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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진리의 영 (요한16,12-15)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5-12 조회수1,811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5월 12일 수요일

[부활 제6주간 수요일진리의 영 (요한16,12-15)

(백) 부활 제6주간 수요일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1독서<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사도17,15.2218,1)

15 바오로를 안내하던 이들은 그를 아테네까지 인도하고 나서자기에게 되도록 빨리 오라고 실라스와 티모테오에게 전하라는 그의 지시를 받고 돌아왔다.

22 바오로는 아레오파고스 가운데에 서서 말하였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대단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23 내가 돌아다니며 여러분의 예배소들을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도 보았습니다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합니다.

24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는 살지 않으십니다.

25 또 무엇이 부족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도 않으십니다하느님은 오히려 모든 이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26 그분께서는 또 한 사람에게서 온 인류를 만드시어 온 땅 위에 살게 하시고일정한 절기와 거주지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27 이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게 하려는 것입니다더듬거리다가 그분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사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28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몇 사람이 우리도 그분의 자녀다.’ 하고 말하였듯이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29 이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므로인간의 예술과 상상으로 빚어 만든 금상이나 은상이나 석상을 신과 같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30 하느님께서 무지의 시대에는 그냥 보아 넘겨주셨지만이제는 어디에 있든 모두 회개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명령하십니다.

31 그분께서 당신이 정하신 한 사람을 통하여 세상을 의롭게 심판하실 날을 지정하셨기 때문입니다그리고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리시어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증명해 주셨습니다.”

32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하여 듣고서어떤 이들은 비웃고 어떤 이들은 그 점에 관해서는 다음에 다시 듣겠소.” 하고 말하였다.

33 이렇게 하여 바오로는 그들이 모인 곳에서 나왔다.

34 그때에 몇몇 사람이 바오로 편에 가담하여 믿게 되었다그들 가운데에는 아레오파고스 의회 의원인 디오니시오가 있고다마리스라는 여자와 그 밖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18,1 그 뒤에 바오로는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로 갔다.

 

화답송 시편 148,1ㄴㄷ-2.11-13ㄱㄴ.13-14ㄱㄴㄷ

◎ 주님의 영광 하늘과 땅에 가득하네◎ 알렐루야.

○ 하늘 위에서 주님을 찬양하여라높은 데에서 주님을 찬양하여라모든 천사들아주님을 찬양하여라모든 군대들아주님을 찬양하여라

○ 세상 임금들과 모든 민족들고관들과 세상의 모든 판관들아총각들과 처녀들도노인들과 아이들도주님 이름을 찬양하여라그 이름 홀로 높으시다

○ 주님의 위엄 하늘과 땅에 가득하시다그분이 당신 백성 위하여 뿔을 높이셨네그분께 충실한 모든 이그분께 가까운 백성이스라엘 자손들은 찬양하여라

 

복음<진리의 영께서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16,12-15)

12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14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1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백) 부활 제6주간 월요일(05/06) 다해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제1독서(사도17,15.22~18,1)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는 살지 않으십니다. 또 무엇이 부족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모든 이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또 한 사람에게서 온 인류를 만드시어 온 땅 위에 살게 하시고,  일정한 절기와 거주지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게 하려는 것이아니다.  더듬거리다가 그분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24-27)

 

바오로는 먼저 하느님을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분으로 소개한다.

그리스인들의 범신론(汎神論; pantheism; 신과 우주를 똑같은 것으로 보는 종교관 또는 철학관)에 의하면, 만물의 근원은 물, 불, 공기 등이며, 이것들이 이합집산(離合集散)에 의하여 만물이 만들어지고 신들도 존재하게 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바오로는 우주와 만물 모두가 단수로 표현된 '신'(호 테오스; ho theos)에 의하여 창조되었다고 선포함으로써 그리스 철학자들의 견해를 정면으로 부정하였다.

이러한 바오로의 선포는 수많은 우상을 숭배하며 우주 만물의 존재와 역사의 흐름에 대하여 끊임없이 사변적인 논쟁을 거듭하였던 그리스 철학자들의 모든 논쟁이 더 이상 의미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 (24)

 

원어 '퀴리오스'(kyrios; 주님)는 주재자(主宰者; 책임지고 맡아서 처리하는 사람)라는 의미와 더불어 '소유' '섬김의 대상'이라는 의미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단어이다.

즉 본문은 '천지의 주인이시다' 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하늘과 땅을 소유하는 주인이라는 표현은 소유권 뿐만 아니라 통치권도 있음을 나타낸다.

어떤 대상을 소유하고 있는 자가 그것의 운명까지도 좌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인간의 삶과 우주의 운행에 대하여  무관심하다고 가르쳤던 에피큐로스 철학자들의 주장과는 다른 것이다.

 

바오로에 의하면, 하느님은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있는 분이 아니라 인간이 삶 속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행동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우주와 인간을 소유하고 있는 소유주이시기 때문이다.

 

아테네 사람들은 사도행전 17장 23절에 나오는대로 '알지 못하는'(아그노스토스; gnostos) 신(神)까지 섬겼다.

그 유래는 B.C.6세기 키레네인 에피메니데스(Epimenides)가 전염병으로부터 아테네 사람들을 구한 후에, 이 일에 대해 신들에게 감사를 드리는 과정에서 혹시 몰라서 감사드리지 못한 신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는 단(壇)을 쌓아 제사를 드린데서 기원하였다.

 

신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알지 못하는 신까지 섬기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바오로는 그 알지 못하는 신이 누구인가를 알려주겠다고 하면서 하느님께 대해서 설명해 나갔다.

바오로는 선교 대상지의 관습과 환경을 무시하지 않고 거기에 적합한 방식으로 선교했던 것이다.

 

바오로는 이러한 아테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으로 섬기고 있는 그 신의 개념으로부터 출발하여 그들이 알지 못하고 섬겼으나 유일한 참 신이신 창조주 하느님을 증거한데 이어서 이 하느님은 손으로 지은 신전에는 계시지 않음을 선포하였다.

 

여기서 '손으로 지은 신전' 계시지 않는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아테네에 있는 신전들의 무용성을 주장한 것이며, 더 나아가서 아테네 사람들이 섬기는 잡다한 우상들과 구별되는 하느님의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편재성(遍在性)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엇이 부족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도 않으십니다' (25)

 

바오로는 섬기는 자가 없으면 곧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며 마치 어떤 것이 부족한(need)것처럼 사람의 손에 의해 섬김을 받는 우상과 달리 하느님께서는 자기 충족성(self-sufficency)을 가지신 분임을 논증하고 있는 것이다.

 

우상들은 다른 존재에 의하여 자기 존재와 의미를 가지는 허구적이며 의존적인 존재인데 반해서 하느님께서는 만물의 창조주요 주권자로서 오히려 사람들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친히 주시는 유일한 절대자이심을 밝히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또 한 사람에게서 온 인류를 만드시어 온 땅 위에 살게 하시고,  일정한 절기와 거주지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26)

 

본문은 모든 인류가 하느님께서 만드신 아담 한 사람으로부터 이어져 왔음을 밝힌다.

아테네 사람들은 그들이 아티카(Attic)본토의 흙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다른 족속들과는 다르다는 민족적 우월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바오로는 이에 반대하여 온 인류가 한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동일한 조상을 가지고 있다는 인류의 하나됨을 언급하면서 그들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해 준다.

 

이러한 관계성 아래서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창조주 되시는 하느님을 바로 알고 섬기는 것이 마땅함을 밝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바오로의 인간관은(로마5,12-21; 갈라3,28) 인간 평등 사상의 뿌리가 되고 있다.

 

'일정한 절기' 번역된 '카이루스'는 '카이로스'(kairos)의 목적격 복수로서 연대기적 시간을 나타내는 '크로노스'(chronos)와 달리 중요하고 결정적인 역사의 때 혹은 기회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여기서 바오로가 말하는 '카이루스'라고 하는 것은 루카복음 21장 24절에 나오는 '이방인의 때'와 같이 각 민족의 생겨나고 사라지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거주지의 경계를 정하셨다' 표현과 더불어 이 세상의 모든 일이 역사의 주관자되신 하느님의 철저한 개입과 섭리에 따라 되어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만물의 움직임이나 역사가 우연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에피큐로스 학파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게 하려는 것입니다.  더듬거리다가 그 분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27)

 

'찾게'로 번역된 '제테인'(zetein)은 '몰두하여 찾다'(seek)라는 의미의 동사 '제테오'(zeteo)의 현재 부정사이다.

'더듬거리다가'로 번역된 '프셀라페세이안'(pselaaheseian)은 '느끼다','만지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프셀라파오'(pselaphao)의 희구법 과거형이다.

이러한 문법적 요소를 가지고 풀어서 번역한다면, 본문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더듬어 찾아서 그를 발견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진다면, 그를 찾을 수 있도록' 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의 연대(일정한 절기)를 정하시고 거주지의 경계를 한정시켰는데, 그렇게 하신 이유가 인간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더듬어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므로 인간들이 이제 그 방법으로 하느님을 찾아 나선다면 그분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하느님께서는 우주 너머 어딘가에 따로 떨어져 있어 인간이 결코 찾을 수 없는 그런 분이 아니다.

 

그분은 항상 우리 가까이에 그리고 역사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인간 역사의 영고 성쇠와 계절의 변화  그리고 우리 인간 사회 속에서 인간의 지혜와 힘으로 접할 수 없는 현상들을 보고서  그런 것들을 주관하고 계시는 하느님을 찾아 나서기만 하면 우리는 그분을 만날 수 있다.

 

즉 인간은 '자연 계시'를 통해 하느님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자연 계시'를 통해 접하게 되는 하느님은 '초자연적인 계시'인 성경을 통하여 접할 수 있는 하느님만큼 구체적인 모습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초자연적인 계시'인 성경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27)

 

사람이 하느님을 더듬어 찾아야 그분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분은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고 가까이 계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사실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기는 하되,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고 무관심하다는 주장을 하는 에피큐로스 철학자들의 사상이 옳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며 하느님께서는 비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격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그분은 인간과 친교할 수 있는 인격적이며 인간에게 가까이 계시는 분이시므로 인간들이 그분을 찾고자 하면 발견하여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부활 제 6주간 수요일 ㅡ 오소서 성령 이시여 [김웅렬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부활 제6주간 수요일복음(요한16,12~15)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13)

 

요한 복음 16장 13절에는 진리의 영이 오셔서 믿는 이들을 위해 하시는 두 가지 일들이 두 개의 동사로 나타나 있다.

 

첫째는, 믿는 이들을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이다.

'이끌어 주실 것이다'에 해당하는 '호데게세이'(hodegesei; he will guide)의 원형  '호데게오'(hodegeo)는 '인도하다', '지도하다', '안내하다','가르치다' 등  복합적인 뜻을 갖는다.

 

고전 희랍어 문헌에는 이 동사가 하늘로 가는 영혼의 여행에 관한 대목에 쓰였고, 70인역(LXX)에서는 히브리어 '나하'(naha)의 역어로 나오는데, 대개 하느님과 관련되며(탈출13,17; 15,13), 주로 시편에서 개인 생활 가운데 나타나는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고백에서 쓰였다(시편23,3; 25,9).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인도하심은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절정을 이룬다(요한14,6).

또한 성령께서는 믿는 이들을 위한 친절한 안내자가 되셔서 진리로 가는 길을 보여 주신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자애로 인도하시고(탈출15,13), 또한 당신께 성실한 종을 의로움의 길로 인도하셨듯이(시편23,3)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들을 그리스도의 삶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희랍어의 미래 시제가 나타내듯이 오늘도 그분께서는 믿는 이들의 삶에 내재하셔서 인도자로서의 역할을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이들은 매일 매순간 성령의 가르침과 인도 아래 있어야 하며,성령 충만을 위한 기도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에페5,18).

이것을 역으로 말하자면, 성령 충만이 없는 사람들은 주님의 참된 진리에서 소외될 수 밖에 없음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믿는 이들에게 앞으로 올 일들 '알려 주실 것이다'는 것이다.

 

'알려 주실 것이다'에 해당하는 '아낭겔레이'(ananggelei; he will tell) 미래 시제이며, '드러내 놓다', '선포하다', '가르치다','알리다' 등을 뜻한다.

 

우리 믿는 이들 안에 머무르시는 성령께서 매일매일 계속해서 우리 믿는 이들에게 미래 일을 가르치신다는 것은 하느님의 계획과 목적에 대해 무지한 인간의 실상을 드러냄과 동시에, 믿는 이들이 적절하게 하느님의 계획을 따라 살아야 함을 알게 한다.

사실은 이 동사가 문자적인 의미에서는 어떤 곳에서 돌아와서 어떤 사실을 '보고하다'이다.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 믿는 이들에게 알리시는 미래의 일의 성격을 규명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말하자면, 그분께서는 전혀 새로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사실을 가르치신다. 

따라서 '드러내놓다'(disclose)는 어휘가 적합하다.

 

성령의 역할은 자의로 무엇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느님께서 우리 믿는 이들에게 계시하셨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일체의 것들을 깨닫고 이해하도록 가르치시는 것이다. 

누구든지 깨닫게 하시는 영인 진리의 영께 배울 때에만, 예수님을 바로 알게 되고, 하느님의 계획과 목적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2017년 5월 24일 부활 제6주간 수요일

 

행복으로 이끄시는 진리의 영 안에서  

-기경호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16,13-14) 진리의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근본적으로 새로운 진리를 가르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계시진리를 더 명확히 더 풍요롭게 해주시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진리를 찾고 있습니까? 세상살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지식이나 과학적 진리, 삶의 지혜도 물론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지식과 경험이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끌어주지는 못하지요. 우리가 찾는 진리는 영혼 구원을 위한 진리요,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완성하며, 하느님을 반영하는 구원의 진리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진리는 하느님을 떠나서 만날 수 없지요.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그 어떤 것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완전한 진리는 계시 자체이며 진리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뿐인 구원의 진리, 생명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포괄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찾아야 할 진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자비의 말씀이 진리요, 연민으로 다가가 함께 하는 몸짓이 진리요, 십자가 죽음에 이르는 희생의 봉헌이 진리입니다. 결국 우리가 찾아야 할 진리는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나눔으로써 참 생명으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사랑의 진리요, 생명의 진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온 마음과 정신을 다 쏟아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영이 오시어 도와주셔야만 진리이신 예수님과 온전히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의 진리는 영이 아니고서는 깨달을 수 없고, 사랑의 실천 없이 알아차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참 신앙의 길, 참 인간됨의 길은 성령 안에서 끊임없이 그리스도와 동화되려는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따라서 진리의 영이 내 안에 오실 수 있도록 깨어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집착과 번뇌, 자기애착과 탐욕, 근심걱정과 교만의 덫에 걸려, 오시는 영께서 드나드는 문을 닫아버리지 말아야겠지요.

오늘의 시대는 장미빛 성공과 행복의 지름길을 제시하며 유혹하는 온갖 지식과 정보가 넘쳐 납니다. 속화된 지식과 거짓 사상들로 정신세계는 물론 삶 자체가 오히려 피폐해져 가는 현실이지요. 그러나 돈과 외모, 출세, 물질적 풍요를 얻을 수 있는 지식들이 과연 참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일까요?

우리는 지식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지혜, 진리의 영께서 주시는 진리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진리의 영께서 나를 찾아오시어, 계시의 말씀을 더 깊고 풍요롭게 알려주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처한 상황을 분명하게 밝혀주시어 ‘진리’에 따라 살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거기에 참 생명, 참 행복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 마음을 비우고, 온갖 집착과 애착에서 벗어나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진리의 영을 모시도록 해야겠습니다. 또한 성령께서 예수님의 구원 행위를 계속 수행함으로써 예수님의 ‘영광’에 기여하실 수 있는 ‘구원의 마당’, ‘생명의 터’가 되어야겠지요. 오늘도 진리이신 예수님을 갈망하고, 그분께서 보내시는 진리의 영 안에 머물며 영적 풍요로움을 체험하는 우리였으면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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