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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제2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4-13 조회수1,525 추천수1 반대(0) 신고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 폰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폴더 폰은 보기 드물 정도입니다. 그닥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사용합니다. 과학과 기술의 진전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단순히 문자와 통화가 주된 기능이었는데, 스마트 폰의 등장으로 이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사회에 미치는 파급력은 어마어마합니다.

 

불과 50년 전만 해도 이런 세상이 올 거라고 사람들이 상상이나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만약 그 당시에 이런 세상이 펼쳐질 거라는 말을 누군가가 했다면 아마 미친 사람 취급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이데거가 말한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철학적인 내용은 차치하고서라도 이 말의 의미는 다양하지만 그 중 하나만 생각하면 이런 게 있습니다. 언어는 같은 단어라도 상황에 따라 느낌이 다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문맥의 의미를 살펴보지 않으면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할 여지가 많이 있습니다. 가령 놀고 있네라는 말을 한번 보시면은, 이 말이 실제 동네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는 장면을 묘사할 때 사용한다면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근데 이 의미가 이런 뜻이 아니고 비아냥거릴 때도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같은 표현인데도 의미가 완전 다른 의미로 전용될 때도 있습니다. 스마트폰이라는 게 나왔다고 해서 그럼 이전에 나온 폰을 멍청한 폰이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세상의 기준을 흑백의 논리로만 생각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실 흑백의 논리는 무서운 논리입니다. 어떤 사람이 지나가는 사람한테 "나 싫어하니?" 하고 물었을 때 "아니"라고 대답했을 때 그럼 '나 좋아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과 같은 것이 됩니다.

 

사람은 그가 사용하는 언어를 보면 그 사람의 세계관의 폭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언어로써 생각하고 사고하기 때문입니다. 작가들이 책을 쓸 수 있는 것은 어휘량이 풍부하기 때문에, 자기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휘로 잘 활용하여 자기의 생각을 잘 풀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휘량이 부족하면 생각하고 사고하는 폭이 우물 안에서만 머물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편협한 사고밖에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말씀을 한번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니코데모가 한 말입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이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복음은 예수님과 니코데모가 나누는 대화의 일부분입니다. 우리는 지금의 시점에서 니코데모를 바라본다면 니코데모가 이상한 사람이라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니코데모 입장에서는 그런 말을 하는 게 당연합니다. 바로 그게 니코데모가 가진 생각의 한계였기 때문입니다. 니코데모는 율법을 잘 아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율법이 의미하는 본질적인 뜻을 이해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는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율법을 해석하는 것 자체도 일차적으로는 언어로 이해를 하고 해석해야 하느 측면도 있어서 그럴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언급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한번 잘 보시면 "세상일을 이야기하셔도 잘 믿지 못하는데, 하늘 일에 대해 말씀하셔도 당연히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말씀이 당연한 말씀이 될 겁니다. 우리는 성당을 다니면서 신부님의 강론을 듣거나 아니면 성경 말씀을 읽거나 들으면서, 하늘 나라에 대한 말씀을 듣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그건 하늘나라의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하늘나라 법전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잘 보면 이런 걸 하나 배울 수가 있습니다. 세상일과 하늘의 일은 이미 존재 자체가 다른 세계입니다. 지금 우리는 세상이라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가게 될 세상의 세계를 알려주는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하는 게, 바로 하느님 말씀인 성경입니다. 우린 그 말씀이 우리의 영혼에 녹아 스며들지 않으면 결코 영원한 생명과는 거리가 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마지막 말씀을 한번 보시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 말씀의 의미를 단순히 그냥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 역사적 사실만을 알고 그걸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는 말씀으로 이해를 한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사람도 없을 겁니다. 인간은 언어로써 생각하고 사고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말씀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질문을 해야만 그 궁극적인 말씀을 이해할 수가 있게 될 겁니다.

 

예수님께서 15절에서 믿는 사람은에서 믿는의 이 의미는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만 하는지에 대한 의문부터 계속 꼬리를 물고 가다 보면, 궁극에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렇게 되어야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 숨어 있을 거라고 보여집니다. 말씀은 이해를 하는 수준에만 머물게 되면 시간이 지나면 결국은 휘발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셔서도 얻을 수가 있지만 말씀이 자신의 영혼에 잘 용해되어 스며들게 되면, 영원한 생명인 영생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사실이 된다는 게 복음 15절 안에 저는 숨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이렇게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일 때 그걸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가짐이 어떤가에 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의 갈림길이 될 수가 있다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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