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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필립보와 小야고보 사도 축일]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요한14,6-14)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5-03 조회수1,265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5월 3일 월요일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 축일]내가 아버지 안에아버지께서 내 안에 (요한14,6-14)

 

 

1독서<주님께서는 야고보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코린토15,1-8)

형제 여러분내가 이미 전한 복음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여러분은 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 안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화답송 시편 19(18),2-3.4-5ㄱㄴ(◎ 5)

◎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네◎ 알렐루야.

○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창공은 그분의 솜씨를 알리네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네

○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고그 말은 땅끝까지 번져 나가네

 

복음<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요한14,6-14)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제1독서 (코린1서 15,1-8)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2)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 나시어(3-4)  맨 마지막으로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8)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2)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전서 15장 1~11절에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역사적 확실성을 다룬다. 그리스도의 부활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이며 신도들의 부활을 보증하기 때문이다.

 

코린토 전서 15장 1절에서 '내가 이미 전한 복음'이 코린토 전서 15장 3~4절에서 '돌아가심(죽으심), 묻히심(장사지낸 바 되심), 부활하심(되살아나심)'으로 요약되어 나타나고,  이어지는 코린토 전서 15장 5~8절에서는 그 가운데 특히 부활에 대한 무수한 증인이 있음을 말함으로써  본 단락에서 다룰 복음의 핵심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나타내고 있다.

 

한글 성경에는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2) 라는 어구가  문장의 말미에 나타나고 있지만, 원문에는 이에 해당하는 '디 후 카이 소제스테' (di hu kai sozeste)가 문장의 서두에 등장한다.

 

이것은 본절이 '내가 전한 이 복음 말씀'(2)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본절에서 '디 후'(di hu; by this gospel)는  같은 절의 '티니 로고 유엥켈리사멘 휘민'(tini logo euenggelisamen hymin; the word I preched to you;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 말씀)과 관련된 것으로서 바로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교회에 전한 복음이며 특별히 그리스도의 부활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특히 여기서 '여러분은 구원을 받습니다' 로 번역된 '소제스테'(sozeste) '구원하다' 라는 뜻을 지닌 '소조'(sozo)의 현재형으로서 구원이 지금 현재적으로 구현되고 있음을 뜻한다.

 

즉 자신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코린토 신도들이 지금 구원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1코린1,18; 로마1,16).

 

구원의 완성은 비록 미래에 온전히 이루어질지라도 현재에도 실현되고 있으며 보장되어 있는 것이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 나시어'(3~4)

 

여기서 '먼저'라고 번역된 '엔 프로토이스'(en protois) 시간적인 면이나 내용적인 면에서의 우선성을 뜻하는 표현인데, 여기서는 후자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바오로의 선교 여정에서 시간적인 순서로 코린토 교회가 사도 바오로의 복음을 제일 먼저 접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교회에 복음을 전할 때 내용적으로 가장 우선하는 것이란 의미이다.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교회에 전한 복음의 내용 중 가장 우선하는 것은  코린토 전서 15장 3~4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성경 말씀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되살아나셨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사도 바오로는 대속적 죽음과 부활의 주체를  '예수'로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라고 밝히고 있을까?

 

그것은 역사적인 예수와 구원자 그리스도가 동일한 인물임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초대 교회의 가장 위대한 선포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것이다. 예수는 나자렛 출신의 일개 목수의 아들로서 역사적으로 실재한 한 개인의 이름이다.

 

그러나 복음서와 바오로는 초지일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이란점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역사상 예수라는 이름으로 실재하였던 바로 그분 다름아닌 메시아 그리스도 곧 인류의 구원자라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사건 이후 사도들의 선포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인가?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느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사도2,36)는 선포가 아닌가!

복음 선포의 핵심은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시라는데 있는 것이다.

역사의 예수가 믿음의 그리스도요, 생명의 주님이며,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이다.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때문에 돌아가시고'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의 죄때문에' 죽으신 대속적 죽음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죽음이 예수님 자신의 결정이나 돌발적 사고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 아님을 '성경 말씀대로' 표현으로 분명히 하고 있다.

 

여기서 '성경'에 해당하는 '그라파스'(graphas)는  복수형으로 '성경들'로 번역될 수 있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은 구약 성경 곳곳에서 예언된 사건이었다. 실제로 구원사의 핵심인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은 구약 성경에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다(창세22장; 탈출12장; 시편22장; 이사야53장; 다니엘9,26 등등).

 

또한 여기서 '죽으시고' 로 번역된 '아페타넨'(apethanen; died) 역시 '죽다'라는 뜻을 지닌 '아포트네스코'(apothnesko)의  부정(不定; indefinite)과거형으로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일회적인 역사적인 사건이었음을 가리킨다.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4)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전서 15장 3절과 4절에서 자신이 전한 복음의 핵심을 밝히고 있다.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묻히심과 다시 살아나신 일 곧 그리스도의 부활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런데 본절의 핵심 단어인 '묻히셨으며'와 '되살아나시어'란 두동사는 모두 3인칭 단수 수동태로 쓰였으나 그 시제가 다르다.

 

먼저 '묻히셨으며'에 해당하는 '에타페'(etaphe; he was buried)는  부정(不定; indefinite)과거형이다.

여기서 이 시제는 육화(肉化; Incarnation; 강생)하심으로 시작된 자기 비하(卑下)의 단계가 드디어 묻히심의 단계까지 이르렀음을 극적으로 묘사하는 최고조의 부정 과거(Culminative Indefinite Past)이다.

 

반면에 '되살아나시어'에 해당하는 '에게게르타이'(egegertai)는 완료형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과거 사실(he rose again; he was raised)임에도 불구하고  전자와 다르게 완료형을 사용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단순히 지나간 역사적 사실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효력이 계속됨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시고 미래에도 변함없이 살아계실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이 두 단어는 모두 수동태 쓰였다.

우선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는 후자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친히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전자는 예수님께서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 등에 의해 장사되었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마태27,57~61).

그러나 이것 역시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구속 사업 계획을 세우신 성부 하느님께 순종하며 장사지내는 자리에까지 이르렀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수동태를 사용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본 단락에서 사도 바오로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단지 죽으시고 묻히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 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크리스챤(신도)간의 일치라는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에 대한 죽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일치한 신도 역시 그리스도와 더불어 죄에 대하여 죽었고,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장차 부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흗날에'(te hemera te trite; 테 헤메라 테 트리테; on the third day)라고 바오로가 굳이 표현한 이유가 뭘까?

사도 바오로가 죽음에서 부활까지 걸린 기간을 명기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 가운데 실재로 일어난 틀림없는 사실이란 점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동시에 안식일 전날 금요일에 돌아가신 그리스도께서 사흘이 지난  안식일 다음 날 이른 아침, 즉 주일(主日; The Lord Day)에 부활하심 명확히 밝힘으로써, 초대 교회 당시 주일에 드리는 공식 예배와 성찬의 정당성을 암시하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부활 사건은 그의 죽음심과 마찬가지로 '성경 말씀대로'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시편 16장 10절이나 이사야 54장 7절의 말씀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서 그의 죽으심의 사건과 동일하게 코린토 교인들로 하여금 신도들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영원하신 계획이란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이해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 다음 코린토 전서 15장 5절부터 8절까지 사도 바오로는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역사적 확실성을 논증하는 가운데  특히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수많은 증인이 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케파 베드로와 열 두 사도, 그 다음에는 오백명이 넘는 형제들, 그 다음에는 야고보,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났다고 전한다.

아마 오늘이 5월 3일, 성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 축일이기 때문에 야고보 이름을 거론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목격 증인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 코린토 전서 15장 7절 '모든 사도' 표현은 열 두 사도에 나오는 장 야고보(대 야고보; 축일은 7월 25일) 소 야고보(차 야고보; 축일은 5월 3일)와  같은 사도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부활 현현(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현)을 목격하고 복음 선포자가 된 사람들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사도 바오로를 돕던 협력자들까지도 때로는 사도들로 언급되어 초대 교회 당시 사도라는 용어가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맨 마지막으로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8)

 

'맨 마지막으로'(last of all)라는 표현은 '가장 하찮은 존재'라는 겸손의 뜻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서  다른 사도들에 비하면 매우 보잘것 없다는 의미를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칠삭둥이 같은 나'(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로 번역된 '엑트로마티'(ektromati)는 '~로부터 밖으로' 란 뜻이 있는 전치사 '에크'(ek) '상하게 하다'라는 뜻을 지니는 동사 '티트로스코'(titrosk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유산되어 태어난 '사산아'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조산아'를 의미한다고 본다.

 

이것은 바오로의 외모가 보잘 것 없음을 나타내는 표현이거나 만삭되지 못하여 갑자기 태어난 아이와 같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바오로의 회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이것이 갑작스런 회심을 가리킨다면, 이것은 그가 사도가 되기 전에 조직적으로 교회를 핍박했던 죄인이었음을 상기시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칠삭둥이 같은 나'라는 뜻의 '엑트로마티' 앞에  정관사 '토'(to)가 붙은 것에 대하여 여러 설이 있다. 구약 성경 70인역(LXX)에서 '엑트로마티'는 주로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민수12,12; 욥기3,16).

 

따라서 이것을 염두에 둔다면, 본문은 사도 바오로가 하느님 앞에서 느끼는 자신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여, 예수님의 지상 선교의 시기인 공생활 동안 줄곧 함께 한 열두 사도들과는 다르게 오히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핍박하다가 후에 사도가 된 사실을 피력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열 두 사도가 만삭이 되어서 난 아이와 같다 한다면, 자신은 달 수를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아이와 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사도 바오로가 정관사 '토'를 붙여서 자신을 '그 칠삭둥이 같은 나'라고 한 말 뒤에는, 그가 사도들 가운데 제일 뒤에 처져서 출발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사도들 중에 유독 그만의 특별히 구별되는 방법으로 부름받음 것을 드러낸다.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복음 (요한14,6-14)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0)

 

요한 복음 14장 10절은 삼위일체의 신비 가운데,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님의 동질성과 하나되심을 보여 준다.


먼저 성부와 성자께서 각각 독립된 신적 위격(位格)을 지녔음을 드러낸다. 성자 '에고'(ego), 즉 '나'라는 독립된 위격으로 표현되었고, 성부 역시 '토 파트리'(to patri; the Father), 즉 '아버지'라는 독립된 위격으로 표현되었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이란 문장에서도 잘 드러난다.

여기서도 '아버지',즉 성부 하느님과 '내', 즉 성자 하느님께서 독립된 위격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여기에 또 다른 신적 위격으로서 요한 복음 14장 16절, 17절, 26절에 나타나는 성령 하느님까지 포함시켜 요한 복음 14장에는 삼위 하느님께서 모두 등장한다.


요한 복음 14장 10절에서 성자 하느님께서 성부 하느님 안에 계시고, 성부 하느님께서 성자 하느님 안에 계시다는 것은 이 두 분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완전한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것은 성부와 성자는 분명히 독립된 위격으로 존재하지만,  본체론적 동질성을 가지며, 신적 속성에 있어서 완전히 하나로 일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자 예수님을 본 자는 성자와 동일 본체이신 성부 하느님을 본 것과 똑같다. 이러한 영적 신비를 필리보를 비롯한 제자들이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는 하나이며, 더 나아가서 성령 하느님도 하나이시라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에서도 유비(analogy)를 찾아 볼 수 없는 삼위일체의 신비이다.


 이러한 신비는 오직 말씀에 대한 신뢰와 믿음으로만 수용할 수 있다. 특히 여기서 '계시다는'으로 번역된 '에스틴'(estin; is)은 영어의 be 동사에 해당되는 '에이미'(eimi) 동사의 3인칭 단수 현재이다.

희랍어에서 현재형은 불변하는 진리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삼위일체의 신비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너는 믿지 않느냐?'


여기서 '믿지'에 해당하는 '피스튜에이스'(pisteueis; you believe) 현재 시제이므로 진행 중인 동작이나 지속적인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3년을 동고동락하며 예수님의 하느님과의 일체성에 대해 거듭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필립보의 영적 상태를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부분에서 '너희에게'에 해당하는 '휘민'(hymin; to you)이라는 복수 표현이 나오므로, 이 문제는 단지 필립보 한 사람의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권능과 메시지, 하느님의 마음 및 우리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생각을 지니고 오직 그것만을 드러내셨음에도 불구하고, 가까이에서 그분을 모시고 함께 헀던 제자들의 눈에는 여전히 이것이 감추어져 있었다.

이것은 삼위일체를 비롯한 영적 진리가 단순히 경험이나 인간의 지적 능력으로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현세적, 정체적 메시야로서 탁월하며 특별한 지도자라는 점은 인정했지만,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이시라는 영적 지식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 그리고 행적이 이것을 증거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생각이 이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우선적으로 그들의 믿음의 부족과 영적 무지 때문이었고, 동시에 사람은 결코 하느님을 볼 수 없다는 유대인의 전통적인 사고 역시 이러한 믿음의 장애물이 되었던 것이다.


끝으로, 요한 복음 14장 10절 후반부의 '머무르시는'에 해당하는 '메논'(menon; dwells)은 현재 분사로서 중단없이 계속 거주하시는 상태를 나타내고, '하시는 것이다'에 해당하는 '포이에이'(poiei; does)도 현재형이라는 점에서 하느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잠시도 분리됨이 없이 당신의 일을 계속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오늘의 묵상

토마스 사도의 질문은 언제나 우리를 명쾌한 주님의 응답으로 이끕니다. 그래서 현대인에 비유되고는 하는 토마스 사도는 의심 많은 제자라기보다 의문이 많은 제자였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또 주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의 질문에 온화하게 답을 주십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사도들의 삶은 거칠었고, 힘들었으며 마지막에는 주님께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하듯 복음의 삶은 죽음의 삶이 아닌 기쁨과 부활의 삶으로, 주님께서 영원히 함께하시는 삶입니다그래서 그들이 전한 예수님의 삶과 행적은 전설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온전한 증거의 삶으로 전해집니다.
오늘 우리가 기리고 있는 필립보 사도와 야고보 사도는 모두 복음 안에서 기쁨을 찾는 삶을 살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보람만을 찾는 것이라면 그들은 순교를 통한 영원한 삶을 얻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의 삶은 세상이 주는 헛된 보람을 쫒기 보다는 어렵고 힘들어도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신 주님’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참 기쁨을 깨닫는다면,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주님에게서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웃들에게 기꺼운 마음으로 봉사합니다.
 보람보다는 기쁨을 찾아 봉사하는 이들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마태 16,24-28 참조) 길이신 주님을 따라 걸으며, 진리이신 주님 안에서 자유로워지고(요한 8,32 참조), 생명이신 주님을 만나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요한 3,16 참조).필립보 사도와 야고보 사도처럼 주님 안에서 참된 기쁨을 되새기는 신앙인은 늘 삶에서 기쁨을 찾고 세상이 주는 보람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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