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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완전히 하나가 되게 (요한17,20-26)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5-20 조회수1,433 추천수0 반대(1) 신고

 

 

 

2021년 5월 20일 목요일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완전히 하나가 되게 (요한17,20-26)

2019년 6월 6일 (백) 부활 제7주간 목요일   

 

1독서<너는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사도22,30; 23,6-11)

30 천인대장은 유다인들이 왜 바오로를 고발하는지 확실히 알아보려고바오로를 풀어 주고 나서 명령을 내려 수석 사제들과 온 최고 의회를 소집하였다그리고 바오로를 데리고 내려가 그들 앞에 세웠다.

23,6 의원들 가운데 일부는 사두가이들이고 일부는 바리사이들이라는 것을 알고바오로는 최고 의회에서 이렇게 외쳤다. “형제 여러분나는 바리사이이며 바리사이의 아들입니다나는 죽은 이들이 부활하리라는 희망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바오로가 이런 말을 하자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면서 회중이 둘로 갈라졌다.

사실 사두가이들은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고 주장하고바리사이들은 그것을 다 인정하였다.

그래서 큰 소란이 벌어졌는데바리사이파에서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일어나 강력히 항의하였다.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잘못도 찾을 수 없습니다그리고 영이나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면 어떻게 할 셈입니까?”

10 논쟁이 격렬해지자 천인대장은 바오로가 그들에게 찢겨 죽지 않을까 염려하여내려가 그들 가운데에서 바오로를 빼내어 진지 안으로 데려가라고 부대에 명령하였다.

11 그날 밤에 주님께서 바오로 앞에 서시어 그에게 이르셨다. “용기를 내어라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화답송 시편 16(15),1-2과 5.7-8.9-10.11(◎ 1)

◎ 하느님저를 지켜 주소서당신께 피신하나이다◎ 알렐루야.

○ 하느님저를 지켜 주소서당신께 피신하나이다주님께 아뢰나이다. “당신은 저의 주님.” 주님은 제 몫의 유산저의 잔당신이 제 운명의 제비를 쥐고 계시나이다

○ 저를 타이르시는 주님 찬미하오니 한밤에도 제 양심이 저를 깨우나이다언제나 제가 주님을 모시어당신이 제 오른쪽에 계시니 저는 흔들리지 않으리이다

○ 제 마음 기뻐하고 제 영혼 뛰노니제 육신도 편안히 쉬리이다당신은 제 영혼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당신께 충실한 이에게 구렁을 보지 않게 하시나이다

○ 당신이 저에게 생명의 길 가르치시니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고당신 오른쪽에서 길이 평안하리이다

 

복음<완전히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17,20-26)

20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하셨다. “거룩하신 아버지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21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아버지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22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3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24 아버지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25 의로우신 아버지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저는 아버지를 알고 있었습니다그들도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6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고 앞으로도 알려 주겠습니다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백) 부활 제7주간 목요일 - 06월06일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제1독서 (사도22,30; 23,6-11) 

 

"그 무렵 천인대장은 유다인들이 왜 바오로를 고발하는지 확실히 알아보려고,  바오로를 풀어 주고 나서 명령을 내려 수석 사제들과 온 최고 의회를 소집하였다." (22,30)

 

사도 바오로는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었다. 로마 시민을 우대하는 조항이 많았던 로마법에 따르면,  정식으로 고소한 사람이 있어야만 비로소 로마 시민을 심문할 수 있었다.  사도 바오로의 경우 정식 고소자가 없었으므로 형사범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천인대장은 제일 먼저 사도 바오로의 결박을 풀어 주었으며, 그 후 산헤드린 최고 의회를 소집하여 사도 바오로가 종교적 범죄를 행하였는지 알고자 했다.

 

'풀어주고 나서'라고 번역된 '엘뤼센 아우톤'(elysen auton)은 '속박으로부터 해방하다'라는 뜻을 지닌 '뤼오'(lyo)의 부정(不定; indefinite) 과거형 '엘뤼센'(elysen) 남성 3인칭 대명사 '아우톤'(auton)과 결합되고 있어서, 직역하면 '그를 석방했다'가 된다.

 

이 본문은 사도 바오로가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안 천인대장이 사도 바오로를 자유롭게 풀어 준 사실을 묘사한 것이다.

즉 본절은 단순히 사도 바오로가 문자적인 의미의 결박에서만 풀려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유인의 신분으로 되돌아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둘러싸고 벌어진 소요가 있었으므로, 치안을 책임지고 있었던 천인대장으로서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규명해야만 했고, 바로 그 문제를 종교적인 것으로 생각했으므로 '산헤드린'을 소집했던 것이다. 

원문에는 '쉬네드리온'(synedrion)으로 나오는데, '산헤드린 최고 의회'를 말한다.

이 최고 의회는 71명의 의원, 즉 율법학자들(서기관들), 원로들, 수석 사제들 가문 중에 탁월한 구성원들, 그리고 이 집단의 의장인 대사제로 이루어져 있었다.

 

유대지역을 관할하던 로마인 통치자들은 산헤드린 최고 의회 법정에 소송 사건을 심리할 권한을 부여하고, 또한 사형 판결을 내릴 권한도 주었다.

다만 산헤드린 최고 의회가 내린 사형 판결은 그것이 로마의 행정 장관(총독)에 의해 승인되지 않을 경우에는 유효하지 않다는 제한이 있었다(요한18,31).

 

천인대장이 이와같은 권한을 가진 산헤드린 최고 의회까지 소집한 것은 그가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이 사건을 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시 산헤드린 최고 의회가 사도 바오로를 죽이려고 담합한 집단(사도23,12~16)이라는 사실과 그들이 내리는 심리 결과가 사도 바오로를 죽음으로 내모는 일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어쨌든, 사도 바오로에 대한 천인대장의 이러한 신중한 태도, 즉 진실 규명을 위해  산헤드린 최고 의회를 소집한 것은 사건을 또 다른 국면으로 전개시키는 원인이 된다.

 

'의원들 가운데 일부는 사두가이들이고 일부는 바리사이들이라는 것을 알고,  바오로는 최고 의회에서 이렇게 외쳤다.' (23,6ㄱ)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유대인과 율법과 성전을 거슬러 가르친다는 혐의로(사도21,28) 이 자리까지 나오게 되었지만, 대사제에 대한 자신의 공격성 발언으로 인해 산헤드린 최고 의회로부터 공정한 판결을 받을 수 없음을 직감하고, 의원들 간에 존재하고 있는 신학적 이견을 충돌시킴으로써, 자신이 처한 위기 상황을 돌파하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사도 바오로의 기민한 태도를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사두가이나 바리사이가 가진 신학전 이견들은 무엇인가?

우선 사두가이들은 당시 수석 사제들과 산헤드린 최고 의회 회원 등 종교, 정치적 귀족들과 그 추종자들로 구성된 기득권층이었다.

'사두가이'(saddukaion; 사두가이온)란 이름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대사제였던 '차독'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었다(2사무15,24; 1열왕1,34).

 

그들이 역사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것은 B.C.160년경 하스모니안 왕조때부터이다. 에제키엘 40장 46절 중에 차독 가문에게 성전 관리를 위임한 것에 착안하여 일부 수석 사제들이 차독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기득권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모세 오경만 권위가 있는 것으로 받아 들이고, 다른 성경 및 전승 문서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하느님께서는 일단 율법을 주신 후 인간사에는 관여하지 않으므로, 오직 인간의 자유 의지만 있을 뿐, 하느님의 섭리는 없다고 보았다. 뿐만 아니라 천사나 사탄등의 영계는 물론 죽은 자의 부활과 영생등 내세도 부정하였다.

 

이처럼 이들은 하느님의 위격과 내세는 인정하지 않았고, 오로지 현실 생활만을  인생의 전부로 보았기 때문에 극도의 현실 추구로 도덕성을 상실하였다.

즉 그들은 신성한 성전 제도까지 상품 거래 행위로 전락시켰으며, 백성을 기만하고 수탈하면서 자신들의 이권만 추구하였으므로 백성의 혐오를 받았다.

 

한편 '바리사이'라는 이름은 '분리하다', '구별하다' 뜻하는 히브리어 '파라쉬'(parashi)에서 유래하여 '분리된 자' 또는 '구별된 자'란 뜻을 지닌다.

그들은 하시딤(Hassidim; 경건한 자들)이라고 불려지던 B.C.4세기 경의 종교 개혁 주장자들의 후예들이었다.

특히 하시딤이 주동한 마카베오 혁명 이후, 하시딤파 중에 더욱 더 조직화된 분파가 B.C.170년경에 바리사이파로 성장했다.

 

그들은 모세를 유대교 창시자로, 에즈라를 유대교의 중흥자로 존중했으며, 모세 율법은 물론 모세 율법을 해석한 자신들의 전승(Tradition)도 동일한 권위가 있다고 믿었다.  또한 수석 사제들이 유대교를 장악하는데 반대하여 일부 의식과 율법을 자유롭게 해석했다.

 

이와 더불어 그들은 인간의 부활과 내세 그리고 천사와 마귀같은 영적세계를 인정함으로써, 사두가이파와 큰 차이를 보였다.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이 지닌 양자간의 이런 명백한 교리 차이는 늘 논란거리가 되었으며, 사도 바오로는 위기 타개책으로 이것을 이용하려 한 것이다.

 

"그날 밤에 주님께서 바오로 앞에 서시어 그에게 이르셨다.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23,11)

 

산헤드린 최고 의회 회원들에게 큰 고초를 치른 날이 다 가고, 이제 밤이 찾아 왔음을 문학적으로 잘 표현한다. '밤'이라고 번역된 '뉙티'(nykti; night)는 문자적으로는 시간을 나타내는 기능을 가지고 있으나(요한6,17; 20,1), 또한 암울하고 어두운 상황을 나타내는 비유적인 용법으로도 사용된다(마태4,16; 루카1,79).

 

사실 사도 바오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 그곳에서 발생될 여러가지 일들로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사도20,22~23; 21,13; 로마15,31). 아니나 다를까 그는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배척받았고, 살해의 위협까지도 느꼈다(사도22,22.30).

 

더군다나 예전에 자신과 특별한 관계가 있었던 산헤드린 최고 의회에서도 심한 고초를 당했다. 만일 일이 악화되기라도 한다면, 그는 정말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사도 바오로가 이렇게 그의 인생에서 다시는 없을, 지독하게 어두운 밤을 맞이하게 된 것을 루카는 객관적 묘사인 동시에 상징적 의미도 지니는 '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바오로를 홀로 버려 두시지 않으셨다. 놀랍게도 바로 그 밤에 주님께서 나타나신 것이다.

 

'주님께서 바오로 앞에 서시어'

 

사도 바오로의 인생에 어두운 그늘이 엄습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위로자로 나타나셨다.

여기서 '주님'으로 번역된 '퀴리오스'(kyrios)는 '주인'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사도 바오로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역사의 주인이시기도 한 예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잘 보여주는 단어이다.

바로 그 예수님께서 인생의 어두운 그림자에 휩싸여 있는 사도 바오로에게 친히 나타나신 것이다.

 

사도 바오로에 대한 주님의 지극한 관심은 '앞에 서시어' 번역된 '에피스타스'(epistas)가 잘 보여준다. '에피스타스'(epistas)는 어떤 것과 매우 가까움을 나타내는 전치사 '에피'(epi)와 '멈추어 서다'라는 의미를 지닌 '히스테미'(histemi)의 합성어로서 '바로 곁에 서 있다'라는 뜻을 지닌 '에피스테미'(ephistemi)에서 비롯된 단어이다.

 

과거에도 그에게 나타나신 바 있는 사도 바오로의 주인이신 예수님 (사도16,9; 18,9; 22,17)께서 그가 가장 위급한 지경에 놓여 있을 때에 다시 나타나셔서 바로 그의 곁에 서 계신 것이다.

사도 바오로에게 이것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사도 바오로가 죽을 것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왔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사태를 바라보며 적지않게 당황했을 것이다.

그 당혹스런 순간에 주께서는 사도 바오로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위로하시고 로마 선교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용기를 내어라' 번역된 '타르세이'(tharsei)는 '용기가 있다', '내적으로 기운차다', '담대하다'란 뜻을 지닌 '타르세오'(tharseo)의 현재 명령법이다.

요한 복음 16장 33절에서 제자들에게 이별담화에서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선포하신 주님께서 사도 바오로에게 담대하라고 명령하고 계신다.

 

이것은 그 어떤 위협이나 난관도, 이제 곧 주님께서 바오로에게 부여하실 사명, 즉 로마에서 복음 전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 준다.

특히 주님께서는 현재 명령법을 사용하여 어떤 일이 닥쳐올지라도 계속 담대해야 할 것을 사도 바오로에게 권고하고 계신다.

 

한편, 주께서는 이때 사도 바오로에게 나타나시어 담대하라고 명하시며, 새로운 로마 선교의 비전을 제시하셨다.

이러한 사실은 '해야 한다' 번역된 '데이'(dei)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희랍어에서 '데이'는 일반적으로 논리적이거나 과학적인 필연성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된다.

 

본문에서도 이제 사도 바오로가 로마로 가는 것은 역사의 주인이시며 사도 바오로의 인생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그에게 부여해 주신 필연적인 사명임을 사도 바오로에게 새롭게 각인시켜 주시 위해서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성경 묵상 - 부활 제7주간 목요일(5월 24일)

 

부활 제7주간 목요일 복음(요한17,20~26)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21)

 

요한 복음 17장 11절에서 제자들간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 17장 21절에서는 그 제자들로 말미암아 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신다.

 

원문에서도 문두에 나오는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에 해당하는 '히나 판테스 엔 오신'(hina pantes hen osin; that all of them may be one)에서 '하나가 되게'로 번역된 '헨 오신'(hen osin; may be one)에서 '오신'(osin; may be)은 현재형이므로, '계속해서 하나가 되게'라는 뜻을 갖는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가 되는 것의 모델은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은 '아버지가 아들 안에,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뜻과 목적과 감정에서의 일치를 말한다.

 

하느님을 보지 못하더라도 그분의 뜻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예수님을 본다면, 그는 곧 하느님을 보는 것과 똑같다(요한10,30. 37.38; 10,9~11).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교안에서 파(派)가 다르고 활동 지역이 다르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뜻과 목적을 하나로 공유하고 진리와 사랑으로 묶여 있다면, 그들은 일치된 모습을 세상에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이러한 하나됨은 그들이 '아버지와 아들 안에 있게 되는 근거'가 된다.

 

이것을 역으로 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뜻과 목적, 진리와 사랑 안에서 일치하지 못한다면, 겉으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워도, 본질적으로는 아버지와 아들 안에 머무르지 않는 외교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또한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사실을 믿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 안에서 하나됨에 힘써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믿게 하십시오'로 번역된 '히나~피스튜에'(hina~pisteue; so that~may believe)는 목적을 나타내는 현재 가정법으로서 '계속해서 믿도록'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뜻과 목적, 진리와 사랑 안에서 하나됨을 통해 당신 자신이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임을 세상이 믿기를 바라는 예수님의 마음이 잘 드러난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이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요한3,16~17)에서 비롯되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은 죄인들의 멸망이 아니라(에제18,23; 2베드3,9) 모든 사람의 구원이다(1티모2,4).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어 죄인들을 위해 기꺼이 당신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써 (로마5,6~8) 죄인들을 향한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해당하는 '호 코스모스'(ho kosmos; the world)를 하느님 아버지의 관심 밖에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에서 '세상', 즉 '코스모스'(kosmos)가 반하느님적이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대적인 세력을 지칭하여 쓰이기도 하지만, 하느님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영혼들의 집합명사이며, 믿는 이들의 일터이기도 하다(마태16,26; 28,19~20).

 

우리는 이 세상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 이러한 귀한 일을 위임하신 예수님께서 세상을 위해 기도하신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요한 복음사가가 자신이 기록한 성경에서 강조하는 개념이기도 하다(1요한4,9~11).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우리 믿는 이들 또한 이 세상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잃어버린 한 영혼이 주님께로 돌아올 때에 하느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안다면, 아무리 일이 바쁘다 할지라도, 잃은 영혼들을 위한 기도와 충고를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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