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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제4주일 ... 독서, 복음서 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4-24 조회수1,347 추천수0 반대(0) 신고

성소 주일

해마다 부활 제4주일은 성소 주일이다. ‘하느님의 부르심인 성소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교회는 이 모두를 존중하는 가운데, 오늘 성소 주일은 특히 사제,수도자,선교사 성소의 증진을 위한 날이다. 성소 주일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진행되던 1964년 성 바오로 6세 교황인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9,37-38)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정하였다. 이날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성소를 계발하고 육성하는 일에 꾸준한 기도와 필요한 활동으로 협력해야 할 의무를 자각하게 하는 기회가 되고 있다.

 

오늘 전례

오늘은 부활 제4주일이며 성소 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자의 이름으로 인간의 나약함을 치유하시며, 부활하신 성자의 영광을 빛나게 하십니다. 흩어진 사람들을 한 가족으로 모으시어,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기쁨을 누리게 하시는 아버지께 감사드립시다.

 

 

 

1독서<예수님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4,8-12

그 무렵

베드로가 성령으로 가득 차 말하였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원로 여러분,

9 우리가 병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한 사실과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하는 문제로 오늘 신문을 받는 것이라면,

10 여러분 모두와 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11 이 예수님께서는,‘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12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1독서 주해

10

일으키신은 루카의 대비 정식, 설교의 공통적 편집요소들에 대한 전반적인 것이다.

 

11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구약성서 가운데 시편 118.22를 인용한다.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인류구원의 사건인 까닭에 구약성서 어디엔가 이 사건이 예언되었을 것으로 믿고 해당 성서 단락들을 찾았다. , 그리스도론적 관점에서 구약성서를 읽으면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관련될 듯한 구절들을 찾아내었다. 그들이 찾아낸 한 구절이 곧 시편 118.22(-23)이다. 그 뜻은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돌같이 여겨 죽였지만, 하느님은 그분을 부활시키시어 모퉁이의 머릿돌마냥 가장 중요한 사람, 곧 구원자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12

명시적으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으면 구원이 확실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중에 그분을 믿는 사람도 구원받는다는 것이 신학계의 통설이다. 다시 말해서 세례를 받지 않았어도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정신대로 사는 사람들에게 마땅히 구원의 길이 열려야 하다는 견해다.

 

루카는 신약성서 저자들 가운데 가장 폭넓은 구원관을 가졌지만 그리스도교보다 더 오랜 전통을 가진 동양의 종교들 안에서도 구원의 표지를 읽어낼 수 있을 정도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에게 알려진 세계는 지중해 연안의 나라들뿐이었고 그가 만난 종교는 유다교와 그리스도교로 제외하고는 그리스-로마 문화의 다신교적 신앙뿐이었기 때문이다.

 

 

 

 

 

 

2독서<우리는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입니다.>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3,1-2

사랑하는 여러분,

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독서 주해

1

긍정적 세상관: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끔찍이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게 요한계 교회의 그리스도론이었다. 이런 그리스도론을 빙자하여 이단자들은 세상과 세상 것들을 사랑했으리라.

부정적 세상관: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다음에도 그분을 배척한 까닭에 예수 역시 세상과 그 지배자 악마를 단죄했다. 그러니 세상 또한 예수와 제자들을 미워하게 마련이다. 이처럼 예수와 세상은 적대관계에 있는만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게 15-17절의 논지다. 세상은 거짓 예언자(반그리스도인들)이 설치는 곳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세상을 이겼듯이 그리도인들도 세상을 이겼다.

 

2

그리스도인들의 종말 축복을 약술하여 그분을 닮을 것이요,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뵈올 것이라고 한다. 여기 두 차례 나오는 그분은 누구냐? 그리스도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하느님이라는 설도 있다. 신약성경 종말론에서 닮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또한 신약성경 종말론에서 은 주로 하느님을 뵙는다는 뜻 또는 예수를 뵙는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복음<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1-18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1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13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14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15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16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17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18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님, 찬미합니다.

 

 

복음서 주해

11

양들의 목자로 암시한 예수가 이제 자기 자신을 착한 목자로서 명시한다. , 양들을 위해 언제나 함께하고 또한 자기 목숨까지 내놓는 목자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는 몸소 당신 백성의 목자이시오, 또한 메시아 시대에 당신의 백성을 위해 목자를 선정해 주신다. 따라서 예수는 자기 자신이 바로 그 목자라는 것도 제시한 셈이 된다.

 

착한 목자의 근거를 제시한다. 양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음으로써 착한 목자의 참된 모습이 입증된다는 것이다. “삯꾼에 비해서 양들에게 끝까지 헌신하는 목자의 희생과 사랑이 강조될 뿐, 양들 대신 죽는 목자의 대속적 죽음의 의미는 없다.

 

13

삯꾼의 부정적 모습이 묘사됨으로써 예수의 착한 목자상이 강조된다. 양들과 아무런 내적 관계가 없고 품삯과 경계에만 관심이 있는 삯꾼의 모습은 문맥상 영광만을 서로 주고받는 유다 지도자들, 율법을 모르는 자들을 저주하거나 사람들을 회당에서 추방하는 바리사이들을 가리킨다.

 

14

내적 결속과 깊은 친교 공동체를 뜻한다.

 

15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의 관계가 예수와 양들(예수에 속한 자들) 결속관계의 원형과 근원으로 언급된다.

예수가 양들을 알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목숨까지 내놓는다는 뜻이다. 양들에 대한 깊은 친교와 결속의 절정이 표현된다.

 

16

이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을,“다른 양들은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다른 양들도 아버지 하느님이 아들 예수에게 보내주신 하느님의 자녀들 곧 예수에게 속한 양들이므로, 예수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들도 생명의 목초를 얻도록 인도해야 한다는 뜻이다. , 하느님이 부여하신 목자로서 예수의 임무가 언급된다.

 

다른 양들도 이미 예수에게 속한 양들처럼 예수의 목소리를 듣고 모이게 된다는 뜻이다. “목소리를 들을 것입니다란 미래형 표현은 한 예언으로서 그 무엇도 방해할 수 없다는 약속과 확실성을 시사한다.

 

다른 양들”, 곧 이방인들도 불러모으는 목적은 한 목자에 한 양떼가 되기 위한 것으로 언급된다. “하나로일치된 새로운 공동체 형성에 역점이 있다. 이 공동체는 한 목자인 예수의 죽음과 기도로 인해 얻게 되는 선물이요 약속이다. , 보편적 차원에서 일치된 새로운 공동체는 한 목자에 의해 앞으로 이루어질 약속된 선물이요 목적이다.

 

17

양들을 위한 목자의 결정적 행위가 그리스도론적 관점에서 언급된다. 아버지와 아들의 결속관계와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목자의 임무가 언급된 대목과 맥락을 같이 한다. 여기서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사실상 이미 전제되어 아들의 행위를 드러낸다. 아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음으로써 아버지께 대한 순명과 자신의 권한을 보여준다. 아들의 순명과 권한은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된 친교를 통한 사랑의 결속도 시사한다.

목숨을 내놓음에 필연적으로 부활이 뒤따름을 시사한다.

 

18

사람들에 대해 목숨을 내놓을 권한과 자유의지가 강조된다. 수난과 죽음을 적극적으로 맞이하는 예수의 주도적 모습과 맥락을 같이한다. 한마디로 죽음에 대한 완전한 자유와 주도권을 시사한다.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아들의 권한과 자유의지가 목숨을 다시 얻을 수 있다는 말로써 더욱 강조된다. 목숨을 내놓을 수도 있고 다시 얻을 수도 있는 아들의 자유의지가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권한으로 시사된다. “권한을 뜻하는 그리스어 엑스시아는 이런 의미를 강하게 시시한다. 즉 절대적 주도권이나 신적 권한을 가리킨다. 또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아들의 자유의지에 따라 이루어지는 유일무이한 사건으로서 불가분으로 결속된 사건이라는 신학적 의미도 시사된다.

 

목숨을 내놓고 다시 얻는 아들의 행위가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권한과 더불어 위임된 사명이라는 것이다, 즉 아들은 아버지와의 일치 속에서 목숨을 내놓고 다시 얻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부활로써 다시 목숨을 얻게 된다는 것은 아버지가 아들 예수를 영광스럽게 한다는 뜻이다. 목숨을 다시 얻는다는 표현도 지상적 인간의 생명을 다시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신적 생명과 영광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가리킨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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