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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 /기도(祈禱)와 열매(果實) (요한15:7-16)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5-06 조회수1,062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5. 6. 부활 제5주간 목요일 도란도란글방

 

기도(祈禱)와 열매(果實)

(요한15:7-16)

7 너희가 나를 떠나지 않고 또 내 말을 간직해 둔다면 무슨 소원이든지 구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것이다. 8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11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12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13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15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다 알려 주었다.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다 들어 주실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열심으로 반드시 우리의 삶 속에서 열매를 맺으실 것이며 그 길에 우리의 옛 자아가 방해물과 걸림돌이 되면 가차 없이 백마를 타시고 철장(鐵杖)으로 쳐 내시며 우리를 완성해 나가신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서 우리 자신의 삶을 보면 실패와 실수와 넘어짐의 연속입니다. 그 때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말씀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송함 송구스러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신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 그런데도 또 변함없이 옛 사람에 대한 연정을 뿜어내고 있는 자아에 대한 실망 결국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와 하느님의 주권에 의해 완성이 될 거란 기대로 인한 소름끼침 등등이 그 분들의 이야기의 주제입니다.

그건 정직한 자아성찰이 선행되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고백들입니다. 거기에서 우리의 기도가 비로소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인 악한 본성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받아들이는 악습입니다. 타락한 이후 하느님의 보호하심에서 벗어나 버린 우리에게는 본능적으로 어떤 자기 보호 장치 같은 것이 있어서 보고 듣고 경험하는 모든 것을 어떻게든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취사선택하고 해석하고 설명하고 미화시킵니다. 인간은 이제 스스로 자신을 보호해야하는 절박한 처지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천성처럼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이 여과장치에 대해 경계하는 훈련은 성도의 신앙생활에 있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 영성생활의 주된 관심 중 하나는 나 자신을 정직하고 진실하게 보는 일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취사선택(取捨選擇)하고 해석하고 설명하고 미화시키려는 유혹을 경계하고 때로는 나 자신을 거북하게 만들고 때로는 참담하게 만들고 때로는 절망스럽게 만드는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받아들이는 훈련은 성도의 영성 생활에 있어서 필수적인 일입니다.

이 악습은 성경을 읽을 때에도 여지없이 활동합니다. 아니 자기 자신을 정확히 보게 하고 자신의 잘못을 가장 날카롭게 고발하는 것이 성경말씀이기 때문에 이 악습은 성경말씀을 묵상할 때 더 강력하게 활동합니다. 이 악습 때문에 우리는 읽은 말씀의 참 뜻을 캐물으려 하지 않고 자기에게 유리하게 받아들입니다. 눈 질끈 감고 우리 귀에 좋게 들리도록 말씀을 변조시킵니다.

그 말씀의 원래 의미를 알아보려고 고민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통해 위로만 받으려 하지 말씀이 주는 도전에 대해서는 회피하기 일쑤입니다. 그러한 인간들의 악습에 의해 가장 많이 오해 되고 있는 구절들 중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참으로 우리를 흥분케 하는 본문입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그리고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할 것이다이 두 말씀은 마치 하느님이 우리 손에 신기한 요술램프를 들려주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어 줍니다. 어떠세요?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이 말씀이 진짜로 적용이 되던가요?

지금까지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난 이후에 기도만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다 이루어졌습니까? 뭐가 문제인가요? 여기 어디 믿음과 정성이 부족하면 안 된다는 단서가 있습니까? 없지요? 그럼 지금 예수님은 지키지도 못할 공수표 같은 약속을 남발하고 계신 것입니까?

우리는 그 무엇이든지라는 단어를 올바로 규명하지 않고는 계속해서 이 구절을 오해하고 오용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 무엇이든지가 제한하고 있는 것에 대해 잘 규명을 해보고 또 그 무엇이든지를 구하는 기도열매의 상관관계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15:7) 너희가 나를 떠나지 않고 또 내 말을 간직해 둔다면 무슨 소원이든지 구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것이다.

 

잘 보면 구하라는 말씀 앞에 하나의 전제가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떠나지 않고 또 내 말을 간직해 둔다면 이라는 전제입니다. 그 말이 무슨 말입니까? '구하는 것' 기도는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게 되면 당연한 결과로 주어지는 결과물인 것이지 어떤 결과물을 얻어내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기도는 아직도 남은 어떤 일을 위해서 동원되어야 할 방법과 과정이 아니라 기도가 우러나올 수밖에 없는 그 자리에 갔기 때문에만 드디어 맛보고 소유할 수 있는 어떤 결과로써 제시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어떤 결과의 반증이요 어떤 수준과 경지에 와 있는 자기 증거요 감사거리인 것이지 단순히 무엇을 얻어내기 위한 원인이나 방법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 응답을 받아 감격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에서부터 감격을 하고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은혜로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다는 증거이니까요.

기도라는 것은 하느님과의 사귐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사귐에서 시작하여 사귐을 지향하며 사귐으로 완성이 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도(祈禱)는 죄와 허물로 하느님의 거룩과 대면하게 되면 즉시 멸해질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하느님과 사귐이 있는 자로 회복이 되었다는 것의 확실한 증거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거룩하신 하느님과 죄인이었던 우리가 아예 함께 동거하는 관계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죄인과 거룩하신 하느님이 언제든지 아버지하고 부르면 왜 아들아하고 대답을 하시는 그런 친밀한 관계로의 회복이 된 것입니다. 그 회복의 증거가 기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지성소 안에서의 대화 혹은 사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단어들을 사용하여 표현하면 농부이신 하느님 아버지가 우리를 예수라는 포도나무에 가지로 접목을 해 주시는 바람에 우리가 모두 하느님 앞에서 예수의 취급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가지들이 자기를 예수로 보아주시며 그렇게 양자 삼으신 하느님 아버지께 무엇을 구할까요?

가지들이 농부에게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가지가 농부에게 구할 것은 열매를 많이 맺게 해달라는 요구밖에 없습니다. 가지에다가 금칠을 한들 그 가지가 가치가 올라가겠습니까? 아니면 가지를 가장 꼭대기에 달아 준들 그 가지의 위상이 올라가겠습니까? 가지를 굵게 만들어주면 그 가지의 인기가 높아집니까?

가지가 할 수 있는 가장 유용하고 가치 있는 일은 열매를 맺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가지의 소원은 열매 맺음 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절대 자신의 야망이나 문제 해결이나 세상 적 소원 성취에 관한 것일 수가 없습니다.

 

(마태6:31-32) "31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32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기도에 대해 생각하면서 항상 이 말씀을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이 말씀대로 하면 분명 세상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 우리가 하느님께 구해야 할 것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느님은 이미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공중의 새가 하느님께 기도했기 때문에 먹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 역시 우리의 기도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이 땅에서 우리의 소원을 이루고 이 땅의 것으로 먹고 사는 일에 사용되는 저급한 것으로만 정의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것들은 하느님의 은혜로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 이외 다른 것은 욕심일 뿐입니다.

기도가 우리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어서는 안 되잖아요? 따라서 기도는 먹고사는 문제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됨됨이에 필요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기도에 대한 정의는 어느 곳에서든 동일하고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아프리카 오지에서 태어나 문명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고 나무나 풀로 얼기설기 만들어진 움막에서 먹을 것 마실 것만 주어지면 다른 욕심 없이 살아가는 그런 삶을 살고 있다고 해 보자고요.

거기에서는 성공이나 인기나 명예나 자랑이나 비교 우위 자가 갖는 상대적 행복 등이 있을 수 없겠지요? 그런 게 아예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곳에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곳에서 기도할 때 과연 어떤 기도를 하겠습니까? 지금처럼 자식들이 공부 잘하고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원하는 기도가 필요하겠습니까? 사업이 잘 되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부유하고 화려한 삶을 살게 되기를 기도하겠습니까?

아프리카 오지와 같은 곳에서는 그러한 기도가 의미가 없습니다. 그곳에서는 성공이라는 말 자체가 의미 없는 말입니다. 그곳이야 말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만으로 모든 것이 충족되는 곳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에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은 하느님이 새를 먹이시는 것처럼 공짜로 주신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기에서 사는 사람들은 무슨 기도를 하겠습니까?

그러한 물질적인 욕심이 배제된 곳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으로 이미 행복한 이들에게서 나오게 되는 기도는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자신들을 그렇게 은혜로 돌보고 계신 그 분께 오롯이 순종하여 그 분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는 것 말고 또 있을까요? 전 세계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로 많은데 그들이 원하는 것이 모두 일관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절박하게 필요한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전혀 필요 없는 것일 수도 있고 아예 그런 것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욕구들 속에서 기도란 무엇 무엇을 구하는 것이다라든지 기도란 어떤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라든지 하는 등의 정의를 내리는 것은 일반화의 오류인 것입니다.

따라서 일반화의 오류를 비켜갈 수 있는 기도의 정의는 하느님의 뜻과 계획과 성품에 참여하기 위해 성도에게서 일어나는 자기부인의 외침정도로 해 두면 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열심을 내어 어떤 것을 얻어냄으로 해서 그것으로 하느님의 일을 돕는 그런 류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원하는 자녀의 모습은 자신의 노력과 힘과 지혜와 열심으로 하느님을 도와주는 그런 자녀가 아닙니다.

하느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자녀는 하느님과 사랑을 나누며 그 분 안에 있는 기쁨이 충만한 것으로 난 하느님 없이는 못 살아요라고 고백하고 하느님은 그 고백에 대해서 난 너 없이는 못 살아라고 대답하실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기도는 바로 우리의 됨됨이 즉 하느님의 자녀 됨을 향해 쏟아져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17:21~26) 21 그들은 너희가 내 제자라 해서 이렇게 대할 것이다. 그들은 나를 보내신 분을 모르고 있다. 22 내가 와서 그들에게 일러 주지 않았던들 그들에게는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자기 죄를 변명할 길이 없게 되었다. 23 나를 미워하는 자는 나의 아버지까지도 미워한다. 24 내가 일찌기 아무도 하지 못한 일들을 그들 앞에서 하지 않았던들 그들에게는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그들은 나와 또 나의 아버지까지 미워한다. 25 이리하여 그들의 율법서에 '그들은 까닭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이 이루어졌다.' 26 '내가 아버지께 청하여 너희에게 보낼 협조자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뜻이 하느님과의 하나 됨 연합입니다. 우리를 성부하느님과 성자하느님 그리고 성령하느님의 연합 속으로 초청하여 하나로 만들어 하느님이 누리는 교제와 안식과 기쁨과 성품과 풍요와 평화를 누리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을 능력으로 보필하려 하고 알량한 지혜로 참모가 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느님과 마음과 계획과 뜻을 하나로 맞추셨습니다. 그래서 14장 내내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이다.’ 라고 반복하여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느님의 뜻에 합일하는 자로 우리의 뜻을 버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의 복된 자리로 인도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필요한 것이 순종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서 예수의 성품과 예수의 복종이라는 당신의 열매를 맺으려 하실 때 나의 뜻을 내세워 거부하지 않고 그 분의 뜻과 계획에 순종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성도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잘 되지 않을 때에 우리가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10:3~6) 3 비록 우리가 속된 세상에서 살고 있기는 하지만 속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4 우리는 세속의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견고한 성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는 하느님의 강한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된 이론을 무찔러 버리고 5 하느님을 아는데 장애가 되는 모든 오만을 쳐부수며 어떠한 계략이든지 다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 6 그리고 여러분이 완전히 순종하게 될 때에는 모든 불순종을 처벌할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심판이 무엇을 향해 내리꽂히는 것입니까? 불복종입니다. 5절에 의하면 복음은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느님 앞에서 교만하게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다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삶을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먼저 살아내어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도 바로 그 성자 예수님의 순종의 삶을 본받아 살았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를 합니다. 왜요? 그게 바로 성도의 삶의 유일한 목적이니까요.

 

(고전11:1) 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으십시오.

 

예수를 본받아 치열한 고난의 삶도 감수하며 사는 자신의 모습을 본받아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 다른 이들에게 본이 되라는 것입니다.

 

(필리3:17) 형제 여러분, 나를 본받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과 같이 우리를 모범으로 삼고 따르는 사람들을 눈여겨 보십시오.

 

그는 심지어 자신의 심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라고 까지 이야기를 할 정도로 예수님 닮은 삶을 신앙생활의 목표로 삼았던 사람입니다.

 

(에페4:13) 마침내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聖徒의 기도란 하느님이 지금 이 세대와 이 세상을 향하여 갖고 계신 그 하느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것이며 그 분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향한 모든 기도는 다 들어주시겠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의 주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기도인데 과연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삼위일체 하느님과 사귀는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구합니까? 아니면 그런 사귐이 없는 상태에서 다급할 때마다 살려달라고 구합니까?

삼위일체 하느님과 사귀는 상태에 있으면 우리가 구하는 대상이 점점 달라집니다. 하느님과 사귀는 삶이 없으면 많은 경우 이기적인 욕심이 우리 마음을 지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급한 상황에 처하여 하느님께 기도할라치면 이기적인 욕심에서 구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과의 사귐이 시작되고 깊어지면 점차로 우리는 자신의 이기적 욕심과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로써 구하는 대상이 점차로 변화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귐의 깊이가 깊어져감에 따라 이기적인 욕심을 구하는 일은 점점 줄어들고 하느님의 뜻을 구하는 일이 점점 많아집니다. 사귀면 친해지고 친해지면 닮아가게 됩니다.

 

선생을 깊이 사귀는 제자는 선생을 닮게 되어 있고 아버지를 친밀하게 사귀는 아들은 그 아버지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서로 깊이 사귀는 부부는 서로 닮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사귀면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사고방식도 닮아가고 가치관도 닮아가고 사는 방법도 닮아가고 인생의 목표도 닮아갑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귑니까? 말씀을 통해 사귀고 묵상을 통해 사귀며 기도를 통해 사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귐이 기도의 내용을 바꿔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의 초점은 삼위일체 하느님과 사귀는 일에 맞추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로써 무엇을 구하는 일은 이렇게 지속적으로 사귀는 과정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만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우리에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가지가 좋은 열매를 맺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농부가 공급해 주듯 우리가 참된 열매를 맺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는 제공해 주실 것입니다.

 

'카메라' 의 어원이 뭔지 아세요?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 라는 라틴어입니다. 그 말의 의미는 어두운 방이라는 의미입니다. 지금도 이탈리아에서는 'camera' 라는 단어를 이라는 의미로 씁니다. 그 카메라의 원리는 BC3세기경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최초로 언급이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그런 실험 안 해보셨어요? 아주 어두운 상자 안에 바늘 구멍만한 구멍을 뚫고 그 상자 안에 양초의 상을 맺히게 하는 그런 실험. 그 바늘구멍이 뚫린 어두운 상자를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 라 보면 무방합니다. 아주 옛날부터 유럽이나 중동에서 어두운 방의 천정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만드는 상을 이용하여 천체를 관측해 왔는데 거기에서 오늘날의 카메라가 탄생한 것입니다.

제가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 안이 죄로 어두워 있을 때에는 밖에 있는 현상들이 우리 마음판에 새겨지게 된다는 그 자연의 원리를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어두운 방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의 벽면에 밖에 있는 상이 그대로 맺혀지듯이 우리 안이 어두움으로 가득 차 있으면 우리는 밖의 현상에 좌지우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하느님과의 사귐으로 하느님이라는 빛이 가득 차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밖의 사건이나 상황에 끌려 다니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 밖의 현상이 우리 마음에 심각하게 맺히지 않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와의 사귐이 없이 기도를 하게 되면 나에게 일어난 현상이나 사건의 해결이 주된 기도의 내용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과의 사귐을 깊이 갖게 되면 우리는 바깥의 것들과 무관한 기쁨과 안식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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