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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요한21,15-19)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5-21 조회수1,931 추천수0 반대(1) 신고

 

2021년 5월 21일 금요일

[부활 제7주간 금요일내 양들을 돌보아라 (요한21,15-19)

(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 - 5월18일  

 

1독서<예수는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합니다.>(사도25,13-21)

그 무렵 13 아그리파스 임금과 베르니케가 카이사리아에 도착하여 페스투스에게 인사하였다.

14 그들이 그곳에서 여러 날을 지내자 페스투스가 바오로의 사건을 꺼내어 임금에게 이야기하였다. “펠릭스가 버려두고 간 수인이 하나 있는데,

15 내가 예루살렘에 갔더니 수석 사제들과 유다인들의 원로들이 그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면서 유죄 판결을 청하였습니다.

16 그러나 나는 고발을 당한 자가 고발한 자와 대면하여 고발 내용에 관한 변호의 기회를 가지기도 전에 사람을 내주는 것은 로마인들의 관례가 아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17 그래서 그들이 이곳으로 함께 오자나는 지체하지 않고 그다음 날로 재판정에 앉아 그 사람을 데려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18 그런데 고발한 자들이 그를 둘러섰지만 내가 짐작한 범법 사실은 하나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19 바오로와 다투는 것은자기들만의 종교와 관련되고또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예수라는 사람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뿐이었습니다.

20 나는 이 사건을 어떻게 심리해야 할지 몰라서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 그곳에서 이 사건에 관하여 재판을 받기를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21 바오로는 그대로 갇혀 있다가 폐하의 판결을 받겠다고 상소하였습니다그래서 나는 그를 황제께 보낼 때까지 가두어 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화답송 시편 103(102),1-2.11-12.19와 20ㄱㄴㄹ(◎ 19)

◎ 주님은 당신 어좌를 하늘에 세우셨네◎ 알렐루야.

○ 내 영혼아주님을 찬미하여라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내 영혼아주님을 찬미하여라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당신을 경외하는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네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가 먼 것처럼우리의 허물들을 멀리 치우시네

○ 주님은 당신 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당신 왕권으로 만물을 다스리시네주님을 찬미하여라주님의 모든 천사들아그분 말씀을 따르는 힘센 용사들아

 

복음<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내 양들을 돌보아라.> (요한21,15-1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다음,

15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주님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16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주님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7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1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5월 25일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사도25,13ㄴ-21)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제1독서 (사도25,13ㄴ-21)

 

"그 무렵 아그리파스 임금과 베르니케가 카이사리아에 도착하여  페스투스에게 인사하였다. 그들이 그곳에서 여러 날을 지내자  페스투스가  바오로의 사건을 꺼내어 임금에게 이야기하였다.(13~14)

  바오로와 다투는 것은, 자기들만의 종교와 관련되고,  또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예수라는 사람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뿐이었습니다."(19)

 

사도 바오로가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자 총독 페스투스는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놀랐을 것이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무거운 짐을 덜게 되어 상당히 홀가분했을 것이다.

 

그는 이제 상급 법정에 제출할 '고소의 형식'  사건의 개요를 담은 보고서 (사도23,26~30)를 작성해야만 했다(사도25,26~27).  

그런데 페스투스는 유다인들과 사도 바오로 사이에 있었던 고소와 변론을 통해서는 로마 황제에게 상소할 재료(사도25,26)를 전혀 확보하지 못했다.

 

그로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칫하면 자신이 무능한 관리로 로마 황제에게 낙인찍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이 사건을 제대로 심리할 서류나 사람을 필요로 했는데, 그때 마침 등장한 이가 바로 유다 종교 문제에 정통한 아그리파스 임금 (Herod AgrippaⅡ)과 그의 누이 베르니케였다.

 

페스투스는 유다인들이 고소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했는데, 첫째는 자기들의 종교 문제요, 둘째는 그 연장선상에 있는 문제로 볼 수 있는 '예수의 부활'사건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종교적 문제의 고소 사건은 이미 사도행전 18장 12~17절에서 언급된 갈리오 총독의 재판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나는 바와 같이 로마 법정의 심리 대상이 되지 못했다.

 

한편 '종교'라고 번역된 '데이시다이모니아스'(deisidaimonias)는 여러 가지 뜻을  지니고 있는데, 첫째 긍정적 의미로 '신에 대한 경외심', 둘째 부정적 의미로 '미신'  (superstition), 그리고 셋째 객관적 의미로서의 '종교' 이다.

대체적으로 당대의 로마의 관리들은 종교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특히 식민지의 종교에 대해서는 멸시하였다.

 

아마도 총독 페스투스도 종교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극히 세속적 성취욕만을 가진 로마 관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그리파스 임금은 클라우디우스 황제에 의해서 '성전 후견인' 권세를 부여받은 자로서 유다 종교에 정통하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따라서 페스투스는 아그리파스 임금이 신봉하는 유다교를 미신으로 단정짓고  '미신'이라는  비하조의 의미로 종교를 언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아그리파스 임금을 의식하여 중립적인 의미에서 혹은 모호하고 조심스러운 뉘앙스로 '유다인의 종교'라는 말을 사용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 여기서는 이전까지 주요한 고소거리 가운데 하나였던 성전 모독죄(사도25,8; 24,6)는 제기되지 않았다.

그 대신 '예수라 하는 이의 부활'이란 주제가 거론되고 있다. 죽은 자의 부활 문제는 유다인들에게 그리 낯선 개념이 아니었으므로  교리상 쉽게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다른 경우였는데, 이것은 사도 바오로를 고소한 대사제들과 원로들을 포함한 유다교 지도자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을 인정한다면 예수님이 메시야가 되며,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자신들이 오히려 난감한 입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부활했든지간에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다는 그 사실은 로마법을 어기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비록 유다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과 동일한 수법(루카23,4.14)으로 종교적인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비하시켜 사도 바오로를 죽이고자 했지만, 총독 페스투스는 이 문제가 단순히 유다 내의 종교적 사안임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2010년 5월 21일 금요일 [(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복음(요한21,15~19)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15,16.17)

 

요한 복음 21장 15절에서 1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하는 질문을 세 번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아가파스'(agapas),'아가파스'(agapas),'필레이스'(phileis)라고 물으시고, 베드로는 세 번 다 '필로'(philo),'필로'(philo),'필로'(philo)라고 대답한다.

 

이들 동사에서 첫번째와 두번째의 경우에 원형은 '아가파오'(agapao)이고,  세번째는 '필레오'(phileo)이다.

 

먼저 '필레오'(phileo)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자신의 과거의 잘못에 대해 진심으로 회개하고, 뜨거운 마음으로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다짐을 나타내지만,  '아가파오'(agapao)는 그러한 관계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은 무조건적이고 신적(神的)인 사랑이므로,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아가파오'(agapao)동사를 통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자신의 뜨거운 열정과 사랑을 드러내고 싶어 '필레오'(phileo)라는 동사를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아가파오'(agapao)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에서 이루어진 사랑처럼 가장 고귀한 사랑을 가리키는 반면에, '필레오'(phileo)는 인간적인 열정이나 애착 같은 일시적 사랑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아가파오'(agapao)를 통해 고귀한 신적(神的) 사랑을 물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필레오'(phileo)를 통해 계속 인간적인 사랑만을 고백하자, 결국 예수님께서도 17절에서 베드로의 인간적인 사랑에 국한하여 '필레오'(phileo)로 물으셔서 베드로가 슬픔에 잠길 수 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두가지 차원의 접근에서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없게 된다.

첫번째의 경우, 요한 복음 21장 17절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처럼  '필레오'(phileo)로 물으시고 베드로도 '필레오'(phileo)로 대답함으로써,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뜨거운 사랑을 인정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베드로가  슬퍼했다는 내용이 나오므로 이 주장이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두번째의 경우도,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인간적인 사랑에 맞추어 주셔서 베드로가 슬퍼했다는 것도, 요한 복음 21장 15절과 16절에서 예수님의 질문에 긍정하는 '주님께서 아십니다'라는 베드로의 대답을 볼 때에는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더군다나 엄밀히 따져 보면, 베드로가 슬퍼한 이유는 세 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받았기 때문이며 동시에 과거에 세 번 배반한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다른 가능성은 신약 성경에서 대부분 '아가파오'(agapao)와 '필레오'(phileo)가 성부와 성자 사이의 친밀성을 드러내기 위해 혼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요한 복음 3장 35절의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에서는 '아가파오'(agapao)가 사용되었고,  요한 복음 5장 20절의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에서는 '필레오'(phileo)가 사용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 번을 물으신 질문에서 어떤 용어가 사용되었는가보다는, 은 질문이 반복되었다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된다고 본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베드로의 사랑을 확증함으로써, 베드로를 당신이 도래시킨 하느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수위권을 가진 사도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동일한 질문을 세 번이나 반복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베드로의 인격 위에 세워질 반석과 같은 교회의 수위권을 가진 사도로서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라는 진리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서 중요한 것은 시제가 '현재형'이라는 사실이다.

 

과거를 추궁하는데 중점이 이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네가 나를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묻는 미래에 중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것이다.

 

물론 사랑과 충성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베드로의 과거를 책망하실 수도 있고, 앞으로의 새로운 출발에 대한 당부도 하실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서', '주님을 내 마음의 중심으로 모시고 진실된 사랑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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