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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제5주일 ... 독서,복음서 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5-01 조회수1,112 추천수0 반대(0) 신고

해마다 5월의 첫 주일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죽음의 문화의 위험성을 깨우치고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참된 가치를 되새기는 생명 주일이다. 한국 교회는 1995년부터 5월 마지막 주일을 생명의 날로 지내 오다가, 주교회의 2011년 춘계 총회에서 이를 생명 주일로 바꾸어 5월의 첫 주일로 옮겼다. 교회가 이 땅에 더욱 적극적으로 생명의 문화를 건설해 나가자는 데 생명 주일을 지내는 뜻이 있다.

 

 

 

1독서<어떻게 집에서 주님을 뵙게 되었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9,26-31

그 무렵

26 사울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제자들과 어울리려고 하였지만 모두 그를 두려워하였다. 그가 제자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27 그러나 바르나바는 사울을 받아들여 사도들에게 데려가서, 어떻게 그가 길에서 주님을 뵙게 되었고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는지, 또 어떻게 그가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였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28 그리하여 사울은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였다.

29 그리고 그리스계 유다인들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였다.

29 그리고 그리스계 유다인들과 이야기도 하고 토론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사울을 없애버릴려고 벼르고 있었다.

30 형제들은 그것을 알고 그를 카이사리아로 데리고 내려가 다시 타르수스로 보냈다.

31 이제 교회는 유다와 갈릴래아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1독서 주해

27

바르나바는 격려의 아들”(4.36)이라는 별명에 걸맞은 행동을 한다. , 사울과 예루살렘 지도자들 사이에 중재 역할을 떠맡는다. 그러나 루카는 그가 어떻게 사울의 회심을 알게 되었는지는 밝히지 않는다. 이 구절의 내용은 갈라 1,17-19에 나오는 바오로 자신의 고백과 정면으로 상치된다. 서간에 따르면 그는 회심한 뒤에 3년이 되기까지 예루살렘을 방문하지 않았으며, 3년 뒤에 방문 때에도 주님의 형제 야고보 이외에 다른 제자들을 보지 못했고 게파와만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으로 고백한다.

 

28

드나들며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아직 지상에 머무르실 때의 행적을 묘사하는 데도 이용된다. 이 구절에 따르면 바오로는 예루살렘 공동체와 긴밀한 관계와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바오로 자신의 보고와는 거리가 멀다. “나는 유다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들과는 전혀 안면이 없었습니다”(갈라 1.22).

 

29

스테파노의 경우처럼(6.9) 그리스인들은 바오로에게도 적대적이며 그의 목숨을 노린다.

 

30

예루살렘의 형제들은 이제 바오로를 아낀다. 타르수스로 간 바오로는 잠시 이야기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그가 그곳에서 당분간 조용히 머물렀다는 것을 시사한다. 바오로는 이 타르수스 은거로 온 교회가 평온해진다.

 

31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의 지리적 순서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팔레스티나의 지리를 보면 유다가 제일 남부에 위치하고, 사마리아가 중앙에, 그 다음 갈릴래아가 북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대목에서 루카는 유일하게 갈릴래아에도 교회가 건설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의 순서는 루카의 신학적 구도에 따른 순서다. 루카의 선교 구도는 먼저 유다인들이 사는 유다와 갈릴래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그 다음 유다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위치한 사마리아인들의 땅을 거쳐, 이방인들의 영역에로 확장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들 팔레스티나의 공동체가 누리는 평화는 루카가 즐겨 사용하는 기쁜 소식과 연결된 평화의 개념이다.

 

 

 

2독서<믿고 사랑하라는 것이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3,18-24

18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 또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20 마음이 우리를 단죄하더라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21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이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22 그리고 우리가 청하는 것은 다 그분에게서 받게 됩니다.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

23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24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독서 주해

18

말과 혀로혀에서 나오는 말로라는 뜻이므로 행실과 진리로써역시 진리에서 비롯하는 행실로써라는 뜻이겠다. 행동하는 믿음을 강조한 야고 2,14-26과 내용상으로 일맥상통한다.

 

19

이로써는 사랑을 행함으로써라는 뜻이다. 19ㄴ 절의 경우 흔히 하느님 앞에서 우리 마음을 진정시킬 것입니다라고 번역하나 하느님 앞에서 우리 마음을 확신시킬 것입니다라고 번역하는 수도 있다.

 

20

그리스도인이 죄를 지어서는 안되지만 죄를 짓고 사는 게 현실이다. 죄를 지으면 으레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마련이지만 하느님의 용서를 믿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다고 한다. 1.8-2.2과 같은 내용의 말씀이다. 하느님이 용서해 주시는 까닭을 적시하여, 편협한 우리와는 달리 도량이 넓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서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은 한편으로 작죄하지만 또 한편으로 형제애를 실천하기도 하는 우리의 처지를 고려하신다는 뜻이리라.

 

21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지 않고 죄를 지을 수 없다는 확신대로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뿐더러 현시점에서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한다는 것이다. 2.28;4.17에는 종말 구원을 확신한다는 말이 있다.

 

22

우리가 양심에 거릴낄 게 없을 만큼 형제에 계명을 잘 지킨다면 하느님은 기꺼워하시고 우리의 청원을 다 들어 주신다고 한다. 5.14에도 같은 내용의 말씀이 있다. 어록에 나오는 청하면 들어주신다는 말씀 집성문을 참조하라.(마태7.7-11=루카11.9-13).

 

24

그리스도인들은 영에 힘입어 상호내주를 깨닫게 된다. “은 요한 1서에서 여기 24절에 처음 나오고 열한 번 더 나올 것이다. 요한 2서와 3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기름부음”(성령)을 받아, 구원의 진리를 알게 된다는 언명이 앞서 2.20.27에도 있었다.

 

 

 

 

복음<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4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6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릴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버린다.

7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8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서 주해

1

예수는 자기 자신을 포도나무라는 형상어로 제시한다. “이나 목자로 계시한 그리스도론적 내용과 같은 맥락이다. “참된은 포도나무의 질적 특성과 유일무이성을 강조한 말로서 예수의 특성을 규정한다. 문맥상 유이무이한 분임을 가리킨다.

일종의 비유로써 예수 안에서 당신 일을 하신다는 하느님 중심적 표현이다.

 

2

일종의 비유로서 포도나무에 대한 농부의 특별한 보호와 함께 포도나무의 유용성에 역점이 있다. 포도나무는 열매맺는 나무라는 것이다. 이 비유는 예수의 명령(4)과 경고(6)에서 그 의미가 구체화한다.

 

3

깨끗합니다깨끗이 (손질)하십니다와 어원이 같다. 제자들은 이미 깨끗해져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에 하느님(농부)깨끗이(손질)하실필요가 없다는 설명이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말한 그 말은 예수의 계시 말씀을 가리킨다. 예수의 말로 말미암아제자들이 이미 깨끗하게 된 것은 예수의 계시 말씀이 바로 영이며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 설명은 편집때 추가된 것으로 보며, 당시 세례성사 신학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한다. 제자들은 구원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15절 참조).

 

4

제자들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 안에 머물러야만 한다는 강한 권고다. 예수와 제자들의 상호내제적 실존이 시사된다.

예수와의 결속관계가 강조된 말로서 예수는 제자들이 열매를 맺도록 하는 근본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결속된 삶. 곧 믿음과 사랑으로 엮어진 공동체적 삶을 가리키고, 동시에 제자들의 복음선포적 활동의 결실도 내포한다.

 

5

포도나무와 가지들 비유가 바로 예수 자신과 제자들의 관계를 뜻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제자들의 모든 노력과 활동은 그들이 예수 안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그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6

제자들에 대한 경고로서 부정적인 경우를 강조한다. “(잘려진)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란 표현은 하느님을 농부로 비유한 내용과 관련되어 있다. “은 심판과 벌에 대한 상징과 수단으로서 지옥불을 연상시킬 수 있지만 여기서는 그런 우의적 의미가 아니라 비유의 한 요소에 불과하다. “말라 버린다는 표현과 함께 죽음에 빠져 구원될 수 없는 벌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그 벌은 예수 안에 머물지 않음으로써 자초한 심판으로 생각할 수 있다(3.18참조)

 

7

예수와 제자들의 상호 내재를 뜻한다. 예수의 말들은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예수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내 말들이 여러분 안에 머물러 있으면이란 말은 아버지와 일치되어 있는 나를 믿고 내 말들을 받아들여 내가 여러분 안에 머물러 있으면이라고 바꾸어 표현할 수 있다.

 

예수와의 결속관계에서 아버지께 청하는 모든 것을 뜻한다. 제자들의 이 요청은 문맥상 예수 안에 머물러 더욱 많은 열매가 맺도록 하느님께 청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가리킨다.

아버지께서 제자들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확신과 용기를 주는 약속이다.

 

8

참으로 예수의 제자임을 보여준다는 의미다.

예수와 결속된 제자들의 청을 들어주시는 하느님은 그들이 많은 열매를 맺어예수의 참된 제자로 드러남으로써 당신 영광 가운데 찬미받으신다는 뜻이다. 즉 제자들이 예수 안에 머물러 많은 결실을 맺는 것은 곧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 안에서 또한 예수를 통해 영광을 드릴 수 있다. “열매는 하느님과 제자들이 함께 맺는 성과요, 예수는 그 성과를 가능케하고 매개하는 장소”, 포도나무.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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