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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 /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요한17.20-26)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5-20 조회수1,369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5. 20. 부활 제7주간 목요일 도란도란글방

 

2016년 5월 12일 부활 제7주간 목요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요한17.20-26)

20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21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22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3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24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25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저는 아버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6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고 앞으로도 알려 주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아멘

 

예수님께서 당신의 대제사장적 기도를 마치시면서 또 영광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하나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아버지가 당신께 주신 영광을 성도에게도 주셨다.' 라고 하세요. 그리고는 또 다시 당신이 있게 될 곳에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세요. 그리고 이유를 '영광이라는 걸 깨닫게 해주기 위함' 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제자에게는 예수님께 주신 그 '영광' 이라는 게 주어지게 되는데 성도 자신이 그 영광을 잘 인식하지 못한단 말이에요. '이게 무슨 영광이야?' 이렇게 인식이 된다란 뜻이지요. 그래서 성도가 자신이 받은 그 영광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라고 이야길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냥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방법까지도 제시를 하세요 예수님 당신이 계신 곳에 성도들을 함께 있게 함으로써 그들이 자신들에게 쏟아 부어진 '예수님의 영광'을 보게 해 주시고 인식하게 해달라 라고 이야길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그들' 이 누군지 알아야 되겠죠? 예수님 '당신이 계신 곳 예수님이 계신 곳 그 분이 계신 곳'이 어딘지를 알아야 그들이 누구며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를 알아야 '그들이 내가 있는 곳에 있게 해 주세요' 라는 말을 이해를 할 거 아닙니까.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가 제자들뿐만 아니라 제자들에 의해서 예수를 믿게 될 모든 이들을 위한 기도임을 알 수 있죠. 그러니까 내게 주신 자들은 제자들을 비롯한 모든 교회를 가리키는 겁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모든 교회. 따라서 그 모든 교회를 함유하고 있는 그 무리를 내가 있는 곳에 있게 해 주세요 라는 그 장소가 당시 예수님이 기도하시고 계셨던 그 장소가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죠.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 있는 곳' 은 그곳에 들어가게 되면 이 세상 그 누구도 알아 볼 수 없는 '예수님의 그 영광'을 알아보게 되는 그곳이에요. 그런데 그 예수님이 지금 계신 곳이 아버지와 또 함께 있는 곳이래요. 이 세상에 뚫고 들어온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거기에 교회를 지금 초청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교회가 그 곳에 들어오게 되면 예수님의 영광이 '이게 진짜 영광이었구나~' 를 깨달아 알게 된다는 그런 뜻이죠. '하느님 나라''하느님의 통치권' 안에 있는 모든 영역을 다 가리키는 거예요. '바실레이' 라는 단어가 '통치권' 이니까 어떤 공간적 국토 공간 이런 곳이 아니라 '통치권이 미치는 곳' 그곳을 하느님 나라라고 그러죠.

예수님은 당신의 생애 동안에 단 한 번도 하느님의 명을 어기신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성경은 그를 가리켜서 '죄없는 자' 라고 부르는 거죠. '' 라는 건 아버지의 뜻과 어긋난 사고와 행동을 죄라고 하는 거잖아요 그러니 성경이 예수님을 가리켜 '죄없는 자' 라고 묘사를 하는 건 예수님이 도덕적 윤리적 사회법적으로 완벽한 삶을 사셨다는 말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어려서부터 태어나서부터 '나는 예수니까 우리 부모에게 절대 땡깡피우지 말아야지. 배고파도 참아야지. 아이고 배고파.. 엄마가 언제 젖 줄래나.' 그러고 계셨을까요? 울었습니다. 그리고 엄마한테 땡깡도 폈어요. 그리고 예수님이 어렸을 때 동네 애들이 와서 한 대 팼어요. '야 그래 나를 때려서 네 마음이 편해진다면 한 대 더 때려라' 그랬을까요? 루가는 예수님의 키와 지혜가 자라갔다 그러죠. 그건 예수님이 어렸을 때 똑같은 아이들이었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그런 것들을 인간들이 했을 땐 죄라 그러잖아요. 예수님이 했을땐 죄가 아닙니다. 왠줄 아세요? 하느님이 이끄시는 대로 하느님의 그 계획 속에서 차근차근 하느님의 뜻을 쫓아 살아간 삶을 죄라고 하지 않아요. 그래서 예수님을 '죄없는 자'라고 하고 그리고 그 분을 '하느님 나라'라고도 이야기하는 거예요. 天國이 왔다라고 했을 때 그 천국이 예수님이었단 말입니다. . 하느님의 뜻을 쫓아 사는 분이었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성도가 나중에 죄 없음의 선고를 받게 되는 거예요. 우리는 무지하게 죄를 짓고 있는데 지금 하느님의 선택에 의해서 하느님에 의해 끌려가고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나중에 죄 없음의 선고를 받는 거지 도덕적 윤리적 사회법적 그런 위반을 죄라고 한다면 우리는 다 죽는 거예요.

물론 거기에 하느님의 속죄사역이 가입을 하게 되지만 그 속죄사역 이전에 이미 하느님의 선택에 의해 그들은 죄 없는 자로 분류가 되어 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하느님의 통치에 순종 되어가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들 간의 그 '사귐과 교제' 속에 있는 이들과 하느님과의 그 회복된 관계 그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예요. 바로 그 곳에 우리 주님이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도 그 곳에 계실 거예요.

그러니까 하느님 나라를 어떤 공간적인 지역적인 개념으로 자꾸 이해를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분명히 나중에는 어떤 공간적인 개념과 지역적인 개념이 있는 그런 곳에서 우리가 살게 될 것이지만 지금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이해할 때는 그런 공간적 지역적 (헬라의 그 공간적 이원론)에 입각해서 천국을 이해하면 안 된단 말이에요.

 

주님께서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초청을 하시면서 '나 있는 곳에 그들도 함께 있게 해 주세요' 라고 하느님께 도와 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 말은 우리가 예수님이 사셨던 그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은 우리 힘만으로는 안 된다라는 증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느님께 기도를 하고 가시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힘들면. 24절에 보면요 '나 있는 곳에 하느님 나라에 그들이 있게 되면 내 영광을 본다' 그러니 이 영광과 하느님 나라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거예요.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노골적으로 나타난 곳이 성막과 성전이죠 항상 거기는 구름과 성막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잖아요. 성막과 성전은 하느님 나라의 모형이잖아요. 하느님의 지성소가 있는 곳이니까 하느님이 모세를 어디 데리고 올라가서 보여주고 이거대로 지어라 그러잖아요. 하느님 나라란 말예요 거기가.

 

(출애40:34-35) 34 그때에 구름이 만남의 천막을 덮고 주님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찼다. 35 모세는 만남의 천막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구름이 그 천막 위에 자리 잡고 주님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쓰인 히브리어 수사법이 평행법이라는 거예요. 같은 내용을 여러번 반복해서 써야 할 경우 다른 단어로 바꿔서 표현하는 수사기법을 말해요. 그러니까 구름이 영광이고 영광이 구름인 거예요. 그래서 항상 하느님의 영광의 구름은 단수예요 그런데 구름은 항상 무엇을 감추고 보호하고 막는 것으로 쓰이죠.

지금 위의 구절에서 구름은 야훼의 영광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영광을 덮어 감추는 것으로 나타나잖아요 성막에 그 하느님 나라에 하느님의 영광이 가득차 있는데 구름으로 감추어져 있어요. 하느님 나라에서는 하느님의 영광이 밝히 드러나 있어요. 그러나 모형인 하느님 나라에서는 하느님의 영광이 감추어 있단 말입니다. 중요한 개념인 거예요 이거는요.

 

(시편 18:11-12) 11 커룹 위에 올라 날아가시고 바람 날개 타고 떠가셨네. 12 어둠을 가리개 삼아 당신 주위에 둘러치시고 시커먼 비구름과 짙은 구름을 덮개로 삼으셨네.

 

(열왕상 8:10-11) 10 사제들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주님의 집을 가득 채웠다. 11 사제들은 그 구름 때문에 서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주님의 영광이 주님의 집에 가득 찼던 것이다.

 

(시편97:1-3) 1 주님은 임금이시다. 땅은 즐거워하고 수많은 섬들도 기뻐하여라. 2 구름과 먹구름이 그분을 둘러싸고 정의와 공정이 그분 어좌의 바탕이라네. 3 불길이 그분을 앞서 가며 주위의 그분 적들을 사르는구나.

 

영광과 구름을 막 혼용해서 쓰죠? 역시 야훼의 영광을 구름이 감추는 것으로 이렇게 표현이 돼요. 왜 하느님의 영광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감추어지는 것으로 묘사가 되는가. 그건 일차적으로 죄인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대하게 되면 그 즉시 죽음이기 때문에 그래요. 하느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 들어와 있는 하느님 나라의 모형 속에서는 감추어지는 것으로 드러나야 돼요.

이 세상은 전부 죄인이거든요. 하느님 나라에서는 죄인이 없으니까 거기선 밝히 드러나야 된단 말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 다른 깊은 메세지가 담겨 있어요 하느님의 영광은 하느님의 것 하늘의 것이 가시적으로 계시된 상태를 '영광'이라고 한다 그랬어요.

그 찬란한 하느님의 영광은 하느님 나라가 완료된 시점에서 이제 확 피어나는 거예요. 그러나 그 하느님의 영광이 이 땅에서 계시가 될 때에는, 세상적 가치관으로 이 죄인의 세상에서 세상적 가치관으로 그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될 때는, 그 안경으로 보게 될 때는 이게 도대체 영광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 라는 의미에서 '영광이 가려졌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전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 자체가 하느님의 나라의 모형으로 이루어진 거예요. 여기에는 하느님의 영광이 가득 차 있어요. 하느님은 무소부재하고 편재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가득차 있는데 죄인들이 못 알아보는 것이고 그 영광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영광처럼 안 보이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우리가 영광을 못 보는 거란 말이에요.

성막이나 성전은 하느님의 영광의 현현을 상징하는 장소에요. 성막의 구조가 어떤지 생각해보잔 말이에요. 번제단 부터 출발하죠 어린양의 제물이 죽는 곳이에요. 출애굽기의 과월절 어린양에서 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그 다음에 바로 그 다음 단계 물두멍에서는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몸을 깨끗이 씻는 거예요. 거기서 안 씻고는 성소에 못 들어가요 들어가면 죽어요.

그럼 출애굽 사건에서는 홍해에서 애굽에서 굴러먹던 옛사람이 빠져죽는 거예요 애굽 측에서 보면. 가나안 측에서 보면 새사람이 깨끗하게 살아 올라와서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거죠? 홍해예요. 그 다음에 성소로 들어가면 향단 촛대 떡상 향단에선 계속해서 연기가 올라오게 되있죠. 구름기둥 불기둥 만나에요.

그러면 성전의 그 구조가 정확하게 무얼 담고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는 거죠.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출애굽 그 역사 그 자체가 지금 하느님의 영광이란 뜻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알듯이 개뿔이나 거기에 무슨 영광이 있었어요?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패역했고 배반했고 원망했고 하느님은 계속해서 징계했고 두들겨 패면서 끌고 갔어요. 결국은 거기서 다 죽여 버렸어요 옛사람을. 그게 영광이라는 말이에요.

그런데요 그 삶을 똑같이 사신 분이 또 있어요. 과월절 어린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가 애굽으로 들어가셔서 애굽에서 나오십니다. 그래놓고 호세아서 10장을 인용을 해서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다 함을 이루려 함이다' 라고 이야기 해요. 그리고는 홍해를 건너시죠. 세례를 받으시잖아요. 그러니까 홍해를 건너시는 거예요 물두멍을 지나가는 거예요. 예수님 자신이 하늘의 빵. . 하느님의 영광이에요. 그러니 예수님은 이 성전의 삶을 그대로 살다 가신 거죠.

심지어 자기를 가리켜 뭐라 그래요? "야 성전 헐어라. 내가 삼 일 만에 다시 짓는다." 그래놓고 '이는 성전이신 자기 몸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그랬어요. '이스라엘 예수님 성전과 성막의 구조' 똑같아요. 그런데 그게 다 영광이에요. 예수님의 삶이 영광이라는 건 우리가 알겠어요. 근데 이스라엘의 삶이 영광이고 성막의 구조 자체가 영광이라는 건 조금 이해가 안가지 않아요?

여기서 중요한 메세지가 있는데 우리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은 그냥 실패의 연속이요 징계의 연속인 줄만 알았어요. 그런데 그 과정 전체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다면 이스라엘의 출애굽 과정 속에서의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지금 애굽에서 끌어내다가 가나안으로 집어넣고 있어요.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데 그 사건 중에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사건이 단 하나라도 있을까요?

이스라엘이 애굽 나와서 충분히 그냥 쭉! 가면은 광야 거쳐서 가나안 들어가는 거예요. 요르단을 왜 건너가요? 그 뒤가 가나안 인데. 그런데 아래로 죽 내려와서 홍해를 건너요. 그거는 정말 미련한 짓이란 말입니다. 하느님이 그들을 그리로 몰아갔어요. 애굽을 나온 이들은 이제 죽음을 경험하면서 옛사람이 죽는 광야의 삶을 이제부터 살아야 한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홍해에서 일단 한번 죽이는 거예요 그거는요. 그리고 건너면서 한번 죽는 거예요 옛사람이 죽는 거야 이렇게. 그래놓구 광야에서 진짜 옛사람이 다 죽어버려요 육십만 명이. 그게 우리의 인생인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났대요.

하느님은 애굽에서 완전히 거기에 젖어서 살던 이들을 당신의 능력으로 새사람으로 바꾸어 내는 당신의 능력과 인내와 용서와 은혜를 그 출애굽 사건 속에서 확 드러내 버리는 거예요.

 

하느님 것 하늘의 것이 가시화되어 계시된 상태를 '영광' 그래서 그 삶의 영광이 이스라엘의 출애굽 과정 속에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났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삶이 그대로 성막으로 옮겨져서 '쉐키나의 영광' 이 가득한 성막에 그 이스라엘의 출애굽 과정이 그대로 모형으로 다 들어가 있는 거예요 또.

그리고 그 삶은 바로 예수의 삶이었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 삶을 그대로 사심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과 성막 성전은 예수님의 삶을 모형으로 미리 그림으로 잠깐 보여준 거였구나 그게 하느님의 영광이었구나 이걸 보여주는 거예요. 자기를 제물로 드려서 우리를 홍해 속으로 집어넣고 싹 빨아서 깨끗하게 끌어 올린 다음에 광야를 통과시켜서 우리의 인생을 통과시켜서 새사람으로 만들어 내는 거예요. 그게 역사고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 엄청난 하느님의 계획과 역사를 아는 이들이 앉아 가지구 맨 자기의 소원만 빌고 앉아 있어.. 우습지 않으세요? 복음을 모를 때는 그게 다 인줄 알아요 다들. 저도 그랬으니까요. 적어도 복음을 알고 난 이후에는 거기서는 벗어나야죠. 하느님이 지금 어떠한 능력과 어떠한 역사로 우리를 끌고 간다는 걸 안다면 이제는 거기서는 벗어 나야죠. 그리스도교는 우리 문제를 해결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사야 43장 한번 보세요.

 

(이사 43:7) 7 나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창조한 이들, 내가 빚어 만든 이들을 모두 데려오너라.’

 

인간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소품에 불과한 거예요. 근데 그 하느님을 이 소품들이 부려 먹고 있는 거예요.'병 고쳐 주세요 부자 되게 해 주세요 승진하게 해 주세요 좋은 집으로 이사 가게 해 주세요 좋은 차 주세요.' 소품들이.

 

(골로 1:15-16) 15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16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위하여 창조가 된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영광을 드러내며 사는 상태를 '영생'이라고 하고 그렇게 영생을 사는 이들이 사는 곳을 '하느님 나라'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하느님 나라의 시간대 (과거 현재 미래가 통합된)를 사는 자들이라 그랬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믿음으로 말씀을 통하여 아담한테도 가고 선악과를 같이 먹기도 하고 노아의 홍수 그 사건에서 방주에 같이 타기도 하고 또 바벨탑을 같이 열심히 쌓다가 언어가 흩어지는 경험도 하고. 또 나중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그 찬란한 부활의 현실을 지금 땡겨서 경험하기도 하고. 이게 영원을 사는 거라고 그랬잖아요. 그게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겁니다. 영생을 사는 거예요 그것이.

그런데 그 모든 게 다 하느님의 영광을 그 분의 능력과 그 분의 사랑과 그 분의 섬김과 그 분의 성품 이런 것들을 다 드러내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모든 것은 하느님에 의해 계획되어지고 그 계획 속에서 차근차근 진행되어져 가는 거예요.

그런 것 앞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느님의 주권과의 충돌, 그게 논의가 될 만한 이야기입니까? 소품들이 무슨 자유의지가 있습니까? 제한된 자유의지예요 그건요. 죽은 흙이라니까요 우리는. 하느님 은혜의 밖으로 나가면 그 즉시 죽은 흙이에요. 언제 지옥으로 쓸어 넣어도 아무 할 말 없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죽은 흙이 무슨 얘기를 해요.

이스라엘의 출애굽 과정 속에서 이스라엘의 패역과 그들의 죄를 징계하시는 '하느님의 공의'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그들을 이끌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고야 마시는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과 인내와 섬김' 이 그 속에서 밝히 드러났어요 하느님 나라에서. 그게 하느님의 영광이에요.

삶으로 드리는 영광은 하느님에 의해서 끌려가며 하느님의 백성으로 조금씩 지어져 가는 그게 바로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 삶인 거예요. 그 삶이 바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때에는 마치 감추어진 것처럼 드러난다.라는 거예요.

 

하느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 드러날 때 감추어져서 나타나는 건 일차적으로 죄인들이 하느님의 영광 앞에 섰을때 살아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고 두번째는 하느님의 영광이 이 세상 속에서 나타나게 될 때에는 마치 감추어진 것처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기 때문에 '감추어져서 나타난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모형인 성막이나 성전에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때 구름으로 가려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당신의 현현을 나타내실 때도 흑암과 구름으로 당신을 숨기셨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는 하느님의 영광이 숨겨지고 감추어진 모습으로 나타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나 부자 만들어 주세요 내가 하느님께 영광 좀 돌릴게요' 이딴 소리 좀 하지 마세요. 그건 무식한 소리예요 그건요. 그렇게 안 나타난다니깐요? 성경은 그 반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나 잘되게 해 줘 보세요 내가 하느님께 영광 좀 돌리게...' 이러고 있어요.

성경 어디에 그게 영광이라 나옵니까? 자기들 생각으로 자기들이 지어놓고 하느님께 막 강요하는 거예요. '내가 영광이라는데 당신이 왜 아니라 그래?' 이런 패역한 인간들이 있어요.

하느님의 이름이 불리는 곳, 교회에서 하느님이 모독 당한다니까요? 이 세상 힘들을. 그거 갖고 와가지고는 '하느님 영광이니까 먹으세요 드세요' 그러고 드리고 있는 거예요. 심지어는 '교회 크게 져 놓고도 영광 영광 받으세요' 그런건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 게 아니에요.

우리들 자신 속에서 이뤄진 하느님 나라. 그 속에서만 하느님 영광이 드러난다니깐요. 그래서 성막과 성전에만! 하느님의 영광이 그렇게 가득차 있었던 거예요. 다른 곳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이 가득차 있었는데 하느님 나라인 모형인 그 성막과 성전에만 내가 거한다라고 일부러 말씀을 하심으로 해서 '나는 나중에 너희들 안에서만 영광을 찾을 거야' 이 얘기를 구약 때 부터 하시는 거예요. 하느님 나라가 ''니까 내가 '성전'이잖아요. 성경도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그 인류의 족보를 아브라함과 다윗과 예수라는 큰 축으로 가르는 거예요.

 

(마태1:1.17 ) 1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17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

 

왜 일부러 이렇게 네가지로 나눴는지 아십니까? 다 이 인물들과 바벨론 포로 생활과 또 바벨론 포로귀환 이게 다 성전에 관한 이야기예요. 바벨론 포로 때 성전이 파괴됐고 귀환해서 성전 재건됐죠. 아브라함은 '성전의 삶' 을 살게 될 출애굽 이스라엘의 시작이에요. 다윗은 최초로 '성전을 짓는 이' 물론 솔로몬이 지어요. 그러나 솔로몬과 다윗은 하나로 묶여서 어떻게 해서 성전이 완성이 되는 가를 설명해주는 것이에요.

그 다윗 그리고 그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진짜 성전인 '참 성전인 예수' 이렇게 역사를 큰 축으로 나누어요. 그러니까 이 역사 자체가 성전 즉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의 세트다 라는 거를 보여주는 거예요. '이 인류의 역사는 성전의 역사였다' 라고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도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을 때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이 다시 3차 포로귀환까지 해서 가나안으로 돌아왔을 때가 70년이 훨씬 넘어요. 그런데 왜 바벨론 포로기간을 70년으로 잡는 줄 아세요? 성전이 파괴됐다가 성전이 재건된 그때 BC 586년에 파괴됐고 516년에 재건됐거던요. 그들은 성전이 없으면 나라로 치질 않은 거예요. 그래서 그냥 '칠십 년' 포로생활이라고 한 거예요. 그 이후에도 포로들이 많았어요. 그만큼 성전은 이스라엘에게 중요했어요.

이스라엘에게 성전이 중요했다라는 건 이 인류에게 교회에게 성전은 뭔가 대단한 (이스라엘이 교회의 모형이고 상징이었으니까) 메세지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 성전이 예수였고 바로 우리란 말입니다. 거기에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거예요. 자 그런데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해서는요 그 영광을 드러내는 반사해내는 반사체의 영광이 완전히 죽어야 돼요.

우리의 영광을 하느님의 영광을 내 영광 하느님의 영광이 채워야 채워져야 할 곳에 내 영광을 채워놓고 하느님의 영광을 계속 거부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죄인' 이에요. 거기를 '지옥'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느님의 영광이 와서 거기를 빛으로 함락시켜 버리지 못하면 거기는 계속 어둠일 수 밖에 없어요. 그걸 지옥이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그리로 떨어질 수 있다니깐요. 우리 인생 동안에 우리를 비워내지 못하면 우리가 그리로 떨어진단 말입니다.

자 성전부터 이렇게 왔는데 연결이 이렇게 되시죠? 그러나 눈과 귀가 열려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볼 수가 있게 된 이들은 그 감추어진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돼요. '.. 저게 영광이구나~'

 

우리는 영광을 볼 수 있어야 돼요 왜. 하느님 나라에 들어오면 그 영광 볼 수 있다며요.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셨잖아요. '나 있는 곳에 함께 있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그 성전의 삶 성전이신 예수님의 삶이 제물의 삶이었고 세상의 빵 되는 삶이었고, 세상에게 먹히는 물의 삶이었고 세상에게 짓밟혀 꺼지는 불의 삶이었어요. 세상에게 찢기는 휘장의 삶이었어요. 그런데 거기에서 가장 큰 하늘의 영광이 드러났다면 우리의 삶 속에서 그런 예수의 삶이 조금씩 나타나게 될때 거기서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어야죠 당연히.

모든 성전 된 자들의 삶에는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진 상태로 나타나요. 그런데 성전들은 그 성전된 자들의 삶 속에 나타나는 감추어진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봅니다.

불법과 억지와 폭력으로 나에게 큰 손해를 입힌 자를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기도를 하는 동안 진심으로 용서를 하게 되었어요 내가 세상 사람들 눈에는 그 사람이 바보처럼 연약한 자로 실패자로 보이겠죠. '약하니까 당하는 거야.. 저런 바보 저런 태도로 이 험난한 삶을 살아~?' 바보 되는 거예요. 성도는 그 속에서 '용서와 섬김과 인내와 온유'라는 '하느님의 성품'을 볼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는 '~ 저 사람 삶 속에서 영광이 드러나고 있구나~' 이렇게 볼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분명 하느님의 나라 안에서 하느님의 성전으로 그 성전의 삶을 사셨는데 그리고 그 삶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었다고 하는데 그 분의 삶은 처참하게 짓밟히고 찢기는 삶으로 나타났어요. 예수님이 지금 하느님께 기도를 하며 우리를 그 자리로 부르고 계신단 말이에요.

 

(골로 3:1-4) 1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2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4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바오로가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는데 그 '' 라는 곳이 예수님이 하느님 우편에 앉아 계신 곳이래요. 하느님 나라란 말이에요. 그러면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안에 감추어 있다 그래요.

근데 감추어진 자는 뭐 대단히 유익을 보는줄 알았더니 이 세상에서 죽은 자로 사는 거래요 죽은 개처럼. 죽은 개 가서 발로 한 대 차면 그 죽은 개가 벌떡 일어나서 '니가 뭔데 나 발로 차?' 대드는 거 보셨어요? 우리를 그렇게 살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었다는데 감추어진 자는 죽은 자라는데 다 살았어 강시가 돼 갖고 콩콩 뛰어다니면서 겉만 죽었어. 그리고 할 건 다해요 인간이 하는 건. 그럼 '죽은 자' 아닙니다.

위엣 것을 찾으라는 건 뭘 찾으라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걸 찾으라는 거예요. '우리의 됨됨이' 그걸 추구하라는 거예요. 위엣 것은 보이지 않는 것 이란 뜻이에요.

 

(1요한 2:15-17) 15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16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17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영원' 그 속에 있는 것을 우리가 찾아야 되는 거예요. 그게 보이지 않는 위엣 것이에요. 그게 성도가 성전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구하는 것입니다. '땅엣 것을 사랑하는 자는 아버지의 사랑을 입은 자가 아니다' 그 말은 '가짜다' 라는 뜻이죠. 사도요한의 이 말은 우리를 반드시 그렇게 만들고야 말겠다라는 하느님의 선언을 대언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삶이 그리로 끌려가고 있는 중인 거예요. 그런데 내 안에서 하느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나를 부인시켜 가세요 그 분이. 나는 나에게 자꾸 나의 죄를 폭로 당하고 나에게 자꾸 실망할 뿐이에요. 하느님은 그걸 통해서 나를 부인시켜 가는 거예요. 거기에서 우리는 위엣 것을 찾는 자로 한발 한발 변해가는 거죠.

 

(로마 8:24-25) 24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25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위엣 것을 찾으라.'에서 '찾으라' '희망' 이란 뜻이란 말이에요. 그니까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는 게 진짜 희망이라 그러죠 그런데 대부분 보이는 것만 찾아 헤매고 있어요. 이렇게 보이지 않는 걸 추구하며 보이지 않는 영광을 드러내며 사는 삶이 어찌 쉽겠어요. 이것을 '하느님의 은닉성' 이라고 하는 거예요 신학적 용어로.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처럼 누룩'처럼 감추어져 있어요. 그 말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통치에 순종하며 하느님 나라를 사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감추어진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게 된다는 말과 똑같은 거예요. 바로 그 삶 안에 어마어마한 상상할 수도 없는 하느님 나라가 감추어져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바로 그 삶 안에 밀가루 전체를 뒤집어 엎어버리는 누룩같은 힘이 들어있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겨자씨와 누룩으로 하느님 나라를 비유하는 거예요.

 

(루가 13:18-21) 1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19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21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성막에 감추어져 있는 하느님의 영광과 이 모습과 연결을 해서 한번 생각해 보세요. 똑같은 거예요. 성막에 드러난 '하느님의 영광 과월절 물두멍 홍해 만나 불기둥 구름기둥' 다 뭐예요? '고난'입니다. 천국은 이 땅에서 이렇게 은닉되어 있어요. 마찬가지로 천국 자체인 여러분 자신도 이 세상에서 은닉되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이사 49:1-4 ) 1 섬들아, 내 말을 들어라.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2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 3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4 그러나 나는 말하였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하느님이 택한 하느님의 백성에 관한 이야기에요. 여기에도 근데 하느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숨기시고 감추신다' 그래요 2절 보면은. 근데 재밌는 건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날카로운 칼같이 만드셔서 당신 손 그늘에 숨기고 날카로운 화살로 만드셔서 전통에 감추신대요.

그렇게 쓰지도 않을 거면 왜 두들겨 패서 날카로운 칼로 만들고 왜 날카로운 화살을 왜 만들어요 왜 자꾸 전통에다 쳐박을 거. 감춘대잖아요 전통에다가 만들었으면 쏴아지 세상을 향해. 감췄대요 날카로운 칼로 만들어서 감췄어요.

누가 우리 보고 나가서 싸우라 그러든가요? 세상과 싸우는 건 하느님이세요. 우리는 세상과 싸운다고 하지만 그래서 우리를 '군사' 라고 하잖아요? 그 세상이 총칭하고 함유하고 있는 게 내 안에 들어 있는 마귀적 속성 그게 마귀예요. 그걸 죽여가는 거예요. 철장을 가지고 백마를 탄 예수가. 그리고 내가 그 싸움에 그냥 노출되어 다 경험하는 거예요. 그걸 '전투'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느님이 때로는 싸워라! 라고 해놓고 때로는 너희는 가만히 있어라 그러는 거예요. 가만히 있는 게 싸우는 거예요. 하느님이 내 안에서 싸울 때 내가 그걸 겪어내야 되기 때문에. 그런데 그걸 겪고 있으면 내가 점점 날카로운 칼이 되어가고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가는 거예요.

그렇게 완성됐을 때 천국으로 옮겨놓는 거예요. 천국에다 감춰버리고 나머지들은 '너희들은 못들어가. 내새끼들은 다 감췄어. 인제 너희들은 여기서 죽었다' 태워버리는 거예요. 그 감추임의 삶을 이 세상에서부터 조금씩 살아내는 거예요.

섣불리 내가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겠다라고 나서지 마세요. 우리의 존재 자체가 영광이에요 이미. 그리고 그 영광은 하느님이 알아서 챙기세요. 우리는 그냥 비워내기만 하면 돼요. 자신이 뭐 할때는 기고만장해서 사람들이 신이 나서 힘든지 모르고 해요. 일단은 우리 안에 있는 그 불을 꺼야 돼요.

그리고 내 안에서 진짜 예수님의 심장 거기서 나오는 그 자비의 마음이 나를 움직일 때 그때는 진짜 머리 도끼삼아 한번 해보는 거예요. 신앙생활. 찍으며 가는 거예요 세상을. 그런데 그게 되기도 전에 하느님이 누군지 구원이 뭔지 죄가 뭔지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뭔가를 해서 자꾸 보상을 받을려고 하는 종교행위들만 난무하니까 그리스도교가 이렇게 힘이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느님 자리에 앉아있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 '죽은 흙'으로 고백시켜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의 빛을 비추어서 당신의 영광을 받아내시는 걸 목적으로 하여 우리의 삶을 끌고 가고 계시는 거예요. 그 삶 속에서 '전도'가 나오고 그 삶 속에서 '헌금'이 나오고 '봉사'가 나오고 '구제'가 나오는 거예요. 역시 하느님이 끌어내시는 것입니다. 천국은 겸손하게 감추어짐으로 승리를 쟁취하는 아주 역설적인 나라예요. 그걸 배우고 가야 되는 거예요 우리는요.

 

(이사 49:8-10) 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내어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으니 땅을 다시 일으키고 황폐해진 재산을 다시 나누어 주기 위함이며 9 갇힌 이들에게는 나와라.’ 하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어라.’ 하고 말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가는 길마다 풀을 뜯고 민둥산마다 그들을 위한 초원이 있으리라. 10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의 말로 바꾸면 '이게 진짜 영광이구나' 를 알아먹게 해 주신다 라는 뜻이에요. 우리는 '어린양' 으로 세상에 보내진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하느님이 쉴만한 물가 푸른 초장 이런 곳으로 우리를 끌고가면 거기가 정말 쉴만한 곳이 되어야 되고 거기가 나에게 만족스러운 곳이 돼야 돼요.

그런데 왜 우리가 그걸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로 때로는 우리의 인생을 그렇게 받아들이냐면 이 양이 이리로 둔갑을 해버려서 그래요. 이리에게는 풀 갖고는 만족이 안돼요. 아니 예수님께서 양을 세상에 보내면서 세상이 이리처럼 너를 물텐데 너는 뱀같이 지혜롭게 절대 양의 자리를 떠나서 이리로 변하여 그들을 물으면 안돼 응전하면 안돼 라고 가르쳐 주셨단 말입니다.

그게 '뱀처럼 지혜로와' 예요. 뱀의 지혜는 항상 '니가 있는 자리를 떠나' 잖아요. 뱀처럼 지혜로우라는 말은 이리가 물더라도 '양들아 이리되지 말아라' 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양으로 지금 계속 있다면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에서 아버지와 함께 기쁘게 놀고 있어야 돼요. 그걸 누리고 있어야 돼 그 나라를.

문명이 정말 우리를 행복하게 해줘요? 문명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인간의 기대치와 욕심은 점점 높아져요. 그리고 만족의 자리는 점점 자석의 양극이 부딪히는 것처럼 멀어져요. 불고기? 어이구.. 누가 고기가 질기니 뭐니 이런 소리를 어디서 해요? 고무로 되어 있어도 먹어요. 그런데 어느날 맛난 소고기를 한번 먹고 나니까 그 질긴 거를 못먹겠어요.

그런데 맛있는 것들은 점점 많이 우리에게 공급되어지고 좋은 것들은 점점 많이 풍성하게 우리에게 쏟아지는데 만족은 점점점점 낮아져요. 그래서 자살률이 점점 높아져요. 그런데 이걸 한번 맛을 들인 사람들이 이 문명을 못떠나는 거예요. 예전에 그 행복했던 삶을 완전히 다 잃어버리고 마약중독자 살인자 거지 부랑자 길거리에 전부 너브러져 있어요 도시에.

세상은 우리를 그렇게 속입니다. 풍요는 절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아요. 편안하게는 만들어주지만 그 편안은 곧 파멸로 이어지는 거예요. 그것이 아닌 진정한 하느님 나라의 풍요와 평안을 구하셔야 되는 거예요 하느님은 그렇게 감추시고 숨기시는 방법으로 이 세상에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거예요.

본문 25절 보면은 갑자기 예수님께서 '의로우신 아버지' 라고 불러요. '공의로운 아버지' 란 뜻예요. 그런데 세상은 그 아버지를 알지 못한대요. 세상은 아버지를 의로우신 아버지로 알지 못하지만 나는 의로우신 아버지를 압니다 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세상은 어떤 아버지를 원할까요? '아니 한번 구원해 준 거 그냥 화끈하게 그냥 확 용서해 줘 버리지 뭘 감추고 숨기는 과정을 통과하고 경험을 또 가져야 된다 그러고 100% 니들이 해야 된다 그러고 아니 기계적으로 오로매릭컬리 그렇게 좀 해주면 안되나? 꼭 인격적으로 그걸 다 경험해야 되나?' 세상이 원하는 하느님.

그러나 사랑으로 모든 걸 용서할라면 도대체 어디까지 사랑을 줘야 돼요? 한계가 모호해요. 그러나 공의로 사람들 용서 할라면 그 하느님이 요구하는 그 공의를 누군가 자격이 있는 자가 충족시켜내고 그걸 전가시켜 버리면 돼요. '하느님은 그렇게 할라고 하는데 세상은 모르네요 아버지 내가 그거 하러 왔잖아요. 나는 아버지를 알아요. 그래서 내가 그 공의의 하느님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 땅에 왔어요. 그런데 세상은 몰라요' 그 말이에요.

세상을 하느님이 공의로 심판하신다는 건 영 단번에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일어났지만 그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삶 속에서 반드시 '실제화' 되어야 된다 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우리의 삶에서는 끊임없는 작은 심판들이 일어나야 돼요. 내 옛사람이 죽는 부인되는 작은 심판들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돼요. 그러나 작은 심판들은 진짜 무시무시한 심판을 면하게 해주는 하느님의 은혜의 수단이에요. 그게 바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거예요.

때로는 우리가 우리의 삶을 보면서도 '이렇게 사는 게 진짜 맞나?' 그럴 때가 있어요.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에요 그것도. 그래서 하느님이 나무늘보처럼 시속 900미터 (그거 보다 속터져 죽는 줄 알았네 진짜) 내려가서 물마시고 왔는데 아직도 그 자리에 있어 걔는 천천히 그렇게 한발 한발 뒤에서 악어가 쫓아오는데도 계속 이러고 가고 있어 ㅎㅎ 새끼 하나 업고. 우리가 그렇게 끌려 간다니깐요? 대단하게 빨리빨리 무슨 성자처럼 변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감추어져 있어요. 그런데 하느님이 여러분 안에서 열심히 부지런히 일을 하시는 것 뿐이에요. 그러다가 하나도 안 변하면 어떡해요? 그럴 수도 있어요.

 

히브리서에 보면 모세가 파라오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예수님을 위하여 받는 고난을 세상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대요 언제 그랬어요? 애굽사람 때려죽이고 동족한테 고발 당할까봐 쫒겨간 거예요. 그게 모세의 일기예요. 모세는 자기의 일상으로 그 일기를 쓰고 있었는데 하느님이 그 일기를 벅벅 지우면서 들어오는 거예요 우리의 삶에. 내가 그 삶 속에서 너를 어떤 자로 만들려고 너에게 그 현상을 허락했는 건 줄 알아? 바로 이거 였어! 라고 기록해 놓은게 히브리서예요 11.

사라는 하느님의 말을 듣자마자 웃었어요 그게 사라의 일기예요. 그런데 하느님이 벅벅 지우면서 들어오세요 - 사라는 믿음으로 - 아브라함은 아버지가 꾼 꿈 때문에 재수없어서 갈대아 우르를 떠났는데 아버지가 벅벅 지우면서 들어오는 거예요. -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갈대아 우르를 떠나 - 그리고는 결국 믿음의 사람으로 모리아산에 세우는 거예요. 그랬을때 결과가 그렇게 되었을 때 그가 거쳐온 과정이 예수님의 일기로 바꾸어 지는 거예요. 히브리서 11장을 다 예수로 바꿔 읽어 보세요.

예수는 믿음으로- 파라오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예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거는요) 예수는 믿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고 예수는 믿음으로- 하느님이 떠나랬더니 금방 떠나고 예수의 삶이 그가 엉터리로 써놓은 일기를 지우고 들어와서 예수의 일기로 바꿔 버리는 거예요. 그게 우리의 신앙생활이에요. 그게 성도의 삶이에요. 그게 믿음인 겁니다.

 

지금 여러분이 보시기에 형편없는 여러분의 일기를 삶으로 쓰고 있을지 몰라요 감춰져 있기 때문에. 그런데 하느님은요 여러분이 이렇게 실망하고 낙망해 있을 때조차도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면서 우리를 위해 일을 하고 계세요. 우리의 그 죄를 지워가고 계신단 말이에요. ~벅 지우면서 예수의 삶으로 다시 기록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리고 나중에 우리에게 '니 일기 여기 있어' 주는 거예요. 받아 봤더니 전부 칭찬 밖에 없어 다 예수의 삶이야 난 그때 살인하고 도망갔는데? '아니야~ 무슨 소리야~ 너는 파라오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갔잖아' 누가 구라치는 거예요 이거? 하느님의 거룩한 거짓말. 그게 구원입니다. 그러니 행복하세요. 잘 참으시고 우리 일기가 조금 마음에 안 쓰여졌다 할지라도 절망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열심히 쓰고 계시니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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