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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복음묵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4-08 조회수1,731 추천수1 반대(0) 신고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은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밤새 고기를 잡으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고기를 잡는 일은 그들의 생업입니다. 밤새 그물질을 수차례 했을 겁니다. 번번이 다 허탕만 친 것입니다. 사람은 노력을 했을 때 노력한 결과에 비해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힘이 빠지고 기력이 소진하게 됩니다. 이제 어느덧 밤의 어둠은 밀려가고 동이 트는 아침이 되자 백 미터 남짓 되는 거리에서 고기를 잡는 제자들을 뭍에서 지켜보시면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아마 미루어 짐작하건데 예수님께서 밤새 허탕질만 하는 제자들을 지켜보시고 계셨을 겁니다.

 

복음을 묵상을 할 때마다 생각나는 게 모든 복음이 어떤 경우는 아주 상세하게 묘사를 하지 못해 복음의 행간 사이를 읽는 사람이 그 공간을 잘 메우지 않으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고기를 잡았는지 물어보십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뭍에 계셨습니다. 거리는 백 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였습니다.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지 않으신다면 들을 수 없는 거리입니다. 근데 복음은 이런 상황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이런 걸 생각해봤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거리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물리적 거리가 적용되지만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물리적인 거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말은 우리 입장에서는 아무리 예수님과의 거리가 설령 멀리 떨어져 있다고 그렇게 느낄지라도, 예수님께서 느끼시는 거리는 지근거리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복음에서 보면 마치 가까운 곳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신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큰소리로 말씀하셨다고 하신 표현이 없는 걸로 봐서는 그렇게 판단을 해도 무리는 아닐 겁니다.

 

예수님의 질문 속에 사랑이 묻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단순히 고기를 잡았느냐고 물어보시는 의미보다는 무엇을 잡았느냐 하고 하는 뉘앙스입니다. 이 말씀엔 미묘한 뉘앙스가 있습니다. 관심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고기를 단순히 잡았느냐와 만약 고기를 잡았다면 무슨 고기를 잡았느냐와는 조금 느낌이 다릅니다. 진정한 사랑은 아주 작은 것에 숨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게 작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드러나는 모습은 작지만 실제 이렇게 하려면 상대에 대해 많은 것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을 때 그런 게 가능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때 복음은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대화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대화를 하긴 하지만 이때 이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저는 이걸 기도와 관련해서 묵상해봤습니다.

 

못 잡았다고 하니 예수님께서 배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시니 그렇게 합니다. 제자들은 이때까지도 그들이 하긴 하지만 그들이 하는 일이 예수님께서 지시한 것이라고는 의식을 하지 못합니다. 언제 그들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인지했는지는 복음에서는 구체적으로 언급이 돼 있지 않습니다. 고기가 그물에 걸려 끌어 올릴 수가 없을 때, 이 상황을 보고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어둠이 가시고 가시거리가 어느 정도 확보됐기 때문에 알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먼저 설령 가시거리 범위 내에 계셨더라도 예수님을 보고 인지한 것이라기보다는, 고기가 생각보다 많이 잡힌 것을 보고 예수님이심을 인지했다고 보는 게 좀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같은 환경임에도 예수님을 제일 먼저 인지한 것은 요한사도였습니다. 왜 요한사도가 먼저 인지를 했을까 추측을 해봅니다. 예수님의 애제자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예수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아마 다른 제자들보다 좀 각별했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우리는 의식을 하지 못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에게 끊임없이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십니다. 대화를 먼저 요청을 해오십니다. 근데 우리는 우리의 일 때문에 그 요청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지내는 것 같습니다. 이 과정이 마치 기도라고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다가오셨지만 요한사도처럼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현존을 인식하지 못한 거지 예수님이 우리 곁에 안 계시신 게 아니라는 사실을 묵상하게 됩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예수님과 같은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통하면 가시거리를 넘어 계신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지 물리적인 거리는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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