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부활 제7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5-20 조회수1,018 추천수2 반대(0) 신고

우리는 살아가면서 공동체에 속해서 살아가곤 합니다. 공동체라고 하면 신앙 공동체도 있을 것이고 또는 인간 단체 조직 중 하나인 공동체도 있을 겁니다. 공동체 생활은 쉽지 않습니다. 제가 서울에 10년 남짓 살면서 몇 개월 고시원 생활을 경험했던 적이 있습니다. 서울대 입구역 전철역에서 서울대 방향으로 가는 곳에 있는 고시원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25년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 고시원에서 생활하면서 같이 안면을 튼 사람 중에 아직도 기억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형 하나는 강원도 출신인데 그때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판사가 되는 게 꿈인 형이었습니다. 그 형이 판사가 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또 한 분은 부산에서 올라온 아저씨였습니다. 그 아저씨는 감정평가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고시원에는 각종 공부를 하기 위해서 전국 각지에서 모여 청운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공부에 매진하는 사람들로 모여진 하나의 건물이었던 것입니다. 고시원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고시원에서 공부하는 사람과 고시원은 그냥 잠만 자고 공부는 인근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는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형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들은 평소에는 모르겠지만 공부를 하는 때는 다들 신경이 예민해져 있곤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공부를 하는 것에 자신의 인생이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한 공간에서 생활하다 보니 문을 여닫고 할 때 다른 사람들을 배려해서 문을 살살 조심해서 닫아야 하는데 그게 잘 되지 않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이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해도 시험이 다가오는 사람들에게는 스트레스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떤 경우는 서로 다투는 경우도 있고 얼굴을 붉히기도 합니다.

 

서로의 개성이 저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이런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는 서로를 위해서도 기본적인 룰은 상대를 위해서도 본인을 위해서도 서로 지켜야 서로에게 좋은 것이 됩니다. 바로 상대를 위해 배려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집 같으면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한 번은 세탁을 하려고 세탁물을 세탁실에 가져갔습니다. 하나가 작동을 하지 않아서 하려고 문을 열었는데 탈수가 다 되었지만 세탁물을 회수해서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보통 그럴 경우에는 빈 바구니에 세탁물을 옮기고 난 후에 세탁을 하는 게 하나의 불문율 같은 규칙입니다.

 

근데 세탁물을 보니 여성의 것이었습니다. 저는 남자 옷이었다면 그냥 했을 건데 여자 세탁물이라서 조금 고민을 했습니다. 설사 제가 세탁물을 옳겨서 놓았다고 해도 변태로 취급될 여지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는 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한 시간 반 후에 주인이 나타났습니다. 그 여자 분은 성격이 털털한지 모르지만 세탁을 시작한 후에 외출을 하고 고시원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자기는 만약 늦게 들어온다고 해도 고시원 규칙대로 누군가 세탁물을 옮긴 후에 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외출을 했던 것입니다.

 

저는 세탁실 앞에 있는 벤치에서 그냥 잡지를 보면서 세탁물 주인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 여자 분이 죄송하다고 하면서 사과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냥 규칙대로 옮기고 난 후에 하시면 되는데 하시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 여자 분도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할 거라고 편하게 생각했으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제가 미련스럽게 기다린 이유가 있었습니다. 세탁물에는 속옷이 있었습니다. 만약 일반 세탁물만 있었다면 제가 바구니에 옮겨놓고 했을 겁니다. 저는 눈으로 보긴 봤지만 그래도 만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세탁물 주인을 위해 배려를 했습니다. 설사 그 여자 분이 그럴 경우에 누가 하더라도 괜찮다고 스스로 용인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당시 제가 생각했을 땐 그래도 모르는 사람이 그것도 동성이 아니고 이성이 그렇게 한다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런 배려를 했던 것입니다.

 

그 여자 분이 그냥 갔으면 될 일인데 그분 성격도 생각보다 쿨한 성격이었습니다. 그분 역시 제가 왜 그분이 오실 때까지 기다렸는지 알 수 있었지만 자기 입장에서는 약간 미안해서 그랬는지 이유를 물어본 것입니다. 제가 조금 전에 언급했던 것처럼 그래서 그랬다고 하니 그 여자 분이 약간 감동을 하더군요. 아무튼 그걸 계기로 그분과 통성명을 나누고 몇 개월 동안 누나 동생처럼 지내게 되었습니다. 누나도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누나는 시험에 합격할 때까지는 여자라는 것을 포기하고 살겠다 생각하고 오로지 공부에만 신경쓴다는 그런 마음으로 공부를 했기 때문에 그때 그걸 별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저에게는 그때 그 누나의 그런 생각이 감동이었습니다. 만약 그때 역으로 그 상황이 제가 그 누나와 같은 처지가 되었다면 저는 제 성격으로는 상당히 민망해 했을 겁니다. 저는 그런 상황을 이해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시간이 아깝지만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 누나가 사실 감동한 것은 자기 속옷을 봤음에도 주인이 올 때까지 자기 세탁물에 접촉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감동적으로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하나를 강조합니다. 오늘 복음 묵상글을 작성하면서 하나가 되는 것을 고시원 생활 체험을 언급한 이유가 있습니다. 복음에도 나오지만 하나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 당신이 성부 하느님께 속해야 하고, 또 성부 하느님도 아들 성자 하느님께 속해 있어야 하고, 성자 당신께서는 또 우리 속에 속해야 하나가 된다고 역설하십니다. 속한다는 것은 그 안에 좌정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두 개체가, 두 개체로 존재하게 되면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복음 말씀 자체만을 놓고 묵상하게 되면 그렇습니다.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원리는 아마도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바로 어느 분 속에 거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그분 속에서 녹을 때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녹는다는 것은 바로 희생입니다. 그 희생은 바로 사랑입니다. 결국 하나가 되는 것은 사랑입니다. 녹아준다는 것은 나를 생각하면 녹을 수가 없습니다. 상대를 생각하는 배려가 있을 때 그게 가능한 것입니다. 바로 제가 고시원에서 했던 그런 체험처럼 말입니다.

 

비누는 자기 몸을 녹여서 다른 존재를 깨끗하게 해 줍니다. 마치 예수님의 그 사랑과 하느님의 사랑이 비누처럼 녹아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깨끗하게 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만 이렇게 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습니다. 다른 이에게도,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렇게 되기를 오늘 복음을 보면 간절히 원하시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그런 마음을 닮으려고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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