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23주일(홍) 성령 강림 대축일 낮 미사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5-22 조회수2,891 추천수0 반대(0) 신고

1독서<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1-11

오순절이 되었을 때 사도들은

1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2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3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4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5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6 그 말소리가 나자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그리고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하였다.

7 그들은 놀라워하고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8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9 파르티아 사람, 매디아 사람, 엘람 사람, 또 메소포타미아와 유다와 카파도키아와 폰토스와 아시아 주민,

10 프리기아와 팔필리아와 이집트 주민, 키레네 부근 리비아의 여러 지방 주민, 여기에 머무르는 로마인,

11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한 이들, 그리고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1독서 주해 (해제, 역주 정태현 신부님)

1

120여명이 다락방에 모여 기도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오순절에 성령이 내렸다. 오순절은 해방절 다음 50일째 축제로서 보리와 밀을 추수하고 나서 햇곡식을 하느님께 드리는 봄 수확 감사제인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기념하는 축제다. 초봄의 해방절 마치 늦가을의 초막절과 함께 순례 축제인 관계로 열세 살 이상의 이스라엘 남자면 누구나 예루살렘을 초만원이었고 예수의 제자들과 동조자들도 거기 모였다. 이런 오순절 축제 때 성령이 내렸다고 루카는 서술한다. 그러나 요한 20.19에서는 예수께서 부활 날 저녁 때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다고 한다.

 

2

세찬 바람이 부는 소리가 나는청각 현상과 불길 같은 혀들이 갈라지면서 그들에게 나타나는 시각현상은 극적 효과를 즐기는 루카의 표현일 것이다.

 

4

1세기 그리스도인 특히 코린토 교회 그리스도인 가운데 무아경에 빠져 남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기이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오로는 이 현상을 일컬어 언어로 말한다고 했고 오늘날에는 심령기도 또는 성령기도라고 부른다. 그런데 루카는 이런 심령기도 현상을 여러 외국어로 말하는 현상으로 바꾸어 여러 가지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루카는 아래 5.13절에서 그 현상을 자세히 논할 것이다.

 

5

경건한 사람이란 표현은 신약성서에서 루카 홀로 쓰는 낱말인데 언제나 유다인을 뜻한다. 5절의 경건한 사람들은 지중해와 근동 여러나라에 이민가서 살다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와 정착한 유다인이다. 이들은 여러 이방인 고장에서 살다 온 이들이므로 간접적이긴 하지만 이방인들을 대표한다는 인상을 풍긴다. 루카는 은연중에 복음이 유다인들에게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선포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10

여기 체류하고 있는 로마인들은 로마에 이민갔다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와서 영주하지는 않고 한동안만 기거하는 유다인들이겠다.

 

11

유다인들과 이방인 개종자들9-10절에서 나열한 각 지역 출신 유다인들의 총칭이겠다. 온 천하 뭇민족들 가운데서 모여온 경건한 사람들인 유다인들을 가리키겠는데 이들 가운데는 인종상의 유다인도 있고 인종상으로는 비록 이방인들이지만 종교적으로는 유다교를 택한 개종자도 있다.

대표적 개종자로는 일곱 봉사자 가운데 막내인 니콜라오를 꼽겠다. 그는 안티오키아 출신 이방인으로 유다교로 개종한 사람이다. 그레데인들과 아라비아인들은 앞서 소개한 인종목록을 총괄한다. 그레데와 아라비아는 서쪽 끝과 동쪽 끝을 대표하는 지역으로서 복음이 유다인, 이방인 개종자들, 이방인들로 확산되는 것을 예시하기 위해 루카가 편집한 것으로 보인다.

 

 

2독서<우리는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2.3-7,12-13

형제 여러분,

3 성령에 힙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할 수 없습니다.

4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5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6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7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13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독서 주해(해제.역주 김영남 신부님)

3

3절은 한편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데 있어 성령의 감동을 받을 필요가 있음을 말하고, 다른 한편 참된 영을 받았는지 여부를 가리는 기준을 제시한다.

저주라고 번역된 아나테마는 어원적으로 위에 놓은 것을, 나아가 바치기로 서원한 봉헌물을 의미했다. 칠십인역에서는 파괴 또는 점멸하기로 서원한 봉헌물을 의미했다. 여기서 저주라는 단어로 발전했다.

 

4

4-6절의 세 구절은 마지막 구절이 좀 길 뿐 평행법으로 잘 구성되어 있다. 구절마다 배분들같은 ()”이 대조를 이루어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를 강조한다. 그리고 ”,“주님”, “하느님이 차례대로 언급되는데, 이 세 요소는 이미 3절에도 나왔다. 그런데 이 셋 중에서 7-8절에서는 당분간 영적인 것들에 관하여라는 12-14장의 본래 주제와 관련하여 에 관하여만 언급된다.

 

4-6절을 직역하면 은사들의 배분들...”,“봉사들의 배분들...”,“활동들의 배분들”,“배분이라고 번역된 디아이레시스는 신약성서에서 여기만 나오는데 차이, 다양성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6

하느님을 (하게))하시는 분으로 묘사하는 것에 관해 11;갈라2.8‘필립2.13 참조.

 

7

4-6절에서 강조된 은사들의 다양성과 그 동일한 원천이 7-11절에서 해설된다. 7절은 다양성의 목적이 유익이라는 원칙을 제시하고, 11절은 은사의 다양성과 동일원천성에 앞의 말들을 정리한다.

 

영을 드러내는 은사가 베풀어진다라는 뜻, 여기서 영의 드러남은 바오로가 말하는 ()령의 선물이란 내적인 것이 아니라 인상적으로 드러나는 외적인 것임을 말해준다. 갈라 5.22에서 영의 열매라고 언급되는 사랑,기쁨,평화등도 영의 드러남이겠지만 이덕목들은 영에 의한 내적 변화의 표시로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질 수 있는 것인 데 비해 여기서 영의 드러남은 사람에 따라 달리 주어지는 선물이다. 영의 내면적 작용에 관해 다음 구절을 참조, 로마 8.11;로마 5.5;갈라4.6

 

흔히 번역본에 공익을 위하여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문맥에서 바오로가 은사들의 교회적 유익성에 큰 관심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원문은 유익을 위하여라고만 되어 있다. 사실 모든 은사가 공적 유익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이상한 언어는 분명히 한 은사이지만 말하는 사람 자신을 일으켜 세운다”. 이에 비해 예언의 은사는 교회를 세운다은사들 앞세워 자기 자랑을 하거나 남들을 무시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바오로가 은사의 공익성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은사에서 개인적 유익을 완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12

몸과 지체들비유는 바오로의 창작이 아니다. 유명한 우화에 기원전 490년경 메네니우스 아그립파라는 사람이 이 비유를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다른 많은 고대 작가도 이 비유를 사용했다. 바오로 시대에 스토아 철학자들은 우주를 거대한 몸으로 생각하여 수많은 존재의 상관성을 강조했다고 한다. 바오로의 독창성은 이를 놀랍게도 그리스도께 적용한다는 점이다.

 

교회도 그렇습니다가 아니고 그리스도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여러분 하나하나는 그 지체들입니다.”라는 27절로 보아 여기 12절의 그리스도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생각할수록 놀라운 표현이다. 몸은 단지 여러 지체의 집합만이 아니라 그 지체들을 하나로 묶어 하나인 생명체일 수 있게 하는 중심원리로 여겨진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도 당신 인격 안에서 당신을 믿는 수많은 신앙인 무리를 하나인 생명체처럼 묶어 하나인 살아 있는 공동체로 존속하게 하는 중심원리로 이해된다. 여기서 우리는 바오로의 독특한 교회관을 본다. 그에게 있어 교회는 단지 개개 그리스도인의 집합체가 아니라, 각 부분이 긴밀히 통일 조직되어 하나인 생명 유기체를 이루듯이 개개의 신앙인이 그리스도와 인격적 결합을 하여 이루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하나인 생명 공동체다.

 

13

한 영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세례는 비록 그 예식이 물로 거행되지만 궁극적으로 영 안에서이루어진다. 13절의 첫부분과 마지막 부분에서 한 영이 강조되는데, 이는 13절이 속한 단락을 앞 단락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한 몸 안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으며라는 뜻이다. “안으로라는 전치사는 세례의 결과 수세자가 누군가와 인격적으로 결합함을 강조한다, 이 결합은 동등한 두 상대방의 결합이 아니라 사람이 물 속으로 들어가 잠기듯이 수세자가 자신의 전 삶을 예컨대 그리스도 안으로잠기게 하는 결합이다. 이것은 다음 예문들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바오로의 이름안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모세 안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세례를 받았다

 

영을 마셨다라는 표현이 어색하게 들리겠지만 다음 예문들을 보면 이해할 수 잇다. :”영적음료를 마셨습니다: “영이 부어진다”;“우리에게 선사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부어졌습니다

 

 

 

복음<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9-23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서 주해(해제,역주 이영헌 신부님)

19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빈 무덤을 발견한 것과 연결하려는 저자의 표현이다. 여기서는 이른 아침대신 저녁이라고 함으로써 아침에 발견한 빈무덤사건의 최고봉을 시사한다. 아무튼 부활사건과 부활체험을 같은 날, 주간 첫날의 일로 서술한 것은 틀림없다. 이어서 저자는 예수의 부활발현 시간을 다양한 방식으로 보도한다.

 

예루살렘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시간과 장소는 역사적 보도라기보다 예수의 부활발현사화를 보도하기 위한 표현일 뿐이다.

제자들의 공포와 불안을 시사하는 데 역점이 있다. 저자는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를 만나게 됨으로써 그런 상태에서부터 해방되었음을 말하고자 한다.

 

부활한 예수의 새로운 실존방식과 그 현존에 오히려 더 관련된 표현이다. 부활한 예수는 돌무덤을 열고 나온 듯이 굳게 닫힌 세상을 열린 세상으로 바꾸기 위해 닫힌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다가갈 것이다.

 

20

예수의 적극적 주도권이 시사된다. 부활발현은 완전히 예수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다.

유다인들의 평상시 인사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고별담화에서 제자들에게 약속한 평화를 이제 부활한 예수가 기원하면서 제자들로 하여금 공포와 불안을 이겨내도록 격려하는 의미가 있다. , 부활과 관련된 특별한 의미를 지닌 인사말이다.

 

부활한 예수가 바로 십자가상에 처형된 예수와 동일인임을 뜻한다. 그러기에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또한 부활한 예수를 제자들이 실제로 만났음을 시사한다. 루카복음에는 옆구리대신 발들로 표현되어 있다. 아마도 요한복음은 창으로 찔린 옆구리를 상기시키려는 듯하다.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를 만나 실제로 기쁨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제자들의 두려움이 이제 기쁨, 곧 부활의 기쁨으로 바뀐다. 따라서 주님을 뵙다란 말은 이별 때 예수가 약속한 말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제자들이 가지게 된 기쁨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21

이 평화인사는 19ㄱ보다 더 깊은 의미를 지닌다. “성령과 함께 주어지는 내적이고 영적인 선물이다. 인사나 축복보다 차원 깊은 의미로 드러나는 평화의 선물이다. 이 평화는 부활한 예수가 아버지로부터 제자들에게 주는 선물로서 제자들의 사명 수행과 함께하고 세상에 증언하는 참된 평화다, 따라서 부활한 예수로부터 받을 수 있고 또한 참으로 원하고 적극적으로 바라는 평화다.

 

제자들 파견이 아들 파견에 참여한다는 의미보다는 파견된 실존의 권위에 더욱 중점이 있다.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그리스도론적 파견사상이 시사된다.

 

22

이 표현은 구약성서에서 생명을 주는 상징적 의미로 사용된다. 여기서는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의 생명을 얻게 됨을 뜻한다.

 

부활한 예수는 공동체 삶을 가능케 하는 성령, 곧 자신의 성령을 제자들에게 준다. ,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로부터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만 강조된다. 이제 제자들은 믿는 자 모두가 받게 되는 성령을 받음으로써 예수의 약속도 이루어진 셈이다. 그런데 이 성령은 죄의 용서에 관한 권한과 함께 제자들에게 주어진다. 초대교회에서는 믿는 자 모두가 세례를 통해 성령을 받고 또한 죄의 용서와 함께 새로 태어난다고 여겼다. 저자도 세례자 요한의 입을 통해 예수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메시아로 소개했다. 제자들은 성령의 세례를 받고 또한 죄를 용서할 권한도 위임받았다.

 

23

부활한 예수가 사죄권을 제자들에게 준 방법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권한이 공동체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죄의 용서는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고 또 계속 이루어질 것이다. 이 용서는 부활한 예수가 공동체에 준 선물인 동시에 위임이다. 현 문맥에서 제자들은 신앙공동체를 대표한다. 죄의 용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한다. 요한 교회도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죄의 용서를 받는다고 여겼다. 부활한 예수는 자기 죽음의 결실을 제자들의 권한으로 부여한다. 그 결실은 구원을 향한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삶이다. 그러므로 사죄는 구원의 원천인 예수의 보편적 속죄를 통해 이루어지고, 사죄받지 못한 자에게는 그 구원의 원천이 폐쇄된 채 머문다는 것을 뜻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