'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고독한 자', '가난하고 궁핍한 자', 죽이기로 정해진 자'라는 표현과 병행하여 사용되는 표현으로서 실제적인 노예와 죄수 뿐만 아니라 정신적, 영적으로 매우 극심한 고난과 고통을 받고 있는 자를 포함한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진리와 생명에서 격리되어 죄와 죽음의 법칙에서 얽매어 어둠의 권세의 영향 아래 살아가는 인간의 비참함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이들의 상태를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감옥에서'에 해당하는 '밈마쓰케르'(mimmasger)의 원형 '마스케르'(masger) '지하감옥'이라는 의미로서 빛이 들어오지도 않고 눅눅하고 침침한 토굴을 지칭하며, 이곳에서는 누구도 탈출할 수 없다. 따라서 이것은 사람이 그야말로 완전한 절망적 상태에 있음을 나타내 준다. 사실 하느님을 떠한 인간은 바로 이와 같은 상태에 놓여 있다 할 수 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어둠'에 해당하는 '호셰크'(hoshek)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같은 어둠을 의미하며(창세1,4; 탈출10,21), 비유적으로는 큰 슬픔이나 불행을 당하거나 파멸에 이르게 된 상태를 의미한다(2사무22,29; 욥17,23). 즉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이란, '눈먼 이들'이나 '감옥에 갇힌 자들' 마찬가지로 육체적, 정신적, 영적 영역에서 볼 때, 아무런 소망없이 고통과 절망 가운데 처한 인간의 실존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특별히 여기서 사용된 '앉아 있는 이들' 해당하는 '요셰베'(yoshebe) 원형 '야샤브'(yashab)는 '거주하다', '머무르다'라는 의미를 지니며 분사형으로 사용되어 잠깐이 아닌 계속 이러한 상태에 있는 자들임을 나타낸다.

칠흑같이 어두운 감옥에 갇힌 죄인이 혼자 힘으로 그 곳에서 결코 나올 수 없는 것과 같이 인간은 그 스스로의 힘으로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메시야의 활동으로 여기에서 능히 벗어나게 될 것임을 본문은 밝히고 있는 것이다.

 

 

 

 성주간 월요일

인간의 지혜가 하느님의 뜻을 죽인다

신학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인간의 지혜가 하느님의 뜻을 죽인 것입니다.

 

(요한12,1-11)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 2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예수님을 위한 잔치 미사(에우까리스띠아-감사제)입니다미사는 우리의 뜻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하느님의 뜻인 십자가의 대속으로 우리의 구원의 완성이신 그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는 예수님을 위한 잔치입니다.

그 미사 잔치에 세 부류의 신앙인의 모습입니다열심한 종교행위를 하는 마르타, 죽음이라는 시련을 체험한 라자로그리고 마리아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마리아는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립니다.


(루가10,39-42) 39 그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던 마르타는 예수께 와서 '주님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데 이것을 보시고도 가만 두십니까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41 그러나 주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마르타마르타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42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시중드는 그 행위의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은 그 종교 행위 밖에 할 줄 모릅니다꼭 필요한한가지 뿐인말씀에 숨겨진 대속의 죽음으로 받는 용서그 구원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태20,28) 28 사실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하셨다.

예수님의 대속그 당신의 목숨으로 죄인들을 섬겨주시는 것이지주님은 우리의 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섬김이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이 내 죄 때문인 것을 인정하며 그분의 죽으심에 감사하며 내가 가치로 여겼던 나의 시간명예의로움그 모든 것이 구원의 가치가 없음을 깨닫는 그 자기 부인버림으로내 삶의 모든 것을 그분께 의탁하며 믿는 것섬김입니다.

마리아는 알았습니다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으로 자신을 섬겨 주심을~~ 말씀 속에서 깨달았던 것입니다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을 깨트려 주님 발에 부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대신 걸어가실 그 발에 믿음의감사의 고백을 드린 것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5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6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성경을 사람의 규정과 교리로 보고듣고받으면 이웃 사랑을 나의 시간과 돈그 나의 것으로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그것이 도둑의 마음입니다하느님의 뜻그 말씀인 성경을 인간들의 지혜로 바꾸어 버린 도둑질입니다.

인간의 도리를 구원의 신앙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나의 죽음의 길을 대신 걸어가 주실 그 예수님의 발을 믿는 것그것이 깨달음믿음기름을 간직함입니다.


열처녀의 비유에서~

(마태25,3-4) 3 미련한 처녀들은 등잔은 가지고 있었으나 기름은 준비하지 않았다. 4 한편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잔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등은 교회를 뜻합니다성당은 열심히 다니며 지킴의 행위는 많으나 말씀의 깨달음그 기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말씀 결론이~~

(마태25,13) 13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

우리의 지혜로는 그 때를 알 수 없습니다그러나 내가 간직한 깨달음그 기름은 늘 깨어있어 나를 이끌어 줍니다.


(1데살2,13) 13 우리가 늘 하느님께 감사하는 것은 우리가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에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였다는 것입니다이 하느님의 *말씀은 믿는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9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많은 유다인들의 무리가 몰려왔다예수님 때문만이 아니라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도 보려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대속으로 받는 용서그 하늘의 생명보다는 육의 목숨에 더 관심이 있는 모습입니다.


10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11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라자로의 육의 살리심을 믿는 것이지 대속의 그리스도로 받는 구원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온 세상은 그 육의 목숨을 위해 시기하고 미워하며 싸우고 전쟁까지 합니다그 마음의 전쟁은 제사와 절기와 축제일 기념일 등을 열심히 지키는 그 종교 행위로는 멈출 수 없습니다.(이사1,11-16참조)

말씀의 신비의 뜻도 모르면서 중얼대는 그 묵주기도 아무리 많이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마태6,7. 10. 31~참조)

또 마리아처럼슬기로운 처녀들처럼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그래야 그 깨달음의 올바른 기도가 모든 분쟁을 멈추게 합니다.

♡ 아멘

 

 

 

 

 성주간 월요일 복음(요한12,1~11)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았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3)  이 여자를 그냥 놔 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7) 

 

요한 복음 12장 3절에 예수님을 위한 잔치의 식탁에서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다가 예수님 발에 붓고, 자기 머리 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린다.

요한 복음 12장 5절에는 그 값어치가 300 데나리온어치라고 말한다. 건강한 노동자가 안식일을 제외하곤, 거의 1년 동안 일해서 얻을 수 있는 총수입에 해당한다.

'리트란'(litran)은 '한 근'을 말하는 중량의 단위로 대략 340g(12온스)정도이다. 마르코 복음 14장 3절에는 '한 근'이 들어가는 '옥합'으로 나온다.

 

그런데 마태오나 마르코 복음은 향유를 머리에 부은 것처럼 묘사하고 (마태26,7; 마르코14,3), 요한 복음은 향유를 발에 부은 것으로 묘사한다. 왜 그럴까?

마리아는 당시 귀한 손님에게 존경을 표하는 관습따라 기름을 머리에 부었다.그런데 이 기름은 양이 적지 않아 몸을 타고 내려와 두 발까지 적셨다. 이것은 아마도 마태오나 마르코 복음에서 맨 처음의 기름을 머리에 부은 동작이 시작되는 상황을 묘사하고, 요한 복음에서는 기름을 부어 발에 떨어진 결과를 묘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요한 복음사가가 언급한 발은 당시 사람들에게 신체 부위 가운데 발이 가장 천시된 것과도 관련된다. 


요한 복음사가는 값비싼 향유와 발을 대비시킴으로 마리아의 헌신을 높이 평가한다.

유대 사회에서 여자가 머리를 풀어 헤치는 것이 수치로 여겨졌던 당시에, 마리아는 이에 전혀 개의치 않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기 시작했다. 희랍어의 'ekmasso'(엑맛소)는 '씻다'(wash)의 의미가 아니라 '닦아내거나 문지르는 것'(wipe)을 나타낸다. 


마치 미용사나 우리 자신이 화장품을 얼굴에 골고루 성의를 다해 문질러 주듯이,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에 부은 향유를 골고루 문질러 드린 것이다. 예수님을 향한 그녀의 뜨거운 마음과 넘치는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고 취한 아름다운 행동이었다.

열 두 사도의 당가를 맡고 있었으나 돈도둑이었던 유다 이스카리옷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요한 12,6),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 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요한12,5)하고 가증스런 발언을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사랑으로 한 행위에 쓰여진 기름이 당신 자신의 장례(죽음)날을 위하여 준비되어 온 기름임을 밝히신다(요한12,7). 주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 그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가장 값진 것을 주님께 드린다. 그래서 향유의 냄새가 집안 가득 퍼지게 된다.

 

'이 여자를 그냥 놔 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7) 

요한 복음 12장 7절의 앞에 나오는 동사 '그냥 놔 두어라'에 해당하는 '아페스' (aphes; let alone)는 그 원형 '아피에미'(aphiemi; 용납하다, 허락하다)의 명령형이다. 그러나 뒤에 나오는 동사인 '간직하게 하여라'에 해당하는 '테레세'(terese; she has kept)는 그 원형이 '테레오'(tereo; 지키다, 간직하다)인데, 여기서는 가정법의 구조로서 '~하도록'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니까 명령형이 아니고 가정법 문장으로서 '그녀를 버려 두어라, 나의 장례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할 수 있도록'으로 번역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번역은 이미 향유가 든 옥합을 깨트려 그것을 예수님께 부음으로써 다 소비해 버렸다는 문맥과는 맞지 않기 때문에 다소 의역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 사본에서는 이 구절의 '간직하게 하여라'에 해당하는 '테레세'(terese)동사에 대해서, 가정법을 인도하는 접속사 '히나'(hina; ~하도록)을 생략하고, 이 '테레세'동사 대신에 3인칭 단수 직설법 완료형'테테레켄'(tetereken)으로 썼다. 

이 완료형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간직하여 왔다는 의미를 선명하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영어로 하면, 'Leave her alone; for the day of my burial she has kept this'이고,  번역하면, '그녀를 내버려 두어라. 그녀는 나의 장례 날을 대비하여 이것을 간직하여 왔다.'이다. 


당시 마리아는 존경하는 분에 대한 감사의 의미 지금까지 간직하여 온 값비싼 향유를 아낌없이 예수님께 부었다. 하지만 천주성(神性)을 가지신 예수님께서는 이런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마리아로 하여금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당신의 장례를 예비하는 큰 일을 하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평소 돈 도둑이었던 유다가 '가난한 자' 운운하며 그것이 아깝다고 이야기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요한 12,8)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가난한 자' 해당하는 희랍어 단어는 '톤 프토콘'(ton ptochon)인데, 상대적으로 가난한 자들이 아니라 끼니조차 해결하기 어려운 극빈자들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곧 이 세상을 떠나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항상 그들과 함께 있는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 보다 당신 자신의 죽음을 예비하는 일이 더 시급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평소 강조하신 가난한 자에 대한 우선적 관심에 반(反)하는 말씀이 아니다. 

그 시기에 무엇이 더 본질적으로 우선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며, 열두 사도단의 당가(살림, 재정)를 맡아 돈을 빼 돌리기 위해 가난한 자의 구제를 명분으로 내세우는 유다의 사악한 마음의 심중을 찌르는 말씀인 것이다.

 

지금 이 시대 빈부의 양극화를 보면서 특히 재벌들의 회개가 많이 필요한 시기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리고 각계 각층의 지도자들이 자신은 조금도 불편함이 없는 하이 클래스로 살고 있으면서도  입으로는 '서민 운운, 비정규직 운운, 절대 빈곤 퇴치 운운'하는 것을 본다. 

사랑도, 나눔도, 자선도 자기 밥통 안에서 말보다 행함으로 먼저 나와야 된다. 


예수님께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자와 당신을 동일시하시며, 애덕 실천의 여부가 최후 심판의 척도가 된다는 것을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계시하신다. 

그러나 알아야 한다. 가난한 자도, 부자도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 인간들이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면서, 우리 존재와 생명의 근본이며 목적이신 주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제외되어 있으면 안된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상의 죽음을 통한 구속의 효력이 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야 한다. 예수님의 보배롭고 거룩한 피가 가난한 자도 부자도 영혼의 때를 씻어내지 못한다면, 현세적 재화의 나눔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화폐로 환산될 수 있는 외적, 물질적 재화가 그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소위 우리의 나눔이라는 것도 언제가는 없어지고 말 이 세상과 현세만을 위한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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