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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4 월요일(백)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교육 주간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5-23 조회수3,699 추천수0 반대(0) 신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8년에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월요일을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제정하였다. ‘교회의 어머니라는 호칭은 교부 시대부터 쓰였는데, 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 헌장에서 마리아에게 교회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부여하였다. 마리아는 성령 강림 이후 어머니로서 교회를 돌보았고, 여기서 마리아의 영적 모성이 드러난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강조하였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2006년 춘계 정기 총회에서 청소년 주일’(5월 바지막 주일)을 포함하여 그 전 주간을 교육 주간으로 정하였다. 가톨릭 교육에 대한 의식을 높이고 이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마련하는 기회로 삼고자 한 것이다.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 무엇보다도 교육이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교회는 이 주간에 가톨릭 정신에 따른 교육과 행사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도록 돕는다.

 

1독서<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3,9-15,20

사람이 나무 열매를 먹은 뒤, 주 하느님께서 그를

9 부르며,“너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셨다.

10 그가 대답하였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11 그분께서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너희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하고 물으시자,

12 사람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13 주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너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하고 물으시자, 여자가 대답하였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

14 주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너는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에서 저주를 받아, 네가 사는 동안 줄곧 배로 기어 다니며 먼지를 먹으리라,

15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20 사람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하였다. 그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 사람은 자기 아내 이름을 하와라 하였는데, 그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원죄 없으신 성모님이 계시니 하와가 죄를 지어서 쫓겨난 우리들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모님이 바로 우리들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복음<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25-34

그때에

2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라나가 서 있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27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고 말슴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28 그 뒤에 이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이르어지게 하시려고 목마르다.”하고 말씀하셨다.

29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듬뿍 적신 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꽂아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대었다.

 

30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31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32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목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33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34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서 주해(해제.역주 이영헌 신부님)

25

네 군인과 대조하여 네 여인이 의도적으로 서술된 듯하다. 군인들은 예수의 십자가를 감시하는 반면에, 여인들은 참고 기다리면서 지켜보는 모습이다. “그분 어머니의 자매는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 살로메를 가리키는 듯하다.

 

27

십자가상 예수가 어머니 마리아와 사랑하시던 제자에게 말한 이 두 마디는 간곡한 당부의 특성을 지닌다. 표면상 우선 죽어가는 아들로서 어머니에 대한 격정이 시사된다. ,“애제자는 지상 아들 예수를 대신하고 마리아는 그 제자의 어머니 관계를 가지도록 예수는 마리아의 애제자의 일치를 원하고 당부한다. 하지만 요한복음 전체 맥락에서 보면 예수의 이 원의의 당부는 더 깊고 구체적인 의미를 시사한다.

 

부인이란 호칭은 카나 혼인잔치에서도 보았듯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독특한 관계를 신학적으로 뜻한다. 카나 혼인잔치에서 마리아는 예수로부터 오는 구원을 찾고 기다리며 또한 다른 사람들을 대신하여 예수의 선물을 청하는 자상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마리아에게 예수는 포도주를 선물함으로써 마리아의 청이 이루어졌다.

 

이 사건을 저자는 표징으로 표현했다. 따라서 마리아의 청이 혼인잔치에서 표징적으로 이루어졌다면 이제 그 청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시사된다. 즉 마리아는 예수 자신의 애제자를 아들로 맞아들여 함께 머물고, 그 아들은 어머니의 청을 중재하고 예수가 남긴 것을 계속 드러내 보일 것이다. 예수로 인해 맺어진 이 모자관계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예수의 그 공동체가 비롯된 어머니의 품안으로 상기시키려는 의도가 있을 수 있다. 즉 그리스도인은 마리아 안에서 메시아적 구원을 기다리는 자라는 뜻이 시사된다.

 

마리아가 구원을 찾는 자들을 대표한다는 관점은 예수의 내적인 것을 직접 들들 수 있을 만큼 신뢰받은 제자요 예수의 계시를 설명하도록 부름받은 신앙인이며 동시에 믿음으로 깨달은 자다. 즉 인간을 위한 예수의 자기계시와 구원계시, 곧 인간을 위한 예수의 자기계시와 구원계시 곧 예수의 복음을 중재하고 설명하는 제자다.

 

따라서 애제자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어머니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마리아로 하여금 어머니 역할을 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맥락 가운데 애제자가 주께서 오실 때까지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말도 유의해 볼 만하다. 그러므로 십자가상 예수의 이 말은 자기계시의 내용이 널리 지속적으로 전파되어 결실을 맺도록 바라고 돌본다는 의사표명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애제자는 구원의 문을 연 마리아와 함께 그 증인으로 언급된다.

 

그 시간부터는 예수가 지상에서 아버지께로 가는 시간을 가리킨다.

 

자기 집에 모셨다란 직역하면 그 제자는 그분을 자기 것들 안으로 받아들였다”. 단순히 을 가리키기보다 정신적 의미로 소유를 뜻한다. 그 제자는 예수의 어머니를 영적 공간 안으로 맞아들였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28

예수의 십자가 처형 장면과 연결짓는 표현이다. 동시에 예수의 마지막 사건이 아직 덜 이루어졌음도 시사된다.

 

예수는 이 세상에서 부여받은 임무를 이미 완성했다는 것을 뜻한다. 원문에 따르면 끝까지 행하다라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다.예수가 내적으로 미리 안다는 표현은 요한복음의 그리스도상에 속한다. 특히 수난사에서 예수의 이런 모습은 죽음의 시간을 알고 있다는 의미로 더욱 돋보이게 묘사된다. 여기서도 그런 맥락 가운데 예수의 모습을 묘사한다. 문맥상 예수의 인식은 예수 자신의 길에 대한 인식이요, 동시에 예수 자신의 과업에 대한 인식을 구체적으로 가리킨다.

 

성경(말씀)이 이루어진다는 표현과는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성경 말씀 전체가 완전히 마지막으로 다 이루어진다는 질적 의미가 강조된다.

 

29절의 식초와 함께 생각할 때, 이 짤막한 말은 시편 22,16보다 오히려 시편 69.22와 더 관련되어 있다. 십자가상 예수의 육체적 갈증은 지독한 고통이요 쓰라린 슬픔이다. 하지만 목마르다라는 표현은 “()이루어졌다라는 예수의 마지막 말과 연결되어 더 깊은 의미를 시사한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의 음식은 자신을 파견하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다 이루는 것이다. 또한 예수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을 마셔야 한다.

 

따라서 배고픔과 갈증은 아버지의 뜻을 끝까지 다 이루고자 하는 갈망의 형상어에 속한다. 그러므로 목마르다란 예수 자신이 수난과 죽음의 잔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다 마시겠다는 원의를 표명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가 식초를 받았다는 표현도 바로 이 점을 더욱 강조한다.

 

가난한 서민층이 마시는 신 포도주나 물과 섞어서 마시는 신맛나는 강한 청량제를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는 시편 69.22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쓰디쓴 음료를 가리킨다. 이 음료는 의식적으로 받아들인 죽음의 고통에 대한 하나의 형상어다.

 

우슬초는 솔잎처럼 가는 잎사귀가 많이 달린 식물로서 특히 어떤 액체를 뿌리거나 바를 때 많이 사용된다. 원전에는 우슬초이 아니라 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0

예수 자신이 지상에서 수행해야 하는 일을 다 이루었다는 뜻이다. 예수는 아버지로부터 받은임무를 끝까지 완수하는 이로서 죽음을 맞이한다.

자신의 임무를 지상에서 다 완성한 예수는 평화로이 의식적으로 아버지께로 간다. , 예수의 승리를 시사한다.

 

여기서 은 성령이 아니라 예수의 인간적 곧 심령이나 생명력을 가리킨다. 예수가 을 아버지께 넘겨주었다는 것은 예수 자신이 죽음을 적극적으로 또한 의식적으로 맞이했음을 뜻한다. 즉 예수는 죽음의 운명을 아버지로부터 받아들였고 또한 아버지께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31

해방절 준비일을 가리킨다. 그 다음날이 안식일이나 금요일에 해당한다.

해방절과 안식일이 겹치기 때문에 중요한 축일이라는 뜻이다.

유다인들의 규정에 의하면,기둥에 처형된 자의 시체는 축복의 땅을 더럽히지 않도록 당일 저녁이 되기 전에 반드시 치우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특히 안식일과 관련짓는다. 아마도 안식일로 인해 시체 치우는 일이 뒤로 늦추어질 가능성을 시사한 듯하다.

 

유다인들은 형집행을 빨리 마무리짓고자 한 것이다. 저자는 유다인들이 예수의 시체를 십자가상에서 되도록 빨리 치워 버림으로써 유다인들의 왕으로서 공포되지 않기를 원했다고 할하고자 한 듯하다. 로마인들은 서민들의 범법행위를 막기 위해 처형된 자의 시체를 은종일 기둥에 그대로 두었다.

 

여기서 유다인들은 특히 대제관들을 가리킨다.

다리를 부러뜨리는것은 죽음을 앞당기기 위한 일종의 처형방법이었다.

다리를 꺾는 일도 예수를 중심으로 묘사된다.

 

34

그리스도인들의 전설에 의하면,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군인의 이름은 론지노다. 이 이름은 그리스어 롱케(“이라는 뜻)에서 연유된 라틴어 음역인 듯하다. 그리고 공관복음에서 언급된 백부장”(마르15.39//)과 동일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예수의 죽음을 눈으로 보고서 다리를 꺾지 않는 대신 창으로 찔러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옆구리보다는 심장을 찌른 것이 더욱 이치에 맞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옆구리의 상처는 부활한 예수의 중요한 표적으로서 언급된다.

 

다양하게 해석되는 구절이다. 예수의 죽음을 구원적 의미로 보면서 제2의 아담인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는 교회 또는 성체와 세례 성사의 상징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이에비해 예수의 죽음에 대한 사실 확인과 보증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여기서도 두 견해로 나뉜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가현설에 대한 반박적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다.

 

다른 하나는 예수의 분명한 죽음에 대한 사실적 확증으로만 해석하는 견해다. 이 견해는 예수의 역사적 수난 보도 차원에서 볼 때 가장 타당하다. 그러나 목격증인의 증언에 대한 진실성과 증언의 목적어나 의도가 언급된 대목과 함께 고려할 때, 상징적이고 신학적 의미가 배제도힐 수는 없다.

 

하지만 예수의 수난사는 어떤 기적 보도와는 거리가 멀고, “피와 물이 나온 것은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결과를 묘사한다. 즉 예수가 십작가상에서 분명히 죽었다는 확증이 당시 사람들의 시각에 따라 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은 피와 물이 절반씩 섞여 구성되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자연적 사건 과정으로서 예수의 수난사 보도 가운데 언급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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