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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16,9-15)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4-10 조회수1,531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4월 10일 토요일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16,9-15)

   

 

1독서<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4,13-21)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은 13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그리고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14 그러나 병이 나은 사람이 사도들 곁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였다.

15 그래서 그들은 사도들에게 최고 의회에서 나가라고 명령한 다음저희끼리 의논하며

16 말하였다. “저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저들을 통하여 명백한 표징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에게 알려진 터이고우리도 그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17 그러니 이 일이 더 이상 백성 가운데로 퍼져 나가지 않도록다시는 아무에게도 그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만 합시다.”

18 그리하여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지시하였다.

19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20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1 그들은 백성 때문에 그들을 처벌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거듭 위협만 하고 풀어 주었다그 일로 백성이 모두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었던 것이다.

 

화답송 시편 118(117),1과 14-15ㄱㄴ.16-18.19-21(◎ 21ㄱㄷ 참조)

◎ 주님제게 응답해 주셨으니 제가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알렐루야.

○ 주님은 좋으신 분찬송하여라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주님은 나의 힘나의 노래나에게 구원이 되어 주셨네의인들의 천막에서 울려 퍼지는 기쁨과 구원의 환호 소리

○ 주님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셨다주님의 오른손이 위업을 이루셨다!” 나는 죽지 않으리라살아남으리라주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리라주님은 나를 벌하고 벌하셨어도죽음에 넘기지는 않으셨네

○ 정의의 문을 열어라그리로 들어가 나는 주님을 찬송하리라이것은 주님의 문의인들이 들어가리라당신이 제게 응답하시고구원이 되어 주셨으니제가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복음<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9-15)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신 뒤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그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여자였다.

10 그 여자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이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11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며 그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12 그 뒤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가고 있을 때예수님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돌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14 마침내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5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 제1독서 (사도4,13-21) 

 

그리하여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지시하였다.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8~20)

 

산헤드린 최고 의회의 의원들이 정작 두려워했던 것 베드로가 행한 앉은뱅이를 걷게 한 기적이 아니었고, 기적을 일으키게 한 예수님의 이름이었다(사도3,6). 이로써 그들 스스로 기적의 근원이 예수님임을 인정하는 셈이 된 것이다(마르14,1참조). 

수석 사제들의 무리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사도들이 누리고 있는 교도권이었다. 예수님의 이름이 갖는 권세 대해서는 그들 스스로도 인정하였다.

 

'그러나 병이 나은 사람이 사도들 곁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였다.' (14) 

그러면서도 이에 대해 함구령을 내려 예수님을 죽인 자신들의 죄를 덮어 두는 한편, 더 이상 예수님의 복음이 확산되는 것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수석 사제들의 무리들이 날마다 하느님의 제사를 드리던 자들이었음을 생각할 때 하느님의 뜻에서 빗나간 그들의 가증됨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19) 

하느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산헤드린 최고 의회의 의원들은 살아계신 하느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구약 성경이 이미 예언한 메시아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지키고 군중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루카23,18) 예수를 못박아 죽였다(루카24,12).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는 그의 제자들에게마저도 생명의 위협을 가하며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막았다.

 

이러한 위협 앞에서 사도들은 '하느님의 말씀' '인간의 말'을 대조시킴으로써 인간인 산헤드린 최고 의원들의 말 듣기를 거부하고, 예수님께서 복음의 증인이 되라고 하신 말씀에(사도1,8) 따를 것을 정정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산헤드린 최고 의회의 권위를 정면으로 맞서는 것으로서 자신들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것이었다. 

이러한 신념이 있었기에, 그리고 인간보다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이 있었기에 초대교회는 그들을 통해 날로 확장될 수 있었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

베드로는 긍정문을 사용해서 '말할 것이다' 라고 표현했을 수도 있었지만, 이렇게 '뒤나메타'<'dinametha'; '~할 수 있다'(can)>란 동사와 더불어 이중 부정문('우~메'; u~me)을 쓴 것은 '전하지 않을 수 없다' 라는 그들의 결연한 의지를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의 최고 법정의 판결과 지시에 대해 불복종할 경우에 최고 사형에 이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보여 준 이러한 적극적이고 담대한 태도를 통해 이미 복음을 위해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바치는 그들의 용기와 헌신을 발견할 수 있다.

사도들이 이렇게 목숨을 내건 이유는 바로 그들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것'에 해당하는 '하'(ha)는 복합 관계 대명사의 의미를 나타내는 '호스' (hos)의 복수형으로서 사도들이 예수님께로부터 '보고 들은 모든 것'을 나타낸다.

그들이 보고 들은 모든 것은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말씀과 행적이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그분의 말씀과 행적, 죽음과 부활을 실제로 지켜 보았고, 그분이 가르치신 말씀과 승천하기 전에 주신 복음 선포에 대한 지상 명령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오늘의 독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알리지는 않는지?  

예수님의 이름을 감추고 종교적 이익이나 교회의 권위를 확장하는데에 급급하거나 혈안이 되어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복음 자체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보고 들은 것'을 위해 사도들처럼, 우리 믿음의 순교자들처럼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지도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한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체험과 절대적 사랑과 믿음, 내세의 영원한 생명과 복락에 대한 희망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2019.04.27.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대속그 죽음그 사랑을 버리고 인간의 희생그 사랑을 구원의 가치로 여기는 신앙을 사는 것은 아닌지인간 중심의 삶은 시기와 질투를 일으키지만 하느님 중심의 삶은 그 모든 것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사도4,10-22)

4,10 불구자였던 저 사람이 성한 몸으로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은 바로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된 것입니다그분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입니다여러분과 이스라엘의 모든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11 이 예수는 집짓는 사람들 곧 여러분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 12 이분을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

= 흠도 티도 없는 깨끗함만이 모든 더러움을 씻을 수 있습니다곧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대속의 피입니다.


(요한14,6) 예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사람의 도리인 계명이 구원의 진리가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티도114참조)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학자들~

13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본래 배운 것이 없는 천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자신있게 말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그리고 그 두 사도가 예수를 따라 다니던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당신의 뜻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십니다.(마태11,25)

아무리 신학자라도 말씀을 사람의 지혜로 깨닫고 말한다면 헛 것이 됩니다.


(1코린3,19-20) 19 이 세상의 지혜는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어리석은 것입니다성서에 '하느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을 제 꾀에 빠지게 하신다고 기록되어 있고 20 또 '주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생각이 헛되다는 것을 아신다고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그 허황된 것에 더 감동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그래서 분별이 필요한 것입니다.

 

(루가9,45)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하느님의 뜻으로 깨닫느냐 사람의 뜻으로 깨닫느냐~의 분별입니다하느님의 뜻이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그것이 그리스도 신앙입니다,(마태6,10참조)


14 그러나 병이 나은 사람이 사도들 곁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였다. 15 그래서 그들은 사도들에게 최고 의회에서 나가라고 명령한 다음저희끼리 의논하며 말하였다. “저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16 저들을 통하여 명백한 표징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에게 알려진 터이고우리도 그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17 그러니 이 일이 더 이상 백성 가운데로 퍼져 나가지 않도록다시는 아무에게도 그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만 합시다.” 18 그리하여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지시하였다.

지도자학자의 권위로 예수님의 대속그 의로움을 구원의 진리로 가르치지 말라고 지시함입니다.

이들이 가르쳤던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자신들의 열심그 의로움을 지키기 위해서 입니다.


19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는 오늘 말씀으로 하느님의 뜻(지혜)으로 깨닫는 것보다 사람의 뜻으로 깨닫는 것이 옳은지 판단해 봐야 합니다하느님의 지혜의 법은 대속의 죽음그 십자가의 의로움을 통한 용서구원이지만, 사람의 지혜의 법은 말씀을 문자대로 보아 사람의 의로움을 위한 도덕과 윤리의 계명이 되어 선악의 판단으로 사람을 죽입니다.


(2코린3,6)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새로운 계약을 이행하게 하셨을 따름입니다이 계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20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1 그들은 백성 때문에 그들을 처벌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거듭 위협만 하고 풀어 주었다그 일로 백성이 모두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의 권위의 위협일 뿐입니다.


22 이 기적으로 몸이 성해진 사람은 마흔 살이 넘은 사람이었다.

마흔살광야40년의 잘못을 치유하십니다우리의 한 생애의 잘못을 용서하심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로 치유용서 받았다’~의 초점을 두면 안 됩니다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십자가의 죽음그 사랑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그 사랑은 인간의 지혜로는 깨달을 수 없기에 성령께 의탁하며 그 사랑을 깨닫기 위한 삶의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에페3,18-21) 18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신비가(하느님의 사랑이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고 19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완성되고 하느님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20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면서 우리가 바라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21 하느님께서 교회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받으시기를 빕니다아멘.

= 우리의 창조 목적인 하느님께 감사의 영광을 드리기 위해십자가의 사랑을 배우고 깨닫고 받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웃에게 그 사랑을 전해주어 그 이웃이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 받았음에 감사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도록 하는 것큰 계명을 실천하는 신앙생활 입니다.

인간의 사랑을 주는 것은 인간의 도리이지 신앙이 아닙니다인간의 도리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하느님이신 분의 대속의 죽음인간의 지각으로 알 수 없는 그 사랑으로 받는 구원입니다.


(에페1,6)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이 영광스러운 은총(은혜)에 대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아멘 아멘 아멘~!!!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 복음(마르16,9-15)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4)

 

'마침내'에 해당하는 '휘스테론'(hysteron; afterward; later) 언제를 가리키는지는 확실치 않다.

마르코 복음 16장 14절의 내용은 루카 복음 24장 36-43절, 요한 복음 20장 19-25절, 26-31절 등과 병행 구절인 것으로 여겨진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당일에 토마가 없을 때 제자들에게 한 번 나타나셨고, 그후 한 주간이 지나 토마가 있을 때 또 한번 나타나신 것을 마르코 복음사가는 통합하여 기록했다고 본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에게 제시한 증거들을 제자들이 믿지 못하였기 때문에 꾸짖으신다.

 

새 성경은 제자들이 믿지 못한 이유 불신 완고한 마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불신'으로 번역된 '아피스티안'(apistian; unbelief; lack of faith)의 원형 '아피스티아'(apistia)는 '믿음이 형성되지 않음'(마르9,24)에 대해서도 사용되었지만, 주로 믿음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거나 배척하는 일에 사용되는 강렬한 용어이다(마르6,6; 마태13,58; 로마11,20; 1티모1,13; 히브3,19).

그리고 '완고한 마음'으로 번역된 '스클레로카르디안'(sklerokardian; hardness of heart; stubborn refusal)의 원형 '스클레로카르디아'(sklerokardia) 확실한 증거를 거절하는 굳은 마음을 뜻한다.

 

이것을 보았을 때에, 당시 부활 소식을 접한 제자들의 마음 상태가 불신앙에 얼마나 단단히 고착되어 있었는가를 알 수 있으며, 또한 제자들의 마음이 다른 것을 받아들일 수 없도록 이미 단단하게 굳어져 있었음을 잘 보여 준다.

여기에 언급된 희랍어 단어들은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을실 때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매우 강한 뜻을 지닌 단어이다.

따라서 이것은 예수님의 수많은 가르침과 애정에 비해 너무나도 형편없이 반응한 제자들의 모습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님께 대한 지식이 있고, 겉으로는 제자 직분의 외양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가장 근본적인 믿음이 없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는 것이다(히브11,8).

여기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믿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동시에 제자들의 완고하기만 한 불신앙을 뛰어넘는 예수님의 포기하지 않으시는 끝없는 사랑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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