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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엠마오 마을로 가는 길에서. (루카24,13-35)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4-07 조회수1,961 추천수1 반대(0) 신고

 

 

2021년 4월 7일 수요일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엠마오 마을로 가는 길에서. (루카24,13-35)

 

 

1독서<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합니다일어나 걸으시오.>(사도3,1-10)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세 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 하나가 들려 왔다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자선을 청할 수 있도록사람들이 그를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 들어다 놓았던 것이다.

그가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자선을 청하였다.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우리를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가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고 기대하며 그들을 쳐다보는데,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일어나 걸으시오.”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벌떡 일어나 걸었다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였다.

온 백성은 그가 걷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는 것을 보고,

10 또 그가 성전의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자선을 청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그에게 일어난 일로 경탄하고 경악하였다.

 

화답송 시편 105(104),1-2.3-4.6-7.8-9(◎ 3)

◎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또는◎ 알렐루야.

○ 주님을 찬송하여라그 이름 높이 불러라그분 업적 민족들에게 알려라그분께 노래하여라찬미 노래 불러라그 모든 기적 이야기하여라

○ 거룩하신 그 이름 자랑하여라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 그분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들아그분이 뽑으신 야곱의 자손들아그분은 주 우리 하느님그분의 판결이 온 세상에 미치네

○ 명령하신 말씀 천대에 이르도록당신의 계약 영원히 기억하시니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이며이사악에게 내리신 맹세라네

 

복음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24,13-35)

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13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14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16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18 그들 가운데 한 사람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20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22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23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24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어리석은 자들아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2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28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29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34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35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사도3,1-10)

  

"그 무렵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세 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1)

 

사도행전은 1-2장이 성령 강림 사건으로 인한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설립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면, 사도행전 3-7장까지는 사도 가운데서도 베드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복음의 강력한 선포 및 초대 교회의 폭발적인 확장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3장에서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첫 치유 기적 베드로가 성전의 '아름다운 문' 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 이것을 계기로 이루어진 솔로몬 행각에서의 베드로의 설교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본절에서 시간과 장소, 기적의 주역을 소개함으로써 이 일이 꾸며낸 일이 아닌 역사적 사건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여기서 언급되는 오후 세 시는 유대인들의 시간표에서 제9시이다. 유대인들이 구별해서 정해 놓은 기도 시간이 제3시, 제6시, 제9시 (현대 시각으로는 오전9시, 정오, 오후3시)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마지막 기도 시간인 오후 3시경에 성전에 올라갔던 것이다. 베드로를 비롯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처럼 유대교의 좋은 기도 전통을 버리지 않고  정한 시간마다 성전에서 열심히 기도하였다(사도2,5.42.46).

 

또한 초대 교회 신도들의 기도는 유대인들의 형식적인 기도와(마태6,5) 달리 역동적인 기도였으며 많은 기적과 승리를 가져왔다(사도12,3-17). 이런 차원에서 사도행전은 기도의 승리를 기록한 기도의 행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성전으로 올라가는데'에서 '올라가는데'에 해당하는 '아네바이논'(anebainon)은 미완료 과거 형태이다. 희랍어에서 미완료 과거는 아직 완결되지 않은 상태나 계속 이루어지는 동작 및 습관적인 동작을 묘사한다.

 

말하자면 베드로 일행이 성전을 방문하여 기도하는 것이 일회적인 일이 아니라 습관이 될 만큼 자주 하였던 행동이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당시 성전을 향하여 나아가는 움직임을 보다 생생하고 현장감있게 묘사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성전으로 기도하러 올라가는 과정에서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라는 궁금증을 자연스럽게 유발하는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 하나가 들려왔다.  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자선을 청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그를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  들여다 놓았던 것이다." (2)

 

'모태에서부터 불구자' 직역하면 그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앉은뱅이(콜로스; cholos)라는 말이다. 저자가 그의 병은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불치병임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다.

 

사도행전 4장 22절에는 당시 그의 나이가 사십여 세가 되었으므로 40 여년간 굳어진 그의 뼈가 펴져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초자연적인 기적이 아니고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문'(미문; 美門)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높이가 23 미터에 이를 만큼 거대하고 금과 은으로 입혀진 황동으로 만들어진 이중문이어서 웅장하고 장엄하기까지 하였다.


'들어다 놓았던 것이다'에서 (사람들이)'들어서' 해당하는 '에바스타제토'(ebastazeto)와 '놓았다'에 해당하는 동사 '에티둔'(etithun)은 모두 미완료 과거 시제이다.

 

사람들이 앉은뱅이를 메고 오는 상황을 완료되지 않은 동작으로 현장감있게 보여 주면서 동시에 앉은뱅이가 '아름다운 문'에 앉게 되는 일이 이때의 당일만이 아니고  거의 매일 반복적으로(날마다) 행해지던 일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즉 그는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는 장애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구걸하는 일을 통해 생계를 꾸려갈 수 밖에 없는 직업적인 거지였던 것이다.

  

신명기 15장 4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율법에 순종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을 받아 그들 가운데 가난한 자들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되어 있다. 

따라서 구걸하는 자가 다른 장소도 아니고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던 성전 문 앞에서 구걸을 하는 비극적인 상황은 이스라엘의 경제적 형편 뿐만 아니라 영적 상황까지도 극도로 빈약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이에 베드로가 '아름다운 문'앞의 그 불구자에게 그가 구걸한 몇 푼의 돈을 주기보다는 나자렛 예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적을 행하는 것은 '아름다운 문'에서 구걸하는 불구자를 통해 투영된 당시 이스라엘의 무기력한 영적인 상황을 치유하기 위한 가장 현명한 행위였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의 생명력 없는 형식적 껍데기 신앙 생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역동적인 복음의 능력으로만 치유될 수 있는 무력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벌떡 일어나 걸었다." (6-7)


여기서 '은과 금'이라는 표현은 금은으로 장식되어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아름다운 문'처럼 껍데기만 남아  형식적인 종교로 타락한 유대교를 빗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에서 '~으로' 해당하는 희랍어 전치사 '엔'(en)을 직역하면 '~안에'(in)라는 뜻이다. 한글의 '~으로' 라는 번역은  베드로가 앉은뱅이에게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단지 걷기 위한 수단으로 준 것 같은 잘못된 뉘앙스를 준다.

하지만  원문의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안에서'라는 표현은 앉은뱅이가 자신의 병을 고침 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매우 중요한 영적 진리를 보여 준다.

 

또한 유다 사회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 전체를 대표한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이름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영원히 추구해야 할 목적이다(히브12,2; 묵시11,18).

앉은뱅이가 자신이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보인 반응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이었다는 사실은(8절) 그가 예수님안에 머묾으로 말미암아 육신의 장애를 극복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건강하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본몬의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은과 금' 대조를 이룬다.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리스도교가 전파하는 복음의 핵심을 가리키고 '은과 금' 외형적인 면에만 치우쳐 있는 예루살렘 성전과 영적으로 피폐해져 있는 유다교를 상징한다.


앉은뱅이가 형식에 물든 유다교의 화려한 성전 문 앞에서는 기껏해야 하루 하루를 겨우 연명할 수 있는 동전만을 받을 수 있었지만,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는 자신의 병든 육신을 고침받고 참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안에 머무는 귀한 축복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 매우 인상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 이름 앞에 '나자렛'이란 지명까지 거론하는 것은 지금까지 대부분 멸시하고 천대하는 의미로 사용했던 호칭(요한1,46; 18,5.7; 19,19)이 영광된 이름인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자랑할 수 있는 높은 가치가 되었음을 역설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앉은뱅이가 강한 새 힘을 얻어 다리의 선천적 장애가 치유된 사건은 의료적 의미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도 갖는다.

먼저 사회적인 의미이다. 당시는 모두 자신의 손과 발을 사용하여 경제 활동을 해야 하는 농업과 목축업 중심의 원시 경제 사회였는데,  손이나 발 등 신체의 일부분을 쓰지 못하는 지체 장애인들은 구걸하는 일 외에는 자신의 생계를 연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사도10,46-52).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의 다리를 완전히 치유하여 걷게 하심으로써 이제는 구걸에서 스스로  경제적 행위를 하여 자립하게 하심으로써 사회의 일반 구성원으로 복귀하여 살게 해주신 것이다. 


또 하나는 종교적 의미이다. 종교적으로 부정하다고 여김받을 수 밖에 없는 장애인이었던 앉은뱅이는  아름답게 장식된 성전 안으로 들어가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없었고,

단지 성전을 드나드는 유다인들로부터 몇 푼의 돈과 함께  경멸과 비난의 시선만을 받을 뿐이었다.

 

당시 유다의 형식적 율법주의자들은 몇 푼의 돈을 앉은뱅이에게 던져주며 상처받고 소외된 이웃에 대한 의무를 다했다는 교만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기적을 베풀어 그의 불구의 몸을 고쳐 줌으로써 그가 갖고 있었던 종교적 부정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한편 경제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무기력하게 성전의 '아름다운 문'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의 모습은   영적으로 무기력한 당시의 유다인들 자신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이 던져 주는 단편적인 진리가 담긴 불확실한 정보에 만족하며 하루하루를 희망없이 살아가는 자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걷게하신 것은 영적 불구자인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포함한 복음만이 영적 건강을 회복하며, 하느님께 대한  바른 신앙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임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이제 땅에서 일어나 하늘을 향해 걸어가자

독서(사도3,1-10)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세 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2ㄱ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 하나가 들려 왔다.

우리 모두는 모태에서 부터 선악과를 먹은 불구자로 태어난 존재들 입니다그런 우리에게 알아들어라’ 오늘 주시는 말씀입니다.

 

2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자선을 청할 수 있도록사람들이 그를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 들어다 놓았던 것이다. 3 그가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자선을 청하였다. 4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우리를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5 그가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고 기대하며 그들을 쳐다보는데, 6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일어나 걸으시오.” 7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8ㄱ 벌떡 일어나 걸었다.

= 오른손-오른 방법으로 일으켰다 입니다내가 가치로 여겼던그래서 청하고 구했던 그 육의 것이 아닌 예수그리스도의 이름그 뜻으로 입니다.

이름(-)-‘분석된 말씀입니다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완전한 것으로 이해되어진 구원의 말씀을 뜻합니다.


(요한14,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이 하늘의 쉼안식을 누릴 수 있는생명을 얻을 수 있는 구원의 완전한 방법이요 과정이며 결과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대속그 죽음그 사랑그 의로움만이 죄인을 일으킬 수 있는 오른손(올바른)의 방법길인 것입니다.

일어나 걸으시오하느님의 말슴을 선악의 윤리사람의 규정과 교리곧 땅의 계명으로 듣고 따랐던그래서 땅의 것만 청했던 그 땅에 앉은 불구의 삶에서 일어나 선이 악을 덮어 용서로 생명을 주시는 그 하느님의 진리의 길을 걸으시오~입니다.

지금까지 살았던 그 자신을 버리고~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따라야한다’(마르8,34) 하셨을 때자신을 버리고 (아파르네오마이자신의 말을 완전히 거절하고~라는 뜻입니다.


8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였다.

치유용서 받고 제일 먼저 한 일이 기뻐하며 성전으로 들어간 것입니다들어가는 이들을 부러워 만 했던 불구자 입니다.

당시 교회법이 불구자곧 죄인은 성전에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하늘의 용서를 깨달았기에 세상이 아닌 하느님께 먼저 들어간 것입니다그 기쁨이 있어야합니다.


온 백성은 그가 걷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는 것을 보고, 10 또 그가 성전의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자선을 청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그에게 일어난 일로 경탄하고 경악하였다.

= 놀라운 육의 기적으로만 봅니다영 의 치유용서를 깨닫지 못한 눈들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치유를 용서로구원의 믿음으로 가져야 합니다.


(로마9,31-32) 31 그런데 이스라엘은 의로움의 율법을 추구하였지만 그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32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그것을 믿음으로 찾지 않고 행위로 찾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그들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 사람의 규정교리계명에 의한 열심한 행위의 의로움을 지키느라 십자가의 대속그 의로움을 내 죄의 용서구원의 믿음으로 갖지 못하면 모태에서 부터 불구로 태어난 앉은뱅이 그대로 남게 됩니다.

오늘 복음으로~

(루카 24,25.30-31)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어리석은 자들아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 왜 사라지셨나요그 예수님을 꽉 붙들까봐서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그 대속의 죽음을 구원의 진리로 깨닫지 못한갖지 못한 그 앉은뱅이로 낙향하는 제자들입니다그들이 예수님께서 빵을 떼시는 모습을 보고 성찬례의 새 계약을 보았습니다깨달은 것입니다그 깨달음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루가22,16.20) 1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파스카 축제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다 이루어질 때까지 이 파스카 음식을 다시는 먹지 않겠다.” 20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 예수님의 죽음으로 얻는 용서자유의 새 계약을 붙들어야 합니다그 새 계약을 붙들라고 예수님께서 사라지신 것입니다그 새 계약으로 땅의 앉은뱅이가 하늘의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완성은 보이는 예수님을 기억하는붙잡고 섬기는 그 종교행위가 아닌그분께서 하신일십자가의 대속으로 얻는 용서구원그 피의 새 계약을 깨닫고 붙들었을 때믿었을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의 법그 길을 버리고 하느님의 지혜의 법그 대속의 십자가의 길을 진리로 따라갑시다오늘 땅에서 일어나 하늘을 향해 걸어갑시다아멘.♡♡♡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복음 (루카24,13-35)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15.31)

 

엠마오의 제자들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예수님께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걷고 있을 때,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그것도 영적인 몸이 아닌, 겉으로는 보통의 육체를 가진 사람처럼 친히 나타나셔서 동행하신다.

 

루카 복음 24장 14절에 나오는 데로 그동안에 일어난 예수님께 관한 '모든 일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눌 정도의 제자들이라면, 예수님의 얼굴을 정확히 알고 있었을 터인데, 그들은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시며 이야기를 나누시고 있는, 지척에 있는 예수님을 알지 보지 못했다.  

그런데 루카 복음사가는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가 '눈이 가리어'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눈이 가리어'에 해당하는 '에크라툰토'(ekratunto; were holden; were kept)는 '억제하다'를 뜻하는 '크라테오'(krateo)의 미완료 수동태이므로, 직역하면 '그들의 눈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게 계속 억제되었다'가 된다.

이것은 엠마오의 두 제자들의 의식과 시각이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전혀 변함이 없었다는 것을 말한다.

 

어떤 성서학자들은 이런 수동적 표현에는 하느님의 행위가 암시되어 있는데, 뒤에 나오는 루카 복음 24장 31절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 보게'될 극적인 반전을 경험하게 하기 위한 '하느님의 의도적인 가림'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영적 상태에 이상이 있음을 나타낸다.

 

아마도 과월절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던 제자들일 가능성이 많기에 그들은 뜻하지 않은 예수님의 십자가형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루카 복음 24장 30절 이하에 보면, 엠마오의 두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그것도 '성찬', 혹은 '성만찬'을 의미하는 '빵의 나눔' (Fractio Panis)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알아뵙지 못했던 영적 무지에서 탈출한다.

 

루카 복음 24장 31절의 희랍어 원문에는 '그들의 눈이 열려'에 해당하는 '아우톤 데 디에노익테산 호이 옵탈모이'(auton de dienoichthesan hoi ophthalmoi)'에서 '그들의'에 해당하는 '아우톤'(auton; their)과 '눈'에 해당하는 '옵탈모이'(ophthalmoi; eyes)가 떨어져 있어 문법적으로 어색하게 표현되어 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영적 무지 가운데 있었던 제자들의 눈이 떠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표현했다.


여기서 눈이 '열려'에 해당하는 '디에노익테산'(dienoichthesan; were opened)은 '열다'를 뜻하는 '디아노이고'(dianoigo)의 부정(不定) 과거 수동태 3인칭 복수로서 그들의 눈이 자신들의 노력이나 의지에서가 아니고 '누군가에 의해', 그것도 '하느님의 능력에 의해' 떠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눈이 밝아지고 나서야 그들은 함께 식사한 낯선 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알아보았다'에 해당하는 '에페그노산'(epegnosan; they knew; they recognized)은 '충분히 알다','완전히 알다'를 뜻하는 '에피기노스코'(epiginosko)의 부정(不定) 과거형으로서 하느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눈을 뜬 제자들이 또렷하게 예수님의 모습을 알아보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사라지심을 강조하기 위해서 인칭대명사 주격(autos)을 사용하고 있다.

사라지신 분은 다른 존재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에 해당하는 '카이 아우토스 아판토스 에게네토 아프 아우톤'(kai autos aphantos egeneto ap' auton)에서 '사라지셨다'로 번역된 단어는 '아판토스(aphantos; out of sight) 에게네토(egeneto; anished; disappeared)'이다.

 

 

여기서 '보이지 아니'로 번역될 수 있는 '아판토스'는 부정접두사 '아'(a)와 '나타나다'를 뜻하는 '파이노마이'(phainomai)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시야에서 갑자기 사라지신 것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천사들이 인간의 시야에서 갑자기 사라지는 것처럼(2마카3,34) 사라지셨는데, 이렇게 갑자기 사라지셨다는 의미는 영광중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시간과 공간에 더 이상 제약되지 않은 영적인 몸을 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몸은 쪼개어진 빵, 곧 성체 안으로 들어가  현존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이러한 영적이고도 인격적이며 살아있는 생생한 체험을 원한다면, 주도적으로 주님께서 영안을 열어 주셔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주도적인 주님의 절대적 개입과 성령의 능력의 터치도 마리아 막달레나나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그것을 받을만한 주님께 대한 애달픈 갈망과 사랑이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하고, 항상 우리들의 영안을 열어 주시도록 '오소서, 성령님!'을 간절히 불러야만 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바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어떠한 시선으로 읽어야 하는지 일깨워줍니다. 

성경을 아무리 읽고 묵상해도 이 초점을 잃으면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전삼용 요셉신부님 글중에서~)

 

전적으로 지지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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