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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요한16,29-33)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5-17 조회수2,685 추천수0 반대(1) 신고

2021년 5월 17일 월요일

[부활 제7주간 월요일이제는 너희가 믿느냐(요한16,29-33)

 

 

1독서<성령을 받았습니까?>(사도19,1-8)

아폴로가 코린토에 있는 동안바오로는 여러 내륙 지방을 거쳐 에페소로 내려갔다그곳에서 제자 몇 사람을 만나,

2 “여러분이 믿게 되었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하고 묻자그들이 받지 않았습니다성령이 있다는 말조차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바오로가 다시 그러면 어떤 세례를 받았습니까?” 하니그들이 대답하였다. “요한의 세례입니다.”

바오로가 말하였다.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주면서자기 뒤에 오시는 분 곧 예수님을 믿으라고 백성에게 일렀습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바오로가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시어그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고 예언을 하였다.

그들은 모두 열두 사람쯤 되었다.

바오로는 석 달 동안 회당에 드나들며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토론하고 설득하면서 담대히 설교하였다.

 

화답송 시편 68(67),2-3.4와 5ㄱㄷ.6-7ㄱㄴ(◎ 33ㄱㄴ)

◎ 세상의 나라들아하느님께 노래하여라◎ 알렐루야.

○ 하느님이 일어나시니 그분의 적들은 흩어지고원수들은 그 앞에서 도망치네연기가 흩날리듯 그들은 흩어지고불길에 밀초가 녹아내리듯악인들은 하느님 앞에서 사라져 가네

○ 의인들은 기뻐하며 춤을 추리라하느님 앞에서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너희는 하느님께 노래하여라그 이름을 찬송하여라그 이름 주님이시다

○ 고아들의 아버지과부들의 보호자하느님은 거룩한 거처에 계시네하느님은 외로운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시고사로잡힌 이들을 행복으로 이끄시네

 

복음<용기를 내어라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29-33)

29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제는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시고 비유는 말씀하지 않으시는군요.

30 저희는 스승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또 누가 스승님께 물을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이로써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3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2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아니이미 왔다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33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그러나 용기를 내어라내가 세상을 이겼다.”

 

 

 5월 21일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사도19,1~8)

 

 부활 제7주간 월요일독서 (사도19,1~8)


"그리고 바오로가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시어,  그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고 예언을 하였다. 그들은 모두 열두 사람쯤 되었다."  (6~7)

 

'안수하자'로 번역된 '에피텐토스'(epithentos) ~케이라스(cheiras)'는 '손을 ~에 얹었다' (laid his hands on~ ; placed his hands on~)이라는 뜻이다.

 

사실 '안수'를 묘사하는 명사 '에피테시스'(epithesis)가 있으나(사도8,18), '에피텐토스'라는 동사의 분사형을 사용한 것은, 사도행전 저자 루카가 바오로의 안수 행위를 보다 역동적으로 묘사하기 위해서이다.

안수는 단순히 상대방에서 손을 얹는 행위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 신적 축복을 빌며, 타인의 건강과 성령의 임재를 위해 행하는 기도이다(창세48,14; 민수27,18; 마태19,13).

 

바오로가 안수한 후, 이어 세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사도19,5) 성령이 임하여 신령한 언어(방언)와 예언의 역사가 나타났다.

이러한 사건에 대해 학자들 마다 해석이 좀 다르다.

 

 어떤 학자는 바오로의 안수가 직접적인 성령의 임재를 가져온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단지 세례 예식의 마지막 순서를 맡은 바오로의 순서가 끝날 때 이러한 역사가 나타났다고 본다.  아마 세례는 당시 에페소 교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아퀼라가 집행했고,   바오로는 세례를  마치는 마지막에 손을 얹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수의 이름으로 시행된 세례에 의해서 성령의 임재가 나타난 것이지, 바오로의 안수에 의해서 성령의 임재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견해이다.

 

 그러나 다른 견해도 있다. 사도행전 8장 17절에는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가 사마리아에 가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았을 뿐, 성령의 임재가 없는 사람들에게 안수할 때 성령을 받은 사건이 있다. 사마리아 신도들에게는 세례와 안수 사이에 분명히 시간적 공백이 있었고, 양자는 별개의 사건이었다.

이로 볼때, 성령의 임재와 역사는 사도의 안수에 직접적인 원인이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 것이다. 바로 안수가 성령의 임재와 역사(役事)의 방법이요 수단이라고 보는 것이다.

 

③ 어떤 학자들은 본절의 사건을 바오로의 제3차 선교 여행의 핵심지였던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교회 이후에, 아시아 지방을 향한 새로운 선교의 중심지가 된 에페소 교회를 위한, 새로운 12제자를 세우는 성령의 역사와 관련하여 일어난 예외적인 사건으로 본다.

12사람이 바오로를 도와 에페소 교회의 일꾼들이 되었고, 본절의 사건은 그들이 예언의 영을 소유하고 방언의 은사를 가진 에페소의 일꾼들을 만들기 위한 예외적 경우로 본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성령 강림을 안수와 직접 연관시키기 보다는 성령 강림은 성삼위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결과였고, 또한 이때 일어난 방언과 예언은 성령 임재의 가시적 표징이며, 이들을 하느님의 일꾼으로 사용하기 위한 특별한 역사로 보는 것이다.

 

 아시아 지방을 향한 새로운 선교의 중심지가 될 에페소 교회의 일꾼들을 세우는 자리에서 12명이라는 숫자는 그렇게 많은 숫자가 아니고, 따라서 세례와 안수를 사도 바오로가 모두 집전할 수 있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사도행전 19장 5절에 세례받은 사건이 언급되고, 19장 6절에서 '그리고'(kai ; 카이)하면서 안수받은 사건을  병행하여 묘사한다. 따라서 사도행전 8장 17절에서처럼, 세례와 안수를 별개의 사건으로 취급하고, 안수를 성령의 임재와 역사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순수하게 받아 들이는 것이다.

 

'그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고 예언을 하였다'

 

바오로의 안수 직후, 사람들은 신령한 언어 말하고(엘랄룬 (테)글롯사이스; elalun (te) glossais; they spoke in tongues)  예언도 했는데(에프로페튜온; epropheteuon; prophesied), 여기서 쓰인 두 개의 동사의 시제는 모두 계속됨을 나타내는 미완료 과거형이다. 따라서 그들이 상당한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방언과 예언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령한 언어(방언)'으로 번역된 '글롯사이스'(glossais)의 원형 '글롯사'(glossa)는 '언어'(language)를 가리킨다.  코린토 전서에서 방언은 영적으로 깊은 무아경에 빠진 상태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 땅의 언어가 아닌 천상의 말을 가리킨다.(1코린14,2.14),

 

코린토 교회에 나타난 방언은 하느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통해서 기도의 깊은 자리까지 내려가고,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과 업적을 찬양함으로써, 개인의 신앙에 확신을 주기 위하여 주어진 은사였다.

 

한편, '예언을 하였다'로 번역된 '에프로페튜온'의 원형 '프로페튜오'(propheteuo)는 '신탁' 또는 '감추어진 일들을 해석하는 것'을 가리키는 동사이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예언에 대한 정의는, 성령께서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들을  대신 말하고, 신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함과 동시에,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들의 잘못을 책망하고,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느님께서는 에페소의 열 두 일꾼들에게 이러한 은사를 허락하셔서 교회의 봉사자로 사용하셨다.

 

 

2016년 5월 9일 부활 제7주간 월요일

 

부활 제7주간 월요일 복음(요한16,29~33)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33)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미 평화를 얻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고, 열매맺는 삶의 비결도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모두 예수님 안에서 머무를 때에만 가능한 일들이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 속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서는 결코 평화를 얻게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의 의미도 들어 있다.

진정한 평화는 예수님에게서 나오므로(요한14,27) 예수님을 떠나서는 그 누구도 진정한 평화를 소유하지 못한다.

 

요한 복음 16장 33절의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에서 '얻게'에 해당하는 '에케테'(echete; have)는 '소유하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에코'(echo)의 현재 시제 가정법으로서 '계속해서 소유하다'는 뜻이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 듣고 준비하면, 마음을 동요시키는 고난의 상황 속에서도 평화를 누릴 수 있으며, 또한 평화를 계속해서 소유하는 이 축복을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사람들에게만 약속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제자들이 세상에서 필연적으로 고난을 당한다는 사실과 더불어 고난을 당할 때에 취해야할 태도와 그렇게 해야 할 근거를 말씀하신다.

 

우선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에서 겪을 수 밖에 없는 고난에 있어서 '겪을'의 뜻으로 번역 된 '에케테'(echete; have)는 현재 직설법 동사로서 '원리' 정해져 있는 격언적 진리를 나타낼 때 사용된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구별된 무리들이기 때문이다(요한15,19; 17,14).

 

한편, '용기를 내어라', '담대하라'로 번역된 '타르세이테'(tharseite; take heart; be of good cheer)는 '타르세오'(tharseo)의 현재 명령형으로서 '계속해서 용기를 내라', '계속해서 무서워 하지 말라'는 뜻이다.

고전 희랍어 문헌에서는 이같은 명령형이 '마음을 다시 먹으라'(take heart)는 뜻으로 흔하게 쓰였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의 제자들의 심리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그들은 확실히 세상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고, 아직 예수님을 위해  세상과 맞설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음을 다시 먹으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이유는 이러한 제자들의 내적인 상태를 잘 아셨기 때문이다(야고4,7참조).

그리고 이어서 제자들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때 담대할 수 있는 근거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여기서 '이겼다'로 번역된 '네니케카'(nenikeka; have overcome)는 '니카오'(nikao)의 완료 시제인데, 예수님께서 '이길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이미 이겼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어둠의 권세에 대한 승리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니카오'(nikao)는 '이기다', '정복하다'는 뜻인데, 신약에서는 언제나 영적 승리에 대해 사용되었고, 70인역(LXX)에서는 히브리어 '나차흐'(natsah)의 역어로 나타나 거의 독점적으로 적의를 가진 권세들에 대한 승리를 나타내는 데에 쓰였다.

즉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겼다는 것은 영적인 어둠의 권세인 이 세상 임금인 사탄(요한12,31; 16,11; 에페6,12)에게 승리하셨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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