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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안셀름 신부님의 지친 하루의 깨달음을 읽고.....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4-08 조회수1,450 추천수1 반대(0) 신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누구나 영적인 메마름을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신앙은 하느님과 나누는 달콤한 사랑과도 같다고 한다면 이상한 말처럼 여겨질지 모르겠다. 신앙은 믿음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믿음은 보이는 실체를 가지고 하는 게 아니고 눈엔 보이지 않지만 마음의 눈으로만 바라봐야 볼 수가 있고, 그런 바탕 위에서 쌓아올린 신뢰가 있을 때만 하느님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이 신뢰가 무너지면 영적으로 따분해지고 급기야 하느님의 존재까지 부정하는 모습으로 변할 수도 있다.

 

사람의 육체는 피로하면 일반적으로 제일 먼저 하는 생각이 휴식일 수 있다. 이 휴식은 단순한 육체의 휴식으로 해결할 수가 있다. 문제는 정신적인 피로인데 정신적인 피로는 과연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풀 수가 있는지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먼저 피로가 자연적인 반응이라는 걸 인정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할 것 같다. 피로 또한 신앙생활에서 당연히 올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이 중요한 것이다. 영적인 피로는 어쩌면 또 다른 신호인지도 모른다. 영적으로 한걸음 더 성장할 수 있는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점검하라는 경고의 신호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 경고의 신호로 받아들인다면 영적으로 한층 더 성장할 수가 있다고 보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고 본다. 또한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해 볼 기회의 시간도 될 수 있다. 영적인 세계를 갈망하라는 경고의 신호로 바라본다면 말이다.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은 이런 경고를 잘 느낄 수 있다.

 

피로가 왔을 때 피로와 맞서서 대처하려면 오히려 더 피로해지는 수도 있다고 한다. 피로는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하라는 표현일 수 있다. 피로와 맞서지 않는다는 게 무시하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하면 삶을 막 살게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고갈된 것에만 초점을 맞출 게 아니라 충전을 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인다면 피로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하느님을 바라보라는 신호라고 하면 그에 순응하면 좋을 것이다. 세상의 삶에만 초점을 맞추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인간의 삶이 그렇게 행복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욕망을 단순히 충족시켜 준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건 절대 인간의 힘으로는 얻을 수 없는 영역이라고 본다. 그 영역을 채울 수 있는 수단으로 하느님을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때 우리가 영적인 에너지를 충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육적인 피로는 쉬면 회복할 수가 있지만 영적인 피로는 쉰다고 해서 해결될 게 아니다.

 

인간은 하느님 없이는 살 수가 없는 존재다. 사람이 한순간도 숨을 쉬지 않으면 살 수가 없듯이, 우리는 하느님과 같이 호흡을 하며 살도록 창조된 것이다. 하느님과 같이 호흡을 하는 가장 근원적인 게 기도가 될 것이다. 흔히 기도는 하느님과 대화라고 하지 않는가? 실제로 우리는 기도를 한다고 하면 무슨 기도를 가장 많이 하는 것일까? 묵주기도 아니면 그 외에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준한 기도문으로 할 수 있는 염경기도도 있을 것이다. 이런 기도도 물론 훌륭한 기도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아무리 좋은 치료제가 있다고 해도 이 세상 모든 게 다 치료제로 사용될 수 없듯이 상황에 맞는 치료제를 사용해야 할 것이다. 1기 환자에게 말기용 치료제를 사용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 될 것이다. 영적으로 무기력한 상태를 치료할 때 이런 원리가 적용될 수가 있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급선무는 무턱대고 기도를 할 게 아니라 일단 침묵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영적인 메마름을 치유하는 가장 중요한 단계라고 본다.

 

바쁘게 살면서 자신이 정작 바라봐야 할 부분을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왔다면 그 부분이 무엇인지 꼼꼼히 점검하는 게 우선 순위일 것이다. 이때 잘못이 드러나면 반성을 하고 회개하면 될 일이다. 자책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도 다 신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성장하기 위한 성장통이라고 생각한다면 한결 편할 것 같다. 우리는 이때 우리의 영혼을 피로하게 만드는 게 우리의 내면 속에 있는 잘못된 자화상이 될 수가 있다. 이건 우리가 남을 의식하기 때문에 생길 수가 있는 것이다. 사람이 살면서 남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나친 의식을 하고 살게 되면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지 못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엉뚱한 데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붓는 어리석은 일을 하게 된다. 때로는 무시해서 무시하는 게 아니라, 우린 이런 경우를 벗어나기 위해서 남이 자신을 바라본다는 의식에서 탈피해 자기만의 고유한 색깔을 가지려는 데 치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제각기 다 다르게 창조하셨다는 걸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 고유한 특징을 살리면서 주위와 함께 잘 어우러져서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하는 게 지혜로운 신앙생활이 될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살아가면서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인데 단순히 의식주만을 해결하는 삶에 그친다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잘 못 느낄 수가 있기에 그렇게 되면 자신의 존재가 그저 생존 본능만 추구하는 동물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인식할 수 있다. 그러면 자신의 존재 가치가 무의미함을 느끼게 된다. 인간은 높은 이상을 추구하려는 본성이 내면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 누구나 이건 다 가지고 있다. 다만 그 존재가 잠자고 있어서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게 충족되지 않으면 영적인 무력감을 느낄 수가 있다.

 

이걸 극복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하느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성령의 기운을 느끼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 될 수가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가 없다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그때 그 말씀을 하신 게 악마의 유혹이 있을 때 하신 말씀이다.

 

우리는 영적인 메마름인 피곤도 우리가 어떤 유혹에 그만 넘어가기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그걸 미연에 방지하는 수단으로 말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말씀에는 격려와 용기를 주는 말씀도 있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새로운 힘을 얻을 수가 있다. 우리가 단순히 피로를 느끼는 것도 육체적인 피로 때문만은 아니다. 정신적인 피로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걸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살면서 피로를 느끼는 이유는 다양하다. 좌절과 실망도 하나의 원인이 된다. 그렇게 되면 희망도 보이지 않게 된다. 일면 그럴 듯해 보이지만 냉정하게 보면 우리는 다 부질없는 일에 마치 목숨을 걸기 때문에 좌절과 실망을 경험하게 된다. 인간은 어리석게도 살아 있을 때 이런 걸 빨리 잘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깨닫는 경우가 많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런 사실을 미리 알아 자신의 삶을 좀 더 가치 있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은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 그렇다고 마냥 우리의 삶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허무하다고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영적인 보화를 발견할 수가 있는 기회의 시간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허무와 고통이 마치 광야와 같기 때문이다. 광야는 생명이 없는 곳이지만, 그곳에서는 오로지 하느님 외엔 그 어떤 존재도 바라볼 수가 없기 때문에 하느님의 현존만을 의식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장소가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기도를 하셨던 것이다.

 

허무는 또 다른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될 수가 있다. 어쩌면 우리가 피로한 것은 세상에서 살면서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을 그만큼 가지지 못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하느님을 만나는 것도 말처럼 쉬운 것만은 아니다. 성경을 보더라도 하느님을 만나려면 인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인내가 부족해서 미리 자신이 포기를 하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고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그만 좌절하기 십상이다. 응답이 되는 길이 아주 멀고 요원하기만 할 수도 있지만, 엘리야 예언자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여정을 보면 하나 배울 교훈이 있다. 하느님의 산, 호렙산에 가는 여정에 기나긴 사막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막과 같은 광야 너머에 계셨던 것이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그 광야는 누구나 거쳐야 하는 필수 과정과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거치는 게 힘들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마치 푸념하는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

 

사막과 같은 광야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그런 곳에서 하느님을 더 많이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엘리야가 하느님을 만난 것은 광야와 같은 메마른 곳에서 하느님의 속삭임을 느낄 수 있었던 걸 보면, 우리가 살면서 하느님을 체험하는 장소가 어쩌면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밑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만약 영적인 피로가 몰려온다면 이 장소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광야가 될 것이다. 이곳에서 하느님을 만날 절호의 기회가 주어지는 시간일 수 있다면, 메마른 신앙생활에 한줄기 단비와 같은 은총의 시간이 될 수가 있다고 본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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