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성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3-30 조회수1,344 추천수1 반대(0) 신고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만찬 때 유다의 배반을 넌지시 언급하십니다. 열두 제자들의 반응이 좀 어색합니다. 배반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실 때 자기가 아니면 아니라고 해야 할 텐데 아니겠지요? 하고 마치 자기도 해당이 될 수도 있는지 모르겠다는 여운을 주는 듯한 인상을 남깁니다. 언어의 미묘한 뉘앙스 차이입니다. 번역상의 차이도 있겠습니다. 실제 이 뉘앙스 그대로라고 가정하고 묵상을 해보고 싶습니다. 왜 그들은 딱 잘라서 자신 있게 자기는 아니라고 확실한 입장을 밝히지 못했을까를 한번 묵상해봤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예수님을 팔아넘길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나름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순수하게 따른 것만은 아니라는 여운을 주는 듯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자신 있게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할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근데 유다의 대답은 참 뻔뻔합니다. 유다는 이미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차라리 말을 하지 말든지 말을 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말을 할 수 있는지 의아합니다.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말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들 예수님께 대답을 할 때 주님이라고 호칭을 하지만 유다는 스승님이라고 호칭을 합니다. 혹시나 싶어서 영어 성경을 찾아봤습니다. 영어 성경 그대로 표현입니다. 물론 스승이라고 해도 그렇게 썩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제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셨기 때문에 그렇긴 합니다만 맨 먼저 유다가 그렇게 했다면 모르겠는데 유다는 복음을 보면 여러 제자가 말을 한 후에 한 걸로 보면 자기가 말하기 전에 다른 제자들은 주님이라고 한 것을 들었을 텐데 유다는 그것과는 상관없이 스승님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너무 비약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이런 상황에서 유다가 주님이라는 호칭을 했더라면 유다의 마음이 순간 변할 수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왜 이런 상상을 하는가 하면 유다가 나중엔 죄책감 때문에 자살을 하기 때문입니다. 스승님이라고 할 때보다는 주님이라고 했다면 그 순간에 자살로 죽을 정도의 양심이면 마지막에 주님이라고 할 때 그래도 그렇지 내가 주님이라고 하는 분을 팔아넘긴다는 게 말이 될 일인가 하고 양심에 가책이 돼서 회개를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마지막 순간에도 스승님이라고 한 걸 보면 유다의 마음은 이미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갔던 것입니다.

 

유다의 삶을 한번 보면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제자였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행위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처럼 회개를 하고 용서를 구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걸 떠나서 다르게 보면 하느님을 만나가지고도 그런 일을 겪었으니 그 모습을 보면서 진지하게 생각해볼 게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서 안전하게 하느님 나라를 향해 순항을 하는 것 같지만 끝까지 목적지까지 잘 도착을 해야 하는데 유다처럼 불시착을 할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유다를 향해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하는 말씀처럼 우리에게도 이 말씀처럼 차라리 믿음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하는 말씀처럼 최후의 심판 때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가정하면 참으로 불행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쩌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유다의 모습이 미래에 하느님 심판대 앞에서는 이런 모습으로는 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