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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아버지와 나는 하나 (요한10,22-30)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4-27 조회수1,139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4월 27일 화요일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아버지와 나는 하나 (요한10,22-30)

2021년 4월 27일 (백) 부활 제4주간 화요일

1독서<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사도11,19-26)

19 스테파노의 일로 일어난 박해 때문에 흩어진 이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티오키아까지 가서유다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

20 그들 가운데에는 키프로스 사람들과 키레네 사람들도 있었는데이들이 안티오키아로 가서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이야기하면서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

21 주님의 손길이 그들을 보살피시어 많은 수의 사람이 믿고 주님께 돌아섰다.

22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가라고 보냈다.

23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24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25 그 뒤에 바르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타르수스로 가서,

26 그를 만나 안티오키아로 데려왔다그들은 만 일 년 동안 그곳 교회 신자들을 만나며 수많은 사람을 가르쳤다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화답송 시편 87(86),1-3.4-5.6-7(◎ 117116,1)

◎ 주님을 찬양하여라모든 민족들아◎ 알렐루야.

○ 거룩한 산 위에 세운 그 터전주님이 야곱의 어느 거처보다 시온의 성문들을 사랑하시니하느님의 도성아너를 두고 영광을 이야기하는구나

○ 나는 라합과 바빌론도 나를 아는 자로 여긴다보라에티오피아와 함께 필리스티아와 티로를 두고, “그는 거기에서 태어났다.” 하는구나시온을 두고는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여기서 태어났으며지극히 높으신 분이 몸소 이를 굳게 세우셨다.” 

○ 주님이 백성들을 적어 가며 헤아리신다. “이자는 거기에서 태어났다.” 노래하는 이도 춤추는 이도 말하는구나. “나의 샘은 모두 네 안에 있네.” 

 

복음<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10,22-30)

22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때는 겨울이었다.

23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24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26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백) 부활 제4주간 화요일 - 5월09일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제1독서(사도 11,19-26)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가라고 보냈다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22~24)

 

사도행전 11장 22절의 '그들에 대한 소문'은 안티오키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방인 회심사건을 말한다.

예루살렘은 안티오키아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져 이방인이 주님께 돌아온 사안이기에예루살렘 교회는 그 소식에 관심을 갖고 들었던 것이다.

 

'교회는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에 해당하는 원문을 직역하면, '교회의 귀들에 소문()이 들렸다'이다.

원문에서는 '귀들'(the ears)에 해당하는 '타 오타'(ta ota)를 써서 예루살렘 교회보다는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 개개인들이 안티오키아 교회에 대한 소문에 큰 관심을 갖고 들었음을 강조하고 있다또한 '듣고'에 해당하는 '에쿠스테'(ekusthe)는 '아쿠오'(akuo)의 수동태로서 어떤 소문이 외부에서 들려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 소문의 내용은 안티오키아에서 복음 선포자를 통하여 복음이 수많은 이방인에게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안티오키아의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소식은 예루살렘 교회로 하여금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게 했다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안티오키아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관심사에 대하여 점검하기 위해 교회 지도자를 파견한 것이다.

 

이것은 사도들이 중심이 된 모교회로서 다른 교회를 보살피려는 사랑과 관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사도8,14).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는 이미 베드로 사도를 통한 경험으로 이방인에 대한 편협한 편견을 버렸기에바르나바를 멀리 떨어져 있는 안티오키아에까지 보낼 수 있었다.

 

여기서 '보냈다'에 해당하는 '엑사페스테일란'(eksapesteilan)의 원형 '엑사포스텔로' (eksapostello)는 어떤 사람에게 임무를 맡기어 어떤 장소로 보낸다는 의미로 '파견하다', '파송하다'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그들이 바르나바를 선택하여 파견한 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 선교를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롭게 개종한 자에 대한 관심과 염려와 더불어 안티오키아에 있는 믿는 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싶었다.

그래서 믿음 안에서 형제들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마음을 담아서 예루살렘 교회의 주요 인물 가운데 하나인 바르나바를 보냈던 것이다.

 

'바르나바'(Barnabas)는 '휘오스 파라클레세오스'(hyos parakleseos), 즉 '위로의 아들', '권면의 아들'이라는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권면과 위로의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사도4,36) 안티오키아 교회 파견에 적합한 인물이었다그는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인으로서 출중한 교사였고 선교사였으며사도 바오로의 협력자로서 초대 교회 복음 전파의 중심인물 가운데 하나였다(사도9,27; 11,30; 12,25; 13~15; 1코린9,6; 갈라2,1.9.13; 콜로4,10).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파견된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에 도착해서 그곳의 회심한 이방인들과 몇몇 복음 전파자들을 함께 만나보고그곳에 하느님의 은총곧 성령께서 임재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기뻐한다그리고는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한다.

 

여기서 '격려하였다'고 하는 '파레칼레이'(parekalei)는 여러 말로써 '권면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파라칼레오'(parakaleo)의 미완료 과거 시제이다.

희랍어에서 미완료 과거 시제는 반복과 계속을 나타내므로이러한 표현은 바르나바의 권고가 그들에게 계속되고 반복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이것은 바르나바의 따뜻하고 세심한 기질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는 뜻은 '마음에 분명한 목적과 뜻을 가지고 주님께 확고부동하게 늘 헌신하고 있으라'는 것이다.바르나바가 이렇게 권면하는 이유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들에게 많은 박해와 시련들이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르나바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보다도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주님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신앙에 있어서 지속성을 갖는다는 것은 받은 축복과 은혜를 상실하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한다는 의미이며제자로서의 기본자세이기도 한 것이다.

 

한편사도행전 11장 24절의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실한 사람'이라고 나온다여기서 '사실'로 번역된 '호티'(hoti)는 '왜냐하면', '~때문에', '~이므로'라는 뜻을 지닌 접속사이다.

이 단어는 바르나바가 안티오키아 교우들에게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 계속 머물러 있으라'고 권면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가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착한'에 해당되는 단어 '아가토스'(agathos)는 '놀라다', '경탄하다', '높이 평가하다'의 '아가마이'(agamai)와 '감탄할 만한', '훌륭한'의 '아가스토스'(agasthos)의 같은 계열의 단어로서 주위 사람들이 경탄하고 높이 평가할 정도로

바르나바의 성품이 훌륭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바르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사람이었다원문은 '플레레스 프뉴마토스 하기우 카이 피스테오스'(pleres pneumatos hagiu kai pisteos)인데여기서 '플레레스'(pleres)는 물이 가득 차서 넘치는 정도까지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형용사이다.

 

이 단어는 바르나바에게 있는 성령과 믿음이 그의 언어표정사고삶을 통해 외적으로 넘치도록 표현이 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바르나바는 영적으로 풍부한 은혜를 소유한 사람으로서 그의 삶 가운데서 이러한 사실이 입증되고 있었던 것이다그 결과로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여기서 '인도되었다'는 '프로세테테'(prosethete)의 원형은 '프로스티테미'(prostithemi)로서수효를 '더하다', '가입시키다', '부과하다'는 뜻이다루가에게 있어서 이 단어는 교회 성장을 의미하는 전문 용어로 쓰였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르나바로 말미암아 안티오키아 교회가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그 모든 것을 이루신 주체가 하느님이셨다는 것이다이것은 '프로세테테'(prosetethe)가 수동형이라는 사실이 증명해준다.

그렇게 때문에 교회가 성장했다고 해서지도자들이 자신을 지나치게 과신하여 그 배후에서 역사(役事)하시는 하느님을 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종교 행위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믿음

(로마노)를 절대 빼앗기지 않겠다약속하신 주님감사합니다.

 

(요한10,22-30)

22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때는 *겨울이었다.

여름이 지난 겨울입니다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를 뜻합니다.

 

(예레8,19-20) 19 이 땅 저 멀리서부터 내 딸 내 백성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주님께서는 시온에 안 계신가시온의 임금님께서 그곳에 안 계신가?” 어쩌자고 그들은 우상들로낯선 헛것들로 나를 화나게 만들었는가?  20 수확이 끝나고 여름이 지났건만 저희는 아직도 구원받지 못하였습니다.

수확은 구원을 뜻합니다그 구원의 때에 구원을 받지 못한 겨울입니다헛 것들 때문입니다그 겨울의 성전 축제가 부서져야 합니다.

내 뜻을 구하기 위해 하느님께 제물을 바쳤던 그 헛된 거래그 장사의 성전을 부수고우리의 생명빛이신(요한1,4) 참 성전이신 예수님을 깨달아야 합니다그 성전과 하나가 되는 것참입니다.

 

(요한2,16.19.21)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 ‘사흘 안에를 직역하면 세 번째 것으로라 했습니다첫 번째보이는 건물성전두 번째예수님세 번째보호자 성령입니다.(요한14,16참조)

 

(1코린6,19)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

 

(로마8,9) 그러나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성전 봉헌축제그 행위가 아닌 내가 예수님의 영을 모신 성전그리스도인 임을 깨닫는 것이 참입니다.

 

23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참 성전이신 예수님께서 그분을 모형한 건물성전에 밀려 성전의 맨 끝자락에 있는 솔로몬 주랑에 계십니다참 성전이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24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예수님은 여러 번에 걸쳐 아버지의 일을 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요한6,38-39) 38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구원의 메시아 예수님 입니다.

 

26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요한1,9-11)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하늘의 생명을 위한 신앙인은 알아듣습니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멘.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우리도 영원한 생명을 얻어 그분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그래서 돌아가시기 전날 기도하십니다.

 

(요한17,20-21) 20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21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아버지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죽음으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여러 표징으로또 말씀으로 가르쳐도 믿지 않는 이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돌아가십니다.

믿지 못하는 완악한 마음그 꿈뜨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짊어지시고 그들의 죄로 대신 죽으시는 것입니다빼앗기지 않으시기 위해이제 남은 건 우리의 몫입니다.

 

(요한6,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종교 행위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믿음입니다깨달음으로 얻을 수 있는 믿음입니다아멘.

 

 

부활 제4주간 화요일 미사

 

 부활 제4주간 화요일 복음(요한10,22~30)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30)

 

요한복음 5장 17절에서 간접적으로 밝힌 예수님과 성부 하느님의 일체성이 여기서는 명시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즉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성부 하느님과 본질과 근본에서 일치됨을 밝히신 것이다.

 

여기서 '하나'로 번역된 ''(hen; one)은 중성이며여기서 중성이 사용된 것은 희랍어 어법을 잘 반영한 것이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 철학에서 '토 헨'(to hen; the one)은 존재의 궁극적인 통일성영원성불변하고 파생되지 않는 단일한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서구별이 없는 존재의 동일성(oneness)을 나타낸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배경을 지니는 ''(he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성자가 성부와 동일한 본질임을 밝히셨는데아버지와 아들은 협력자의 관계 이상이며본질상 본래 하나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는 존재의 통일성에 근거하기 때문에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시실은 '~이다'로 번역된 '에스멘'(esmen; are)이 '에이미'(eimi)의 현재 시제라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희랍어에서 현재 시제는 현재와 계속그리고 변함없음을 나타내므로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이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심을 알게 한다.

 

예수님의 이같은 주장은 모여 있던 유대인들로 하여금 당장 돌을 집어들어 던지게 할 만큼 커다란 분노를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예수님의 선언은 신성(神性모독의 극치였던 것이다.

 

하지만 실로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가 되실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하느님과 동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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