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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주간 화요일]주님, 어디로 가십니까?(요한13,21ㄴ-33.36-38)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3-30 조회수1,227 추천수0 반대(1) 신고

 

2021년 3월 30일 화요일

[성주간 화요일주님어디로 가십니까(요한13,21-33.36-38)

 

1독서<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49,1-6)

섬들아내 말을 들어라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귀를 기울여라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이스라엘아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그러나 나는 말하였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그분께서는 야곱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화답송 시편 71(70),1-2.3과 4ㄱㄷ.5-6ㄱㄴ.15ㄴㄷ과 17(◎ 15ㄴㄷ참조)

◎ 주님제 입은 당신 구원의 행적을 이야기하리이다.

○ 주님제가 당신께 피신하오니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당신 의로움으로 저를 건져 구하소서제게 귀를 기울이소서저를 구원하소서

○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저를 구할 산성 되소서당신은 저의 바위저의 보루시옵니다저의 하느님악인의 손에서저를 구원하소서

○ 주 하느님당신은 저의 희망어릴 적부터 당신만을 믿었나이다저는 태중에서부터 당신께 의지해 왔나이다어미 배 속에서부터 당신은 저의 보호자시옵니다

○ 당신 의로움당신 구원의 행적을저의 입은 온종일 이야기하리이다하느님당신은 저를 어릴 때부터 가르치셨고저는 이제껏 당신의 기적을 전하여 왔나이다

 

복음<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요한13,21-33.36-38)

그때에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께서는

21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2 제자들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23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

24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고갯짓을 하여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여쭈어 보게 하였다.

25 그 제자가 예수님께 더 다가가, “주님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대답하셨다그리고 빵을 적신 다음 그것을 들어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

27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28 식탁에 함께 앉은 이들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아무도 몰랐다.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주머니를 가지고 있었으므로예수님께서 그에게 축제에 필요한 것을 사라고 하셨거나또는 가난한 이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말씀하신 것이려니 생각하였다.

30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때는 밤이었다.

31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32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33 얘들아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내가 유다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이제 너희에게도 말한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36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37 베드로가 다시 주님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하자,

38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성주간 화요일 제1독서 (이사49,1-6) 

"섬들아내 말을 들어라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귀를 기울여라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어머니 배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너는 나의 종이다이스라엘아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1~4.6)

 

이사야서 49장 1~7절은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이다여기서는 주님께서 종을 태중에서부터 부르셨다는 것(1~3)과 주님의 보상 선언(4)과 주님께서 종의 사명을 이루고 영광과 승리를 얻게 하신다는 사실(5~7)이 제시된다.

이같은 내용으로 시작하는 본문은 주님의 종 자신이 앞으로 제시할 내용을 이 세상의 모든 족속들이 마땅히 들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본문의 표현은 법정의 상황에서 증인을 소환하는 장면을 연상케 하는데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본문은 하느님께서 메시야를 부르심이 모든 이들이 다 받아들일 만큼 매우 분명한 사실임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섬들아내 말을 들어라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귀를 기울여라.' (1)

'섬들'에 해당하는 '이임'(yiim)은 매우 먼 지역에 떨어져 있는 민족들세상의 땅 끝에 사는 민족들을 상징한다이것은 이스라엘 백성과 전혀 관계없는 민족들주님의 이름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민족들이스라엘이 생각하기에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을 전혀 받을 수 없는 민족들을 대표하는 표현들이기도 하다.

 

'귀를 기울여라'에 해당하는 '웨하크쉬부'(wehaqshibu)는 '깊은 주의를 기울이다', '청종하다', '순종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카샤브'(qashab)의 사역 명령형이다즉 본문은 점층적 동의 대구법이 사용되어 모든 민족들이 다 주의를 기울여 메시야의 말씀을 들어야 함을 촉구하고 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어머니 배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1)

주님의 종이 자신의 소명의 기원을 강조하여 밝히는 표현이다원문은 동사 앞에 주어가 선행하여 부르신 주체가 하느님이심을 강조하고 있다그리고 '부르시고'라는 표현은 소명과 관련되어 있으며, '모태에서부터'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구원에 의한 절대적 선택과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크신 섭리를 나타내고 있다.

 

말하자면하느님의 간택하심에 따른 주님의 종의 권위를 부각시키고 있다특히 '모태에서부터'라는 표현은 종의 사명(소명)이 그의 일부가 아니라 그의 삶 전체존재 자체가 사명(소명)을 위한 것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에 해당하는 '히즈키르'(hizkir)는 '기억하다'라는 뜻의 '자카르'(zakar)의 사역형으로서 '특별히 기억하다', '언급하다', '부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름'에 해당하는 ''(shem)은 단순히 호칭만을 나타내지 않는다이것은 그 이름으로 불려지는 대상의 존재 자체나 인격이나 일 등을 포괄한다그러므로 이름을 지어주셨다는 것은 그의 일과 삶을 완전히 책임지고 정해 놓으셨다는 뜻이며이름을 부르신다는 것은 독립적이고 특별한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본문도 주님의 종의 사명은 종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부여하신 것임을 보여준다.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2)

본절에서는 주님께서 주님의 종이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예비하시고보호하셨음을 보여준다주님의 종의 일(사역)이 말로 하는 활동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이사50,4).

 

여기서 '날카로운 칼'이란 큰 영향력이 있는 말씀을 상징한다따라서 본문은 주 하느님께서 주님의 종을 하느님의 권능의 말씀으로 채우셨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이렇듯 하느님의 권능의 말씀(히브4,12)으로 무장한 주님의 종은 그 말씀을 선언함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게 될 것이다.

 

메시야의 전쟁은 무력을 통한 전쟁이 아닌말씀을 통한 영적 전쟁이 될 것이란 예언으로 이해 할 수 있다. '당신의 손'에 해당하는 '야도'(yado)의 원형 '야드'(yad)는 '권능'과 '능력그리고 '소유'의 의미도 내포한다. '그늘에'에 해당하는 '베첼'(betsel)의 원형 ''(tsel)은 '어둡다'라는 뜻에서 유래하여 '그림자', '그늘'이라는 의미이다이것은 그늘이 더위로부터 막아준다는 의미에서 파생한 것으로서 위험을 피하게 하여 안전하게 지켜주는 보호를 나타낸다.

 

'숨겨 주셨다'에 해당하는 '헤흐삐아니'(hehbiani)는 '하바'(haba)의 사역형으로서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적극적으로 보호하여 숨겨줌을 나타낸다(여호6,17; 1열왕18,4).

주님께서 그 종을 가장 적합한 순간에 세상에서 일을 하게 하심을 나타내는 표현으로서 구원 사업의 과정 하나하나를 완전히 섭리하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 (2)

'화살'에 해당하는 '레헤츠 빠루르'(lehets barur)는 정성스럽게 마름질하여 끝이 날카롭게 된(갈고 닦은화살촉을 의미한다이런 화살은 한 번의 발사로 적의 심장을 뚫어 버릴 수 있는 치명적 무기이다.

상반절의 '날카로운 칼'이라는 표현과 동의적 대구를 이루고 있는 이 표현은 영적으로 원수들을 단숨에 제압하고당신의 백성을 구원할 능력의 말씀을 상징한다그리고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라는 표현은 '당신의 손 그늘에 숨겨 주셨다'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주님의 종을 사용하시기 전까지 철저하게 보호하여 주심을 나타내고 있다.

 

만약 아무렇게나 보관한다면화살은 부러지거나 혹은 날이 무디어져 전투의 도구로서 제대로 사용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정한 날에 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실 수 있도록 완벽히 보호하여 보관하신다는 것이다 (갈라4,4; '때가 차차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너는 나의 종이다이스라엘아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3)

여기서 ''에 해당하는 '아브띠'(abdi)는 '섬기다', '일하다'의 뜻의 '아바드' (abad)에서 유래하며 주인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소유물인 노예나 왕국의 가신(1사무19,1)을 언급하거나 상대방에 대한 겸손을 나타낼 때에 사용한다(창세33,5). 그러나 본문에서 이 종은 주님을 지칭하는 1인칭 접미어와 결합하여 '주님의 종'으로 표현되고 있다.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에 해당하는 동사 '에트파아르'(ethpaar)의 원형 '파아르' (paar)는 어떤 물체가 찬란하게 반짝이는 모습을 나타내는 어원에서 유래한 단어로서아름답게 장식하거나 영화롭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에서는 재귀형으로 사용되어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영화롭게 하시되그의 종을 통해서 그렇게 하실 것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너에게로'로 번역된 '뻬카'(beka)는 '메시야의 삶과 일(사역)을 통해서'라는 뜻이다오직 주 하느님의 말씀대로만 사는 메시야의 삶과 무죄한 자로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은 메시야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주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요한17,4).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4)

본절에 제시되는 '주님의 종'의 한탄은 실패할 것을 예언하는 것이 아니며메시야의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될 것을 예언하는 것은 아니다이것은 메시야의 고난과 메시야의 인성(humanity)과 관련된 예언이다.

 

메시야는 이 땅에 오신 처음부터 구원사업을 마치는 마지막까지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했을 뿐 아니라(요한1,11; 마태26,56), 무죄한 자기 몸을 바쳐 십자가상에서 대속의 죽음을 이루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인류를 향하신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완성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마태28,17). 그런 측면에서 그의 죽음은 헛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본절의 상반절은 메시야의 한탄을 나타내는 예언이지결코 메시야의 사역이 실패할 것을 말하는 예언이 아니다하지만하느님의 소명을 받은 메시야가 이러한 극심한 내적 갈등을 겪게 된다는 사실은 바빌론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내 권리'에 해당하는 '미쉬파티'(mishipati)의 원형 '미쉬파트'(mishipat)는 법정에서 법과 규정에 따라 판결 및 심판을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 '샤파트' (shapat)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심판', '판결', '판단', '공의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본문에서는 메시야가 행하는 구속 사업의 정당성그것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내 보상'에 해당하는 '뻬울라티'(beulati)의 원형 '뻬울라'(beula)는 공들여 행한 일에 대해 주어지는 정당한 보상(reward)을 의미한다 (레위19,13; 잠언11,18; 에제29,20).

 

본절의 상반절에서 제시된 바와 같이 외견상으로는 자신의 사역이 완전한 실패로 보이는 상황에 직면해 있을지라도주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진 주님의 종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일을 통한 열매를 바라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메시야가 받을 보상은 죄인들이 새 생명을 얻는 것과 자신이 하느님 옥좌 오른편에 앉아 온 세상을 통치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히브12,2; 1베드2,24).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6)

'지파들을'에 해당하는 '쉬브테'(shibte)는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나타내는 표현이다사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지파간 골육상쟁의 비극이 끊이지 않았으며 (판관12,6; 21,15) 북과 남으로 나뉘어 결국에는 둘 다 멸망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종을 통하여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끊으시고열 두 지파를 단 하나의 지파도 결이 나지 않게 완전하고도 온전히 회복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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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간 화요일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지 맙시다.

하느님의 나라는 창조이전 계약(약속)에 따라 하느님께서 만들어 가십니다걸림돌에 걸려 넘어지지 맙시다.

 

(요한13,21-38)

21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9절까지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시고 그리고 36~38 까지는 베드로의 배반을 예고하십니다지난주일 마태오 복음에서는 제자들의 배반 그 예고 중간에 성찬례를 피로 맺는 새 계약으로 세우셨습니다.

오늘 요한복음에서는 새 계명을 주십니다마태오의 새 계약과 같은 의미라는 뜻입니다.

 

27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예수님의 빵양식(말씀)을 받자 그의 악한 마음이 드러났다는 것입니다빛 앞에 어둠이 드러난 것입니다.

 

30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때는 밤이었다.

어둠으로 나갔다 입니다이때 우리는 밖으로 나갈 것이 아니라 그 어둠을 품으시는 빛의 덮으심을 받으면 됩니다.

 

31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영광(독사)- 하느님의 신성과 본성인 사랑그 빛영광이라 했습니다그 사랑이 드러난 것이 십자가입니다하느님의 뜻인 죄인들의 구원의 완성을 이루실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그 사랑그 영광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그 영광이 되었고 되셨다과거 완료형으로완성입니다.

그런데~

32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하실 것이다- 미완료 형으로 아직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구원의계(약속)은 전지전능하신 분의 계약으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뜻하며하느님의 시간 속에서는 순서적인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사실 시간이라는 것이 하느님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2베드3,8참조)

 

(공동번역성서 에페1,4-5) 4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 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5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이것은 하느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창조 이전 이미 완성된 그 하느님의 구원의 계약이 이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그래서 영광스럽게 되었고되셨다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33 얘들아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내가 유다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이제 너희에게도 말한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유다인들의 율법(제사와 윤리),  자기 의로움으로는 올 수 없다입니다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그 의로움을 받는 피의 새 계약새 계명을 지켜야(믿어야주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34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서로 사랑하여라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십자가의 대속그 피의 새 계약으로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입니다우리는 그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그 새 계약의 사랑을새 계명으로 받아 그 사랑을 이웃과 서로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인간들의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우리의 사랑은 구원을 줄 수 없으니까요예수님의 구원의 사랑을 서로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먼저 내가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그 사랑을 믿어야 다른 이와 그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사랑으로 내가 용서 받았다면 당연히 이웃도 그 예수님의 사랑으로 용서 받을 것을 인정하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 누구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누군가를 판단 한다는 것은 그 누군가가 용서 받았음을 믿지 않는 것이 되고그러면 나 또한 용서 받았음을 믿지 못한다는 결과가 되니까요.

 

(로마2,1) 1 그러므로 아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그대가 누구든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남을 심판하면서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으니남을 심판하는 바로 그것으로 자신을 단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6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피의 새 계약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하신 그 나중입니다.

 

37 베드로가 다시 주님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하자, 38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내가 진실로진실로 너에게 말한다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우리의 목숨 바치는 그 열정열심히 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죄의 용서 구원은 예수님의 열심목숨 바치시는 그 사랑으로 얻는 것입니다.

 

(로마9,31-32) 31 그런데 이스라엘은 의로움의 율법을 추구하였지만 그 율법(제사지킴과 윤리그 의로움)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32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그것을 믿음으로 찾지 않고 행위로 찾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그들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아버지 의탁합니다.! 천주의 성령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 저희 죄인을 위하여 간구해 주소서~

아멘  

 

 


성주간 화요일 복음 (요한13,21ㄴ-33.36-38)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27)

 

예수님과 제자들이 앞당겨 파스카 만찬을 행하고 있는 그곳에는 음식물이 풍성하게 있다. 그중에는 공동으로 먹게 되어 있는 빵과 포도를 발효하여 만든 식초도 있었다.

당시 식사 풍습에 있어서 주관자가 식사 참여자들에게 접시에 담긴 빵을 식초에 직접 찍어 주는 경우가 있었다.  이것은 사랑과 우정의 표시이다.

 

주님께서는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셨다. 오히려 호의깊은 이런 행동을 통해서 유다로 하여금 마음의 가책을 느껴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다른 제자들로 하여금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길 배신자라는 걸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 그리고 유다가 그 빵을 받은 직후에 '그에게' 사탄이 들어간다. '그에게'에 해당하는 원문은 '에이스 에케이논'(eis ekeinon; into him)으로서 '유다 속으로'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그가 당신을 팔아넘길 자요 악마임을 아셨고(요한6,64.70), 요한 복음사가는 악마가 이미 유다의 마음 속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불어 넣었다고 증거했는데(요한13,2), 요한 복음 12장 27절에 사탄이 그 속으로 들어갔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이것은 그 순간부터 사탄이 유다의 인생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들어갔다'에 해당하는 '에이셀텐'(eiselthen; entered)은 '에이세르코마이' (eiserchomai)의 부정 과거인데, 성경의 용례를 보면 많은 마귀가 들린 것 (루카8,30)이나 더러운 영들이 돼지 떼에게로 들어간 것(마르5,12.13)을 나타내었다.

따라서 사탄이 유다의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이제 유다 스스로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을 나타낸다.

 

'군대'라는 이름을 가진 마귀가 어떤 사람 속으로 들어가니까 그가 마귀에게 몰려 무덤에서 짐승처럼 살게 되었고(루카 8,27), 더러운 영들이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자 2천 마리나 되는 돼지들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마르5,13). 이것은 마귀들린 당사자나 돼지 떼로서는 불가항력적 일이었다.

 

사탄이 유다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군대 마귀가 들린 사람처럼 해괴한 짓은 하지 않았으나 철저히 시탄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사탄은 유다의 생각이나 감정, 판단 및 결정 능력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임의로 주관하게 된 것이다.

유다가 이렇게 된 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는 12사도단의 생활 당가였으나 돈 도둑이었고, 공사(公私)가 불분명한 자였으며, 항상 자신의 죄악을 합리화, 정당화시키는 자였다.

 

그는 수학 머리, 계산 머리가 있어서 예수님의 여러 기적들을 체험한 뒤 예수님을 팔아넘기면 현세적으로나 세속적으로 힘있는 임금, 부귀영화를 가져다주는 임금으로서의 모습, 팔레스티나를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주는 정치적 임금으로서의 모습을 예루살렘에서 보여주리라 기대했다. 

말하자면 그는 예수님을 끝까지 시험한 자였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자기 나름의 메시아관을 그렸던 사람이다.

 

그러나 주님은 인류를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시켜주는 영신적 메시아였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무죄하신 어린양이셨다. 

마치 가랑비에 옷깃젖듯이, 권투 선수가 잔 펀치에 넉 다운이 되듯이 유다는 그렇게 작은 죄악들과 이기적 욕심으로 주님과 동료들을 이용하려했던 평소 가치관과 생활 습관이 쌓이고 쌓여 이렇게 마(魔)를 불러 들이고,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한편, 요한 복음 17장 12절(ㄴ) 에는 '제가 그렇게 이들을 보호하여,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멸망하도록 정해진 자 말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나온다. 

'멸망하도록 정해진 자'에 해당하는 '호 휘오스 테스 아폴레이아스' (ho hyos tes apolleias; the son of perdition) 운명의 차원이 아닌 인격과 속성의 측면에 대한 표현이다. 이것은 테살로니카 2서 2장 3절에도 동일한 표현이 나오는데, '멸망하게 되어 있는 그자'가 '무법자', '맞서는 자', 자칭 '신'이라고 자처하는 자로 나온다.

 

이것을 볼때 유다 이스카리옷을 이렇게 표현하신 것 유다가 사탄이 가지고 있는 성품과 인격과 속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서 그가 태어날 때부터 멸망받을 자로 예정된 것이 아니라 유다의 사탄과 같은 인격과 성품이 멸망받을 만한 것으로 되어 있다는 말이다.

 

요한 복음 13장 27절에서 예수님께서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하시며 이러한 유다를 지키시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유다 자신이 예수님의 보호하심을 자신의 욕망 때문에 저버렸기 때문이다.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에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 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주었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마태26,14~16)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요한13,30)

 

또한 예수님께서 유다를 지키시지 않은 것은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라고 말한다.

여기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에 해당하는 '히나 헤 그라페 플레로테' (hina he graphe pllerothe; so that the scripture might be fulfilled)는 유다의 배반이 이미 하느님의 섭리와 예지 가운데 들어 있고,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성경은 유다의 배신이 간접적으로 예언되어 있는 시편 41장 10절과 시편 109장 8절 등을 가리킨다.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라는   성경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 (요한13,8)

'제가 믿어 온 친한 벗마저, 제 빵을 먹던 그마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듭니다.' (시편41,10)

 

'원수가 저를 모욕한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제가 참았을 것입니다.  저를 미워하는 자가 제 위에서 거드름을 피운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제가 피해 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 내 동배 내 벗이며 내 동무인 너.  정답게 어울리던 우리 하느님의 집에서  떠들썩한 군중 속을 함께 거닐던 우리.' (시편55,13~15)

'그의 살날들은 줄어들고 그의 직책은 남이 넘겨받게 하소서.'(시편109,8)

 

여기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라는 말 때문에 '유다 아니면 또 다른 누가 그 역할과 배역을 수행해야만  예수님의 구속사업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며 예정론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이 많다.

언뜻보면, 성경 안에는 넓은 의미의 예정론이 있다.  과거 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까지도 예지(豫知)하시는 하느님의 전지 전능하신 구원의 계획과 섭리와 안배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이나 진리를 깨닫는 능력인 이성(理性)이나 선(善)을 추구하는 행동의 원리인 의지(意志)를 자유(自由)롭게 쓰며, 매사에 하느님의 뜻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 선택하고 자신이 선택한 것에 책임을 져야 하는 인간의 인격(人格)은 어떻게 되며, 모든 것이 다 정해져 있다면, 인간은 하느님의 로봇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또한 멸망하도록 작정된 자가 영원으로부터 미리 정해져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저주이기에, 인류 모두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기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라는 말은 유다의 배반 사건이 있은 뒤 적어도 2~30년 뒤에 복음서를 기록한, 구약을 잘 아는 복음사가가 볼 때, '아~구약 성경에 예언된 이 말씀이 바로 여기서 실현되었구나'하고 알아 들었으니까 그렇게 기록한 것이지, 예정론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더군다나 '멸망으로 정해진 자'의 표현은 운명이 아니라 인격과 성품과 속성의 측면을 말한다고 이미 앞에서 밝혔다.

 

유다는 12사도단의 당가를 책임지면서 평소 공금을 횡령하던 도둑이었고 (요한12,6), 다른 여느 사도나 유다인들처럼 현세적이고 정치적 메시아관을 가지고서 예수님을 팔아 넘겨 궁지에 몰아 넣으면, 평소 여러 기적을 행하신 능력의 소유자이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힘있는 왕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줄거라고 끝까지 시험한 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유다라 할지라도, 자신의 기대치에 어긋나 일이 심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엄청난 죄책감에 사로잡혀 양심의 불편함을 느껴 주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주님을 바로 뵙지 못해 주님의 뒷모습만 바라보아서도, 그는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요사파 수녀님께 하신 예수 성심의 메시지에 나오는 말씀이다.


유다는 이미 가랑비 옷깃 젖듯이 평소에 죄(罪)를 차곡 차곡 쌓아 놓아서 이미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기엔 때가 늦었던 것 같다.

그의 심령의 주인이 하느님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어 그의 자아(自我)가 너무 커져 버려 스스로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거슬러 스스로 생명을 처분할 생각을 갖게 되었고, 사탄이 그의 심령을 온전히 지배하도록 방치해 버렸던 것이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일생을 틀어서 진정한 참회의 순간과 주님께 사랑을 진정으로 고백하는 진실된 기도의 시간을 갖지 않았음에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유다의 삶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길래 하느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셨겠는지를 곰곰히 묵상해 보아야 한다.

우리 자신도 매사 매순간에 주님 가장 가까운 곁, 바로 턱 밑에서 또 다른 유다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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