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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복음묵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4-05 조회수990 추천수1 반대(0) 신고

 

오늘 복음은 인간의 완고함의 결정판을 보여주는 것 같은 모습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형사 재판 시스템은 증거재판주의입니다. 모든 건 증거로 재판을 한다는 뜻입니다. 이미 소송법에서도 법률로 명문화해놓은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무고한 희생자의 발생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요즘 국가적으로도 많은 국민적인 이슈가 되고 있는 게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몇 번 언론에서 히트가 된 말이 있습니다. DNA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지금 피의자에게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지만 극구 부인하고 있는 사정입니다. 아직까지는 정확한 범죄 피의 사실이 소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단을 할 수가 없지만 진실은 나중에 밝혀진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될지는 시간이 좀 더 흘러야 될 것 같습니다. 한 인격에 대해 도덕인 비난을 떠나서 이 사건을 보면서 언론이나 범죄심리학 전문가의 의견을 굳이 참조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이 사건을 보면서 저는 여러 가지로 많은 걸 생각해봤습니다.

 

아직까지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함부로 말할 수가 없는 사정입니다. 지금 사실 언론과 수사기관에서도 정황증거로만 가지고 범죄사실을 추론하는 사정입니다. 극단적인 경우의 수를 가지고 생각한다고 해도 두 가지의 경우의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거짓말, 하나는 진실, 이렇게 양분됩니다. 만약 나중에 진실이 밝혀져서 지금의 피의자의 범죄 피의사실이 사실로 밝혀진다는 걸 전제한다면 우리는 여기서 남의 일이지만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어떤 증거보다도 형사소송법적으로도 증거능력이 가장 탁월한 과학적인 증거가 제시됨에도 불구하고 범죄사실을 부인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이번에 아주 중요한 걸 하나 알았습니다.

 

일부에서는 피의자가 형량을 감량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렇게 한다고 하는데 그럴 수도 있지만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한다면 아주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조금 설득력이 없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정말 아둔해서 그런지 그건 두고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보다도 좀 더 설득력이 있는 주장은 지금 나와 있는 범죄사실이 소명되는 것보다 배후에 있는 사실, 그게 다른 범죄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범죄사실 여부를 떠나서 다른 관련 어떤 사실이 노출되는 게 지금 자신의 범죄사실보다도 더 자신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일이 될 수가 있기 때문에 피의자는 그게 두려워서 지금 자신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범죄사실을 극구 부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카드라고 생각해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과학적인 증거인 DNA보다 더 증거능력이 있는 증거가 나와야 이 사건의 실마리가 풀릴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건을 보고서 하나 느낀 게 있습니다. 사람의 죄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도 수치스럽지만 죄를 인정하고 죗값을 치르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일의 근본적인 원인은 죄보다도 수치입니다. 그만큼 수치가 죄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걸 여실히 증명해 주는 케이스입니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인간은 나약하기 때문에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기 때문에 누구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면 어느 부분에서는 공감을 할 수가 있지만, 개개인에 따라서는 오히려 수치스러움 때문에 인정이 되지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는 지금은 수치 때문이라고 단정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정확한 결과가 나온 상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단은 헌법이 보장하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적용해야 하기 때문에 함부로 예단을 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이라는 전제를 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실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인데도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자처한다고 종교지도자들은 되지도 않은 죄명으로 신성모독이라는 미명 아래 예수님을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했습니다. 실제 그들이 예수님께 누명을 씌운 범죄사실이 거짓이라는 사실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게 현실로 명명백백하게 실현된 것입니다. 설령 그땐 그들의 영안이 막혀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해서 그런 엄청난 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이젠 사실이 밝혀진 이상 하늘을 우러러보며 가슴을 치며 회개하고 하느님께 석고대죄를 해야 될 상황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이라면 자기들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경비병을 매수하려고 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들이 경비병을 매수했다는 사실에서 벌써 이미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라는 건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이지만 사실로 인정을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흔히들 범죄자들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부인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그렇다고 인정을 한다고 해도,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젠 최종적으로는 총독까지도 매수를 하겠다는 심산으로 자신들을 방어하려고 하는 모습을 오늘 복음은 보여줍니다.

 

상당한 비약을 하는 건 모르지만 어느 정도 선을 넘어가면 하느님이 하느님이심을 증거하는 명확한 증거가 나와도 회개하지 못하는 그때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종교지도자가 단순히 복음에 나오는 종교지도자만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제 생각이 아니고 우리 가톨릭에서 공인된 성경 주석의 한 부분에 나옵니다. 바로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이 주석에서는 그렇게 설명은 되어 있지 않지만 단순히 과거의 시간이 아니고 현제의 시간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단어의 문법적인 시제를 풀이한 해석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 말은 이 사건은 2000년 전의 단순한 사건의 한 예가 아니고 지금도 적용되는 유효한 사건이라는 의미일 겁니다.

 

이와 같은 결론이 발생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인간의 완고함입니다. 다르게 생각하면 아집입니다. 아성이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만큼 아집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결국은 아집이라는 게 하느님까지도 거부할 수 있게 하는 무서운 독버섯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종교가 아집의 위험성을 언급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기독교에서도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에서'  자신이 바로 아성의 근원이 될 수 있는 아집이 될 것입니다. 불교나 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아지경에 이르러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야 참 부처를 만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교에서는 극기승자 즉, 자기를 이기는 자가 천하승자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 아성과 아집을 없애기 위한 수단으로 불교에서는 마음을 내려놓는 하심을 끝까지 수행하는 이유도 우리와는 조금은 다른 것이지만 원리는 비슷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보면 알 수 있듯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보는 영광을 누린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예수님의 곁을 지키려고 했던 여인들입니다. 제자들도 아닙니다. 제자들은 비겁하게 다 도망갔습니다. 이 여인들이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지켜서도 그럴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여인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마음에 거짓이 없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게 사실이라는 게 여기서 증명이 된 셈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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