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이사악의 마음에 대한 묵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5-13 조회수3,266 추천수0 반대(0) 신고

가톨릭 굿뉴스 묻고 답하기 코너에 어제 올라온 질문이 있어서 그에 대해 한번 묵상을 한 후에 작성한 글입니다. 

 

성경에 대해 잘 모르지만 지극히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한번 말씀드려보겠습니다. 먼저 저도 개종 전에 알고 있었던 지식인데 혹시나 그곳에서 알았던 사실이 맞는지 몰라 본당에서 하는 성경 공부반에서 하는 봉사자분(교구 봉사자분)께 여쭤봤습니다. 이사악이 모리아 산으로 가는 게 예수님께서 골고타를 오르시는 것의 예표인지 하고 말입니다. 그때 그분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땐 그렇다고 하니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갔습니다. 그러다가 몇 년 전에 어떤 신부님의 권유로 아주 어려운 책인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삼위일체 책을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그 책의 일부분을 보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방금 전에 제가 가진 질문이 맞는 것이었습니다. 예표라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 기준을 가지고 한번 말씀드리보겠습니다.

 

그럼 한 가지 약간 의문이 들 수가 있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만약 이사악이 예수님과 같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사악도 번제물로 희생이 되어야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는 말씀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가 있을 겁니다. 이사악은 최종적으로는 하느님의 천사가 번제물로 삼기 위해 아브라함이 희생을 가하려고 했을 때 저지하도록 해서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덤불에 숫양이 미리 준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숫양이 결국에는 번제물로 바쳐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는 이사악이 번제물이 되어야 하는 상황이 숫양이 대신 번제물로 대신 된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이 논리가 좀 설득력이 있을 것 같습니다.

 

원래 번제물이라는 의미 자체도 실제 번제물이 되어야 하는 대상이 번제물이 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동물이 자신을 대신해서 희생을 하게끔 된 것이 번제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논리도 맞지만, 실제 하느님께서 맨 먼저 전제를 하신 말씀이 시험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테스트였습니다. 실제 한글로는 시험이라는 말로 사용되었지만 이 시험은 곤란과 역경을 나타내는 그 시험이 아니고 실제 시험, 테스트의 의미였습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이게 이 의미로 사용되어야만이 야훼 이레라는 말씀이 맞는 말씀이 되게 되는 논리가 성립합니다. 그렇게 보면 전체적으로는 사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인공은 분명 아브라함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 숨어 있는 양면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이사악도 숨어 있는 주인공이 될 수가 있습니다.

 

실제 제가 처음에 예표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만 이 예표는 소설 문학에서 사용되는 용어인 복선과도 비슷하다고 보면 이해가 좀 더 쉬울 수가 있을 겁니다. 소설에서 복선은 나중에 결말 부분에서 봤을 땐 그게 하나의 암시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게 암시로 작용하는 것을 독자들이 알 수가 있다면 그 소설은 독자들에게 별로 흥미를 줄 수가 없을 겁니다. 독자로 하여금 처음엔 그게 몰랐는데 결론 부분으로 가면서 어떤 게 그게 이런 걸 미리 암시를 해 준 것이라는 사실을 알 때 역으로 소설에 흥미를 가져다 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연이었던 게 그게 복선의 존재로 필연으로 구성을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작은 주인공 역할을 하는 이사악의 관점에서 자매님의 질문을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마치 이사악도 그런 생각으로 성경을 접근하면 좀 흥미롭게 묵상할 수가 있을 겁니다. 신약은 구약의 그림자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한번 접근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외아들이십니다. 이사악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하가르에서 낳은 이스마엘이 있지만, 이스마엘은 원칙상은 장자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스마엘은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약속의 자녀인 이사악을 염두에 두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미 이 내용은 성경에 있습니다. 쉽게 표현해서 이사악을 통해 하느님의 씨가 적통으로 계승되게 하려는 의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마엘을 기다리지 못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몸종의 몸을 통해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사악은 사라의 몸을 통해서 나왔기 때문에 완전 적통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과 이사악은 이것부터서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건 사실 예수님의 탄생 족보 혈통을 보면 깨끗한 혈통만이 있는 게 아니였습니다. 이것도 사실 숨은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설명을 생략하겠습니다.

 

아우구스투스 성인의 삼위일체 책에는 단순히 예표라는 설명만 있지 자세한 내용은 언급이 돼 있지 않았습니만 한번 논리적으로 유추는 할 수가 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는 아마 이사악이 지게 된 장작이 그 십자가를 상징할 거라고 저는 추측합니다. 실제 성경엔 나오지 않지만 이때 이사악의 나이가 대충 어느 정도인지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일단 삼 일 정도를 걸어갈 수 있어야 하고, 또 장작을 질 정도이면 오늘날로 보면 최소 고등학생 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17세 정도라고 가정한다고 해도 그럼 아브라함의 나이가 117세 정도가 됩니다. 이 정도의 나이에서 이 사건을 한번 들여다 보면서 성경을 해석하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보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제물로 바치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의 심리상태라든지 그런 건 나오지 않습니다. “.”라고 하는 대답도 나오지 않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으로 실행을 하는 모습만 성경은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를 했습니다. 사실 여기서부터 이미 아브라함의 믿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일찍이라는 말에서 나옵니다. 실제 그런 상황에서는 인간적으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상황이라면 순종을 한다고 하더라도 미적거리면서 하게 되는 게 일반적인 사람의 심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찍 행동으로 개시했다는 것 자체에서 이미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땠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보면 이사악이 한 번쯤 연로한 아버지에게 여쭤볼 수가 있었을 겁니다. 질문은 하지 않았지만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는 알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나중에 가까이 갔을 때 아브라함과 단 둘만 걸어가야 하는 상황에서 자기가 장작을 지기는 지는데 번제물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번제물은 어디 있는지 아브라함에게 여쭤보는 걸로 봐서는 당연히 아버지께서 하느님께 번제물을 바치시려고 하실 때 아버지께서 그 일에 자신을 대동하여 하시려고 하는 것을 알고 그냥 자식으로서 순응했던 것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막상 있어야 할 번제물이 없으니 의아했을 겁니다. 이렇게 보면 사실 처음부터 이런 질문을 했어야 했을 겁니다.

 

그럼 처음엔 왜 하지 않았을까를 한번 생각해봅니다. 아마 아버지를 믿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일 것입니다. 실제 절대적인 신뢰를 했다고 해도 이제 막상 하인들은 배제된 채 둘만 걸어가야 하는 상황에서는 조금 느낌이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질문을 했을 수 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사실 표현은 돼 있지 않지만 얼마나 가슴이 찢어졌겠습니까? 바로 네가 제물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완곡하게 에둘러서 표현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안심을 시키는 아버지의 마음에는 슬픔과 고뇌가 가득했을 겁니다.

 

그렇게 해서 목적지에 도착할 무렵에 다다랐습니다. 이때 제단을 쌓고 장작을 올려놓았습니다. 이때만 해도 아버지와 함께했을 겁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번제물은 언제 어디서 나오지 하고 생각하면서 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갑자기 아버지가 자기 몸을 묶는 것입니다. 이때 이사악은 자신이 번제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성경을 보면 반항을 한 모습은 기술되지 않았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이게 가능하겠습니까? “아버지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럼 제가 번제물이라는 것입니까? 어떻께 저한테 이럴 수가 있으세요? 이런 등등의 하소연을 할 법한데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이사야에 나오는 설명과 흡사합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과 같은 모습이면서도 입을 열지 않는 모습의 예언의 말씀과 같은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에서도 이사악이 골고타를 오르는 예수님을 예표한다는 게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런 모든 상황에서 보면 청년이 설마 아버지보다 힘이 없었겠습니까? 힘으로만 생각해도 얼마든지 아버지께 어떤 물리적인 힘을 사용해서 충분히 벗어날 수가 있었을 겁니다.

 

물론 순간 칼을 뽑아서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그 순간은 겁을 먹었을 겁니다. 결국은 하느님의 천사로 인해 생명을 보존하게 됩니다. 생명을 건졌지만 우리가 생각했을 때 아버지를 원망하거나, 심각한 트라우마로 작용했을 거라고도 짐작할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그런 추측도 가능하지만 여기서 저는 조금 달리 보고 싶습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만 생각해보겠습니다.

 

이사악은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아버지를 이해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이신 아브라함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렸을 겁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를 철저히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버지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준비해두셨다고 말입니다. 그 말씀을 신뢰했습니다. 근데 사실 결론을 본다면 실제 모습은 다르지만 이미 숫양을 준비한 것이 됩니다. 다만 시험하기 위해서 그 대상이 자기가 된 것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자기가 받았을 충격도 트라우마로 남지 않고 충분히 이해를 할 수가 있었을 겁니다.

 

바로 이사악을 예수님에 대입해서 생각해본다면 당연히 이해가 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이건 지극히 성경적으로만 봤을 때 이런 추론이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상처로 남을 수가 있을 겁니다. 이제 믿음의 눈, 신앙의 눈으로 본다면 충분히 이사악의 입장에서 아버지인 아브라함이 비인간적인 사람이 아닌 이상은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리는 효자의 마음으로 충분히 아버지를 이해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원망하거나 했다면,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피땀을 흘리실 때 원망을 하셔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시면서 전적으로 성부 하느님께 당신의 온 존재를 맡기시는 모습을 보면 충분히 이사악도 그런 마음으로 모든 걸 받아들였을 거라고 상상해봅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