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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 예수라는 친구가 맺는 사랑이라는 열매 (요한15,7-17)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5-06 조회수1,354 추천수0 반대(1)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5. 7. 부활 제5주간 목요일 도란도란글방

 

예수라는 친구가 맺는 사랑이라는 열매

(요한15,7-17)

7 너희가 나를 떠나지 않고 또 내 말을 간직해 둔다면 무슨 소원이든지 구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것이다. 8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11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12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13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15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다 알려 주었다.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다 들어 주실 것이다. 17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

 

하느님께서 성도에게 맺으라고 하시는 열매는 착한 일, 선한 일, 도덕적 윤리적 바른 일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자가 되어 하느님과 연합되는 일, 그것을 다른 말로 자기부인이라고도 하지요?

그런데 그 열매는 우리가 스스로 노력하여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이 요구하시는 열매는 결국 하느님에 의해 맺혀지게 될 것이며 우리는 그러한 구속사의 과정을 몸으로 살아냄으로 해서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직접 경험하게 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따라서 성도의 성화가 100% 하느님의 몫임과 동시에 100% 성도의 몫이라는 이야기는 성도가 자신의 노력으로 100% 거룩에 도달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거룩을 완성해 가시는 하느님의 열심을 100% 자신들의 삶을 통해 경험하게 된다는 말이지요. 잠자고 일어났더니 자동적으로 성화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100% 내가 그 과정을 겪어내고 통과해야 한다는 그런 말입니다.

성도가 평생 동안 맺어야 할 거룩이라는 열매는 이스라엘의 진과 성막과 지성소의 도식 속에서 나타나 있는 것처럼 하느님의 선택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지 절대 정하고 부정한 것 깨끗하고 더러운 것 등의 자격과 조건으로 맺혀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으로 나누어지고 다시 속된 것이 정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나누어지는 것.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맺게 되는 열매는 자기부인이며 순종이며 결국 연합으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라고도 하지요.

자기만을 사랑하던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해 하느님을 배우고 하느님의 은혜를 자각하며 하느님의 끈질긴 사랑과 관심과 배려에 대해 배우게 될 때 우리는 그 분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고 그 분의 뜻에 조금씩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열매입니다.

그러니까 사랑 순종 연합 자기부인은 하나로 묶여있는 덕목인 것입니다. 자기가 부인되면 될수록 하느님을 의존하게 되고 그 의존은 순종으로 이어지며 순종이 깊어질수록 연합이 이루어지고 그렇게 연합이 된 상태를 사랑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바로 그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게 과연 가능할까 고민되시지요? 하느님께서 열심히 그 열매를 맺고 계십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지금 처한 상황이나 사건 등이 전에는 불편하고 불만스러우며 만족스럽지 못했는데 지금은 담담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면 여러분은 여러분도 모르게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자신의 뜻을 맞춰가고 계신 것입니다.

예전에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는 불안하고 불편하고 고통스러워서 단 한시도 살아낼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지금 그런대로 담담하게 살아지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순종의 모습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그렇게 성숙시켜 가고 계신 것입니다.

나에게 들이닥친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사건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해가 되고 받아들여질 때 그걸 열매 맺는 삶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이 반복이 되다보면 죽음 앞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그것을 가리켜 순교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신앙생활을 통하여 작은 순교를 수없이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 앞에서 나의 뜻을 완전히 거두어들이는 것이 순교이니까요. 왜 순교를 신앙의 절정이라 표현하는지 아세요? 하느님 나라가 바로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완전히 죽인 순교자들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연합이잖아요?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우리의 뜻과 계획이 무너지고 하느님의 뜻과 계획이 나의 뜻과 계획으로 받아들여지고 바뀌어져 가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내 뜻과 계획을 관철시켜내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긍정적 사고와 종교적 열심으로 자신의 원하는 바를 성취해 내는 것은 다른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그런 여타의 종교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스도교는 긍정적 사고나 종교적 열심 도덕적 윤리적 선한 행위 등으로 하느님을 감동시켜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는 그런 저급한 종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옛 사람을 장사지내며 세상의 힘을 조롱하고 너무나 선명하게 약속이 되어 있는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며 하느님 나라 백성으로 지어져 가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죄인 된 자신의 소원이 기각이 되고 하느님의 소원이 자신의 인생에서 성취가 되기를 열망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성도의 기도가 응답이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원과 자신의 계획이 무산이 되어 집니다.

자신의 뜻과 계획이 무산된다는 말은 곧 하느님의 뜻과 계획이 성취된다는 말과 같은 것이지요? 그래서 기도 응답을 못 받는 것도 은혜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그러한 하느님의 거절 속에서 우리의 미숙함이나 무력함 욕심 등을 폭로 당하는 것이고 그렇게 거절하시면서 까지 우리를 향한 당신의 소원인 우리의 거룩을 완성해 가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가 필연적으로 통과해야 할 것으로 고난을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지켜보시는 하느님도 고통스럽습니다. 당신 자녀의 고난을 곁에서 지켜보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거룩을 향하여 이 세상과 구별되어져 가는 모습을 보시면서 그 자녀들의 고통을 보면서 자신의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신다고 성경은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마르1:40-45) 40 나병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선생님은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41 예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손을 갖다 대시며 '그렇게 해 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 하시자 42 그는 곧 나병 증세가 사라지면서 깨끗이 나았다. 43 예수께서 곧 그를 보내시면서 44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네가 깨끗해진 것을 그들에게 증명하여라' 하고 엄하게 이르셨다. 45 그러나 그는 물러가서 이 일을 널리 선전하며 퍼뜨렸기 때문에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드러나게 동네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동네에서 떨어진 외딴 곳에 머물러 계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예수께 모여 들었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입니다. 41절에 보면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라는 단어가 나오지요? 그 단어 스플랑크니조마이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다.’ 라는 뜻입니다. 왜 예수님이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셨을까요? 문둥병 환자를 만나고보니 너무 불쌍해서 그런 것인가요?

그렇게 문둥병 환자들이 불쌍하셨다면 문둥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곳에 가셔서 한 번에 다 낫게 해 주시면 되잖아요? 그리고 그 사람에게 네가 있던 곳에 가서 그 곳에 있는 문둥병 환자를 전부 데리고 와라 다 고쳐주마하셨어야 옳지요? 그런데 주님은 그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절대 아무에게도 그 일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단순히 문둥병이라는 질병을 앓고 있는 그 사람의 상태를 보시고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문둥병 환자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는 것은 단순히 그가 가진 병이 너무 가혹한 병이라서가 아니라 문둥병이 걸린 사람이 자기 병을 낫게 해 줄 능력이 있는 예수님 앞에서 막무가내로 도와달라는 말도 못하고 당신이 원하시면이라는 말을 첨언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신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들어보세요. 당시 문둥병은 천형으로 여겨졌던 아주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자기 병을 낫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 앞에 서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문둥병자였다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 것 같으세요? 체면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울고불고 매달렸어야지요? 그런데 그 문둥병환자는 주님이 원하시면 이라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어구가 이 에피소드를 여는 열쇠입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선 문둥병 환자가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요? 기도도 간절히 했을 것이고 좋다는 명약은 다 찾아서 먹어 보았을 것이며 혹시 착한 일을 많이 못해서 그런가 하여 남 몰래 선한 일을 한답시고 열심히 노력도 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문둥병 환자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목표가 있습니다.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했고 열심히 수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원이 들어지지 않습니다. 그 때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을 저주하고 떠납니다. 그러나 창세전에 하느님에 의해 택해진 하느님의 백성들은 그 과정을 통과하며 하느님의 당신의 주권에 대한 고집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은 절대 당신의 주권의 타이밍을 인간에게 양보하시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때에 당신의 힘으로 당신의 소원을 이루시는 것이 하느님의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자신의 소원이 계속해서 기각당하는 경험을 통해 아 이것은 내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셔야 되어지는 일이구나하고 하느님의 주권 아래로 항복해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에 그가 받은 거절감과 외로움과 박탈감과 소외감과 부끄러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겠지요? 주님은 그 과정을 전부 한눈에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측은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문둥병 환자가 주님 저 좀 낫게 해 주세요라는 요구를 한다는 것은 그가 가진 당연한 권리입니다.

문둥병이라는 병이 얼마나 무서운 병입니까? 그런 병을 앓고 있는 이가 예수님을 만나서 주님 저 좀 고쳐 주세요라고 소원을 말한다고 해서 그를 나무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문둥병환자가 그 당연한 소원의 주체 자리를 주님께 내어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백성은 신앙생활을 통과하면서 아주 당연한 것 같은 소원도 이게 과연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일까?’ 를 고민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무조건 보좌를 흔들어서 자신의 소원을 성취해내는 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은 수없이 많은 거절과 기각과 외로움과 버려짐을 경험해야 하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을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겪고 계십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버려짐과 거절당함과 부끄러움과 외로움의 십자가는 우리의 삶 속에서 그대로 실제화 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서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이 주님 제가 원합니다. 저 좀 고쳐주세요라는 자리에서 주님이 원하시면 저를 낫게 해 주세요의 자리로 내려가기까지 문둥병과 함께 당했을 그 거절감과 외로움과 설움을 다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문둥병자의 주님이 원하시면이라는 말을 듣자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러한 천형으로서의 문둥병을 지니고 있는 자들 아닙니까? 때때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실제를 직면하게 될 때 정말 얼마나 더럽고 추악합니까? 문둥병이 아니라 에이즈보다 더 징그럽지 않아요? 그런데 성도는 그 상태에서도 하느님이 원하시면의 자리로 낮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고쳐주세요가 아닌 하느님 당신이 뜻하지 않으시면 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음을 저는 잘 압니다. 부디 저를 향한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 저를 고쳐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만 하느님이 원하시지 않으신다면 그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음을 저는 압니다.

하느님 원하시면 저를 고쳐주세요이게 바로 성도가 도달해야 할 자기부인의 자리요 순종의 자리요 사랑의 자리인 것입니다. 성도가 신앙생활을 통하여 하느님을 배우고 그 분의 크심을 자각하며 자신의 나약함과 불가능함과 추악함을 깨닫게 되면 당연한 요청조차도 더 이상 하지를 못하게 됩니다.

성숙한 성도는 너무나도 당연한 소원 너무나도 당연한 간구일 수 있는 것에 대해조차도 자기가 바랄 수 없는 자라는 소원의 주체가 완전히 뒤바뀌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내 생을 향하여 소원을 하시지 않는 한 아무 것도 내게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자신의 삶의 주체로 삼고 자신은 객체로 내려앉는 상태를 순종이라고 하고 하느님의 편을 드는 삶이라고 하는 것이며 자기부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 구원이 완성이 됩니다.

문둥병자가 부정함에서 벗어나게 되는 사건이 바로 구원의 완성을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태까지 가기 위해서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일은 그리 녹록치가 않은 것입니다. 자신만을 사랑하던 죄인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완성이 되어지는 일이 어찌 쉽기만 하겠습니까?

여기에서의 문둥병은 모든 죄인들의 총체적 부정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저 질병으로서의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문둥병이라는 질병으로서의 현상을 고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가난이라는 문둥병 질병이라는 문둥병 약함이라는 문둥병 그런 것들에서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소원을 이루는 것을 신앙이라 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적 자아 숭배 교라는 저주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진짜 벗어나야 할 문둥병인 것입니다. 만일 문둥병을 고쳐주는 것 정도가 신앙의 본질이라면 예수님께서 문둥병에서 벗어난 그이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시면 안 되지요? 이왕 그런 것이 목적이라면 예수님은 그에게 가서 동네방네 알려서 문둥병자란 문둥병자는 모두 오게 하라고 하셨어야지요?

그런데 주님은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자신의 소원을 가지고 주님을 찾아오는 자들은 예수님에게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소원을 내려놓고 주님이 원하시면의 자리로 내려앉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 문둥병자의 말을 듣고 수 없이 모여 들었을 수많은 문둥병자들을 내버려 두고 산으로 가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자신의 소원을 이루는 종교가 아닙니다. ‘내가 원하노니의 자리에서 주님이 원하시면의 자리로 내려가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인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본문 9절을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하십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문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어떻게 해야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는 것이지요? 그 말은 자기에게 닥친 모든 상황과 현상과 사건을 주님의 사랑으로 해석해 내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셨다가 말았다가 또 사랑하셨다가 말았다가 조변석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으로 선택을 받은 그 순간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보면 도저히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일어나는 것 같지 않은 그런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지요? 그 때에도 성도는 이건 모두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일이므로 내가 이 상황에 순종 하겠다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 닥쳤을 때 주님이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시나보다하고 그 분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하느님을 떠나버리는 것은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은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느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옳습니다라는 신앙 고백의 자리로 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가 맺어야 할 열매입니다.

그렇게 우리 성도가 맺어야 하는 열매로서의 거룩은 하느님의 편을 들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사랑하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건 단순히 구제나 봉사나 헌신이나 희생 등의 인도적인 차원에서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사랑하는 정도의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조금 어려우겠지만 끝까지 잘 들어보세요. 오늘 본문의 역교차 구조는 이렇게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A : (7a) 너희가 나를 떠나지 않고 또 내 말을 간직해 둔다면 B : (7b)무슨 소원이든지 구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것이다. C : (8)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면 D : (9)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E : (10)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F : (11a)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G : (11b)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G': (12)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F': (13)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E': (14)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D': (15)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너희에게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다 알려 주었다. C':(16a)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B': (16b)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다 들어 주실 것이다. A': (17)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

이러한 역교차 구조(chaism)의 핵심은 항상 맨 가운데에 있는 것과 맨 가장 자리에 위치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된 강조점은 AA' 그리고 GG'인 것입니다. AA'를 연결시켜 보면 성도가 예수님 안에 머무는 행동의 구체적인 결과가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GG'를 보면 그렇게 서로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계명이며 그 계명을 지킴으로 성도는 기쁨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전체 요약입니다.

그런데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은 분명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며 서로 사랑하라고 하면서 그렇게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당신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갑자기 하느님의 계명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성도는 거기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본문 9절 이하를 다시 보겠습니다.

 

(요한15:9-11)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11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지요? 그런데 우리가 정말 하느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있나요?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자가 아니라는 거지요? 13절과 14절로 가면 더 암담해 집니다.

 

(요한15:13-14) 13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계명을 지키고 서로 사랑하는 것의 구체적인 실천세목이 제시가 되는데 그게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점입가경(漸入佳境) 입니다. 우리는 도저히 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을 평생의 숙원 사업으로 여기며 살아왔던 우리가 남을 위해 목숨을 버리다니요?

따라서 우리는 예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도 아니고 계명을 지킬 수도 없는 자이며 서로를 사랑할 수도 없는 자가 맞지요? 그런데 15절로 가면 대 반전이 일어납니다.

 

(요한15:15) 15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다 알려 주었다.

 

도저히 아닌 다를 이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친구가 될 수 없는 우리를 향해 주님이 먼저 값없이 친구라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친구가 된 것인지 보세요.

 

(로마5:6-10) 6 우리 죄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때가 이르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7 옳은 사람을 위해서 죽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혹 착한 사람을 위해서는 죽겠다고 나설 사람이 더러 있을지 모릅니다. 8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9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었으니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하느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될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던 때에도 그 아들의 죽음으로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하물며 그분과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에 와서 우리가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우리를 친구 삼기 위해 먼저 우리를 대표하여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예수 때문에 우리가 감히 예수의 친구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의 공로로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린 친구가 된 것이고 서로 사랑하는 자가 된 것이고 계명을 지키는 자가 된 것입니다. 본문 16절을 보면 좀 더 분명해 집니다.

 

(요한15:16)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다 들어 주실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를 택해서 우리가 하느님의 친구가 된 것이지 우리가 뭔가를 해서 하느님의 친구의 자격을 갖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전적인 무능력과 전적인 타락 속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들에서 천지의 주재 하느님의 친구가 된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 드린 것처럼 본문 16절에는 두 개의 목적절이 있다고 했지요? 처음 목적절은 선택과 열매와의 관계 하느님의 선택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라는 목적에 대해 기술을 하고 있는 것이고 두 번째 목적절은 첫 번째 목적절에 지배를 받는 종속 결과절로서 하느님께서 반드시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이므로 거기에 관해 그들이 하는 기도는 다 이루어 질 것임을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두 목적절이 모두 선택하심이라는 단어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매에 관한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선택에서 시작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자연스럽게 격발이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포도나무 가지를 어디에다 쓰는지 아세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화목으로도 못 씁니다. 그래서 포도나무 가지는 쓰레기를 태울 때 함께 태워 버립니다.

 

(에제15:2-4) 2 '너 사람아, 포도덩굴이 무엇이냐? 숲 속에 얽힌 덩굴과 다를 게 무엇이냐? 3 거기에서 가구를 만들 재목이 나겠느냐? 무엇을 걸어 둘 못을 만들겠느냐? 4 보아라, 땔감으로 불에 들어 같다. 양쪽 끝은 타고 가운데는 그을었는데, 그것을 무엇에 쓰겠느냐?

 

그런데 그렇게 쓸모없는 가지에서 열매가 맺히는 것은 순전히 줄기와 뿌리의 덕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포도나무 가지라 비유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쓸모없는 자들에게서 열매를 맺어내시는 하느님의 그 사랑을 아는 이가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고 거기에서 기쁨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이미 친구로 삼으시고 열매 맺는 자로 만드시고 거룩한 자로 만드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 거룩하라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에만 기쁨이 있기에 당신의 기쁨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그건 결코 우리에게 감당하지 못할 짐을 지우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때때로 우리에게 징계(懲戒)를 가하시는 것도 우리의 죄에 대한 보응(報應)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쁨과 우리의 유익을 위해 우리의 거룩을 위해 은혜로 허락을 하시는 것입니다.

 

(히브12:10~11) 10 우리를 낳아 준 아버지는 잠시 동안 자기 판단대로 우리를 견책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익을 주며 우리를 당신 처럼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견책하시는 것입니다. 11 무슨 견책이든지 그 당장에는 즐겁기보다는 오히려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책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은 마침내 평화의 열매를 맺어 올바르게 살아 가게 됩니다.

 

징계는 우리의 유익 즉 우리의 기쁨을 위한 것이고 우리의 거룩을 위한 은혜에서 발원한 것입니다. 우리를 기쁘게 해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사랑은 항상 기쁨을 동반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사랑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스바3:17) 17 너를 구해 내신 용사 네 하느님 야훼께서 네 안에 계신다. 너를 보고 기뻐 반색하시리니 사랑도 새삼스러워라. 명절이라도 된 듯 기쁘게 더덩실 춤을 추시리라.'

 

(마태3:17) 17 그 때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 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기뻐하는) 아들이다.'

 

여기도 역시 마찬가지지요? 사랑과 기쁨은 항상 동행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은혜를 깊이 자각하고 자신의 불가능함을 올바로 직시한 이들은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고 그들은 하느님의 계명 즉 하느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게 되는 것이고 아주 가끔이지만 그 속에서 하늘의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왜 열매와 사랑의 이야기에 계명이라는 단어가 불쑥 튀어 나오는지 잘 아시겠지요?

하느님의 계명의 요약이 사랑이잖아요? 따라서 하느님의 은혜를 자각하고 올바로 인식한 이들은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는 것이고 그들이 바로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수시로 실패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과거에 잠깐씩 맛보았던 하늘의 기쁨을 추억하고 되새기며 그 완성된 하늘나라를 기대하며 희망하는 것이 성도의 인생입니다.

 

(시편1:1~2) 1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고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하고, 2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복 있는 사람 즉 하느님의 백성들은 야훼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을 하는 자들입니다. 이 말은 여러 가지 율법의 세목을 지키는 것을 즐겁게 행한다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한 이들이 하느님의 그 사랑의 마음을 즐겁고 기쁘게 이해를 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계명을 지킴입니다.

 

(시편119:35, 48, 54-56) 35 나의 기쁨은 당신의 계명에 있사오니 그 길 따라 곧장 살게 하소서. 48 당신 계명 내가 사랑 하옵기에 쌍수 들어 반기고 당신 뜻을 언제나 나는 명상합니다. 54 나그네살이하는 이 내 집에서 당신 뜻을 노래로 따르리이다. 55 야훼여, 밤에도 당신의 이름을 잊지 않고 당신의 법을 지키리이다. 56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것, 이것이 나에게는 전부입니다.

 

여기도 역시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즐거워하고 그것만이 자기의 소유이며 분깃이라고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겠어요?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은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이 기쁨으로 격발이 되자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기쁘고 행복해 지더라는 것입니다. 순종이 곧 기쁨이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땠습니까?

 

(요한8:29) 29 나를 보내신 분은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 두시지는 않는다. 나는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하느님을 한 몸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에 항상 하느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며 사셨습니다. 그게 주님의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간음을 안 하고 도둑질을 안 하고 거짓말을 안 하고 살인을 안 하는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명령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반응하여 그 분이 하지 말라니까 안 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그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발각되어지고 폭로되어질 때 그래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하시는 하느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계명을 지키는 것이요 거룩으로 향하는 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때로는 죄를 짓고 나서 그 죄 속에서 계명을 지키게 되는 것이고 그 죄 속에서 거룩을 살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역설을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거룩하게 사는 것은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죄를 짓지 않는 단순한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자신에게 실망하고 죄에게 분노하며 하느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절박하게 간구하는 그 자기부인의 자리가 바로 계명을 지키는 자리이며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하느님께 더욱 더 가까이 가게 되는 것이니까요.

여러분이 하느님의 계명을 거룩하라 사랑하라하는 하느님의 권고를 단순히 착하고 선하게 살라는 권고로 지키기 힘든 것을 억지로 하게 하는 짐으로 생각하는 한 여러분은 또 다시 아담의 범죄 현장 속으로 빠지게 될 것입니다. 아담도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단순히 금지 조항으로만 여겼기 때문에 그 금지 조항이 서운해졌던 것이고 급기야 그 명령을 어기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신 것이고 그렇게 까지 세심하게 배려를 하시며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알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계명 지킴은 하느님의 마음을 알고 그 분을 사랑해 드리는 것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그것을 그냥 한낱 착하고 선하게 살라는 금지 조항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짐이 무거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조그만 유혹이 오자 그 짐을 확 내던져 버린 것입니다. 아닙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하느님의 은혜를 알고 그 분의 마음을 알고 그 분을 사랑하는 것으로 수렴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아닌 계명지킴 선한 삶 착한 일은 모두 꽝입니다.

사실은 십계명도 하느님과 이웃 사랑에 관한 것을 세목 화시켜 나누어 놓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렇게 계명의 진의는 하느님의 은혜를 알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나오는 성도의 삶의 본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의 은혜를 떠난 문둥병자들이 그 문둥병의 무서움과 더러움과 추악함을 경험하며 우리는 감히 이 문둥병을 고쳐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는 그런 자들이지만 이 문둥병 같은 세상을 경험해 보니 절대 이 문둥병을 가지고는 행복할 수 없음을 알기에 면목 없지만 주님이 원하시면 여기서 좀 건져 주십시오하는 자리로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그 더럽고 추악한 죄라는 문둥병에서 건져진 것이고 그 사실을 조금씩 배워가는 것이며 결국 그 사랑과 은혜 앞에 완전히 굴복하여 하느님과 연합이 되는 것을 목적지로 삼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친구가 맺은 사랑의 열매 오늘도 풍성히 맺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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