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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제2주일] 성령을 받아라. (요한20,19-31)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4-11 조회수1,622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4월 11일 주일

[부활 제2주일성령을 받아라. (요한20,19-31)

 

1독서<한마음 한뜻>(사도4,32-35)

32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33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34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

 

화답송 시편 118(117),2-4.13-15ㄱㄴ.22-24(◎ 1)

◎ 주님은 좋으신 분찬송하여라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알렐루야.

○ 이스라엘은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아론의 집안은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 주님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셨다주님의 오른손이 위업을 이루셨다!” 나는 죽지 않으리라살아남으리라주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리라주님은 나를 벌하고 벌하셨어도 죽음에 넘기지는 않으셨네

○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주님이 이루신 일우리 눈에는 놀랍기만 하네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2독서<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깁니다.>(1요한5,1-6)

사랑하는 여러분, 1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실천하면그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복음<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요한20,19-31)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제1독서(사도2,42-47)

 

"형제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2,42)

 

사도행전 2장 42절의 '전념하였다'에 해당하는 '프로스카르테룬테스' (proskarteruntes)의 원형 '프로스카르테레오'(proskartereo)는 '힘입게 집착하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서는 현재 분사형으로 사용되었으며미완료 과거 동사 '에산'(esan)과 서로 관련되어 쓰여서 계속하여 힘썼음이 강조되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계속해서 전념하고 있었다(They were continually devoting themselves)'는 뜻이다.

 

원문에서 '에산 데 프로스카르테룬테스'(esan de proskarteruntes)가 사도행전 2장 42절의 제일 앞에 쓰여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기도하는 일네 가지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 나온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사도행전 2장 42절부터 47절 까지는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시작된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특징적인 모습을 간략하게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공동체는 예수님을 따르는 강력한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는데바로 사도들의 가르침이 중심이 된 공동체였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에 해당하는 '테 디다케 톤 아포스톨론' (te didache ton apostollon; to the teaching of the apostles)에서 '사도들'은 복수형이고,'가르침'(디다케)은 '단수형'이다.

 

이것은 베드로의 설교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게 된 수천 명의 제자들에게 열두 사도 모두가 가르쳤음을 보여 주며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도들의 가르침은 한 가지였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왜냐하면사도들이 자신들의 생각이나 개인적인 철학을 가르친 것이 아니고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영적그분의 생애와 구원 사업즉 복음만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바로 사도들이 가르친 내용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가르쳐 주셨던 내용(마태28,20)과 예수님의 생애를 기본으로 한다 (사도3,15; 4,10; 1코린15,1~4).

 

교회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것은(1테살4,1.2) 하느님께로부터 온 권위에 입각한 것으로 이것은 교회를 교회이게 하고 교회답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원문은 '카이 테 코이노니아 테 클라세이 투 아르투' (kai te koinonia te kllasei tu artu)인데초대 교회의 두번째 특징적인 모습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이어서 '성도들의 친교'(to the communal life)이다.

 

초대 교회에서 '성도들의 친교'는 정신적인 친교일 뿐 아니라 물질적인 친교이기도 하다.

 

'친교'에 해당하는 '코이노니아'(koinonia; fellowship)는 신약 성경에서 '사귀다'(2코린6,14)로 번역되거나 '헌금'의 의미로 '동정하다','자기의 것을 나누어 주다'(로마15,26)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교회를 구성한 공동체의 성도들은 같은 믿음 안에서 서로 영적인 친교를 나누었을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 서로 도왔던 것이다.

 

'빵을 떼어 나누고'

 

그 다음 초대 교회의 특징적인 모습은 '성찬'이다여기서 '빵을 떼어 나누고'에 해당하는 '테 클라세이 투 아르투' (fractio panis; to the breaking of bread)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성도들이 모이면 아가페 형식의 기본적인 식사를 하고그 다음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성찬의 의식을 하였다.

 

먼저 아가페 형식의 식사를 한 것은 공동체의 형제들 가운데 가난해서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지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라는 표현은 성찬의 전례의식곧 성체성사를 나타내는 용어이다(마태26,26; 마르코14,22; 루카22,19; 1코린11,23.24).

 

초대 교회 성도들은 모일 때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찬의 전례 즉 성체성사를 거행하였던 것이다.

 

'기도하는 일에'

 

원문은 '카이 타이스 프로슈카이스'(kai tais proseuchais; and to the prayers)인데,초대 교회의 네번째 특징은 '기도'였다.

 

초대 교회가 역동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기도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그들은 예수님의 기도의 권면에 따라(마태7,7; 26,41; 루카18,1; 요한16,24) 기도에 힘썼던 것이다이러한 사실은 사도행전에 기도에 대한 기록이 너무나 풍부하다는 데서 잘 보여준다(사도4,24; 12,5.12; 21,5).

 

 

 부활 제2주일 복음(요한20,19-31)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는냐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28-29)

 

'토마스'에 해당하는 '디뒤모스'(Didymos; Thomas)는 아람어(Aramic)적인 표현으로 '쌍둥이'라는 뜻도 있지만, '이중성'이라는 뜻도 갖는다.

 

여기서 요한 복음사가가 이것을 밝힌 것은 육적인 열정에 비해 영적인 믿음이 뒷받침되지 못한 그의 신앙 상태를 그대로 잘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이런 토마스가 7일간 계속되던 유월절 축제 기간이 완전히 끝나고동시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 나타나신 주일로부터 7일이 지나 다시 주일이 된 '여드레 뒤에부활하신 주님의 발현을 체험하고 신앙 고백을 한다.

 

'저의 주님저의 하느님'에 해당하는 '호 퀴리오스 무 카이 호 테오스 무'(ho kyrios mou kai ho theos mou; My Lord and my God)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실 뿐만 아니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모든 믿는 이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낸다.

 

여기서 '저의'에 해당하는 ''(mou; my)라는 1인칭 단수 소유 대명사가 두 번이나 사용되었다.

 

이것은 이전에는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해서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었지만이제는 그분께서 하느님의 진정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개인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체험하여 깨달았음을 보여 준다.

 

특히 원문에서는 '~이시며'와 '~이십니다'에 해당하는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희랍어 '에이미'(eimi) 동사가 생략되었고각 단어들 앞에 각각 ''(ho)라는 관사가 각각 사용되어서 예수님의 유일성과 신성(神性)이 더욱 강조된다.

 

토마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 뵙게 되자 직접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먼저 볼 필요도 없이 그의 의심들이 눈 녹듯이 모두 사라졌고이 고백의 말을 외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잘 정리된 신앙 고백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놀라움에 가득찬 탄성과 같은 것이다.

 

특히 여기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토마스가 이전에 자신이 함께했던 역사의 예수님과 부활하신 주님을 동일시했다는 점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의심많은 토마스와 같은 사람에게도 능력을 발휘하는 영혼의 부활이요육체의 부활이며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부활이었다.

 

토마스가 체험한 이 부활의 능력은 그를 의심많은 제자에서 참된 신앙을 고백하며 결단하는 제자로 바꾸어 버렸다.

 

한편요한 복음 20장 27절에서는 '믿음없는 자'에 해당하는 '아피스토스'(apistos; faithless)와 '믿는 자'에 해당하는 '피스토스'(pistos; believing)가 서로 대조 되었고요한 복음 20장 29절에서는 토마스로 대표되는 '보고 믿는 자들'에 해당하는 '헤오라카스~페피스튜카스'(heorakas~pepiteukas)와 '보지 않고 믿는 자들'에 해당하는 '호이 메 이돈테스 카이 피스튜산테스'(hoi me idontes kai pisteusantes; these who have not seen and you have believed)가 서로 대조되었다.

 

첫번째의 대조는 불신앙을 버리고 신앙을 촉구하는 요한 복음서의 기록 목적 (요한20,31)을 반영한다.

 

신앙과 불신앙 사이의 선택은 당시의 등장 인물들에게 부과된 선택이었을 뿐만 아니라 요한 복음에서 독자들인 초대 교회 성도들과 오늘날 이 말씀을 듣는 우리들에게 계속해서 던져지는 핵심적인 질문이다.

 

그러나 두번째 대조는 성경의 어떤 인물들도 당시까지는 다다르지 못한 높은 신앙에 대한 촉구이다.

 

즉 토마스 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조차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그들의 눈으로 보기 전에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지 못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천 이후의 시대에 태어나 예수님을 받아들인 자들은 모두 보지 않고서도 믿는참으로 더 복된 자들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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