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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집착이 일어나는 근원적 원인: 하느님 위에 서는 맛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21-03-30 조회수2,251 추천수6 반대(0) 신고

 

2021년 나해 성주간 수요일


<집착이 일어나는 근원적 원인: 하느님 위에 서는 맛>


복음: 마태오 26,14-25



LORENZETTI, Pietro 작, (1325)  

 

 

 

가리옷 유다는 상처를 받고 폭풍우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만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방법이 은화 서른 냥이었습니다. 그는 상처를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많이 받아 고통스러운 상태라 더는 고통스럽지 않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상처를 사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베트남 출신 승려 틱낫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래전 나는 폐에서 피가 나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나는 수시로 피를 뱉어야만 했다. 지금 숨을 쉬면서 나에게 필요한 것은 폐가 세균에 감염되었던 때를 기억하는 일이다. 그리고 내가 쉬는 매번의 숨마다 너무 맛있고, 너무 좋다.”

 

폐에 바이러스가 감염되었을 폭풍과 같은 때를 두려워하여 지금 그것으로부터 피하려고 갖은 노력을 하는 사람도 있겠고, 그 상처를 이용해 지금의 빗속에서도 기분 좋게 춤을 출 줄 아는 사람도 있습니다.

 

현재의 행복은 상처를 주님께서 필요해서 주셨다고 소화를 한 사람과 그것을 소화하지 못해 아직도 체해 있는 사람과의 차이에서 생깁니다. 하느님을 좋은 분으로 믿으면 옛 상처가 소화되고 지금의 빗속에서 춤을 출 수 있지만, 하느님을 나쁜 분으로 여기면 폭풍 속에서 살려고만 버팁니다. 그리고 의미 없는 것이 전부라고 그것에만 집착하고 매달리게 됩니다. 가리옷 유다에게는 그것이 은전 삼십 냥이었습니다.

 

 

어떤 스승과 제자가 황량한 들판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묵고 갈 집을 발견하지 못하던 찰나에 한 허름한 오두막을 발견합니다. 둘은 그 집 주인에게 잠시 쉬어갈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부부와 자녀들이 쉴 공간도 부족하지만, 그들은 기꺼이 쉴 곳을 내어주었습니다. 스승은 가장에게 물었습니다.

이 황량한 들판에서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십니까?”

, 저희에게는 여읜 암소 한 마리가 있습니다. 그것으로 젖을 짜서 우유를 마시기도 하고 치즈를 만들어 장에 가서 팔기도 합니다. 그렇게 저 암소 덕분으로 겨우겨우 연명하며 살고 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둘은 감사의 인사를 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잠시 가다가 스승이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암소를 절벽에서 떨어뜨려라.”

제자는 놀랐습니다. 그러나 항상 스승에서 순종하던 착한 제자이기에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몇 년 뒤 제자 혼자 다시 그 길을 가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는 그 집을 다시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허름하던 집은 없고 좋은 집이 지어져 있었으며 화단에 꽃과 나무들이 심겨있었습니다. 제자는 다른 사람이 이사 온 것으로 여기고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가족이었습니다. 어찌 된 영문이냐고 묻자 가장이 설명했습니다.

, 두 분이 떠나시던 날 아침 저희 암소가 그만 절벽으로 떨어져 죽었습니다. 살길이 막막한 저희는 죽지 않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돌밭에 약초를 뿌렸는데 그것이 잘 된 것입니다. 그리고 힘들여 밭을 개간하고 농사를 지었는데 의외로 농사도 잘 되어 이렇게 잘살게 되었습니다. 그때 암소가 죽은 것은 저희에게 큰 복이 되었습니다.”

[출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류시화, 유튜브 채널, ‘책읽는 다락방 J’]

 

 

지푸라기를 잡고 놓지 못하는 이유는 물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어서면 허리밖에 차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폭풍처럼 여겨지는 근저에는 하느님께 대한 원망이 심겨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원망이 있으면 여읜 암소 한 마리에 집착합니다. 폭풍 속에서 잡을 수 있는 지푸라기와 같습니다. 가리옷 유다에게는 은전 삼십 냥입니다. 폭풍우 속에서 그것을 놓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는 왜 하느님을 좋은 분으로, 누구는 무자비한 분으로 여기게 되는 것일까요? 이지선 같은 자매는 온몸에 화상을 입고 얼굴과 몸에 큰 상처로 살면서도 어떻게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싫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하느님을 좋은 분으로 여기고 싶은 마음 안에는 겸손이 있습니다. 사실 폭풍 속에서 사는 이유는 하느님을 원망하고 비판하며 하느님이 된, 아니 하느님을 넘어선 자신을 즐기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리옷 유다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런 마음에서 벗어나려면 하느님을 비판하며 높아지려는 나의 교만을 보아야 하고 그래서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믿고 행복하려고 해야 합니다. 내가 행복하기를 바라고 그러면 주님께서 은총을 주십니다. 행복하기를 바라야 합니다. 누가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지만 사실 대부분이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원망하는 맛에 길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행복해지고 싶다면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할 것을 찾을 것입니다. 주님은 좋으신 분이라 믿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감사한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십니다. 그 눈으로 지금이 폭풍우가 아니라 그저 비가 내리는 것일 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두려움이 나의 눈을 멀게 한 것입니다. 주님이 좋으신 분으로 믿고자 원하기만 한다면 이제 빗속에서 춤을 출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만이 은전 삼십 냥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입니다. 집착은 두려움에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폭풍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가 아니라 그저 빗속에서 어떻게 춤출 것인가를 찾으십시오. 그러면 춤의 맛을 더해 주기 위해 하늘에서 물을 뿌려주고 있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https://youtu.be/CCtYkmJdJS0

유튜브 묵상 동영상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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