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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제4주간 토요일 ... 독서, 복음서 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4-30 조회수965 추천수0 반대(0) 신고

1독서<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3,44-52

44 그다음 안식일에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도시 사람들이 거의 다 모여들었다.

45 그 군중을 보고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모독하는 말을 하며 바오로의 말을 반박하였다.

46 그러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담대히 말하였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47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땅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

48 다른 민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되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졍해진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되었다.

49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50 그러나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과 그 도시의 유지들을 선동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하게 만들고 그 지방에서 그들을 내쫓았다.

51 그들은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나서 이코니온으로 갔다.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1독서 주해

44

루카는 바오로를 위대한 설교가요 성공적 선교사로 소개한다. 그가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큰 반향을 일으키자 유다인들이 시기하여 그에게 적대적 태도를 취한다.

 

45

유다인들이 모독을 한 대상은 바오로가 아니라 예수였다(26,11참조).

 

46

9,27-28에도 나오는 대담하다는 표현은 확신에 찬 철학자의 말에 부여되는 특징이다.

선교과정은 하느님 계획에 따라 진행된다. 먼저 유다인들, 다음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바오로는 사도행전에서 유다인들로부터 이방인들에게 선교의 발걸음을 돌리겠다고 세 번 선언한다. 그러나 여기서와 코린토에서의 두 번째 선언 뒤에도 유다인들을 향한 설교를 계속한다.

 

47

인용된 이사 49.6은 주님이 이방인 선교를 직접 명령하셨다는 논증으로 제시된다. 야훼의 종의 노래에 나오는 이 인용문은 루카 2.32에서 시므온의 예언으로 시작되어 사도 1.8에 소개된 예수의 예언에 이어진다. 바오로는 여기서 분명히 땅 끝까지 그분의 증언을 옮기게될 이방인들을 위한 빛과 동일시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원래 이 빛을 예수 그리스도로 보았다.

 

48

27절에서 루카는 이스라엘 가운데 지도자들과 평범한 사람들 사이를 구별했고 여기서는 유다인들의 반응과 이방인들의 반응 사이를 구별한다. 기뻐하는 반응은 하느님의 방문을 받아들인다는 표시다. 유다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배척하고 스스로를 영원한 생명에 부적합한 자로 판결한 것과는 달리, 이방인들은 같은 하느님의 말씀을 환영하고 찬양함으로써 자신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 합당한 자임을 드러낸다.

 

49

어떤 지방에서 선교가 성공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루카의 독특한 표현.

 

50

바오로에 대한 유다인들의 시기는 폭력으로 이어진다. 디아스포라 회당 안에서는 부인들이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 부인들이 유다교에 개종한 사람들인지 아니면 단순히 유다교에 호의를 가진 사람들인지 알기가 어렵다. 루카가 13장에서 경건한이라는 형용사를 어떤 특정한 그룹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지 않고 다소 자유롭게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게 적용하기 때문이다.

 

52

루카는 말씀이 어떻게 전파되었는지뿐 아니라 지역 공동체들이 어떻게 번창해 갔는지에도 관심을 보인다. 제자들이라는 말로 독자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복음<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7-1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서 주해

7

일부 고대사본에는 여러분이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입니다로 되어 있다. 제자들에 대한 비난이 담겨 있다. 아마도 필립보에 대한 예수의 책망으로 보고 필사자들이 고쳤을 것이다. 하지만 위 본문이 그러나 이제 이미 여러분은 ...”(7)이란 문맥에 내용상 더 적절히 연결된다. 6ㄴ절에도 순조롭게 연결된다. , 예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가지 못하지만, 그를 통해 참으로 아버지께로 간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소극적 표현이 적극적 표현으로 다시 언급된 셈이다.

 

또한 아버지께로 간다아버지를 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나를 알면으로 달리 표현되는데, 따라서 7절은 예수가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무이한 이라는 6절의 내용을 더욱 강하게 일깨우고 예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강화시킨다고 볼 수 있다. “안다란 표현은 인격적 관계를 가지게 되는 공동체 형성을 뜻한다(10,14-15 참조).

 

알 것입니다라는 미래 형태는 일종의 약속을 가리킨다. 그 약속이 이제 이미예수 자신 안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약속의 현재적 의미가 강조된 것이다. 지상 예수를 믿음으로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보는 자란 뜻이다. 아버지께로 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아들, 지상에 현존하는 예수를 보고서 믿어야 한다는 필수성이 강조된 말로 이해할 수 있다.

 

8

일종의 이의제기로서 필립보의 이 소청은 아직도 예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에 대한 믿음도 부족함을 시사한다.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란 말은 일종의 신현을 가리키는 말로서 아버지를 직접 볼 수 있게 해달라는 뜻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다른 대목에서는 보여주다란 말이 직접적인 하느님의 계시를 가리킨다. 그리고 아무도 하느님을 직접 보지 못했다는 말이 강조되어 있다. 따라서 당시 주변 종교의 신비가들의 사고가 반영된 듯하다.

 

9

예수의 말과 일들을 통해 예수의 신현과 정체를 이미 알았어야 했다는 것을 뜻한다.

필립보를 책망하는 말로서, 하느님을 직접 눈으로 보려 하거나 특별한 환시적 신체험을 촉구하지 말고 오히려 예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라는 촉구다.

 

10

아버지와 예수가 완전히 일치되어 있음을 표현한다.

아버지께서 예수 안에 계시고 예수를 통해 계시하시며 예수 안에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예수의 말들은 예수 자신의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들은 것이며 아버지께서 위임한 것들이라는 뜻이다.

예수가 행하는 일들이 곧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들이라는 뜻이다.

 

11

아버지와 완전히 일치된 예수 자신과 예수의 말들을 믿으라는 뜻이다.

적어도 그 일들 자체를 보아서라도 믿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일들은 아버지와 예수가 함께 일치하여 행하는 것들로서 예수를 증언하는 것들 곧 표징을 가리킨다. 이 일들은 눈으로 볼 수 있는 표징이요 증언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도록 이끌어 주고 도와 주는 근거가 된다.

 

12

믿음을 가지고 제자가 된 자들에게 예수가 앞서 언급된 일들과 관련해서 말한 약속이다. 믿는 제자들이 행하는 일들은 우선 예수 자신의 일들로 강조된다. 원칙적으로 예수 자신이 그 일들을 행하며 아버지께로 떠나간 다음에도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또한 그 일들은 예수가 지상에서 행하는 일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도 시사된다. 그 일들은 단순한 기적이 아닌 표징으로서 생명을 주는 예수 자신을 가리키고 보여주는데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예수의 일들보다 더 큰 일들은 예수와 함께 이루는 일들로서 믿음의 효과에 대한 약속을 가리키며, 예수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에 제자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영광스럽게 된 예수의 일들이요, 그 일들의 끝이 없다는 뜻에서 더 큰 일들로 언급된다. 이런 일들은 예수가 아버지께로 간 다음 제자들의 활동을 통해 가능해진다. 하지만 예수의 일들을 보충하거나 능가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13

제자들의 청을 다 들어주겠다는 또 다른 약속이다. 그러나 내용상 12절의 약속과 연결된다. 제자들이 예수의 일들을 행하고 그 일들보다 더 큰 일들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예수가 아버지께로 가서 아버지 곁에서 그들의 청을 들어주고, 그들이 청하는 것을 또한 함께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자들의 청은 내 이름으로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 어떠한 청이라도 예수가 다 들어준다는 오해가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 단서는 예수와의 깊은 결속관계 속에서 예수에게 전적으로 신뢰하며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제자들의 청을 확실하게 다 들어주게 된다는 것은 예수가 그들을 파견했고 그들과 결속관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고 또한 예수 자신이 그들의 일을 함께 행하고 더 큰 일들이 그들에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원하기 때문이다.

 

아들을 통하여는 직역하면 아들 안에서

예수가 제자들의 청을 들어주는 동기와 목적이 시사된다. 그것은 마치 예수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주어진 일들을 이행함으로써 아버지를 지상에서 영광스럽게 하는 것과 같다. 제자들은 예수가 행한 일들을 하고 예수도 제자들이 청하는 것을 들어주기 때문에 그들의 일들이 바로 예수 자신의 일들이 된다.

 

14

13절의 약속이 반복되지만, 예수 자신이 기도의 대상으로서 또한 청을 들어주는 자로서 강조된다. 즉 예수 자신이 제자들을 위해 계속 활동하는 자로 더욱 부각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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