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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토요일 아침에 부활을 묵상하며....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4-03 조회수1,332 추천수1 반대(0) 신고

 

전례적으로 오늘은 성토요일입니다. 저도 잘 모르지만 매일미사에 간단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무덤 옆에 머물러 주님의 수난과 죽음, 저승에 가심을 묵상하며 주님의 부활을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숨을 거두셨고 이제 주님의 영혼은 저승에 잠시 가셨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저승하면 마치 예전에 드라마 전설의 고향과 같은 곳에서 자주 나오는 저승과 같은 이미지가 자주 떠옵니다. 마치 우리와 맞지 않은 말처럼 여겨집니다. 근데 이 저승이라는 말은 사도신경에 나오듯이 우리가 신앙고백을 할 때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가셨다가 다시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왜 다시 오실 거면서 그곳에 가셨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럴 만한 분명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무엇을 저희에게 가르쳐주시려고 과연 부활을 하시려고 하시는 것일까? 감실 조배를 하면서 요한복음 13장부터 19장까지 이번엔 침묵 속에서 조배를 한 시간이 많아 계속 성경을 가지고 묵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호자이신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많은 이유가 있지만 그건 예수님께서 그간 가르쳐주신 걸 기억하고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보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떠나시는 게 저희에게 좋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떠나야만 하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성령을 보내주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또 다른 하느님이십니다. 지혜의 영이라고도 명확하게 제시해 주십니다. 그러니 그 성령의 힘이, 부족한 저희가 가르침을 받을 수가 있고, 또 기억을 할 수가 있도록 해 주신다고 하니 참으로 고마우신 일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하신 이유를 묵상해봤습니다.

 

예수님의 역할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예수님도 마냥 이 지상에서 저희와 계속 계실 상황이 아니였던 것 같습니다. 떠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또한 당신의 일이셨던 것입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또 헤어짐이 있으면 만남이 있다고 하는 세상의 이치가 여기에도 적용이 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희와 헤어짐에도 저희들을 고아처럼 내버려두고 싶지 않다고 하셨기에 그래서 보호자를 보내신다고도 하셨습니다. 저승에 가셔서도 저희의 안위를 걱정하시는 따뜻한 예수님 마음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건 또 하나의 사랑일 겁니다.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이실 것 같습니다. 예수님 한몸으로서는 감당이 되시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서 그런 놀라운 능력으로 다시 언제나 이 세상에 함께해 주실 또 다른 하느님을 보내주시려고 하신 것 같습니다.

 

그걸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시려고 저희에게 나타나시고 잊지 말라는 뜻으로 깜짝 나타나신 게 부활이지 않을까 하는 묵상도 해봅니다. 죄로 물든 몸으로 부활이 아니라 죄도 흠도 없는 무결한 몸을 받기 위해서 당신이 그런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셨고 그 처절한 고통 속에서 당신께서 쏟으신 피와 땀이 우리가 지은 죄를 대신하신 보속의 눈물과 같은 것일 겁니다. 우린 그걸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화려한 부활만 보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다주는 고귀한 가치가 훼손되는 것이 될 수가 있을 겁니다. 죽음 너머에 있는 부활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그런 부활을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 될 것입니다.

 

조금 전에도 표현했지만 부활의 몸을 받는다에서 몸을 받는다이건 제가 어려서부터 스님으로부터 많이 들은 내용입니다. 특히나 불교에서 이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원래 정식 불교에서는 윤회가 없다고 합니다. 잘못 전해진 것입니다. 아무튼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개념 때문에 지금도 그런 표현을 하곤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묵상 정도는 할 수가 있는 소재거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불교에선 이걸 업으로 표현합니다.

 

우리로 말하면 자기가 현세에서 살면서 한 행실 정도 되겠죠. 불교에서는 윤회도 여러 윤회가 있는데 다시 사람으로 인도환생하길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이 살면서 좋은 공덕을 쌓고 자신이 지은 죄업이라는 업장을 소멸시키기 위한 기도를 그토록 하는 것입니다. 다음 생에서 그나마 좋은 몸을 받으려고 말입니다. 우리와 비교하면 기도의 공덕과 같을 겁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한 기도만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영혼도 영혼이지만 우리는 영혼 영혼을 위해 기도를 하면 연옥 영혼도 우리를 위해 기도를 해 준다는 성인의 통공을 믿고 하는 기도와 비교를 하면 비슷한 부분도 있긴 합니다. 불교도 마찬가지이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 공통적인 부분은 그들이 말하는 업장소멸처럼 우리 또한 우리의 죄가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해야 새로운 인간의 몸을 받는다고 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런 윤회가 필요한 게 아니라 단순히 자신의 육이 죽고 또 자신의 거짓 자아를 벗어버리기만 하는, 아집을 버리는, 이런 걸 벗어버리는 게 진정한 죽음이 될 것입니다. 단순한 육체의 죽음은 하수와 같은 죽음이 될 것입니다. 그건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찾아오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그 죽음이 하나의 지표가 될 수가 있지만 그런 죽음은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우리는 그런 죽음도 하나의 껍데기와 같은 존재라는 걸 알아야만이 예수님이 그토록 당신께서 수난하신 후에 당신께서 보여주신 부활이 어떤 의미를 저희에게 가져다주는지 알 수가 있을 겁니다. 단순한 육신의 부활만을 의미하는 부활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그렇게 당신께서 수난을 하셨다면 그런 하느님은 어리석은 하느님이지 않겠습니까? 인간인 사람도 그렇게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린 몇 시간 후면 다시 예수님께서 화려하게 어떤 마전장이도 할 수 없는 거룩하고 깨끗한 옷을 입고 부활을 하실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부활이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부활하는 게 중요합니다.

 

저는 이번 사순을 썩 그렇게 잘 보낸 것 같지 않습니다. 나름 노력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지나고 보면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이번에는 실패작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하느님의 자비만을 청할 뿐입니다. 부족하지만 그 부족한 부분을 하느님께서 채워주셔서 다시 새롭게 새출발을 할 수 있도록 기도를 드릴 뿐입니다. 부활 미리 축하드립니다. 단순한 부활이 아니라 정말 새로 거듭나는 부활이 되시길 기도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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