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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 아버지의 영광 아들의 영광 나의 영광 (요한17:1~8)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5-18 조회수1,685 추천수0 반대(1)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5. 18. 부활 제7주간 화요일 도란도란글방

 

아버지의 영광 아들의 영광 나의 영광 

(요한17:1~8)

1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2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도록 아들에게 모든 사람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3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4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5 아버지,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제가 아버지 앞에서 누리던 그 영광으로, 이제 다시 아버지 앞에서 저를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6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뽑으시어 저에게 주신 이 사람들에게 저는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었는데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7 이제 이들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8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말씀을 제가 이들에게 주고, 이들은 또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제가 아버지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참으로 알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오늘부터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에 관해 공부를 할 것입니다. 이 장도 굉장히 엄청난 복음의 핵심 내용을 구구 절절이 함의하고 있기 때문에 간단하게 넘어갈 수 있는 그런 장은 아닙니다. ‘이 세상의 성경이 모두 사라지고 요한복음 17장 한 장만 남는다 할지라도 복음은 여전히 전해 질 수 있다고 말씀을 하셨을 정도로 요한복음 17장은 중요하고 복된 장입니다.

우리가 흔히 예수님의 기도하면 떠 올리는 것이 주님의기도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기도문은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이지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직접 올리신 기도는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오늘부터 우리가 공부하게 될 이 요한복음 17장의 기도로 대표된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7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먼저 1절부터 8절까지는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이고 9절부터 19절 까지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위한 기도이며 20절부터 26절까지가 당신의 제자들과 그 제자들에 의해 믿게 될 모든 신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부분인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를 우선 개괄적으로 공부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이 마지막으로 하시는 것이 기도라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에 당도하여 다시 한 번 기도의 중요성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분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끊임없이 기도를 하셨습니다. 어떤 때는 온 밤을 새워 기도를 하셨고 새벽 미명이 되기 훨씬 이전에 일어나셔서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다는 기록도 자주 발견합니다. 그 분은 제자들을 선택하시기 전에도 밤을 새워 기도를 하셨고 겟세마네에서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현장이나 죽은 나자로를 살리시는 현장에서도 그 분은 하느님께 먼저 기도를 하셨으며 이제 마지막으로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직전에도 하느님 앞에 간절한 기도를 하십니다. 이렇듯 기도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성도의 삶에서 필수적인 호흡과 같은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러한 스승의 기도의 습관을 곁에서 지켜보다가 스승님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라고 했던 것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는 그림입니다. 그렇듯 기도는 아버지와 아들 된 자의 긴밀한 대화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선택과 은혜로 그 분의 아들이 된 성도들은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미주알고주알 조잘조잘 대며 아버지와의 대화를 즐겨 하게 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종이나 외인들은 주인에게 함부로 말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무서워 보이는 주인도 아들이 와서 조잘조잘 자기 이야기를 할 때에는 그것을 즐겨 듣는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께 우리의 모든 사정과 삶의 이야기를 터놓고 아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들이니까요.

오늘 날의 기도는 상당히 곡해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우리는 하느님의 주권과 그 분의 권능을 알기에 그리고 그 분의 약속 이행을 확신하기에 더욱 더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좀 솔직해져 보자고요.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것이 정말 하느님께서 다 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분의 도우심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까? 성도가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주권에 모두 맡기기 위한 기특한 생각에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그 분의 약속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이 땅을 살다보면 하느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계시해 주신 하느님의 언약들이 과연 그렇게 될까?’ 하는 의심과 불안 속에서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까지 이 불완전한 옛 몸을 입고 있고 대적이라는 놈이 우리를 수시로 흔들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그럴 때 아니야 정말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며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야 아버지 맞지요?’ 하고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정말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흔들리고 연약한 가운데에서도 전혀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우심을 기대하지도 않고 아예 포기해 버린 사람들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을 믿으며 또한 하느님의 약속들을 확신한다는 믿음의 가장 좋은 표현 방식입니다. 우리가 무릎을 꿇고 하느님을 우러러보며 하느님께 아뢸 때만큼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선포하는 때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주권과 그 분의 권능을 인정하지 않고 어떻게 기도라는 것을 합니까? 안 그래요? 따라서 기도는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전한 성도의 기도는 자기의 요청과 간구로 일관 될 수 없습니다.

정말 하느님을 기다리며 진실로 의지하는 사람은 기도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저는 그 모든 것을 믿습니다. 하느님은 부지런히 하느님을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저는 믿습니다. 또한 하느님은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모든 만물이 하느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하느님의 통제를 벗어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제가 하느님께 나아오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 계신 것을 제가 알며 오직 하느님의 거룩한 임재 속에서만 제가 평화와 안식과 고요함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이유는 하느님이 바로 그와 같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옳은 방식인 것입니다. 기도는 당면한 문제의 해결이나 소원 성취를 그 목적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평화와 신앙의 성숙을 그 목적지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11:28-29)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의 무거운 짐을 다 짊어지고 하느님 앞에 나아가 납작 엎드렸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쉼을 얻게 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기도가 응답을 받고 못 받고는 부차적인 문제이며 차후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로든 하느님 앞에 나아가 엎드렸을 때에 하느님은 그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고 새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밭을 사라하셨을 때 예레미야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그는 하느님께서 이미 이스라엘 자손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 마당에 밭을 사는 일이 왜 필요한가 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그 때 예레미야는하느님 제 우둔함을 일깨워 주소서. 하느님께서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 저로 알게 하시고 그 거룩한 뜻을 제게 설명해 주소서하고 기도를 합니다. ‘이 마당에 왜 밭을 사라는 겁니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고 제 의견을 한번 들어 보세요하고 자신의 뜻을 펼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성도는 하느님과의 대화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게 되는 것이며 하느님의 백성으로 성숙되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기도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황급하고 위급한 기도 제목이 있다 하더라도 일단 하느님 아버지께 다 아뢴 후 그 일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어떤 선한 유익을 주시려 하시는지를 꼭 물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부터 공부하게 될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를 다 공부를 하시고 난 후에 나는 왜 기도해야 하는가? 그리고 나는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확실한 답을 얻으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때가 이르렀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는 어떤 를 말하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12장으로 가면 그 때가 어떤 때인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12:23, 27)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27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는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사건으로 아들이 영화롭게 되고 하느님 아버지가 영화롭게 된다고 합니다. 아들이 죽는데 아버지가 영화롭게 된다? 그리고 죽음 자체가 영화롭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관점으로는 선뜻 이해가 어려운 그런 내용입니다.

거두절미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하느님의 영광 그리고 아들의 영광이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앞서 공부한 13장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오지요?

 

(요한13:30~32) 30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31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32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유다가 예수님을 팔러 나가자마자 예수님 당신이 영광을 얻으셨다고 하십니다. 거기에서 동사의 부정과거 수동태가 쓰였습니다. 그 말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이지만 그것이 기정사실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쓰인 말입니다. 도대체 자기가 팔려서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무슨 영광이라고 이렇게 단 두 절에서 영광이라는 단어를 무려 네 번이나 쓰시면서 영광을 강조하실까요? 12장에도 역시 아들의 영광과 하느님의 영광에 대한 진술이 나옵니다.

 

(요한12:27~28) 27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28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그러자 하늘에서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에서도 하느님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수난의 순종을 가리켜 네가 이미 나를 영광스럽게 했다고 말씀하시고 앞으로 예수가 지실 십자가를 겨냥하여 네가 또 다시 나를 영광스럽게 하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참 잔인한 아버지 아닙니까? 우리는 영광 이라는 단어를 너무 표피적으로 이해를 하고 있기 때문에 자칫 오해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그 영광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머릿속에 꼭 새기고 가셔야 합니다.

영광 독사라는 단어는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 하느님의 성품 하느님 나라의 것이 가시적으로 계시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 영광이라는 단어가 함의하는 내용은 그보다 더 크고 풍성합니다.

원래 그 영광이라는 단어 헬라어 독사는 견해나 지식을 가리키는 단어였습니다. orthodox, paradox 등에 붙어 있는 그 ‘dox’ 가 바로 독사에서 파생된 접미사입니다. 그런데 그 독사올바르고 선한 견해를 가진 사람의 위치와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여지게 되었고 그러한 선한 견해와 지식을 가진 사람을 향한 칭찬과 명예를 나타내는 단어로 발전했으며 지위를 굳힌다 명성을 얻는다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성경에 나오는 영광이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나오는 빛나는 영예라는 의미와 하느님과 하늘의 것이 가시적으로 계시된 상태를 둘 다 아우르는 단어인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이 영광이라는 단어가 하늘의 것이 인간 세상에 가시적으로 계시되는 것’(11:4, 12:16,23, 13:31) 이라는 의미와 칭찬과 명예와 명성 빛나는 영예’(8:24, 12:28, 15:8, 16:14, 21:19)라는 두 가지 의미로 다 쓰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곳에서는 그 두 가지 의미가 모두 혼합된 상태로 쓰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사복음서나 요한복음을 읽으실 때 61번이나 등장하는 영광이라는 단어를 해석하면서 그 의미를 잘 분별하여 읽으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영화롭게 하다 독사조라는 단어는 어떤 의미로 쓰인 것일까요?

 

본문 1절을 다시 보면 예수님께서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를 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4절과 5절에서는 내가 이 세상에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하고 기도를 하십니다. 4절과 5절이 참 난해한 구절입니다.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그런 부분이라 제가 서론을 길게 보탠 것입니다.

 

(요한17:4-5) 4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5 아버지,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제가 아버지 앞에서 누리던 그 영광으로, 이제 다시 아버지 앞에서 저를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이 구절을 언뜻 보면 예수님께서 죽을 고생을 다 한 후에 아버지 이제 됐죠? 아버지가 시키신 일 다 했으니까 이제 다시 옛날의 그 영광을 회복시켜 주세요하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건 자칫 예수께서 당신의 영광을 잠시 비워 놓으셨던 그 시간들 이 지긋지긋한 시간이었다는 뉘앙스를 풍기게 합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이루고자 하셨던 그 영광이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면 예수님은 창세전의 그 영광을 갖고 그냥 하늘에 계시면 됩니다. 뭐하러 내려오셔서 그 고생을 하세요?

여기 4절과 5절에서의 영광은 앞에서 설명해 드린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함의하는 단어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 죽기까지 순종을 하심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했습니다. 그건 이런 말입니다. 예수님의 그 순종에서 하느님의 공의와 사랑과 인내와 용서하심 인자하심 온유하심 등이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났습니다. 그게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향한 하느님에 대한 지식과 견해가 올바로 드러난 상태가 영광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순종으로 하느님이 하느님의 자리에서 하느님으로 인정을 받으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순종에서 하느님의 성품과 하느님 되심이 드러나게 됨으로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 세상에 계시가 되며 그러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이 하느님으로 인정이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영광입니다.

그렇다면 본문 5절에서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지금 이 세상에서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해 달라는 기도는 어떤 기도 이겠습니까? 이제 곧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이 시키신 일의 절정에 도달해야 하는데 그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예수님 자신도 피하고 싶으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힘을 주셔서 자신을 영화롭게 해주시면 다른 말로 끝까지 순종하게 하셔서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이 세상에 드러나게 해 주시면 거기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이니까 그렇게 좀 도와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반드시 십자가를 지게 해주세요라고 기도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게 나를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늘나라에게 당신이 가졌던 그 화려하고 장엄한 그 영광을 돌려달라고 떼를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당신의 마음이 약해져서 하느님의 영광이 자신의 삶속에서 드러나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하느님 아버지가 도와주셔서 당신이 십자가를 잘 질 수 있게 도와달라고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영화롭게 하시면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다는 말은 아들이 아버지께 순종하도록 아버지의 권능으로 도와주시면 그 아들의 삶 속에서 아버지가 드러나게 되고 그 일로 말미암아 아버지가 아버지 대접을 받게 된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창조의 목적인 것입니다.

인간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완전히 순종하여 그들의 삶 속에서 하느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그들이 추구해야 하고 드러내야 하는 하느님의 영광을 자기들의 선악 판단에 따라 다른 것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엉뚱한 영광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로마1:18~23) 18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들의 모든 불경과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가 하늘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19 하느님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이미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20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21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거나 그분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게 되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22 그들은 지혜롭다고 자처하였지만 바보가 되었습니다. 23 그리고 불멸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인간과 날짐승과 네발짐승과 길짐승 같은 형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보다시피 인간은 지어질 때부터 하느님을 알고 그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로 지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에서 타락을 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포기하고 그 영광을 썩어질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예가 금송아지 사건입니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 내려왔을 때 그 아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아론과 함께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형상이 금송아지였습니다. 그 금송아지는 그들이 애굽에서 섬기던 풍요의 신 아피스의 암소와 하돌의 황소를 본 따 만든 것이었으며 그들이 앞으로 들어가 살게 될 가나안 지방의 풍요와 다산의 신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 마음속의 하느님은 풍요와 다산을 주는 그런 존재였지 자신들에게 하느님의 생명인 영생이라는 영원한 생명을 선물하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가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낸 하느님이다라고 부른 것입니다. 하느님을 목숨 걸어 섬긴다고 하던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하느님을 형상으로 만들어 보라고 하니까 송아지가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건 곧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하느님을 방법과 수단으로 동원하도록 하는 마귀의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썩지 않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하느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살아야 할 자들이 썩어질 이 세상의 풍요를 추구하며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된 것 그것이 타락입니다.

 

(로마1:25) 25 그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버리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받들어 섬겼습니다. 창조주께서는 영원히 찬미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이 상태에 있는 자들을 죄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당신의 백성들에게 다시 그 영광을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요한17:22) 22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느님께 받은 영광을 성도들에게도 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느님께 받은 영광이 죽기까지 순종하여 고난도 감수하며 십자가를 지는 것까지 감내하는 절대 순종의 삶이 바로 영광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주님은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내셔서 하느님과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게 하느님이 주님께 주신 영광입니다. 그런데 그 영광을 성도들에게 주었다는 것이 무슨 말이겠습니까?

성도들 또한 자신들의 꿈과 야망과 비전을 접고 하느님의 뜻을 좇아 죽기까지 순종하는 자로 만들어 내시겠다는 예수님의 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반드시 우리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절대 순종의 자리로 이끌어 가신다는 말입니다.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영광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 성도의 구원의 목적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에페1:11~14) 11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습니다. 12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13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위한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게 되었을 때,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14 우리가 하느님의 소유로서 속량될 때까지, 이 성령께서 우리가 받을 상속의 보증이 되어 주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우리 성도는 하느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기 위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성도는 하느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자로 성숙이 되고 완성이 되어 자기의 영광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느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자로 회복되기 위해 구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영광을 위해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며 집중하여 삽니다.

 

(필리3:17~21) 17 형제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도 눈여겨보십시오. 18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19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20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21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들의 하느님은 자기 배요 그들의 영광은 아이스퀴네 부끄러움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영광으로 알고 추구하는 모든 것이 다 아이스퀴네 부끄러움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그러한 땅의 영광 즉 아이스퀴네 부끄러움을 추구하며 사느라 하느님을 도구요 방법으로 동원하여 사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세상의 헛된 것들을 쌓아서 하느님 앞에 내어 놓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합니다. 축구 경기에서 골을 넣어도 하느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고 대종상 영화제에서 상을 받아도 하느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느님의 영광이 고작 그런 것과 비교될 수 있을 것 같으세요?

하느님의 영광은 하느님의 것이 계시되는 것이고 하느님의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여러분이 이 땅에서 아무리 훌륭한 업적을 이루어 낸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자랑스러워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여러분이 이 세상 그 어떤 것을 올려드리며 당신의 영광을 삼으라고 하셔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자랑은 하느님이 주신 하느님의 일을 열심히 수행해 내는 그 백성의 순종 그리고 거기에서 나타나는 하느님의 성품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랑인 것입니다.

 

(예레6:20~21) 20 스바에서 들여온 향료와 먼 지방에서 가져온 향초 줄기가 나에게 무슨 소용이냐? 너희 번제물이 마음에 들지 않고 너희 제사가 나에게 기쁨이 되지 않는다.” 21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이 백성 앞에 걸림돌을 놓아 그들이 걸려 넘어지게 하리라. 아버지와 아들, 이웃과 친구들이 함께 망하리라.”

 

하느님의 기쁨과 자랑과 영광은 하느님 백성들이 고난을 감수하며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의 배가 아닌 하느님과 하느님의 이웃을 위해 그들의 수고를 감수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 예수에게 십자가를 지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인내와 온유와 절제와 공의와 오래 참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그 하느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넘겨주시고 가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 속에서도 십자가가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내 뜻과 내 야망이 기각되고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십자가의 삶이 내 삶 속에서도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도 주님이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다고 하시지요?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일은 십자가를 지고 죽어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구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하라고 주신 하느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요한6:28) 28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여기서 은 복수로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한 일을 자기들이 해 내어 하느님께 이 세상의 것들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종교 행위들로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어떤 좋은 것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을 마치 거래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하루에 기도를 세 시간씩 하라던가 십일조를 빼 먹지 말고 하라던가 매년 꼬박꼬박 단기선교를 가라던가 열심히 구제에 힘쓰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엉뚱한 답을 주셨습니다.

 

(요한6:29) 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여기서의 은 단수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하는 하느님의 일은 예수를 잘 믿는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하느님의 일 예수를 잘 믿는 일' 은 믿음을 받은 자로서 믿음을 발휘하며 사는 신앙인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느님의 일입니다.

가난하고 못 배우고 변변치 못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당당하고 기쁘게 행복하게 살아내는 것, 많이 가지고 많이 배우고 높은 지위에 앉은 사람이 그것이 진짜 힘이 아니란 것을 알고 겸손하게 다른 이들을 섬기는 것 하느님의 일입니다. 즉 보이는 것을 의지하여 교만을 떨고 자랑을 하거나 그것을 가지지 못했다고 해서 부끄러워하고 기가 죽어지내는 이들은 예수를 믿는 믿음을 발휘하고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만이 믿음의 대상이 되어 있는 자 그가 바로 하느님의 일을 이루고 있는 자이고 그가 바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인 것입니다.

 

(이사43:7) 7 나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창조한 이들, 내가 빚어 만든 이들을 모두 데려오너라.’”

 

보세요. 우리는 우리의 영광을 위해 사는 이들이 아닙니다. 정말 명심하세요. 성도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해야합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잘 참아내야 하는 일과 용서해야 하는 일 섬겨야 하는 일 사랑해야 하는 일 등이 우리에게 닥칩니다.

그 상태에서 순종하는 것이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고 거기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세상에 밝히 선포되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에 고난이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잘 견디고 그 상황에 열심히 순종하다 보면 그 속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고 그 하느님의 영광은 장차 우리의 영광으로 완성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8:18) 18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고전10:31~33) 31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32 유다인에게도 그리스인에게도 하느님의 교회에도 방해를 놓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33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나처럼 하십시오. 나는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내가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찾습니다.

 

예수께서 하느님께 순종하여 하느님이 주신 당신의 백성들을 모두 구원해 냄으로써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셨고 그 예수의 삶을 하느님이 영화롭다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로써 다른 이들의 구원에 도구요 방법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십자가의 순종과 완전한 자기부인입니다. 잘 안 되면 그 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 일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끝까지 기도를 하셨는데 우리가 도대체 뭐라고 기도를 게을리 한다는 말입니까? 기도합시다. 그리고 고난 속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멋진 성도들의 모습을 한 번 세상에 보여주세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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