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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체 조배 .... 영원한 생명의 빵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4-01 조회수1,450 추천수0 반대(0) 신고

성체 조배

성체 조배는 주님 수난 예식 전까지 계속한다. 성체를 모셔 두는 장소는 기도와 묵상의 분위기가 이루어지도록 마련하되, 지나치게 화려한 장식은 하지 않는다. 성체는 감실이나 성합에 모시고 문을 잠가야 하며, 어떠한 환경에서도 성체를 성광에 모시어 내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금요일 오후에 숨을 거두셨기 때문에 이 감실은 무덤이 될 수 없으므로 무덤이라는 표현도 해서는 안 된다. 성체 보관 장소(수난 감실)주님의 묻히심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성금요일의 성체 분배와 병자들을 위하여 성체를 모셔 두고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마태 26.40)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주님 앞에 머물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신자들은 주님 만찬 저녁 미사 다음, 밤시간 동안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 앞에서 조배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자정이 지나면 소박한 분위기에서 조배를 한다. 주님 수난의 날이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독서(아래의 글 대신 다른 글을 읽을 수 있다.)

주님, 주님 손에 맡깁니다. 송두리째 남김없이 바칩니다. 하늘과 땅이 결합하는 위대한 순간입니다. 드디어 저희가 구원을 누리게 되는 제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아버지, 저희 자신을 아낌없이 모두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받아 주소서. 날마다 사제의 손을 거쳐 바치는 이 골고타 제사와 함께하는 저희입니다.

가슴을 치며 따라가는 저희의 부족함을 보지 마시고, 아드님의 위대한 제사와 하나 되어, 아버지의 입가와 마음에 웃음이 번지게 하소서. 또한 더욱 열심히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하나 되어, 저희 자신을 되풀이하여 주님께 바치고 이웃에게 내어 주며, 주님을 예배하는 사제직의 수명을 수행하도록 은총을 주소서,

<잠시 묵상한다>

 

 

 

복음<영원한 생명의 빵>

형제 여러분,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말씀을 들읍시다. 6,35-40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35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36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3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38 나는 내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40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 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주님의 말씁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서 주해

35

예수 자신이 32-33절에 언급된 하느님의 빵이라는 결정적 자기계시다. , 자기 자신이 하느님의 빵으로 이 세상에 신전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빵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자기계시가 촉구와 구원 약속으로 연결된다. 이런 구조로 된 예수의 자기계시 말씀은 요한복음에 더러 있다. 허기와 갈증의 해소는 구약성서에서 실존적 위기와 불안을 이겨내는 구원을 가리킨다.

 

오다믿다에는 모두 예수를 믿으라는 촉구가 내포되어 있다. 문맥상 이 구절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예수를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길이 남아 있을 양식을 예수 안에서 또한 예수를 통해서 얻게 되리라고 바꾸어 표현할 수 있다.

 

36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예수의 질책이다. 그러나 예수가 이미 말했다는 내용은 문맥상 찾아볼 수 없다. 이미 말한 것을 전제하고서 예수 자신이 그 말을 인용하는 식의 표현은 요한복음에 흔하다. 특히 나를이 문제점으로 대두된다. 필사본에 따라 있거나 없기 때문이다. 이 인칭대명사가 원본에 있었을 경우, “당신들은 빵의 기적에서 나를 하늘에서 내려온 빵으로 알 수가 있었습니다란 뜻이 된다.

 

나중에 필사자들이 추가했을 경우, 35절에서 거듭 언급된 인칭대명사 를 문맥상으로 삽입한 것으로 여길 수 있다. 원래는 없었던 것으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그 이유는 표징이란 말을 삽입해 보면 문맥상 의미가 순조롭고, “보고도 믿지 않는다란ㄴ 26절을 요약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의 질책은 좀더 분명해진다. “당신들은 외적 이유로 나를 찾아옴으로써 비신앙적 모습을 보여주었듯이, 표징들을 보고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믿지 않기 때문에 참으로 표징을 보지 못했다. 예수의 표징들을 외적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믿지 않았다.

 

37

하느님에 의해 예수를 믿을 수 있다는 뜻이다. , 믿음의 주도권은 하느님네게 있다는 뜻으로서 믿음이 은총이라는 점도 시사된 셈이다. “아버지께서 주신다란 표현은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신다란 말과 함께 영으로부터 난다는 말과 맥락을 같이한다.

예수는 자기에게 와서 함께 마무는 자들, 곧 자기를 믿는 자들 누구나 쫓아내지 않고 돌본다는 뜻으로, 목자와 양들비유를 연상시킨다.

 

38

예수는 자기를 보내신 분의 을 행하려고 자기를 믿는 자들 누구나 잃지 않도록 돌본다는 것이다. 즉 아버지의 구원계획이 아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신학사상이 시사된다. 하느님은 아들을 세상에 파견하고 아들에게 사람들을 보내신 구원의 창시자다.

 

39

예수 지상활동의 목적과 의미가 분명히 언급된다. “잃어버리지 않는다37절의 밖으로 쫓아내지 않는다보다 고조된 적극적 표현이다.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리는 것이란 40,44.54절에서도 동일하게 언급된 내용으로써 예수를 통해 누리는 생명이 부활 때 완성됨을 뜻한다. 즉 종말론적 구원의 현재적 의미가 미래적 의미로 부각된 셈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저자 또는 어느 편집자가 종래의 구원 의미를 삽입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40

39절은 반복하면서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따른 관점을 강조한다. 아버지께서는 누구나 아들을 믿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바라신다는 것이다. “아들을 본다란 말은 36절을 상기시키면서 아버지로부터 파견된 아들을 올바르게 알아차리라는 촉구의 의미도 있다. 이면에 아들 안에서 아버지를 본다는 생각도 내포되어 있다. 이런 눈으로 아들을 보는 가운데 믿음이 실현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39절의 잃어버리지 않는다의 적극적 표현이고, 동시에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이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예수의 말이 이제 그들 모두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라고 분명하게 설명된 셈이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따옴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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