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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슴으로 예수님을 사랑한 베드로 사도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5-21 조회수2,199 추천수2 반대(0) 신고

 

누구나 살면서 사랑은 한 번쯤은 해보게 됩니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때로는 슬픈 경우도 있습니다. 사랑을 해서 사랑의 결실이 맺어지게되면 그건 아름다운 사랑일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랑이 그런 것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할 때입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니 슬픈 사랑이 될 것입니다.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마음이야 아프겠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그것도 아름다운 사랑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은 꼭 이루어져야만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눈에는 이루어진다면 좋겠지만 말입니다.

 

사랑은 머리로 할까요? 가슴으로 할까요? 예전에 번역을 하면서 우연히 덤으로 공부를 하게 된 것이 있었습니다. 공부를 하려고 해서 한 게 아니고 그냥 알게 된 사실입니다. 이성간의 사랑을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랑을 할 때 인간의 감정 상태는 두 가지로 발현된다고 합니다. 하나는 머리로 사랑을 하는 사람과 가슴으로 사랑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하실 겁니다. 머리로 하는 사랑은 이런 것입니다. 이미 머리가 인간의 감정을 계산해버린 것입니다. 그 계산의 결과에 따라 이성적으로 따르는 것이 머리로 하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해 외모가 아름답거나 또 그 외에도 남들보다 조건이 더 좋으면, 단순히 조건 때문이 아니라도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그런 사람에게 관심이 더 가는 건 당연합니다. 우리는 이런 걸 굳이 계산을 해서 계산을 하는 게 아니라 몸이 이미 본능적으로 이끌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조건반사적으로 반응을 하는 것처럼 그런 것입니다. 가슴으로 하는 사랑은 이런 것입니다. 머리로는 도저히 사랑하고 싶은 조건이나 상황은 아닌데도 사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가슴으로 사랑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근데 꼭 그렇지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드물긴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가슴으로 사랑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랑은 어쩌면 힘겨운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가슴으로 하는 사랑과 머리로 하는 사랑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같이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때 알았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있지만 보통 사람으로 할 수 없는 사랑을 이런 사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사랑은 마음이 순수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사랑 같습니다.

 

학문적으로는 이렇게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성향의 사람은 이성으로 가슴을 통제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단순히 사랑이라는 감정에서만 그렇습니다. 이런 사실을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그럴 것 같습니다. 예전에 개신교 때 번역을 했기 때문에 그때도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땐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때도 우리와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 묵상을 하긴 했어도 지금과는 다른 묵상을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보니 그런 사랑은 인간의 감정을 초월한 사랑이 될 수가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런 사랑은 남녀간에 나누는 이성간에도 이런 초월적인 사랑을 할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성별, 나이를 초월한 사랑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것 같습니다.

 

예전에 개신교 때 외국에서 생활하고 평신도로서 선교사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삶을 간증한 것을 많이 봤습니다. 그들의 삶을 보면서 그런 희생적인 사랑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사랑을 초월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도 생각했지만,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요즘은 뼈저리게 느낍니다. 그땐 단순히 봉사 정신이 투철하고 신앙심이 좋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을 한다면 단순히 신앙심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신앙심은 좋아도 그렇게까지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사실이 반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세 번씩이나 사랑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 묵상을 할 때면 묵상할 때마다 다른 관점에서 다양하게 바라봅니다. 오늘은 다른 관점에서 묵상해봤습니다. 예수님께서 단순히 사랑을 확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세 번 질문을 했을까입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예전에 어떤 신학자 분은 자신이 세 번 부인했기 때문에, 그 세 번의 부인을 용서하는 의미로 세 번 물어봤다고 재미있게 해석해놓은 분도 있는 걸 봤습니다. 그건 여담일 것입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고요. 그 신학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을 잘 보면 확인을 하고 나신 후에 내 양을 돌봐라.”고 하십니다. 이게 세 번 반복됩니다. 이건 무슨 의도로 하셨을까요? 저는 이 의미는 단순한 사랑을 확인하는 메시지가 아니고,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내양을 돌보는 것이라는 걸 묵시적으로 표현하신 것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베드로 사도가 어떻게 순교할지를 말씀하십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를 고민해봤습니다. 그게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씀하시니 무슨 숨은 뜻이 분명 있을 듯합니다. 그런 메시지를 언급하신 후에 예수님을 따라라고 하시면서 오늘 복음은 끝을 맺습니다. 정리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은 내 양을 돌보는 것이고, 그 길은 죽음도 불사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에 그래도 나를 따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야만이 나를 따를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도 나오지만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순교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삶은, 단순히 우리가 아는 신앙심만으로 그렇게 하느님을 위해서 자신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신앙심을 초월한 그 어떤 사랑이었을 겁니다. 그게 바로 가슴으로 하는 사랑일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을 가슴으로 사랑할 때만이, 하느님을 위해서 그런 삶을 살 수가 있을 겁니다. 바로 그런 삶이, 비근한 예로 우리의 선조들이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을 위해서 기꺼이 바친 삶일 겁니다. 순교를 떠나서 우리는 이런 순교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런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겠다고 한다면 이보다도 더 아름다운 사랑은 없을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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