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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제5주일(생명 주일)] 나는 참포도나무요 (요한15,1-8)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5-02 조회수1,273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5월 2일 주일

[부활 제5주일(생명 주일)] 나는 참포도나무요 (요한15,1-8)

오늘 복음 - 4. 29. 부활 제5주일(이민의 날)

 

1독서<어떻게 길에서 주님을 뵙게 되었는지>(사도9,26-31)

26 사울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제자들과 어울리려고 하였지만 모두 그를 두려워하였다그가 제자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27 그러나 바르나바는 사울을 받아들여 사도들에게 데려가서어떻게 그가 길에서 주님을 뵙게 되었고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는지또 어떻게 그가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였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28 그리하여 사울은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였다.

29 그리고 그리스계 유다인들과 이야기도 하고 토론도 하였다그러나 그들은 사울을 없애 버리려고 벼르고 있었다.

30 형제들은 그것을 알고 그를 카이사리아로 데리고 내려가 다시 타르수스로 보냈다.

31 이제 교회는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다.

 

화답송 시편 22(21),26-27.28과 30ㄱㄴ.30-32(◎ 26ㄱ 참조)

◎ 주님저는 큰 모임에서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알렐루야.

○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앞에서 나의 서원 채우리라가난한 이들은 배불리 먹고주님 찾는 이들은 그분을 찬양하리라너희 마음 길이 살리라

○ 온 세상 땅끝마다 생각을 돌이켜 주님께 돌아오고만 민족 모든 가문 그분 앞에 경배하리니세상 모든 권세가들 그분께만 경배하고흙으로 돌아가는 모든 이들 그분께 무릎 꿇으리라

○ 내 영혼 주님 위해 살고후손은 그분을 섬기리라다가올 세대에게 주님 이야기 전해져태어날 백성에게 그 의로움 알리리라주님이 이렇게 하셨음이로다

 

2독서<믿고 사랑하라는 것이 하느님의 계명입니다.>(1요한3,18-24)

18 자녀 여러분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또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20 마음이 우리를 단죄하더라도 그렇습니다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21 사랑하는 여러분마음이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22 그리고 우리가 청하는 것은 다 그분에게서 받게 됩니다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

23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24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알고 있습니다.

 

복음<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5,1-8)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머물러라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5월  3일    일요일      부활  제5주일  (생명 주일)

 

 

 부활 제5주일 제1독서 (사도9,26-31)

 

"그러나 바르나바는 사울을 받아들여 사도들에게 데려가서, 어떻게 그가 길에서  주님을 뵙게 되었고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는지, 또 어떻게 그가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였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하여 사울은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였다. 그리고 그리스계 유다인들과 이야기도 하고 토론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사울을 없애 버리려고 벼르고 있었다. 형제들은 그것을 알고 그를 카이사리아로 데리고 내려가 다시 타르수스로 보냈다." (27-30)

 

사울이 회심한 직후 하느님께서는 하나니아스를 준비하셨다. (사도9장) 그를 통해 사울에게 세례를 베풀고 성령을 충만하게 하신 후, 그를 다마스쿠스 유대인들에게로 인도하게 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울이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에는 바르나바를 사용하신다. 바르나바(Barnabas)는 히브리어로 '예언의 아들' 이란 의미의 인명이며,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를 '위로의 아들'(퓌오스 파라클레세오스 ; 사도4,36)로 번역하였다. 그는 자기 소유의 토지를 팔아 진실하게 헌금으로 드렸을 뿐만 아니라 (사도4,36) 선하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사도11,24) 

당시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의심과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던 사울이 예루살렘 신도의 모임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도록, 바르나바는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중재 역할을 담당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였는지' (27) 

'담대히 설교하였는지' 에 해당하는 '에파르레시아사또'(eparresiasato)의 원형 '파르레시아조마이'(parresiazomai)는 '기탄없고 막힘 없는 언변'을 뜻하는 명사 '파르레시아'(parresia)에서 파생된 것으로, 회심한 사울이 복음에 관하여 전혀 거리낌없이 모든 것을 선포하고 가르쳤음을 알 수 있다. 

사울이 그렇게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성령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말한다는 것이, 예수를 신성모독으로 죽은 범죄자로 여기던 유대인의 미움을 사며, 목숨의 위험까지도 감수해야 하는 일임을 사울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주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령의  능력으로 담대히 말하였다. 

바르나바는 사울의 그러한 면을 잘 알고 있었으며,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사울의 이러한 면을 소개함으로써, 사도들로 하여금 사울을 자신의 동역자로 받아들이게 하였던 것이다. 바르나바가 사울을 도운 것은 성령의 감동과 바르나바의 선함 심성 때문이지만, 그는 이미 사울과 잘 아는 사이였다고 볼 수 도 있다. 

 

'그들은 사울을 없애 버리려고 벼르고 있었다' (29) 

'벼르고 있었다' 로 번역된 '에페케이룬'(epecheirun)의 원형 '에피케이레오'(epicheireo)는 '~위에'를 뜻하는 '에피'(epi)와 '손'을 뜻하는 '케이르'(cheir)의 합성어로서 '~에 손을 대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어떤 사물을 '손으로 잡는다'는 의미와 더불어(루카1,1), 어떤 것이 이루어지도록 '착수하고 시도한다'는 의미를 지닌다.(사도19,13) 

본절에서는 후자의 의미이며, 또 미완료 과거 시제로 쓰여, 죽이려고 수차례 착수했음을 암시한다. 그들은 유대교 교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사울의 주장의 허구성을 밝히고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려 하였으나, 논리적으로 사울을 이길 수 없었던 이들은 과거 다마스쿠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울을 죽임으로써, 침묵하게 하려는 사악한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형제들은 그것을 알고' (30) 

과거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사울은 두려움과 의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사울의 죽음을 무릅쓴 선교 활동을 보고, 형제들은 그를 신뢰하게 되었으며, 이제 그에게 도움을 주는 관계에까지 발전했다.

그들은 불타는 열정과 논리적인 복음의 전파로 유대교에게 큰 타격을 주어, 유대교인들의 제거의 대상이 된 사울이 처한 위험을 알게 되었을 때, 그를 '카이사리아'까지 데려가 멀리 그의 고향인 '타르수스'로 보냈다. 

'알고'로 번역된 '에피그논테스'(epignontes)는 '에피기노스코'(epiginosko)의 부정(不定 ;Indefinite)과거 분사이다.  이 동사는 어떤 것을 알되, 정확하고 철저히 아는 것을 의미한다. 예루살렘의 형제들은 사울이 처하게 된 위기와 그의 입장을 정확히 알고, 그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하여 그에게 필요한 도움울 준 것이다.

즉 사울을 예루살렘 성밖으로 내보내지 않으면 그가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할 것을 확인하여 그를 타르수스까지 보낸 것이다.

 

'형제들'이라고 번역된 '호이 아델포이'(hoi adelphoi)는 '제자들'을 의미하는 '호이 마테타이'(hoi mathetai ; 사도6,1),  '성도들'을 의미하는 '호이 하기오이'(hoi hagioi ; 사도9,13)와 함께  새로운 공동체인 그리스도인들의  명칭이다. 

'성도들'이나 '제자들'보다는 '형제들'이라는 표현이 사울과 그들과의 관계가 더 가까워졌음을 보여 주기에 적당한 말이다.

 

 

 

♡주님 안에 머물러라 / 반영억라파엘 신부님 2015.5.3 부활 제5주일

부활 제5주일 복음(요한15,1~8)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1)

 

요한 복음 15장의 '참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와 사랑과 인내에 대한 교훈이 주어지는 내용들은 요한 복음 13장에서부터 17장까지 전개되는 성주간 목요일 밤 주어진 다락방 이별의 담화의 일부이다.

특히 요한 복음 15장 1~11절은 예수님 당신 자신이 육신적으로는 비록 제자들과 떨어지게 될 것이지만, 영적으로는 하나의 일치된 유기체이심을 보여 주는그 유명한 참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이다.

이것은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이 시대에도 예수님과 영적으로 일치를 이루고 있는, 믿는 이들의 상태를 보여 주는 중요한 가르침이다.

 

예수님께서 '나는 참포도나무요'라고 하실 때, '참'이라는 말을 사용하신 것은 하느님께서 심으신 포도나무인 이스라엘과 참포도나무이신 당신 자신을 의도적으로 대조시키기 위해서이다. 

팔레스티나의 특산물이며 매우 흔한 식물이기도 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구약시대 때부터 이스라엘은 주님의 포도나무, 혹은 주님의 포도밭으로 비유되어 있다.

 

그들은 주님의 포도밭(이사5,1~7)이었고, 주님께서 심으신 좋은 포도나무였으며 (예레2,21), 열매맺는 무성한 포도나무였다(호세10,1). 

하느님께서 이 포도나무를 이집트에서 가져다가 팔레스티나에 심으셨다는 시편 저자의 노래(시편80,9)에서 볼 수 있듯이,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의 상징이었다. 

마카베오 시대의 화폐에 이스라엘이 포도나무로 표현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과 포도나무를 일치시켰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로 당신 자신이 '참포도나무', '참된 포도나무'라고 주장하심 으로써, 동시에 가짜, 혹은 불완전한 포도나무와의 구별성을 강조하고 있다. 

'참'으로 번역된 '알레티네'(alethine; true) 원형 '알레티노스'(alethinos)는 가짜 혹은 불완전한 것을 의미하는 '프슈데스'(pseudes; pseudo)의 반대로서 '진짜', '순수한', '이상적인'등을 뜻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 내포된 당시 이스라엘의 실상은 무엇인가? 그들은 가짜, 혹은 최소한 불완전한 포도나무라는 것이다.

 

성경은 주님의 포도밭으로 지칭되는 이스라엘 열매가 없는, 형편없는 포도나무, 들포도 나무라고 말한다(이사5,2).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신 주님의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한 불완전한 포도나무였던 것이다.

 

구약에서는 포도나무의 상징이 언제나 타락의 개념과 함께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사야 예언자가 노래하고 있는 주님의 포도밭에 나타나는 중심 사상은 포도밭이 황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이사16,10).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야생의 낯선 들포도나무로 퇴화되었다고 탄식한다(예레2,21). 

호세아 예언자도 헛된 포도나무라고 외쳤다(호세10,1).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참포도나무라고 칭하신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다. 

즉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낼 수 없는 포도나무라는 사실이다.

 

유대인,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마태3,7~10참조).

하느님께서는 그 누구도 민족, 혹은 혈통, 가문으로 만나시지 않는다. 오로지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서 개별적으로 만나시는 것이 그분의 뜻이다 (로마2,28.29).

하느님의 약속을 상속으로 계승하게 될 아브라함의 후손은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영적 이스라엘뿐이다(갈라3,7.9). 

따라서 모든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머무를 때에만, 희망있는 삶을 살 수 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열매는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만 맺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심오한 진리를 선포하시기 위해, 먼저 당신 만이 유일한 참포도나무임을 선포하신 것이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신지 밝히신 후에, 성부 하느님께서 누구신지를 밝히신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성부 하느님을 지칭하신 '나의 아버지'에 해당하는 '호 파테르 무'(ho pater mou; my Father)라는 호칭은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님만이 사용하실 수 있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독생성자 예수님만이 성부 하느님의 유일한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나의 아버지'라는 호칭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성자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선언하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농부'로 비유되고 계신다. 

'농부'에 해당하는 '게오르고스'(georgos; gardener; husbandman)의 기본적인 의미는 '땅을 경작하는 사람'으로서, 신약성경에서는 '농부'(2티모2,6), '포도밭 주인'(포도밭지기)(마태21,33~35) 등을 가리켜서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소유자이면서 동시에 관리인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도 하느님께서는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일치한 가지인 참된 믿는 이들을 더 나은 축복으로 인도하시고,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가차없이 심판하시는 분으로서, 포도나무와 그 가지들을 세밀히 관리하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한편, 당신 자신을 참포도나무로 비유하시고, 성부 하느님을 농부로 비유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곳 팔레스티나의 주요 농작물 가운데 하나인 포도 재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동시에 이 가르침이 주어졌던 당시의 장소가 성체성사가 이루어진 마르코의 다락방이었다고 할 경우에, 제자들 앞에 '아직 남아 있는 과월절 만찬용 포도주'를 바라보면서 이 가르침이 주어졌다는 것은, 제자들이 잘 알고 있던 친숙한 소재를 사용한 놀라움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의 묵상

오늘 제2독서에서 요한 사도는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라고 권고합니다. 실천이 없는 사랑은 알맹이 없는 사랑 곧 껍데기만 남은 가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성경을 펼치면 온통 ‘사랑’에 대한 이야기인 듯합니다. 신부님들의 강론이나 여러 신앙 강좌의 주제 또한 사랑에 대한 것이 가장 많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변에서 귀가 따갑도록 듣는 말도 사랑이고 인기 많은 대중가요의 주제로도 사랑은 단골 메뉴입니다. 사랑하고 있을 때 이런 노래를 들으면, 더 가슴이 뛰고 기쁩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이 세상은 온통 사랑이라는 말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너무나도 흔해 쉽게 휴지통에 버리는 휴짓조각 처럼 널려 있기도 하고, 내가 가진 것만 사랑이고 나머지는 아니라고 쉬이 판단해 버리기도 합니다. 
요즘 사회에서 사랑은 점점 사라지고 경시되며, 유치한 것으로 치부되기도 합니다. 사랑보다는 돈과 명예 그 밖에 많은 물질적인 것에 사랑의 자리를 양보하고 “사랑이 밥 먹여 주니?”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어떤 것인가요? 오늘 복음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다음 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예수님께서는 사랑 그 자체이시기에 당신과 함께 머무름이 참사랑임을 알고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무른다면 이 사랑은 머무름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몸소 보여 주신 자기 증여의 삶 곧 이타적인 삶으로 이어져, 사랑을 말로만이 아니라 직접 실천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우리는 사랑함으로써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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