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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박기석 신부님 제24회 마르 6,30-44 오천 명을 먹이시다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21-04-26 조회수1,392 추천수0 반대(0) 신고

제24회 마르 6,30-44 오천 명을 먹이시다 / 박기석 신부님




 

안녕하십니까? 복음의 시작 마르코가 전한 예수 박기석 신부입니다. 열두 제자의 파견을 전하다, 헤로데 안티파스의 여론 조사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죽음 이야기를 삽입해서 중간에 전해줬던 마르코가 이제 다시 열두 제자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마르 6,30)

이전에 예수님께서 여장 규범과 전도 규범을 가지고 제자들을 파견하셨어요. 고향 나자렛에서 무시당한 다음에. 그런데 그들이 파견된 후에 돌아와서 그들이 활동했던 거에 대해서 보고합니다. 여기서 '사도'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지요. 마르코복음에서는 3,14에 예수님께서 처음 많은 제자들 가운데 열두 사도를 세우셨다. 열두 사도 명단을 언급할 때 '사도'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권한을 부여받은 대리자라는 뜻의 사도. 그런데 그 사도라는 단어가 지금 다시 6,30에 쓰이고 있어요.

 

마르코복음에서는 이렇게 두 번만 처음 열두 사도 명단과 사도들이 파견돼서 돌아와서 자신들이 활동한 것을 보고할 때 이때만 사도라는 단어가 딱 두 번 쓰입니다. 물론 제가 나중에 설명을 드리겠습니다만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다."라고 하는데요. 한 번 사도가 영원한 사도는 아닙니다. 사도로써 불림을 받았지만 사도로서 살아가는 게 더 중요한 거예요.

 

왜 더 이상 사도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았는가? 우리는 단순하게 사도들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배반한 제자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사도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거죠. 여하간 마르코는 지금 사도들이 돌아와서 예수님께 보고하는 내용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행하고 가르쳤던 모든 것을 보고하는데요. 그들이 행한 것은 예수님께서 공적 직무를 수행하셨던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치유해 주셨고, 사실 대부분의 경우 예수님은 제일 먼저 어느 마을에 들어가시든 제일 먼저 하셨던 것은 가르침을 주셨지요. 그리고 병자를 치유해 주시고, 더러운 영들도 쫓아내 주셨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 파견하셨던 제자들(사도) 또한 마찬가지로 가르침을 먼저 행했고 하느님 나라 복음을 전했겠죠. 그리고 병자 치유와 악령을 쫓아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당신께서 행하신 것들의 연장선에서 사도들도 행하였다는 거죠. 물론 그 효과는 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마르 6,31)

 

기회가 닿는 대로 몰려드는 군중들을 피해서 외딴곳으로 가셔서 쉬시며 기도하였습니다. 하지만 더욱더 몰려드는 군중들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자들도 예수님께 받은 권한으로 같은 행동을 취했고, 이에 사람들이 보고 몰려들었던 거죠.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제자들에게도 같은 상황이 연출되자 예수님은 일단 제자들이 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마르 6,32) 32절의 내용을 통해서 지금 무대가 바로 갈릴래아 호숫가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어요.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마르 6,33)

 

그런데 여러분들 여기서 갈릴래아 호수를 횡단한 게 아니에요. 가로질러 간 것이 아닙니다. 배를 타고 가로질러 갔다면 사람들이 육로로 따라갈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군중들이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는 얘기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가 어떻게 갔다는 거죠. 횡단한 게 아니라 해변가를 따라갔다는 거죠. 해변가를 따라서 배도 움직였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육로로 먼저 뛰어갈 수 있는 겁니다.

 

이거는 여러분들이 성지순례를 가서 갈릴래아 호수를 보신 분들은 그림이 그려져요. 갈릴래아 호수가 바다처럼 굉장히 넓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반대편으로는 걸어서 먼저 갈 수가 없어요. 해번가를 따라서 배가 갔을 때만 육로로 더 빨리 갈 수 있는 거죠. 육로를 이용해 예수님과 제자들보다 먼저 외딴곳에 먼저 도착한 군중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4)

 

제자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주시고자 하셨던 예수님이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계획은 뜻대로 되지는 않아요. 예수님은 저녁 그 상황에서 또 다른 반응을 보여 주십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가엾이 여기다.' 하느님이 당신의 백성을 대하는 감정을 표현할 때 선택적으로 사용하는 동사 중에 하나가 바로 '가엾이 여기다.' 입니다. 이 동사의 명사형이 스플랑크논이라고 하는데 사실 이 말이 우리 말로 번역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 가엾이 여기다 → 명사형 스플랑크논

ㅡ 내장, 심장, 마음

ㅡ 마음 가득 자비가 가득하다 , 애태우다 , 애끓다의 애 (哀)

 

우리말로 내장, 심장, 마음으로 번역되지만 마음 가득 자비가 가득 차다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제대로 그 뜻을 살려서 번역을 하자면 애태우다, 애끓다. 부모가 자녀 때문에 애끓는다는 표현 있잖아요. "너 왜 이렇게 내 속을 태우니, 애를 태우니!" 그런 식의 표현이 가장 정확한 표현 번역이 아닐까 싶네요.

 

예수님의 마름이 이렇게 애가 끓도록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자비를 가지셨다. 가엾은 마음을 가지셨다는 것인데요. 그 이유는 그들이 처한 상태 때문입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양 떼는 예수님 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양들을 이끌며 그들을 돌보는 목자가 만약에 꾸벅꾸벅 존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광야의 거친 동물들 늑대나 이리가 와서 아주 그냥 쉽게 먹잇감으로 양들을 잡아먹겠죠. 즉 목자 없는 양 떼는 곧바로 흩어지게 마련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일컬어 양 떼로 하느님을 두고 양 떼를 돌보시는 목자로 묘사를 하는 내용이 종종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그들 앞에 서서 나가고 그들 앞에 서서 들어오는 사람, 그들을 데리고 나가고 그들을 데리고 들어오는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공동체가 목자 없는 양 떼처럼 도지 않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민수 27,17-17)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로 임명될 때 모세가 주님께 이렇게 기도하죠.

 

아합의 패전을 예언하는 대목에서 "그러자 미카가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 백성이 목자 없는 양 떼처럼 이 산 저 산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 (1열왕 22,17) 이런 대목을 통해서 목자는 하느님 그분의 백성을 양 떼로 표현하는 구약성경의 모습을 볼 수 있죠. 목자라는 모티브는 구약성경에서부터 잘 알려진 것으로 결국 하느님 자신을 가리키는 상징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군중을 목자 없는 양으로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은 하느님의 신성을 공유하신 분, 즉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떼를 지어 모여드는 사람들이 당신께 원하는 것, 바로 삶의 길을 제시해 주고 보호막이 되어 달라는 것이라고 파악을 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들의 원의를 들어주셔요.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많은 것들을 군중들에게 가르쳐 주시기를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지금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제자들이 와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마무리되어야 함을 알려주고 있어요. "어느덧 늦은 시간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마르 6,35) 아마도 해 질 무렵, 저녁 식사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는 말을 하려는 거죠.

 

그리고 그 결과로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하나의 제안을 합니다. "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 (마르 6,36)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께 영적, 물적 도움을 얻고자 찾아온 이들을 그저 빈손으로 돌려보내고 싶지 않으셨던 거 같아요. 제자들에게 이렇게 얘기하시죠.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마르 6,37ㄱ)

 

이미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권한을 주셔서 제자들을 파견하셨었습니다. 그러면서 여장 규범과 전도 규범을 주시면서 분명히 하셨거든요. 그러기에 이제 제자들도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지녀야 돼요. 예수님과 같은 권한을 받아서 같은 가르침, 기적, 병자 치유와 더러운 영들을 쫓아냈거든요. 그렇다면 권한만 예수님과 같은 권한을 갖고 싶어하고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갖지 않으려는 거는 욕심쟁이에요. 그거는 자기(인간)을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는 거죠.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어떤 마음이죠? 조금 전 언급했던 애끓는 마음, 군중을, 백성을 양 떼로 여기면서 사랑하려는 마음, 그 마음을 제자들도 지녀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께 부여받은 권한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치유하며 회개하라고 선포했던 제자들이 지금 자신의 육체적 피로와 배고픔 앞에서는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마음,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 버린 거죠. 그런 그들을 예수님께서 다시 일깨워 주시려고 말씀하셨던 거예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과 직무를 계속 이어가기를 원하셨던 겁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전혀 다른 입장의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은 마음, 가엾은 마음, 애가 끓는 마음을 갖기를. 그래서 그렇게 제자들은 예수님과 하나 되어 있음을 환기시켜 주시려고 하시는 것이죠.

 

하지만 제자들의 제안이 또 전혀 틀린 것이라고 볼 수도 없어요. 합리적인 부분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외딴곳에서 무엇을 찾아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거예요. 지금 사람들의 수가 정확하게 얼마인지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단 알 수 있는 부분은 제자들의 수, 12명이죠. 많은 군중과 열두 명. 제자들이 만약 음식을 지니고 있다면 그들이 쉬면서 먹으려고 했던 13인분, 예수님 것까지 13인분은 갖고 있었을 겁니다.

 

이 갈릴래아에서 어부들이, 농부들이 하루 먹을 도시락은 갖고 다녔을 것이라고 본다면 13인분은 있었을 거예요.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내어놓는 것은 아예 생각도 못 했을 겁니다. 그들도 지쳐 있었고. 지금 제자들이 파견돼서 돌아와서 보고한 다음에 쉬고 싶어 해서 예수님도 허락했던 터에 군중들이 따라오니까 예수님이 마음이 약해서 가르침을 줬고, 그 마음이 약해서 먹을 것을 주려고 하는 것이거든요.

 

여러분 예수님의 약점은 예수님이 완벽한 분인데 단 하나 약점이 마음이 약한 거예요. 그래서 더 주려고 하시는데 제자들은 그 마음을 못 쫓아가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하라고, 군중들에게. 어떻게 보면 제자들이 나쁜 생각 한 거 아닙니다. 합리적인 청을 드린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 이 모든 상황을 스스로 해결하라고 지시를 내립니다. 제자들의 반응을 볼까요?

 

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 어치나 사다가 그들에게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다. (마르 6,37)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을 주석하면서 합리적인 측면보다는 존경심이 덜 담긴 투로 예수님께 제자들이 대꾸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전의 바리사이나 율법 하자들의 말투처럼 말이에요. 예수님의 지시가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제자들이 더욱 드러내려고 그랬다는 거죠.

 

물론 머리뿐만 아니라 몸도 지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제자들이 대꾸했을 것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분이고, 존경하는 분이어도. 여러분들 졸릴 때 누가 깨우면 짜증 내요. 아이들이. 그런데 지금 한창 배가 고픈데 아무리 존경하는 스승이라도 짜증 날 수밖에 없겠죠.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머리와 몸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영적으로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는 거죠.

 

여기서 이백 데나리온 어치는 도대체 얼마나 가치 있는 돈이냐?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은으로 만들어진 로마 시대의 기본 화폐로서 한 데나리온은 당시 일반 노동자가 받는 하루 임금, 농촌 일꾼의 하루 품삯입니다. 마태 20,1-2를 보면 그 당시 마태오복음에서 나오듯 하루 농촌의 일꾼이 한 데나리온이 하루 노동 일급이에요. 그렇다면 한 데나리온으로 빵 12개를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빵 하나로 보통 세 끼를 연명했다고 하거든요.

 

계산해 보죠. 빵 하나로 3인 식사가 가능 겁니다. 빵 하나로 세 끼를 먹는 거니까. 이게 이백 데나리온이면, 한 데나리온으로 12개의 빵을 살 수 있잖아요. 그런데 빵 하나로 세 끼를 먹으니까 7,200명 분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음식 기적, 즉 빵을 많게 하신 기적으로 성인 남성만 오천 명이 먹었다고 지금 44절에 언급이 되는데 대략 맞아떨어지는 겁니다.

 

단 한 번 눈 대중으로 얼추 숫자를 알아맞힌 제자들의 눈썰미가 대단합니다. 여하간 제자들의 나름대로 계산된 질문은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에요. 외딴곳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께 "스승님, 당신을 모두 찾고 있습니다."(마르 1,37) 풍랑이 일었을 때 배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마르 4,38)

 

하혈 병을 앓고 있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었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습니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마르 5,31) 하고 빈정대는 말투로 얘기한 적이 있었죠.

 

이런 것을 통해서 보았을 때 제자들의 어떤 나름 계산된 질문이 여기서도 보인다는 겁니다. 사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권한을 주시며 파견하실 때 분명한 여장 지침을 주셨어요. 어떤 여장 지침을 주셨죠? "길을 떠날 때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마르 6,8)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그 명대로 파견되어 돌아와서 보고드릴 때 그들 중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잖아요. 그런데 갔다 와서 보고하면서 "저희 굶었어요." 이 얘기 본 적 없습니다. 굶었다는 보고는 없었어요. 굶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런 것들은 채워주신다는 거죠. 예수님은 분명 그들에게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과 병자를 치유할 힘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들의 한계를 넘어선 주님의 권한을 받아 파견된 사도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여전히 현실적인 배고픔과 육체적 피로감이 사도로서의 공인 의식을, 주님의 거룩한 도구임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알아보고서,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마르 6,38) 여장 규범 지침대로 하면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말아야 되는데 좀 갖고 있는 거예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오병이어죠. 적어도 전도여행 떠나면서 도시락은 갖고 다녔을 것이다. 예수님조차도 제자들에게 여장 규범을 주셨지만 실제로는 갖고 다니셨다는 걸 알 수 있죠.

 

빵은 평민들의 기본적인 일상 음식입니다. 당시에는 밀로 만든 빵과 보리로 만든 빵이 있었는데, 당연히 가루가 고운 밀가루 빵은 부자들의 몫이고, 가난한 이들은 거친 보리빵을 먹어야 했습니다. 보리빵은 거칠어서 치아에 많은 손상을 입혔다고 하죠. 그리고 소금에 절여 말린 물고기도 빵과 함께 갖고 다녔다고 해요.

 

빵 덩어리는 보통 둥글고 납작하죠. 작은 것은 지름이 약 2.5cm 큰 것은 20.3cm 정도 피파 빵이라고 하는 겁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가지고 다녔던 물고기는 건조한 것이거나 소금에 절인 거예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더운 곳이니까요.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열두 제자들과 예수님을 위한 저녁 식사로 충분한 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부족한 양이에요. 그런데 7,200명의 한 끼 식사로 이건 터무니없는 확실히 부족한 양이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어, 모두 푸른 풀밭에 한 무리씩 어울려 자리 잡게 하셨다."(마르 6,39) 자리 잡게 하셨다, 자리에 앉게 하셨다는 말인데 말 그대로 음식 주변에 모여 앉았다. 드러눕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비스듬히 누워서 밥을 먹었으니까요. 게다가 한 무리씩 어울려 앉게 하셨다는 것은 친교의 의미를 담고 있죠.

 

비록 그들이 외딴곳에 있지만 그렇다고 주님께서 주시려는 음식, 주님께서 베푸시는 성찬의 전례에서는 서로가 낯선 사람들이 아니라 친교를 나누는 이들이라는 사실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이들이 이렇게 음식이 있는 주변으로 친교를 이루며 한 무리를 이루어 앉은 곳은 푸른 풀밭이에요. 외딴곳에 그것도 사막에 푸른 풀밭이 있다니 아주 뜻밖이죠. 최적의 장소입니다.

 

푸른 풀밭이야말로 소풍 때 싸가지고 온 맛있는 점심을 먹기에 최적의 장소입니다. 아마도 이 음식 기적 사화의 전승자, 즉 최초의 사건을 어떤 신앙 안에서 전해 준 사람이 여기에 조금 추가적으로 넣은 것이 아닌가? 우리가 구약 시편 너무 잘 아는 시편 23편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파란 풀밭에 이 몸 뉘어 주시고를 연상했을 거라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았다."(마르 4,40) 이전과 상당히 다른 모습이에요. 사실 예수님이 계시는 곳마다 심지어 제자들이 주님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 파견돼서 가고 나서도 사람들은 몰려들었습니다. 군중들이 더욱더 몰려들었는데요, 무질서했어요. 얼마나 무질서하냐 하면 너무 몰려드니까 예수님이 가르침을 주실 때 4장에 배를 마련해서 거리를 두셨잖아요. 안전을 위해서.

 

그런데 그런 무질서한 군중과 지금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질서정연한 상태예요. 풀밭으로 한 무리씩 어울려 자리를 잡았다는 거죠. 그것도 백 명씩, 쉰 명씩. 이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백성이 어떻게 조직되었는가를 기술하는 대목들을 우리에게 떠올려 주는 장면입니다.

 

탈출기나 신명기에 보면 모세의 영도로 이집트에서 탈출한 백성들 이야기를 모세의 장인 이트로가 듣게 되죠. 그래서 이트로가 와서 모세에게 조언을 해 주는데 어떻게 하냐 하면, 천인 대장, 백인 대장, 오십인 대장, 십인 대장으로 백성을 세우게. 모세는 장인의 말을 듣고 그가 말한대로 다하였다. 모세는 온 이스라엘에서 유능한 사람들을 뽑아 백성의 우두머리 곧 천인 대장, 백인 대장, 오십인 대장, 십인 대장으로 삼았다.

 

하느님의 백성을 어떻게 조직하는가? 백성의 조직을 특히 10,50,100 단위로 쪼개서 조직화하는 모습을 구약성경이 제시하고 있고, 또 신명기에서도 모세가 유언을 남기면서 백성을 다시 조직하는데 여기서도 같은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바로 조직화하는 모습을 구약성경에서 10명씩, 50명씩, 100명씩 이렇게 조직하거든요. 바로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는 거죠.

 

그런데 지금 마르코복음에서는 이것을 정확히 백성들을 어떻게 그렇게 나눴는지에 대한 정확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음식을 먹기 위해서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모인 것. 이것은 마르코복음의 첫 번째 독자들 즉, 마르코복음의 공동체죠. 이 공동체가 성찬의 전례, 미사를 하기 위해서 이렇게 모인 것이 아니겠느냐?

 

이 구절에 대해서 교부 시대의 오리게네스 교부는 50명 단위는 회개를 상징하는 집단이고, 100명 단위는 믿음을 상징하는 집단이라고도 주석을 해 주고 있습니다. 회개한 이들과 믿는 이들은 상징적으로 풀밭에 앉아 있는 이들과 절반 혹은 전체로 연결되어 있다는 거죠. 따라서 하느님의 빵을 받을 준비가 된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마르 6,41)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기도하시는 장면이에요.

 

그런데 이것은 유다인들이 의례 밥을 먹을 때, 식사할 때 주인이나 대표자가 하는 식사 범절입니다. 예수님이 최후 만찬 때도 같은 기도를 하십니다. 그런데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다.'라고 하죠. 이거는 유다인들의 기도 자세인데요. 유다인들의 식사 때 대표자가 하는 찬미. 그것은 음식의 축복이 아니라 음식을 주신 하느님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최후 만찬 즉 오늘날로 하면 미사와 연결이 되겠죠. 그래서 여기에 초기 교회 신자들이 의미를 더 부여했다고 보시면 좋을 거 같아요. 수천 명을 먹이신 기적 사화들은 성찬례 즉 미사의 풍요함을 밝히는 그런 이야기죠.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하신 다음 빵을 쪼개어 사람들어게 나누어 주셨고, 이어서 물고기도 그렇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음식 자체는 단순해요. 당시의 소작농의 식사였습니다. 제자들은 그들 스스로가 군중들에게 음식을 마련해 주라는 예수님의 명을 이렇게 수행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내어 드렸고, 예수님은 그것을 가지고 기도하신 다음 나누어 주는 일이 제자들이 하는 일이었죠.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은 그분이 이 지상에서 제자들과 앞으로 가지실 마지막 식사, 최후의 만찬을 예시하는 것이라는 것. 그래서 여기서 사용되는 단어들이 나중에 최후의 만찬 장면에서 다시 사용된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기억을 하셔야 됩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우리가 하나 놓치고 있는 것이 있어요.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마르 6,42) 굶은 사람은 없죠. 그런데 여기서 조금 아쉬운 게 있어요.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배불리 먹은 사람들의 반응, 이전까지 예수님이 가르침을 주셨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있었어요. 악령을 쫓아내고 새로운 가르침을 주실 때 '참으로 놀랍다, 이전의 가르침과 다르다. 악령도 쫓아내시다니, 악령도 복종하다니, 새로운 권위다.' 이런 반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배불리 먹은 사람들의 반응이 없다는 거예요. 특히나 군중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제자들의 반응이 없다는 것은 좀 더 아쉬운 부분이죠. 평범한 일상적인 게 아닙니다. 식사 자체는 평범하지만 결과들, 작은 음식(오병이어)_에서 7,200 명이 먹도록 풍성히 넘쳤고 배불렀다는 그 기적, 이것에 대한 반응이 없다는 것. 군중들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죠. 하지만 제자들만큼은 달랐어야 되는데 제자들 또한 이 기적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르코는 오히려 여기서 아낌없이 베푸시는 예수님의 행동의 그 결과에 주목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충분히 만족할 때까지 모두 배불리 먹이실뿐만 아니라 또한 풍성히 그 음식이 남았다는 것에 일단은 우리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어요.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마르 6,43) 광주리의 숫자와 어느 숫자가 일치하죠? 제자들의 숫자와 일치합니다. 사람들이 먹고 남은 음식을 담아 보니 열두 광주리였다는 거죠. 열두 제자들이 처음에 가지고 있던 음식과 달리 마지막에 남은 음식들의 수가 너무나 많습니다.

 

"빵을 먹은 사람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었다."(마르 6,44) 마르코는 오직 음식을 먹은 이들이 장정만도 오천 명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구약성경에 예언자 엘리사가 20개 빵으로 100 명을 먹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2열왕 4장에서 확인할 수 있죠. 그런데 예수님이 이보다 더 많은 숫자, 더 많은 이를 먹이고도 음식이 남았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엘리야보다도 더 큰 인물이라는 것을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죠. 더 큰일을 이루셨다는 겁니다.

 

마르코는 6장에서부터 성격이 전혀 다른 두 개의 잔치를 우리에게 이야기해 줬습니다. 첫 번째는 지난 시간에 살펴봤던 헤로데 안티파스의 생일잔치였어요. 그 생일잔치는 어땠습니까? 왕궁에서 벌어졌고 진수성찬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을 가지고 했지만 결과는 타락과 세례자 요한의 죽음이라고 하는 그런 잔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예수님의 잔치는 어때요? 산해진미가 아니라 평범한 음식인데 풍성히 넘쳤죠. 7,200 명이나 먹고도 열두 광주리에 음식이 가득 찼으니까요. 잔치는 똑같은 잔치이지만 그 결과는 달랐다는 것. 풍성히 남았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만들어질 더 큰 잔치, 그야말로 소중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질 만찬을 예시하는 그런 잔치요 식사였습니다.

 

지금 이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죽음, 즉 그 앞서 미리 보여주신 유혈 제사, 최후 만찬 이것을 우리가 재현하고 있죠. 바로 성찬의 전례, 미사입니다. 6장에서 드러나는 두 잔치, 그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천상 잔치와 이 땅에서의 속물적인 잔치라는 너무나 선명한 대조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음을 오늘 우리 같이 확인하였고요.

 

다음 시간에는 지난번에도 마찬가지지만 4장 하느님 나라의 비유 다음에 시험을 봤어요. 그것도 호숫가 배 위에서. 빵의 기적도 자연 음식 사화인데요, 이것도 이제 제자들이 의미를 깨우쳤는지 시험을 봐야 되겠죠. 다음 시간에 기말시험을 어떻게 지루는지 한 번 보겠습니다. 제자들이 여기서 시험을 떨어지는지 성공하는지 예수님이 또 한 번 같은 물 위에서 또 시험을 보셔요. 다음 시간에 어떻게 시험을 보게 되고 제자들이 시험을 성공했는지 확인해 보도록 합시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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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박기석 신부님, 오천 명을 먹시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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