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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10: 1-10)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4-26 조회수986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4. 26.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도란도란글방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10: 1-10)

1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양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딴 데로 넘어 들어가는 사람은 도둑이며 강도이다. 2 양치는 목자는 문으로 버젓이 들어간다. 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다. 목자는 자기 양들을 하나하나 불러내어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4 이렇게 양떼를 불러 낸 다음에 목자는 앞장 서 간다. 양떼는 그의 음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를 뒤따라간다. 5 양들은 낯선 사람을 결코 따라 가지 않는다. 그 사람의 음성이 귀에 익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그를 피하여 달아난다.' 6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해 주셨지만 그들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7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8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모두 다 도둑이며 강도이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9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거쳐서 들어오면 안전할뿐더러 마음대로 드나들며 좋은 풀을 먹을 수 있다. 10 도둑은 다만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오지만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 아멘

 

착한 목자와 양에 비유가 나오는 부분이죠 이 10장은 9장과 긴밀한 연결이 되어 있는 장이에요 9장에 연속으로 봐야 옳습니다 차라리 여기서 장이 안 나눠졌으면 더 이해가 쉬웠을 텐데 장이 나눠지는 바람에 조금 더 이해가 어려워진 거 같아요

유대인들에 3대 절기 중에 하나인 과월절을 배경으로 한 6장에서 오병이어에 기적을 통해서 영생은 이 땅에 빵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임을 설명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티베리아 바다로 몰아넣으세요 그리고 약속에 땅은 자신들에 노력과 열심을 의지하여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저주에 물 위를 걸으시는 유일하신 분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여 들어가는 것임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6장이 끝나고 7장으로 넘어와서 이제 초막절이 배경이 되죠 6장에서는 과월절이 배경이였고 7장으로 넘어와서 초막절을 배경으로 하여 유대인들에 율법준수와 절기지킴에 대한 잘못된 오해와 기대를 주님께서 생수와 빛을 소재로 하여 이제 친절하게 지적을 해주시고 설명을 해주시죠 유대인들은 초막절에 제단에 물을 붓고 또 커다란 촛불을 밝히는 의식을 예식을 행한다고 했어요 주님은 그들에 종교행위에 등장하는 물과 빛을 예로 들어서 자신이 바로 율법과 성전제사에 원형이심을 밝혔죠

주님은 7장에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즉 내가 물이니까 엉뚱하게 제단에다가 물 갖다 붓는 수고하지 말고 그런 종교행위로 너희들 구원받으려고 하지 말고 나를 마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마셔 이렇게 헛수고 하지 말고 나를 믿어라 라는 말씀을 하셨잖아요 그랬더니 대 제사장들과 바리세인들이 주님을 죽이려 그랬어요 왜냐면 자기들이 목숨 걸고 지키는 율법을 무시한 거 아니에요 니네들 그거 말고 나를 믿으라니까 그러니까 그럼 우리가 여태까지 한건 뭐야 이래가지고 화를 냈어요 죽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참 생수이신 그 주님에 정체와 그 생수가 어떻게 죄인들을 구원하게 되는지를 하나에 에피소드를 들어서 설명해 주죠 그게 간음한 여인에 이야기에요 그 간음한 여인에 이야기는 민수기 5장에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면 도저히 풀 수 없는 내용이에요 간음한 여인의 죄를 밝히기 위해서 물을 티끌과 섞어서 여인에게 마시우게 하는 그 민수기 5장에 그 이야기는 바로 생수이신 주님이 저주받은 티끌과 연합이 되어서 자신이 티끌이 되시고 그들에게 생명에 물을 주는 십자가 복음 유니온 크라이스트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그 속에 힌트되고 있는 거라 민수기 5장이 그랬어요

그러나 택한 자들만이 그 티끌 섞인 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마시고 죄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어떻게 되요 티끌 섞인 물을 먹고 육신이 붓고 막 떨어저 나가 버리죠 그런 것처럼 그런 간음한 여인처럼 예수로 말미암아 심판받게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심판하는 심판에 도구이도 한 것입니다 그렇게 간음한 여인에 이야기에서도 생수이신 주님이 죄로 인해 저주속에 던져진 흙과 이겨져서 죄인들에게 제시가 되요 역시 은혜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에 행위를 의지하는 죄인들은 그 은혜에 복음을 피해서 다 도망가버렸죠 그 여인 하나 남고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인본주의에 빠져 있는 자들은 은혜를 감당을 못해요 이해를 못해요 왜 내가 은혜를 받아야되 나도 능력있는 자인데 그래서 은혜 그러면 다 도망가는 거에요 그러나 이미 사형선고를 받고 오갈 곳이 없는 이제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으로 그렇게 드러난 그 사형수인 간음한 여인은 그 은혜에 생수를 받아들여서 구원에 이르게 되는 이야기가 바로 8장 초두에 삽입이 되어 있는 간음한 여인에 이야기에요

이렇게 요한복음은 율법과 은혜에 텐션 율법과 은혜에 그 팽팽한 긴장속에서 계속 전개되어지고 있죠 바리세인들 유대인들은 율법을 계속 주장하고 예수님은 계속 그것을 쳐내면서 은혜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율법을 쫓는 자들이 계속해서 예수님을 은혜에 예수님을 죽일려고 하는 그런 형국이 요한복음 전체에 틀로 그렇게 전개되어지고 있죠

예수님은 계속 오직 은혜로만 너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참 행복에 이를 수 있다라고 하시는데 유대인들은 열심히 율법을 드리대며 절기지키는 것 안식일 논쟁 이런 것으로 계속 주님을 죽일려고 하는 거에요 그리고 계속해서 주님은 나는 세상에 빛이니까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에 빛을 얻으리라 라고 선언을 하세요 그거는 초막절에 큰 촛대를 세우는 것을 비유해서 그렇게 이야기하신 것이죠

왜 너희들 거기다 촛불켜고 그렇게 헛수고 하고 그래 그런 종교행위가 너희들 구원하는 거 아니야 내가 빛이라니까 물뿌리는 의식을 빗대어 왜 물뿌리지마 내가 물이라니까 그 촛대를 빛대어 내가 빛이라니까 왜 거기다 촛불 밝히고 헛수고들 해 이렇게 말씀하신 거죠

812절에 그 선언은 자신들에 종교행위로 빛을 밝히려 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주님에 일갈이였죠 야단치신 거에요 그러자 또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서 주님을 죽이려고 했고 주님은 그들을 피해서 숨어서 성전을 나가셨어요 그게 8장 마지막이죠

그리고 9장으로 넘어와서 주님은 그렇게 그 불가능하고 무력한 죄인들에 대표로 이제 날때부터 소경이 되었던 어떤 사람을 모델로 해서 하느님에 구원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해 주는 거죠

날때부터 소경된 자.....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고 자신에 구원에 대해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왜 몰르니까 그게 뭔지도 모르니까 자신에 구원을 위해 그 어떤 노력이나 시도를 해본적이 전혀 없는 한 사람이 예수님에 부르심과 선택에 의해서..... 예수님이 찾아갔잖아요

그 소경은 예수님이 누군지도 몰랐고 보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찾아간거죠 그 구원에 시작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부르심과 선택에 의해서 오직 은혜로만 눈을 뜨게 되는 그 구원에 서정 그 전체가 요한복음 9장에 내용이였죠

그런데 바리세인들은 그렇게 은혜로 구원을 얻은 소경을 찾아가서 힐문하고 그를 출교시켜 버려요 그리고 오늘 말씀이 붙어 있는 거에요 거기에, 그러니 오늘 말씀도 무슨 얘기겠어요 율법과 은혜에 대조 극명한 대조를 함의하고 있는 내용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9장에 눈뜬 소경이 상징하는 하느님에 택한 백성들과 율법을 들어 그를 출교시키면서까지 자신들에 정당함과 기득권을 옹호하려고 했던 바리세인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을 등장인물로 해서 그 9장에 이야기가 이런 이야기야라고 비유로 한번 또 반복해서 설명해 주는 거에요 그러니까 어렵지 않아요 여러분 9장을 다 이해하셨으면 10장은 거저먹는 거에요

 

먼저 예수님께서 설정하신 드라마에 등장인물과 무대셋트를 정리해 보면 양과 목자가 등장하고 그리고 문지기와 절도와 강도 그리고 양에 우리와 양에 문 등이 무대셋트로 등장하죠 그 등장인물과 무대셋트가 어떤 것을 비유하고 있는지 부터 우리가 확인을 해야 되겠죠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들은요 목축을 하는 지역에 사나운 짐승 들짐승들이 출몰했기 때문에 동네 마다 공동 양우리를 지었어요 각 집집마다 양 우리를 짓기는 너무 낭비였고 그래서 동네에 커다란 공동 양우리를 지었습니다 지금도 그렇다고 그러죠 그리고 그 양 우리는 마을 공동소유로 삼았다 그래요 높이가 10피트에서 12피트 정도되니까 1피트가 30.48인가요 58센티인가요

그러니까 높이가 3미터가 넘는 거에요 그렇게 양에 우리를 지어 놓고 한면으로 양이 들어가고 나가는 문을 만들었는데요 그 양에 문에서는 목자나 문지기가 스스로 문이 되어서 이렇게 누워서 자는 거에요 양이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항상 목자나 문지기를 밟고 나가야 하는 형국입니다 그게 유대인들에 양 우리에요 그러니까 우리 안에 양은 목자나 문지기를 통과하지 않고는 절대 밖으로 나올 수가 없은 거에요 그걸 잘 알아두어야 됩니다.

그 공동 양 우리에는 온 마을에 양들을 전부 다 넣었어요 왜냐하면 양들은 자기 목자에 음성을 분명하게 분별할 수 있는 신기한 능력이 있습니다. 양들에게 양은 잘하는거라고는 그거 하나밖에 없어요 이집 저집의 양들이 서로 섞여서 밤을 지세우다가 아침에 목자가 와서 자기 양들을 부르면요 그 목자의 양들이 정확하게 그 목자를 다 따라나간다 그래요 참 신통한 능력이에요

양은 아주 연약한 동물이에요 양은 시력이 나빠서 자기 앞에 양을 제대로 보지 못해갖고요 졸졸 쫓아가다가 조금만 앞에 있는 양이 먼저 가버리면 길을 잃어 버린데요 그래서 이사야서에서 우리는 다 양같아서 각기 제길로 갔거늘 이런 구절이 들어가 있는 거에요 진짜로 그렇게 길을 잘 잃어 버린데요

거기다가 공격용 무기라고는 아무것도 없어가지고요 파리들이 자기 콧구멍에다 알을 낳는데도 그걸 이겨낼 힘이 없어요 그래서 양을 목자들이 잘 닦아주고 관리해주지 않으면 코구멍이나 잎에서 구데기들이 살고 그래요 그러면 겨우 할 수 있는게 나무에다가 자기 머리를 자해하는 거에요 막 박는거 그렇다고 그게 떨어집니까 그게 미련하고 우매해요 왜 우리를 양에 비유했는지 아시겠죠 하느님이요 우리가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자 그리고 양은 자기를 지켜주는 목자가 없으면 무서워서 높지도 못해요 그래서 듬직한 목자가 주인이 곁에 있을 때에만 풀밭에 눞습니다. 시편 23편에서 그가 주님이 우리를 푸른 풀밭에 뉘이신다는 것은 그는 정말 안전한 목자라는 것을 상징하는 거에요 양은 그렇게 듬직하고 안전한 목자가 있을 때만 누울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들에게 신비한 능력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청력이에요 실제로 동물학자들이 시험을 했는데요 최근에 그 양들이 신기하게 주인에 음성을 알아들어서 그 양 주인에 옷을 그대로 입히고요 성대묘사를 완벽하게 하는 사람에게 그 옷을 입히고 그 양들을 부르게 시켰대요 그런데 한 마리도 안따라 나가더래요 신기하죠 양들이 그래요 그건 그 목자에 음성을 확실히 분별할 수 있는 하느님에 백성들을 상징하기 위해 하느님이 양들을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아세요? 이 온 우주는 하느님에 백성들을 중심에 놓고 창조가 되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양들이 우리에게 어떤 것을 교훈하기 위해 그렇게 창조됐다라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됩니다 아 여기서 한번 누구 처럼 해볼까요?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ㅎㅎ 예 그렇다면 이제 자연스럽게 양들을 부르는 목자에 정체도 알게 됐죠 양이 누구에요 갈바를 알지 못하는 어둠속에서 헤매는 우리 죄인들 ~

그러나 하느님에 의해 불림을 받아 그 목소리를 분별하고 구원을 받는 성도들을 양이라고 하는 거에요 그 양을 부르는 분 목자는 누구에요 당연히 우리 주님이죠 그 목자는 이미 구약에서 반복하여 예언되어져 있어요

 

(민수기 2715-17) 보세요 15 모세가 야훼께 아뢰었다. 16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 숨을 불어 넣어 주시는 하느님 야훼여, 회중을 거느릴 사람을 세워 주십시오. 17 그들의 앞장을 서서 드나들 사람, 그들을 이끌고 나가고 이끌고 들어 올 사람을 세워 주십시오. 야훼의 회중을 목자 없는 양떼처럼 버려두지 마십시오.'

 

모세가 지금 하느님에 백성인 이스라엘에 목자를 세워 달라고 하느님께 간구하고 있는 거에요 사실 이 말은 여호수아에게서 성취가 되죠. 하느님은 여호수아를 모세 다음으로 이스라엘에 목자로 세우세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 목자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인 거에요 여호수아를 헬라어로 바꾸면 뭐에요 예수죠 호세아를 헬라어로 바꿔도 예수고~

지금 모세가 야훼의 백성들 목자가 그들을 인도하고 양들이 그 앞에서 이렇게 출입하게 그렇게 해달라고 지금 기도를 했는데 오늘 본문 9절에서 뭐라 그러는지 보세요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거쳐서 들어오면 안전할뿐더러 마음대로 드나들며 좋은 풀을 먹을 수 있다.’

 

민수기 27장에 기도가 요한복음 109절에서 지금 성취가 되고 있는 모습이에요 물론 그 전에 여호수아로 한번 그림자로 모형으로 보여 줬지만 여기에서 비로소 성취가 되는 거라 말입니다 정확히 민수기 이야기와 요한복음 10장의 이야기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에요

하느님의 백성인 양을 치는 목자는 긍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거에요 그러면 지금 주인에 음성에 반응해서 양 우리 밖으로 나오는 그 주인에 양으로 상징되는 하느님에 백성들이 다른 양들과 섞여서 사는 하느님에 양들이 아닌 다른 양들과 섞여서 사는 그 양에 우리는 어디일까요 그러니까 교회와 천국은 아니에요 9장과 한번 연결시켜서 보시란 말이에요

지금 그 양을 하느님에 양을 상징하는 그 소경이 어디로 부터 밖으로 나왔죠 쫓겨났어요 그런데 결국은 쫒겨나서 들어간게 예수님에 품이였습니다. 어디서 쫓겨난 거에요 크게 거시적으로 이야기하면 하느님에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

자기들이 이 세상에 왕이되고자 하는 자신들에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지 않는 이 세상을 상징하는 것이지만 9장과 연결해 보면 어디에요 유대교 유대주의를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리고 그 유대주의는 곧 율법을 가리키는 것이고 율법은 곧 뭐에요 하느님에 은혜 하느님께 내가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된다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내가 내 배를 위해서 사는 이 죄된 세상 전체를 율법이라고도 하지 않습니까? 양에 우리는 거기인 거에요 ....

그러니까 거기에서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불러내는 거에요 근데 그들은 기가 막히게 그 주인에 음성을 알아듣고 나오더라는 거에요 우리들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하느님에 말씀을 복음을 전했을 때 정말 신기하게 기적처럼 그들이~ 그게 복음이에요

그럼 나도 예수 믿을래요 하고 나오는 분들이 있죠 그 모습을 한번 연상해 보시란 말이에요 전혀 알지 못했던 그들이 애들아 내 양들아 나와그랬더니 그 음성을 듣고 알아듣고 졸졸 나오는 거에요 어떻게 그 양에 문에 누워있는 예수를 밟고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에 희생을 밟고 그 세상 유대교 유대주의 율법 죄에서 밖으로 나오는 거에요 그러니 양에 우리에서 예수님에 목자에 부름을 받아 그 양 우리 밖으로 나오는 걸 뭐라 그래요 구원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림이 이해가 가세요 요한복음 10장은 그런 거에요

9장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 오로지 주님에 말만 듣고 음성만 듣고 그 말을 알아 들어요 그리고 실로암 연못으로 내려가서 주님에 명령대로 눈에 붙은 진흙을 씻어 낸 사건을 기억해 보세요 바로 그 이야기 지금 하고 있는 거에요 여기에서 앞이 보이지도 않는 그가 어떻게 주님에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 우리에서 나와야 하는 주님에 양이 목자이신 주님에 음성을 알아듣는 것을 형상화해서 거기서 지금 보여준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눈이 먼거에요 음성을 알아들어야 되니까 그런데 정작 눈을 뜨고 있는 바리세인들은 우리도 소경이냐 그러면서 예수님에 음성을 분별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죠 그러한 교만 내가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악을 분별하겠다 나는 눈을 떴어 라고 한 인간들은 음성을 못알아 듣더라는 것입니다

 

(요한10,26-27) 26 그러나 너희는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나를 믿지 않는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 온다.

 

자 너희들이 지금 이 소경을 출교시켰는데 그는 내 양이라 내 음성을 알아듣고 내 명령에 순종했어 그런데 너희들은 못알아 듣는구나 왜 너희들은 내 양이 아니야 라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거에요 이제 양 우리와 양 그리고 목자가 누구인지는 밝혀 졌어요

그런데 우리가 조금전에 본 본문 9절에는 그 양들이 들어가며 나오며 풀()을 얻는고 기록이 되어 있죠 좀 이상하죠 그렇다면 성도는 율법으로 상징되는 세상에서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서 살 수 있다는 말인가요 그 말이 아니에요 그럴수는 없죠 한번 나온 양은 다시 세상으로 들어갈 수 없어요 우리들은 거기에서 건져졌기 때문에 우리에 목적지는 천국이에요 그리로 가야지 다시 에굽으로 못돌아 가요 홍해가 닫히면 거기 헤엄쳐서 못넘어 갑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닫아 버린 거에요

에굽에서 건져서 홍해를 건넌 다음에 그 홍해에서 에굽사람 다 죽여 버리고 그 홍해를 다시는 가르지 않았어요 왜 내 백성아 너희는 다시 돌아가면 안돼 그러면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겠어요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에 완전한 자유를 말하는 거에요

율법아래 갖혀서 꼼짝 달싹 못하게 죄에게 구속되어 있던 자들이 높이가 3미터, 양은 요만하잖아요 양은 때려 죽여도 못넘어가요 그런 담에 갇혀서 꼼짝 못하게 율법과 또 제사제도와 이런 거에 꽁꽁 묶여 있던 자들 그들은 또 이방인과도 담이 있어서 못넘어 갔잖아요

이방인과 밥도 먹어도 안됐어요 그래서 성전에도 이방인에 뜰 여인에 뜰 고 사이에 그 담을 이방인이 넘어가면 사형이에요 죽여도 좋다라는 것이 벽에 게시되어 있었단 말입니다 못넘어가요 그렇게 구속이 되어 있었던 자들이 하느님에 은혜로 이제 자유로워 졌다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래서 그 유대교 유대주의 율법을 상징하는 우리에서 이제 들며 나며 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라고 그렇게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이방인들과도 한 몸 한 지체가 되는 거에요 그래서 양에 우리에서 들며 나며 자유로운 모습으로 살 수 있는 거죠

느혜미야 3장에 보면 문이 열개가 나오는데 그 중에 어떤 문만 빗장과 자물쇠가 없다 그래요 어떤 문? 문 신기하죠 양문에만 빗장과 자물쇠가 없어요 들며 나며 하는 그 양에 문을 요한복음에서 설명하기 위해 느혜미야에서 벌써 그 양의 문에는 빗장과 자물쇠가 없다라는 것이 힌트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 요한복음 10장은 벌써 느혜미야에서 부터 예시되고 있었던 거에요 그러니까 양의 우리를 나오는 것이 바로 구원인 거에요 그게 출애굽기에서 또다른 그림으로 요렇게 그려져 있어요 볼까요

 

(출애굽기 337-10) 7 모세는 장막을 거두어 가지고 진지 밖으로 나가 진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그것을 치곤 하였다. 모세는 그것을 만남의 장막이라 불렀다. 야훼께 여쭈어 볼 일이 생기면 누구든지 진지 밖에 있는 만남의 장막으로 나가야 했다. 8 모세가 장막으로 행차할 때마다 모든 백성은 자기 천막 앞에 서서 모세가 장막으로 들어 갈 때까지 그 뒤를 지켜 보곤 하였다. 9 모세가 장막에 들어서면 구름기둥이 내려 와 장막 문간에 섰고 야훼께서 모세와 말씀을 나누셨다. 10 구름기둥이 장막 문간에 서 있는 것을 바라보면, 모든 백성은 각기 자기 천막 문간에 일어섰다가 엎드려야 했다.

 

하느님을 앙망(仰望)하는 자들은 항상 진에서 나와 어디로 가야 되요 진에서 나와서 만남의 장막(회막)으로 가야 되요 그런데 그 장막 앞에는 모세가 서 있고 그 모세는 하느님에 임재와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형국이 요한복음 10장에서 그려지고 있는 거에요 하느님을 仰望하는 자는 하느님의 음성을 분별하여 알아들을 수 있는 자들은 그 세상에서 나와서 하느님에 임재가 있는 그 지성소로 천막에 하느님에 임재가 있었던 곳 아니에요 그 중에서도 지성소 그리로 가야 되는 것인데 거기에는 목자이신 예수가 서 계시고 그 예수는 하느님과 성령과 함께 계시는 분이란 말이에요 자 그 모습이 그대로 출애굽기에 그려지고 있는 거에요 겹쳐지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양 우리에서 목자가 양을 불러내는 것은 양을 구원해 내기 위한 부르심인 거에요 그래서 그 소경을 정말 양처럼 연약하고 무기력하고 불가능한 그 소경을 주님이 찾아가서 애야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 그러면 너는 눈을 뜨게 될 거야 내가 빛이니까 믿고 가서 씻어그랬더니 알아듣고 가서 씻더라는 것이죠

 

우리 같으면 씼겠어요? 지금 가뜩이나 눈이 멀어갖고 사람들이 나 장님인거 아는데 거기다가 침을 그냥 이 만큼을 뱉어 갖고 눈에다가 이겨 붙여 버렸어요 진흙을 눈에다가 진흙을 이겨 붙일래면 침을 얼마나 뱉어야 돼요 그 무슨 망신이에요 우린 그럴 거 아니에요 아니 주님 왜 침을 뱉고 그러세요 왜 그 더러운 진흙을 왜 내눈에 붙이고 그러세요 거기다가 또 가서 씻으래요 실로암 까지 더듬더듬 또 거기까지 찾아가야 되요 거기 가서 또 씻어야 되요 그런데 그 일을 하느님이 택하신 양을 상징하는 소경이 그대로 순종하여 하더라는 거에요 음성을 알아듣는 양이다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 주는 거죠 그러면 양 우리를 지키고 있는 문지기는 누구인가?

자 문지기에 역할이 뭐죠 목자가 오면 그 목자를 보증하고 아 당신 맞군요 목자 참 목자 맞군요 하고 양들에게 그 목자를 소개시켜 주는 거죠 대려가라고 그 일을 누가 했어요 신약에서 세례자 요한이 누군가를 상징하며 먼저 와서 그 일을 했어요 그 세례 요한은 누구를 상징하는 걸까요 성령 하느님이죠 성령 하느님이 참 목자이신 예수와 참 목자에 양인 성도들을 연결하시는 것입니다 그 문지기에요 그 문지기가 예수와 우리 사이에서 서로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절도요 강도는 누구겠어요 여기서 절도라고 번역이 된 클레프테스는 자격도 없는 자가 어떤 일을 몰래 혹은 함부로 행하는 것을 말하는 거에요 그리고 강도라고 번역이 된 레스테스는 폭력을 사용하는 자를 가리키는 거에요

그러니까 절도와 강도는 자격도 없는 자가 자기가 자격없음을 숨기고 어떤 일을 함부로 행하며 심지어 폭력까지 동원해서 자기에 일을 합리화 시키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 절도와 강도처럼 자기들이 차지할 자리도 아니고 또 그러한 권한도 없으면서 권리도 없으면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자기들에게 정당하게 속하지도 않는 권위를 행사하며 그들도 타당한 근거를 전혀 내세울 수 없는 그런 복종과 순종을 불법적으로 요구하고 또 거기에 불응할 경우에 폭력까지 동원하여 쫓아내고 한 이들이 누구에요 소경 쫓아냈죠 바리세인들이야기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9장에 등장인물을 그대로 10장으로 요렇게 옮겨 가지고 그 이야기를 그대로 한번 다시 비유로 또 설명을 해 주는 것입니다 9장에서 하느님에 택한 백성인 소경을 엉터리 교리와 신학으로 가리치려고 하다가 듣지 않으니까 무력을 사용해서 유대교에서 출교시켜 버린 자들 그 바리세인들 그들이 바로 절도요 강도라고 하는 거에요

 

(루가11,52) 52 너희 율법교사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렸고 자기도 들어 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들어 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 목자는 절대 양들을 구원으로 못 이끄는 목자란 말이에요 절도요 강도는 지들도 못들어가요

(마태23,13) 13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하늘나라의 문을 닫아 놓고는 사람들을 가로 막아 서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못 들어가게 한다.'

 

그러니까 담넘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양에 우리에서 밖으로 나오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 문 그 은혜를 의지하여 나올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절도며 강도들은 율법으로 타고 넘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역시 은혜와 율법에 긴장이 그 속에서도 지금 극명하게 대조되어 나타나는 거죠

그러니까 율법을 숭앙하고 인간에 가능성을 부인하지 못한 인본주의적 가르침을 던지는 자들은 모두 절도며 강도인 거에요 왜 근데 절도며 강도가 유대교 안으로 유대주의 안으로 담을 넘어 들어갔다라고 이야기하는가 그렇다면 나왔다라고 이야기를 해야지 절도며 강도는 거기에서 담을 타고 나오더라 라고 이야기를 해야지 왜 그리로 들어간다라고 이야기를 하는가 이런 질문이 드시죠?

 

그 양의 문이 은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그 양에 문에 실체는 유대주의, 유대교는 사실은 율법을 가지고 그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이들인데 그들이 그 율법을 진짜 온전히 지켜낼 수만 있으면 그 유대교는 진리에요 참이에요 왜냐면은 율법을 온전하게 다 지키면 구원을 받을 수 있거든요

그런데 그 율법에 의미는 뭐였어요 우리는 그런 존재가 못되기 때문에 다 지켜낼 존재가 못되기 때문에 우리는 양에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 은혜 율법을 자기가 다 지키러 완성하러 오신 그 예수 그리스도, 내가 지키는 율법이 아닌 예수가 지키는 율법 그 은혜를 밟고 들어가야 되는 곳인데 이들은 그 율법을 내가 지킬 수 있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양의 문인 예수 그리스도 그 율법을 통과하지 않고 그 유대교를 엉뚱하게 이해를 하고 그냥 우리가 지킬 수 있으니까 우리 힘을 발휘하여 지키자 해서 열심히 절기 지키고 안식일 지키고 했단 말입니다

그게 담을 넘어 유대교로 들어간 거에요 예수님은 유대교로 어떻게 들어 가셨어요 아니야 은혜야 내가 지킬 거야 예수님은 다 지켰어요 들어가서 절도며 강도들은 지들이 못지키는데도 지킬 수 있다니까 하고 담넘어 들어갔다 말입니다 이해가 가시죠?

양에 문이 누구인지를 한번 확인을 하고 가자구요 그 문은 양들이 유대교에 밖으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 다른 말로 양들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에요

 

(사도4,11-12) 11 이 예수는 집짓는 사람들 곧 여러분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 12 이분을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유일한 문은 누구에요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문, 예수 그리스도죠 양들이 10피트가 넘는 담을 넘을 수가 없어요 양은 반드시 문을 통해 나와야 되는데 그들이 통과하여 목자의 품에 안겨야 하는 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거에요 다른말로 은혜인 거에요

본문을 보면 정확하게 나오죠 109, ‘누구든지 나를 거쳐서 들어오면 안전할뿐더러 마음대로 드나들며 좋은 풀을 먹을 수 있다그렇죠? 요한복음 146절 보세요 예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창세기에서 노아의 방주, 그 구원의 방주에 문이 몇개 있었어요 하나, 그리고 그 문은 하느님이 닫으세요 성막에 성전에 문이 몇개 있었어요 하나, 하느님에 임재속으로 들어가는 문은 유일하게 하나인 거에요 그런데 그 문은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9절에서도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이라고 정확한 단서를 달아 놓은 거에요 우리는 우리에 노력이나 열심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에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 자들이란 뜻이에요 그래서 나를 거쳐서 들어오면 이에요 나를 거쳐서 들어오면 내가 너희들을 드려 보내줄텐데 나의 은혜를 힘입어 들어가는 자들은 구원을 얻고 그렇지 않고 지들 힘으로 들어가는 자는 절대 구원에 이를 수 없다가 나를 거쳐서 들어오면 구원을 얻고라는 어구에 진의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세인들은 은혜의 본체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 끝까지 율법을 고집하고 있는 거에요

먼저 하느님에 양들은 도대체 어떻게 그 안에 들어가 있게 되었는가 하느님에 양들은 왜 천국에 안 있고 왜 이 세상에 이렇게 들어와 있는가 잘 보잔 말이에요

 

(사도18,9-11) 9 어느 날 밤 주께서 신비로운 영상으로 바울로에게 나타나 '겁내지 말라. 잠자코 있지 말고 전도를 계속하여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을 터이니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다' 하고 말씀하셨다. 11 바울로는 일 년 육 개월 동안 거기에 머물면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바오로가 고린도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을 때에 일이에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를 방해하고 괴롭혔죠 그때 하느님께서 바오로에게 말씀하시기를 에는 이미 내가 택해 놓은 내 백성들이 많이 있으니까 잠잠하지 말고 가르쳐라사도 바오로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회심한 이들이 많다라는 뜻이 아니라 사도 바오로가 아직 복음도 안 전했는데 이 에는 내 백성이 많으니까 내가 이미 내 양들을 이 에다가 많이 심어 놨으니까 너 가르쳐 내 목소리로 내 음성으로 그들을 불러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양들은 어떻게 그 안에 들어가게 되어 있는 거에요 창조이전에 이미 하느님에 의해 내 백성이라고 도장을 딱 받고 하느님에 의해 이 땅에 심겨진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에요 그 하느님께서 아무런 계획이 없이 이 땅을 창조하셨을 리는 없죠 무엇이든지 계획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실행이 있는 거잖아요 그냥 즉흥적으로 막 이거하고 저거하는 분이 하느님 아니란 말입니다 계획을 하고 하시는 분이에요 그러면 애초에 하느님에 계획과 목적이 무엇이였을까요 이 땅을 창조하기 전에 계획과 목적 성경에 나오잖아요

요한묵시록에 새하늘과 새땅 내 백성과 내가 누리는 모든 하늘에 풍요와 하늘에 영광과 그 하늘에 그 엄청난 것들을 나와 함께 영원히 누리게 되는 그 나라 그것이 원래 하느님에 계획이였어요 그런데 그 계획 그 나라가 이미 하느님에 의해 창조이전에 계획이 되어져 있다면 그 안에 들어갈 하느님에 백성들도 역시 창조이전에 그때 계획 되어진 거에요

나라만 계획해 놓고 나중에 여기에 들어갈 인간들은 지들이 어떻게 하는 거 봐서 내가 합격 불합격 판정한 다음에 넣고 빼고 하겠다 이게 아니란 말입니다 하느님은 계획하시는 하느님이니까 그래서 에페소서 14절에서는 우리가 창세전에 이미 하느님에 아들들이 되었다라고 명확히 나오는 거에요

왜냐면 하느님이 이걸 이미 계획하셨단 말이에요 어디에서 시간 너머인 영원 속에서 영원인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은 시간에 개념이 전혀 없는 곳이기 때문에 이 영원속에서 전지전능한 자기가 생각한건 금방 이루실 수 있는 그분이 뭔가를 계획하셨다라는 것은 이 종말을 계획하셨다라는 것은 이 창조와 구원 앞에 이미 하느님에 계획과 목적이 완성되어져 있다라는 뜻이니까

 

하느님은 계획하시는 분이고 전지전능하신 분이고 시간과 공간에 구애를 안받는 분이기 때문에 어떤 것을 계획하셨을때 그분은 이미 영원속에서 그걸 완성하신 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이 시간 밖으로 튕겨져 나가면 그 영원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우리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시간 밖에서 튕겨져 나가는 그 시간 죽음이죠 그게 그 죽음과 동시에 우리는 거기가서 그 하느님 나라에 들어있는 모든 하느님에 백성을 다 만나게 되는 거에요 이 역사속에서는 기다림이라는 게 있지만 시간 밖에서는 기다림이라는 그 개념이 없다 말입니다

물론 논리적으로는 우리가 죽어서 우리 영혼이 낙원에 가 있다가 거기에서 예수님에 재림때 까지 기다리다가 이제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우리가 몸의 부활을 입고 다시 또 천국으로 들어가는 그게 이제 논리적인 순서이지만 시간이 없는 곳에서 그런 논리적인 순서가 무슨 의미가 있냐구요 그것은 이 역사속에서 우리가 그 구원에 여정 그것을 바라볼 때 아 이런 순서로 되겠구나라고 보는 것이지 영원 속에서 내려다 볼 때는 그건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거란 말입니다 이해를 하시는 거죠 흐흐흐

 

(로마서8,29-30) 29 하느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택하신 사람들이 당신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가지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셨습니다. 30 하느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불러 주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보세요 우리가 이미 영원속에서는 영화롭게 되었다고 과거로 이야기하고 있어요 목자에 음성을 알아듣는 양들을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셨다 그래요 그리고 그렇게 미리 정함을 받은 이들은 하느님께서 미리 아신자들이라 그래요 여기서에 안다라는 말은 언약 속에서에 앎을 말하는 거에요

예를 들어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가 너희만 알았나니 아모스 32절에 내가 너희만 알았나니 라고 했을 때, 그 안다라는 말 그 말은....내가 언약 속에서 창조이전에 계획한 그 언약속에서 아들과 나와 한 그 언약속에서 내가 너희를 구원할려고 이미 계획했다가 내가 너희만 알았다라는 뜻인 거에요 그러니까 그건 언약의 언어에요 내가 너희를 알았다라는 뜻은~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하느님에 백성들을 미리 정하고 그 미리 정한 백성들은 미리 알았다라는 건. 하느님께서 그렇게 미리 선택하여 창세전에 정할 그 백성들을 미리 하느님에 언약과 계획속에서 이미 그들을 먼저 사랑하고 그들을 구해 내기로 작정했다라는 뜻인 거에요 그게 내가 너희를 알았다라는 뜻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정하시고 그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불러내시는 거에요 역사속에서 불러내시는 거에요 애야 내가 이미 영원속에서 너를 사랑했고 너를 구원하려고 계획했어 그러면서 불러 내는 거에요 역사속에서, 그런데 그때에 그 하느님에 언약속에 그 계획속에 들어있던 자들은 그 하느님에 음성을 알아 듣고 아무도 못알아 듣는 그 상황속에서 성큼 성큼 걸어 나오더라는 거에요 살아서~ 죄와 허물로 전부 죽어있던 시체들 사이에요 성큼 성큼 그들이 걸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전지전능한 하느님에 능력이에요

 

(호세아11,1-3) 1 내 아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너무 사랑스러워, 나는 에집트에서 불러 내었다. 2 그러나 부르면 부를수록 이스라엘은 나에게서 멀어져만 간다. 바알 우상들에게 재물을 바치고 향을 피워 올렸다. 3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팔에 안아 키워 주고 죽을 살려 주었지만, 에브라임은 나를 몰라 본다.

 

잘 보세요 미리 아신 자들을 불러 내셨다 라는 말과 사랑하여 불러 내셨다라는 말이 이렇게 어우러져요 그러니까 미리 아셨다라는 말을 뭘로도 바꿀 수 있어요 미리 사랑하셨다라는 말과 바꿀 수 있는 거지 내가 이렇게 미래를 보니까 어떤 놈은 나를 믿을 거고 어떤 놈은 나를 안믿을 거야 그걸 내가 다 알게 되었어 그래서 이 미리 내가 미래를 내다보고 나를 믿을 자들을 내가 미리 정했다 이런 뜻이 아니란 말이에요

미리 안다라는 말은 언약에 언어라 그랬어요 그걸 잘 기억해 두세요 언약에 언어에요 그런데 그 언약 속에서에 그 앎은 안다라는 그 개념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어린 양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피로 맺어진 언약 그 언약을 아는 거에요 그 언약 속에서 안다라는 뜻이에요

첫언약은 뭐에요 간단히 표현하면 율법을 지켜라 지키면 살려주고 복주고 안지키면 죽어 이게 첫 언약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율법을 열심히 지켰고 제사를 목숨걸고 지냈던 거에요 왜 안지키면 저주를 받아 죽을 것이다 그랬으니까 그런데 그러한 첫 언약에 속한 제사나 율법으로는 절대 사람이 속까지 구속을 받을 수 없어요 속죄받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게 성경에 나오잖아요

 

(히브10,1-4) 1 율법은 장차 나타날 좋은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고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해마다 계속해서 같은 희생제물을 드려도 그것을 가지고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2 만일 그렇게 해서 완전해질 수 있었다면 예배하는 사람들이 단번에 깨끗하게 되어 다시는 죄의식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계속해서 제물을 바치지도 않았을 것이 아닙니까? 3 그런데 해마다 제물을 바치면서 죄를 되새겨야 하는 것은 4 황소와 염소의 피로써는 죄를 없앨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창조이전에 하늘에서 있었던 성부 하느님과 성자 하느님에 그 언약에 대한 그림자요 모형이였던 거에요 창세기 315절에 원시 복음 하느님에 언약이죠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

그 창세기 315절에 그 원시 복음 또 노아에 언약 ,무지개 언약, 아브라함에 언약 ,다윗의 언언약, 이런 것 등등은 성경에 나오는 수 많은 언약은 전부 영원 속에서 하느님과 예수님에 그 언약에 모형인 거에요

영원속에서 하느님에 계획, 언약, 약속이 있었단 말이에요 성부 하느님과 성자 하느님에 약속이 있었단 말입니다 .계획을 하셨어요 회의를 하셨단 말입니다. 새 하늘과 새땅을 ...그런데 어떻게 그걸 만들까 거기에서 이미 내 아들 예수야... 니가 내려가서 죽어라 십자가가 이미 영원속에서 준비되었던 거에요 그러면 그 십자가가 영원속에서 이미 계획되어지고 준비되었다면 그 십자가는 2천년전에 단순히 이 역사속에 선 것이 아니라.... 이 역사 전체를 아루르는 것이죠

영원속에서 이미 계획 되었다는 것은... 이 십자가가 이미 거기에서 이 영원안에 영향력을 발휘했다라는 뜻이거든요 하느님이 계획한 거니까 그러니까 2천년전에 십자가가 섰다고 해서 그럼 그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은 뭘 믿고 천국에 갑니까 십자가로, 십자가는 영원에서 선 것이기 때문에 전 역사를 아우르는 거에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이전에 이미 알리신바 되었다, 알다가 언약에 언어라 그랬잖아요 그 언약속에서 이미 하느님에 의해 죽임을 받도록 계획되어졌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부와 성자에 그 언약을 근거로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그렇게 살아난 하느님에 백성들이 하늘에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되고 영원한 왕국이 건설되고 그 왕위가 끊어지지 않는 참된 왕이 출연하게 된다라는 그런 언약이 이 땅에 던져지게 되는 거에요 무얼 근거로 이런 약속을 하시는 거에요 그랬을 때 우리는 영원속에서 성자 하느님과 성부 하느님이 함께 하신 그 약속에 의해서 이런 약속들을 하느님이 하실 수 있었던 거구나 그럼 그 약속이 뭐냐 말이에요 예수 그리스도에 십자가란 말입니다 그게 히브리서에 나와요

 

(히브리9,15-17) 15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새로운 계약의 중재자이십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먼젓번 계약 아래서 저지른 죄를 용서받게 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따라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약속해 주신 영원한 유산을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16 상속에 관한 유언이 효력을 내려면 그 유언을 한 사람의 죽음이 확인되어야 합니다. 17 유언이라는 것은 유언을 한 사람이 죽어야 효력이 있는 것이지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부르심을 입은자나오죠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단어가 그대로 나오는 거에요 목자가 양을 부른다 그랬죠 그런데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약속해 주신 영원한 유산을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약속이란 단어가 나왔어요 유언은 이 유언이라는 단어가 약속 언약이라는 단어에요 그런데 여기서 유언이라는 단어로 번역을 했어요 유언은 상속에 관한 유언이 효력을 내려면 그 유언을 한 사람의 죽음이 확인되어야 합니다

 

(히브9,19-22) 19 모세는 율법에 있는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선포할 때에 송아지 피와 물을 가져다가 박하묶음과 붉은 양털로 계약의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렸습니다. 20 그리고는 '이것은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맺으신 계약의 피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21 또 같은 모양으로 그는 천막 성전과 예배의식에 쓰이는 모든 기구에도 피를 뿌렸습니다. 22 율법에 따르면 피로써 깨끗해지지 않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피 흘리는 일이 없이는 죄를 용서받지 못합니다.

 

첫 언약 그 모세의 언약 구약 그 구약 때에도 피로 죄가 정결케 되었어요 그런데 그거는 어떤 것에 모형이였단 말입니다 어떤 것에 모형이였어요 그 앞에 나오죠 언약은 언약한 당사자가 죽지 않으면 유언이라는 말을 언약으로 바꾸세요

디아데케라는 단어가 언약이거든요 그런데 성서에 유언이라고 번역을 해놓은 거니까 갑자가 유언장이 갑자기 생각나고 이상하잖아요 ` 15절에서는 그걸 언약이라고도 번역했고 약속이라고도 번역을 했는데 그 밑에 뜸금없이 갑자가 유언이라고 해놔갖고 햇갈리죠 그 유언이라는 단어 대신에 언약이라는 단어를 끼어 넣고 읽어 보시란 말이에요 이런 거에요

창조이전에 하느님과 하느님에 아들과에 그 약속은 그 약속에 당사자인 성자 예수가 죽어야만 효력이 발생하는 그런 언약이였다는 거에요 그래서 유언은 죽은 자가 살아있으면 무효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언약은 반드시 그 언약 당사자인 예수가 죽어야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라는 그 언약 그 피흘림이 있어야 내 양들을 불러 올리는 그 구원이 완성이 된다라는 바로 그 언약, 그 영원속에서 있었던 그 언약을 근거로 해서 하느님이 창세기부터 계속해서 언약을 던지신 거에요

왜 자기가 이미 이루어 놨거든요. 내 아들을 죽여서 너희들을 구원해 낼거라는 그래서 창세기 315절 부터 여인에 후손 그가 뱀이 그에 발뒤꿈치를 물고 그게 십자가에 죽음이니까 그러나 그가 그 뱀에 머리를 짓밟는 그런 식으로 너희들에 구원이 일어날 것이라고 그 창세전에 영원 속에서 일어났던 하느님과 예수님에 그 언약을 아주 작은 그림으로 부터 요렇게 크게 설명해 주는 거에요 그래서 원시복음 노아에 언약 아브라함에 언약 다윗에 언약 이렇게 점진적으로 이렇게 밝히 계시가 되는 것입니다

다 잊어 버려도 괜찮아요 창조이전에 영원 속에서 하느님이 예수를 죽여서... 우리를 불러 내시기로 결정했다 ..그게 하느님과 예수님에 언약이다 이것만 알면 되요 그 언약 그 언약 때문에 우리가 살아 난거란 말입니다 이 역사와 공간이 창조되기도 전에~

그런데 거기에다가 우리에 행위를 보탠다구요? 그런 터무니 없는 거죠 요거만 우리가 알아도 하느님이 그 크심 하느님에 그 계획하심 하느님에 그 신실하심 그 알게 되잖아요 그러니 그 하느님을 어떻게 우리가 배반하고 어떻게 그 하느님께 등을 돌리겠는가 그리로 갈 수 있는거 아닙니까

그거 아니고 하느님에 능력이 좀 부족해서 우리가 계속 도와줘야 되면 우리에 행위를 자꾸 그 구원에 보태야 된다면 그 하느님을 어떻게 우리가 믿어요? 하느님은 전지 전능하신 분이에요 혼자 다 하시는 분이에요

 

(베드로전서1,18-20) 18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그것은 은이나 금 따위의 없어질 물건으로 값을 치르고 된 일이 아니라 19 흠도 티도 없는 어린 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얻은 것입니다. 20 하느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미리 정하셨고 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해서 그분을 세상에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안다라는 단어가 또 나왔어요 인제 너희를 위하여 이 말세에.... 말세는 언제부터 언제까지라 그랬어요 예수님에 초림부터 재림까지를 말세라 그래요 이 말세에 너희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예수님이 직접 이렇게 나타났다 얘들아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피흘려서 죽으시고 도저히 불가능하고 무력한 우리가 살아날 것이다라는 것을 아는 것을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 복음을 이해한다 하느님을 믿는다 이렇게 표현하는 거에요 그걸 아는게... 그 하느님에 언약속에서 계획된 그것을 아는 것을...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 하느님을 믿는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오늘 본문 바로 아래에 양들이 나를 알고 내가 양들을 아는 것이 아버지가 나를 알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이렇게 말씀하신 거에요

 

(요한10,14-15) 14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15 이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자 이 구절이 인제 이해가 가세요? 하느님이 예수를 알고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요 예수님이 하느님 아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아나요? 그건 단순히 지식적인 이야기가 아니죠 언약에 언어라 그랬어요 예수님이 우리를 알고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건 뭐에요 주님이 우리를 위해 피흘려서 죽으시고 우리가 구원을 받은걸 내가 알아요가 내가 예수님을 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래서 요한복음 1014절에 보면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안다라는 개념 잘 아시겠죠 이제요.

 

하느님과 예수님이 서로를 언약속에서 아시는 것처럼 목자이신 예수님에 음성을 듣고 세상 밖으로 빠져나온 하느님에 양들은 언약속에서 주님을 알게 된다는 거죠 그 말은 오직 은총인 우리 주님에 희생으로 우리가 구속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언약이 창조이전에 영원속에서 삼위에 하느님 사이에 있었고 그것이 실현되었다라는 것을 믿는 것 그것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게 예수님을 안다라고 하는 거에요 그래서 양이 목자를 안다 성도가 예수님을 안다 라고 성경이 기록을 하고 있는 거에요 우리는 그렇게 어린 양에 보혈에 공로를 힘입어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에요 히브리서 915절에 나오죠

 

그럼 잠깐 복습해 보세요 오늘 우리가 지금 이 10장 착한 목자와 양에 비유를 공부를 했는데 거기에 나오는 무대 셋트와 등장인물들 그게 무슨 의미인지 그건 다 인제 이해가 가시죠.! 그렇게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하느님에 언약속에서 그 예수님을 아는 자들이기에 그에 음성을 분별할 수 있는 거에요

그런데 그 부르심은 언제 벌써 결정된 거에요 창조이전에 영원속에서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 구원은 실패될 수 없고 번복될 수 없어요

그러니 안심하시고 열심히 우리 하느님께 의탁하고 순종하면서 그 구원을 이 땅에서 피흘리기까지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 가는 거에요. 구원은 과거시제 현재시제 미래 시제가 있다 그랬죠 이미 영원속에서 완성되었지만 반드시 우리는 이 땅에서 손발을 움직여 구원을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그 삶을 열심히 살아보자구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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