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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 세상이 미워하는 이들 (요한15:18~16:4)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5-10 조회수1,603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5. 10. 부활 제6주간 월요일 도란도란글방

세상이 미워하는 이들 

(요한15:18~16:4)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20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 21 그러나 그들은 내 이름 때문에 너희에게 그 모든 일을 저지를 것이다.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22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으면 그들은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들의 죄를 변명할 구실이 없다. 23 나를 미워하는 자는 내 아버지까지 미워한다. 24 일찍이 다른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들을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하지 않았으면, 그들은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한 일을 보고 나와 내 아버지까지 미워하였다. 25 이는 그들의 율법에 그들은 까닭 없이 저를 미워하였습니다.’라고 기록된 말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26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27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3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4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처음부터 이 말을 너희에게 하지 않은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5장 마지막 부분과 거기에 연결이 되어 있는 16장 서두까지 왔습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는 성도 입니다. 요한복음 14장부터 17장까지는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유언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예수님의 고별설교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우리가 오늘부터 묵상하게 될 요한복음 15장의 마지막 부분과 16장은 예수님의 유언의 결론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14장과 15장에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중심으로 농부이신 하느님께서 직접 맺으실 성도들의 열매에 관해 길게 설명을 하십니다. 그 열매는 다름 아닌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우리가 생산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부인이 되고 우리가 우리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마다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임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이 맺으시는 사랑은 자기주장과 자기보호 자기관심에 지나치게 몰입하여 집중하고 있는 자아 숭배 교에 빠진 자들이 타락한 자아의 현실을 올바로 직시하고 그렇게 누추하고 지저분하고 미덥지 못한 자기를 향한 사랑을 조금씩 내려놓게 되는 자기 부인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기부인과 십자가는 타락한 인간이 자발적으로 내어 놓을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느님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자기부인과 십자가라는 내용을 가진 하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영글어가기 위해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열심이 우리에게 들이닥치게 될 때에 그것이 고난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위 구절이 어떻게 끝이 나는지 기억하세요?

 

(요한15:16~17)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열매를 맺게 하고 항상 그 열매가 있게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는 자로 만드시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시겠다고 17절을 마무리 짓고는 갑자기 18절에서 성도를 향한 세상의 미움이 등장하는 것 입니다. 그것은 성도가 사랑하는 자로 영글어 가게 되면 될수록 그만큼 성도를 향한 세상의 미움이 가중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변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습니다. 내가 먼저 사랑하고 내가 먼저 섬겨주고 내가 먼저 바르게 살면 세상도 우리를 본받아 바르고 청렴하고 사랑이 넘치는 곳으로 변할 것이라고 믿어왔습니다. 그리스도교가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신자가 바르게 살면 세상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큰 착각은 없습니다.

신자가 아무리 바르게 살아도 세상은 변화하지 않습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변할 것을 기대하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것 자체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 개혁을 외치는 어떤 무리들의 바르게 살아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모토는 너무나 비 성경적인 것입니다.

신자가 바르게 살아서 세상이 변한다면 무엇 때문에 하느님이 당신의 아들을 보내서 죽게 하시겠습니까? 차라리 신자를 많이 만들어서 바르게 살게 하시는 것이 더 옳지 않습니까? 그러면 세상이 모두 그 신자들을 따라서 바르고 선하게 살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신자가 신앙으로 살아야 할 이유는 누군가를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남편이 아내가 우리의 희생과 사랑을 보며 뉘우치고 변화하여 새 사람으로 돌아오던가요?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쳤지요? 그러나 그게 맞는 것입니다.

세상은 아무리 교육을 하고 훈계를 하고 모범을 보여도 하느님의 은혜를 입지 않으면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이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그들을 통해 그 진리를 배우면 되는 것입니다.

왜 신자는 신자다운 삶을 살아야 하는가? 신자가 사랑하며 살려고 애를 쓰고 섬기는 삶을 살려고 애를 쓰는 이유는 그가 예수께 속한 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자가 세상의 방식과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예수님께 속한 자는 예수님의 생각과 뜻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자신이 누구에게 속했는가를 분명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세상은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른 목적지를 향해 다른 삶의 원리로 다른 삶을 추구하는 이들을 뜨악해 하며 급기야 미워하고 죽이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공식입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 나라라는 울타리 속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우리의 노력은 모두 미움으로 돌아와야 정상입니다. 심지어 세상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도 오염이라는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판단과 선택의 과정에서도 고민하고 싸우며 괴로워합니다.

를 섬기라는 오염의 외침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내 안의 성령의 외침이 서로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 대는 일을 수시로 경험합니다. 그렇게 우리 안에서 혹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세상 속에서 신자를 향한 세상의 미움을 경험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신자가 예수를 믿게 되면 그의 삶 속에서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기에 그러한 세상의 미움과 시험과 고난이 성도의 삶에 닥치게 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예수를 믿는 성도들을 세상이 미워하게 되는 이유는 예수를 믿는 자들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세상과 차별되고 구별된 삶의 방식과 자세 때문입니다.

 

(요한15:19) 19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세상은 자기들과 한 편만 사랑합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느님나라 사람들은 세상이 미워해야 정상입니다. 혹시 이 말씀을 곡해하여 난 세상과 별로 다른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데 어떡하지? 난 세상에서 선택이 되어 구별된 사람이 아닌가?’하고 고민하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신자에게서 나타나야 하는 세상에서의 구별됨은 그런 의미의 구별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러한 차별화 되고 구별이 된 삶의 모습은 성도의 삶에 나타나야 하는 아주 소중한 열매입니다. 성도는 세상과 구별되어 근본적인 삶의 자세와 지향점이 바뀌어 지기 때문에 세상과 섞일 수가 없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백성들은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필연적인 결실의 자리로 인도가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를 주장하고 숭배하던 자리에서 끌려 내려오는 삶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자발적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끌려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성도의 삶에서는 냄새가 나게 되는데 세상은 그 향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오로가 이렇게 묘사를 합니다

 

(고린후2:14~17) 14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분께서는 늘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우리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내가 우리를 통하여 곳곳에 퍼지게 하십니다. 15 구원받을 사람들에게나 멸망할 사람들에게나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16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죽음으로 이끄는 죽음의 향내고, 구원받을 사람들에게는 생명으로 이끄는 생명의 향내입니다. 그러나 누가 이러한 일을 할 자격이 있겠습니까? 17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장사하는 다른 많은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실한 사람으로, 하느님의 파견을 받아 하느님 앞에서 또 그리스도 안에서 말합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이기시고 개선행진을 하시는 것입니다. 절대 우리가 그 승리의 개선 행진을 하고 있는 그림을 그리면 안 됩니다. 그 개선 행진의 말미에 항상 끌려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포로들이며 노예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에 의해 사로잡혀 끌려가는 포로들이라는 말을 그렇게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개선 행진이 현재형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계속해서 포로로서 하느님에 의해 끌려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하느님이 우리를 이기시고 우리를 포로로 사로잡으시는데 그 과정에서 냄새가 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냄새는 개선 행진 때 피웠던 향냄새를 빗대어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대시대 때 승리의 개선행진을 하게 되면 그 개선 행렬 중간 중간에 항상 향을 피웠습니다. 승리를 오감관(五感觀)으로 즉 냄새로도 만끽을 하겠다는 의도에서 였습니다. 그 때 승자에게는 그 향냄새가 승리의 냄새요 축제의 냄새이지만 패자에게는 죽음의 냄새가 되겠지요

 

그래서 바로 그 승리의 행진 뜨리암뷰온티 라는 단어 뒤에 죽음에 이르는 냄새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포로로 잡으시고 우리를 거룩이라는 자리로 끌고 가십니다. 하느님이 승리하시고 우리의 옛사람이 완전히 패배하는 자리가 우리 거룩의 완성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매순간 우리를 이겨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때때로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뜻과는 별개로 거룩하고 고결한 삶이 드러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3:20)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세상은 거룩한 사람을 언제나 찬양하고 존경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때때로 착하고 정직하고 바른 사람들에게 박수와 찬사를 보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 대한 세상의 찬양과 존경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순간 비판과 배척으로 바뀝니다. 누군가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직하게 세금 보고를 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존경심을 가지다가 막상 자기 남편이 그럴라 치면 요령 없는 사람이라고 불평을 하는 게 세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포로가 된 이들은 반드시 손해 보는 자리로 끌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고뇌와 번민 속에서 때로는 실수와 넘어짐 속에서 십자가와 자기 부인의 자리로 끌려 내려가게 되는데 그 사람의 그런 삶이 하느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세상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냄새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실수와 넘어짐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사람의 고민하는 모습이나 고뇌하는 모습 속에서도 세상은 그로 하여금 편치 못한 삶을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요일3:13) 13 그리고 형제 여러분,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하여도 놀라지 마십시오.

 

(2디모3:12) 12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이들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부인되어져 가고 있는 성도들의 삶을 보면서 왠지 불편합니다. 세상의 삶의 원리와는 생리적으로 안맞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죽음에 이르는 냄새입니다.

그러나 같은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는 정말 그렇게 사는 것이 맞는 것이구나 누구나 외딴 섬은 아니구나하는 동질감의 확인 기회가 됨과 동시에 생명에 이르는 자극제요 촉매제의 역할을 하여 생명의 냄새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가밀리엘 문하에서 엄격한 유대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로마의 시민으로서 헬라 문화에도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핍박을 피해 갈 방법을 찾으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할례 같은 율법의 행위들을 조금만 용인해 주었으면 되었을 것이고 굳이 입을 열어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지 않았으면 되었을 것입니다. 헬라인들에게 핍박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 앞에서 복음에 관한한 입만 다물고 있었으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를 가만 놔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은 그를 사로잡으시고 그를 마치 개선 행진의 맨 끝에 있는 포로와 같이 취급을 하시면서 그의 입을 주장하셨고 그의 삶을 섭리해 나가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열심으로 바오로에게 그 고난을 통과하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고린전4:9~13, 16) 9 내가 생각하기에, 하느님께서는 우리 사도들을 사형 선고를 받은 자처럼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과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된 것입니다.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슬기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하고 여러분은 강합니다. 여러분은 명예를 누리고 우리는 멸시를 받습니다. 11 지금 이 시간까지도, 우리는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고 집 없이 떠돌아다니고 12 우리 손으로 애써 일합니다. 사람들이 욕을 하면 축복해 주고 박해를 하면 견디어 내고 13 중상을 하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쓰레기처럼, 만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16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는 하느님이 자신을 포로의 자리인 개선 행진의 끝에 두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는데 자신이 가타부타 말 할 자격이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에게 맡겨진 그 자리에서 입으로 삶으로 최선을 다해 복음만을 전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느님의 포로로 살게 되었을 때 세상은 우리 때문에 불편해 합니다. 가족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어떤 면에 있어서는 가족 중에 세상이 있을 때에 그 핍박은 가히 상상을 초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가까운 사람은 우리를 향한 세상 적 기대가 다른 사람들보다 크거든요.

 

(마태10:34~36)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포로로 잡히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살 수가 없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포로로 잡히는 순간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며 세상에서 지는 자의 삶으로 인도가 됩니다. 그 때 가족들과 지인들의 기대가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게 되지요?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최대한 약게 살아야 하는데 그 삶이 무산이 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 안에서 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는 이 세상과 반드시 미움의 관계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그 냄새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세상과 너무 사이좋게 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과 아무런 분쟁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에서 사는 방법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향하는 목적지도 똑같아요.

그리스도교가 뭔가 특별히 구별된 삶을 살고 있다는 착각들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들이 그렇게 모든 종교가 하나인데 너무 유별나게 굴지마라고 그리스도교를 향하여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의 눈에 그리스도교회가 다른 종교와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들의 지탄은 뭐 별반 다를 것도 없는 것들이 그렇게 유난을 떠느냐 뭐 특별한 냄새도 없는 것들이 자기들만 옳다고 하느냐? 너나 나나 똑같은 것 같은데 그냥 하나로 뭉치자는 비아냥인 것이지 우리가 대단하게 다른 삶을 살아내었기 때문에 그렇게 무례하게 구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정말 그리스도교회가 그들과 다른 삶의 방식으로 세상과 역행하여 살고 있다면 그들은 함부로 그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 입니다. 그처럼 다른 이들에게 죽음의 냄새가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나의 향기를 맡으며 죽음을 느낀다는 것은 내가 그 사람에게 저승사자처럼 여겨지게 된다는 말이기 때문에 그 지경에 처해 있는 성도는 참으로 힘이 듭니다. 그래서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똑같은 생각으로 똑같은 것을 추구하며 똑같이 살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게 죽음의 냄새가 되지 못하는 성도는 존재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반드시 세상에게 미움을 받아 내야 합니다. 그렇다고 자기의 죄나 모난 성품으로 미움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마태5:10~12)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성도는 반드시 예수님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고난을 받게 되어 있는데 자기가 악한 일을 하여 세상으로 부터 당하는 미움이나 고난 그리고 자기가 잘 못 믿어서 세상으로 부터 당하는 괴로움과 억울함과 아픔은 여기에 포함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열심히 믿는다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교회 일에 지나치게 빠져서 가정 일을 게을리 함으로 인해 문제가 생길 때 그것을 예수 때문에 당하는 박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왜 예수 때문입니까? 자기 자신 때문이지요.

교회 일을 하면서 자기 고집대로 하다가 다른 사람과 갈등이 일어나면 그것을 예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라고 미화시킵니다. 그게 어떻게 예수 때문입니까? 자기 자신의 성질 때문이지요. 성경에는 심판이 성소에서 시작이 된다는 구절이 여러 곳에서 반복되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예레25:29) 29 보라, 내 이름으로 불리는 그 도성에 내가 재앙을 일으키기 시작하는데, 너희가 벌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너희는 벌 받지 않을 수 없으리니, 내가 이 땅의 모든 주민에게 칼을 불러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과 같이 살인, 도적질, 악행, 남의 일에 간섭함 등으로 남들에게 지탄을 받거나 미움을 받아서는 안 되는데 그게 잘 안 고쳐지잖아요? 그 때 하느님께서 성소에 있는 하느님의 집 즉 교회 안에 들어오셔서 그들에게 작은 심판 들을 허락하실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성소에서 심판이 시작된다는 말은 하느님의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가짜들을 비롯하여 여전히 신자 안에 남아 있는 옛 사람의 잔재들을 고난과 시험을 통하여 순결하게 제련해 내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신자는 그러한 하느님의 열심에 의해 세상의 미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누구를 들어 교회의 더러운 잔재를 청소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세상이지요.

이렇게 자연스럽게 두 번째 이유로 넘어왔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삶의 방식으로 이끌림을 받게 되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이 첫 번째 이유라면 두 번째 이유는 하느님이 교회를 연단하시기 위하여 세상을 들어 사용하심으로 해서 세상의 미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말라3:1~5) 1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2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3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 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4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5 나는 심판하러 너희에게 다가가리라. 나는 주술사와 간음하는 자 거짓 맹세하는 자 품팔이꾼의 품삯을 떼어먹고 과부와 고아를 억압하는 자 이방인을 밀쳐 내는 자 나를 경외하지 않는 자들을 거슬러 곧바로 증인이 되리라.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렇지요? 그리고 세 번째로 성도가 세상에게 미움을 받게 되는 이유는 성도 자신이 세상과 사는 것이 불편해 지기 때문입니다. 돈과 쾌락만을 쫓아 자신의 인생을 올인 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이방인인 성도가 삶을 살아내기가 그리 녹록치 않은 것입니다. 인격이나 인품이나 됨됨이와는 아무 상관없이 돈 많은 자가 강자로 군림을 하고 많이 배운 자들이 훌륭한 사람으로 치부되는 이 세상 정말 불편하기 그지없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자기들이 합의해 놓은 이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도 우리를 공격하곤 합니다. 그게 세상으로부터 받는 미움의 또 다른 그림입니다. 네 번째로 성도는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자라는 이유만으로 세상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요한15:19) 19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신자가 하느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택함의 교리 즉 자신들의 행위를 부정하고 오직 하느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그리스도교 교리가 세상을 화나게 만들어 버린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구원을 위해 자신의 노력과 열심을 근거로 정말 최선을 다해 행위를 내어 놓고 있는 이들에게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선택으로만 주어진다고 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대단한 모독인 것입니다. 행위의 부정은 곧 그 대단한 인간들의 무력함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은 택함을 입은 신자를 미워하여 죽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요한16:1-4) 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3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4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처음부터 이 말을 너희에게 하지 않은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2절에 보면 '회당에서 내쫓을 것' 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그건 교회가 유대인들에게 받는 박해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근사한 종교 행위를 근거로 하여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는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선택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교회를 출교하고 출회하며 자신들의 무리에서 쫒아 내 버리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왜 그렇지요? 자기들은 그렇게 열심히 율법도 지키고 제사도 지내고 하는데 어떤 사람들이 나타나서 구원은 그렇게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이 선택하셔야 하는 것이고 은혜로만 주어지는 것이라고 자신들의 행위를 보잘 것 없고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 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 건 열심을 그렇게 폄하해 버리는 그리스도교인들을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쫓아다니며 박해를 했던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오로 였지요? 바오로는 살기가 등등해서 그리스도교인들을 잡아 죽이러 다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이 하느님을 섬기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2절을 보면 그렇게 행위를 의지하여 하느님의 은혜와 선택을 부정하는 것이 하느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고 우길 것임이 예언이 되고 있지요? ‘그것이 하느님께 봉사라고 우긴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들의 무력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행위를 여전히 의지하고 있는 이들은 절대 선택의 교리 은혜의 교리를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게 인본주의의 망령인 것입니다.

 

(루가4:25~29)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예수님이 뭐 별로 하신 말씀도 없습니다. 그냥 하느님의 백성은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하느님의 선택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벼랑으로 밀어 버리려 했습니다. 이렇게 자기의 모든 행위를 부인해야 하는 올바른 교리에 입각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은 예수를 열심히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조차 미움을 받습니다.

 

(묵시2:9~10) 9 나는 너의 환난과 궁핍을 안다. 그러나 너는 사실 부유하다. 또한 유다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에게서 중상을 받는 것도 나는 안다. 그러나 그들은 유다인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다. 10 네가 앞으로 겪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이제 악마가 너희 가운데 몇 사람을 감옥에 던져, 너희가 시험을 받게 될 것이다. 너희는 열흘 동안 환난을 겪을 것이다. 너는 죽을 때까지 충실하여라. 그러면 내가 생명의 화관을 너에게 주겠다.

 

유대주의, 하느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붙들지 못하고 사람의 가능성을 크게 인정하며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복의 진수라 착각 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은 사실은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라는 것입니다. 그 사탄의 무리가 성당 안에 들어와 있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그 사탄의 무리에게 교회를 붙여버리십니다. 그 사탄의무리가 교회를 훼방하게 그냥 놔두신다는 것 입니다. 이렇게 성도는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자라는 이유만으로도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다섯 번째로 성도는 이 세상의 악함을 폭로하기 위해 세상의 미움을 받기도 합니다.

 

(하바꾹1:2~4) 2 주님, 당신께서 듣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까? 당신께서 구해 주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폭력이다!” 하고 소리쳐야 합니까? 3 어찌하여 제가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제가 재난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제 앞에는 억압과 폭력뿐 이느니 시비요 생기느니 싸움뿐입니다. 4 그러니 법은 스러지고 공정은 영영 모습을 드러내지도 못합니다.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니 왜곡된 공정만 모습을 드러냅니다.

 

(시편69:5) 5 저를 까닭 없이 미워하는 자들이 제 머리카락보다 더 많습니다. 저를 파멸시키려는 자들, 음흉한 제 원수들이 힘도 셉니다. 제가 빼앗지도 않았는데 물어내라 합니다.

 

시편 69편을 비롯한 성경 여러 곳에 성도가 당하는 이유 없는 고난이 나오지요? 하박꾹은 왜 악인들이 형통하며 왜 악인들이 의인을 에워싸고 있는데 하느님이 침묵하시냐고 항의를 합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세상이 무고한 자기를 공격하는 데 가만히 계시냐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서도 그런 일을 왕왕 겪지요.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우리가 세상에게 맞아서 초죽음이 되어 가는데 하느님이 그냥 놔두시는 경우가 종종 있으시지요? 그 때 성도는 세상의 악함을 폭로시키고 그러한 세상의 미움을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심판의 근거로 쓰실 수 있게끔 도구가 되어 쓰이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로 하느님 나라의 백성인 성도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게 놔두시는 것은 천국이 이 땅에 감추인 보배로 들어와 있음을 고지(告知)하기 위함입니다.

 

(마태13:44) 44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하느님은 천국이라는 보배를 멋진 진열장에 진열해 놓지 않으시고 밭에다가 감춰두셨습니다. 그 말은 천국은 이 땅에서 아주 보잘것없고 힘도 없고 화려하지도 않게 나타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라는 보배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셔서 하느님의 백성으로 불러내신 이들에게만 보이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그 나라와 그 나라의 백성들이 세상에게 당하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더 약하고 더 보잘것없고 더 못나게 감추어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이 세상에 믿음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내기 위해 세상에게 맞아 죽는 모습으로 살게 되기도 합니다.

일곱 번째로 하느님의 백성들이 세상에게 미움을 받고 고난을 당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도움의 필연성을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16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고 공격할 것이라는 걸 이제야 이야기 하시는 이유가 나옵니다.

 

(요한16:4) 4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처음부터 이 말을 너희에게 하지 않은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뭡니까? 지금까지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이 고난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을 때에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고난을 다 막아 주셨습니다.

 

(루가10:17) 17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보세요.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에는 귀신들도 제자들에게 항복을 했습니다.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밥을 먹었을 때에나 안식일 날 이삭을 비벼 먹었을 때에도 예수님이 다 막아서서 그들을 보호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동산에서 붙잡히셨을 때에 제자들을 놓아주라고 호통을 치시며 제자들을 보호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에도 제자들은 안전하게 모두 갈릴레아로 돌아갔습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후에는 그들이 예수님과 똑같이 세상의 공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껏 예수님 께서 보호해주시고 지켜주셨는데 이제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미움과 고난을 확약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 스도의 보호하심 안에 들어가야만 비로소 안전할 수 있는 성도의 피조물 된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고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필연적으로 동참해야 하는 성도의 신분에 대한 고지였던 것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를 작게나마 경험하면서 십자가의 위대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그 은혜에 대해 조금이나마 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필리3:10) 10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런데 사실 주님은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당신이 이 세상의 문제들에 전혀 무관심하며 전혀 개입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우리에게 세상의 공격을 그대로 받게 하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오늘 본문 어디 한 구절 세상의 미움이나 공격을 막아주신다는 구절이 있는지요. 그냥 통보일 뿐입니다.

나중에 그런 일이 일어날 때에 당황하지 마라 그래서 내가 미리 일러두는 거야오히려 미움과 고난의 도래를 확증해 주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도 우리가 세상에게 당할 때 말려주지 않으시는 것은 예수를 더욱 더 꼭 붙들라는 것입니다. 예수 없으면 너희들은 그렇게 죄에게 당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들이니까 예수를 꼭 붙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필연적으로 세상의 미움을 당하고 세상으로부터 고난을 당하게 되겠지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지금 우리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미워하는 것이라고요. 그래서 그들은 지옥에 간답니다.

 

(요한15:22-25) 22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으면 그들은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들의 죄를 변명할 구실이 없다. 23 나를 미워하는 자는 내 아버지까지 미워한다. 24 일찍이 다른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들을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하지 않았으면, 그들은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한 일을 보고 나와 내 아버지까지 미워하였다. 25 이는 그들의 율법에 그들은 까닭 없이 저를 미워하였습니다.’라고 기록된 말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늘의 비밀을 다 알려 주셨음에도 그것을 알아먹지 못하고 계속해서 인간들의 가능성을 주장하고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에만 집착하는 자들은 결국 하느님을 미워하는 자들이고 그들은 이미 성경에 그렇게 되도록 예언이 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들은 예수가 직접 이 땅에 오셔서 하늘의 비밀을 말씀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예수를 거부하고 핍박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죄를 핑계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신도들을 예수와 똑같이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건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예수님과 연합되어 있는 우리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내고 잘 이겨 냅시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힘이 되는 것은 우리 주님이 먼저 그 미움과 고난을 다 당하셨다는 것이고 지금도 우리 앞서 가시면서 우리보다 먼저 그 미움과 고난을 당하고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요한10:4) 4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님은 앞서 가시면서 우리를 천국으로 이끌고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 신도에게 닥치는 필연적 미움과 고난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증거이니 당당하게 자랑스럽게 미움을 당하세요.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값없는 구원입니다. 그 말을 값싼 구원으로 오해를 하시면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값없이 허락하신 것은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값진 것이기 때문에 값없이 주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값없는 은총을 선물로 받을 때는 아무런 조건도 아무런 대가도 필요 없습니다만 이 은혜를 받고 나면 이 은혜는 서서히 우리의 삶 전체를 요구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손과 발의 행동과 입술의 말과 마음속의 생각까지 전체를 요구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속속들이 하느님의 자녀답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변화하기를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때로 손해를 견뎌야 하기도 하며 때로 고난을 감수해야 하기도 하고 가끔 죽음을 견뎌야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값 치고는 대단히 비싼 값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은혜는 선불이 아니라 후불이라고 말을 한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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