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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하늘 양식이 우리 안에서 만들어 내는 것, 용서 (마태복음 6:12-13)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6-17 조회수4,298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6. 17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도란도란글방

 

 하늘 양식이 우리 안에서 만들어 내는 것, 용서

(마태복음 6:12-13)

12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13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

 

이제 주의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 내용들은 전부, 앞에서 말한 하늘 양식(糧食)인 그 이라는 떡을 갖게 되었을 때에, 성도(聖徒)에게서 나타나는 그런 현상들과, 또 이루어지게 되는, 성취(成就)되는 그런 현실들을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용서에 관한 내용만을,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앞서 공부한 바에 의하면, 주님은 모든 율법을 살인하지 마! 간음하지 마! 거짓증거하지 마!’의 셋으로 축약(縮約)을 해서 설명을 해 주신 후에, 그 모든 것을 올바로 이해(理解)해서, 마음으로 간직하고, 그것을 이웃에게 흘려 줄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아가페다라고 말씀하셨죠? 그게 사랑이야! ‘에스카톨로스 코드란테스.’ 그 넷의 마지막, 그 사분의 일, 우리가 해야 할 그것을 아가페, 사랑이라고 했잖아요, 그죠?

그리고 으로 완성된 자들이 의 존재, 그 사랑을 하는 그런 존재로 살게 된다고 하셨죠. 그러면 그것이 바로 하느님이 원하시는 온전(穩全), 완전(完全)’이다. ‘델레이오스(Teleois)라고 그렇게 말씀해 주셨어요. 그래서 5장 마지막을 하느님이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해야 된다.’ 그런데 어떻게 완전해져야 되느냐? 그걸, 모든 율법을 사랑, 그 넷으로 이해하여, 마음으로 가지면, 그걸 완전이라고 해줄게 이렇게 이야기했단 말이에요.

하느님의 어떤 도덕적 속성, 이런 것들을 닮아가는 게, ‘완전(完全)’이 아니란 말입니다. ‘완전의 비스무리하게가 아녜요. 그저 완전해라 그랬다니깐요. 닮아가라 그러지 않고. 그러고는 그런 성도의 역사 속 현실, 그것을 이제 프로슈코마이(proseucomai), 기도라는 것을 예로 들어서 다시 풀어 주는 거예요. 그게 주의기도문(主祈禱文)입니다.

그러니까 5장 앞에 그거, ‘그 내용들을 이렇게 떡으로 너희들이 갖게 되면, 이렇게 흘려주게 될 거야, 그리고 너희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실(現實), 성취되는 그런 현실은 이런 거야라고 설명해주는 게 주의기도문이에요. 그리고 그걸 통틀어 그냥 기도(祈禱)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깐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기도는 성경이 말하는, 그리고 하느님이 원하시는 그런 기도는 사실은 아닌 거죠.

 

성도는 그 사랑으로 완성이 되는 말씀을 양식으로 받아서, 그 하늘들 안에, 아버지를 모신 자가 되는 것이며,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이 되는 거죠? 그래서 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하늘들그러니까 호 우라노스’, 우리가 하늘들이 되면, 그 안에 그 진리(眞理)라는 아버지가 계시는 것이고, 그 아버지가 우리를 아들로 낳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 하늘들 안에, 그 아버지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고, 그리고 그것이 그 이름이, 그 말씀이 거룩하게 되는 거죠? 그건 다른 말로, 그 말씀으로 깨끗하게 해주세요. 라는 거죠. 그건 이미 우리에게 일어난 현실이죠. 그 말씀, 그 진리로 우리는 깨끗한 자, 그게 하기오스’, 성도(聖徒)라는 단어가 그 뜻이거든요. 깨끗한 자, 거룩한 자가 이미 됐단 말이죠.

그리고 그 상태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그 섬김으로, 하느님이 우리를 말씀으로 섬기잖아요? 그 섬김을 받는 나라가 되는 거고, 내가! 바실레이아(basileia)’섬기다라는 뜻이란 말이에요. 하느님이 말씀으로 나를 섬겨주면, 내가 나라가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늘의 뜻이 땅인, 흙인 나에게서 이루어지는 거란 말이에요.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진정한 영의 양식으로 받아먹게 되면, 우리에게서 일어나게 되는 현상과 이루어지게 되는 현실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들입니다. 그냥 다 같은 이야기예요. 본문 12절에 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라는 청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하늘의 양식을 올바로 받아먹게 되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용서(容恕)’라는 현상이라는 이야기예요. 용서(容恕)’, 그게 구원의 핵심(核心) 아닙니까? 용서. 그런데 이 구절을 원문으로 보면요, 죄라는 단어가 하마르티아(hamartia)’가 아니라, "오페이레테스라는 단어로 씌었어요.

 

신약성경에서 죄라는 단어는 거의 하마르티아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단어의 의미는 과녁을 벗어나다,’ ‘제 짝이 아니다,’ 그랬죠? 그 단어 자체가, 과녁을 벗어나다는 뜻도 있지만, ‘라는 부정 접두어에다가 메로스,’ ‘메로스가 창세기로 가면 하느님께서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고 했을 때에, 쩨라(צלע)’라는 단어가 갈비뼈가 아니라, 부분이에요. 반쪽. 이런 뜻이거든요. 그것이 메로스라는 단어인데, ‘하고 메로스예요. 그 짝이 아니다. 그러면 죄예요 그것이. 그 단어가 하마르티아거든요.

그러니까 내 짝을, 내 남편을, 엉뚱한 것으로 붙들어서 나하고 붙여버리면, 그게 예요. ‘하마르티아란 말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엉뚱한 대상(對象), 그 대상을 내 남편으로 붙들어 버리면, 거기에서 발생되는 엉뚱한 열심히 있어요. 그러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진리(眞理)로 받지 않고, 율법으로 받아 버리면, 그래서 그걸 내 남편으로 삼아 버리면, 그 율법은, 나를 열심히 어떤 행위를 하게 독려(督勵)를 해준다니깐요.

그리고 독려뿐만 아니라, 협박(脅迫)을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그렇게 그 남편에 의해 강요(强要)된 행위를 내가 하게 되면, 그 모든 것들을 다 죄()라 그래요. 그게 하마르티아란 단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죄는, 하느님이 아닌, 그 다른 대상, 내 짝, 진짜 짝이 아닌 다른 짝, 그걸 내게 붙여서 그걸 숭배(崇拜)하는 것이거나, 거기에서 발생되는 엉뚱한 과녁을 향하는 그런 열심, 이런 걸 죄라 그래요.

그러니 그것이 세상에 속해있는, 그러한 상태에 대한, 인간 실존의 현주소, 이게 하마르티아예요. 죄란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늘을 설명해 주시기 위해, 우리의 인식 수준에 맞는 아래의 것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 있죠? 그거, ‘호 코스모스, 세상 아래의 모든 것들이 다 그거란 말이에요. 그걸 그냥 표피 그대로 인식을 하므로 해서, 잘못된 짝으로 그걸 취해버리거나, 그 표피적 말씀을 몸으로 열심히 행해 버리면, 그걸 죄라 그런단 말이에요.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죄는, 그것만이 아녜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죄는, 그것과는 다른 죄예요. 오늘 본문의 죄는 하마르티아가 아니라, ‘오페일레마타 (opheilemata)’, 오페일레마타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단어는 이에요. 빚 채무자가 진 빚 있지요? . 그 빚이라는 의미와 함께 마땅히 해야 할 의무(義務)라는 뜻도 있어요. 마땅히 갚아야 할 빚을 갚지 않거나,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죄라는 거예요. 갑자기 율법(律法)으로 돌아가는 것 같죠? 설마 그런 이야기겠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마땅히 해야 할 어떤 일은 그런 율법적인 행위를 말하는 게 아녜요.

 

아무튼 이 신약성경이 쓰여질 당시의 사회문화적 관습을 고찰해보면, 당시의 유대인들은 일하지 않는 것, 그리고 마땅히 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행하지 않는 것을, 죄의 범주(範疇)에 넣었던 것은 분명해요. 그래서 주님께서도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라고 이야기한 것이 일하지 않는 자는 못 먹는 자라는 뜻이에요. 주님은 그 문제, 오페일레마타의 문제를, 해결(解決), 그 문제에 대한 해결을 말씀하시고자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성도가 지니고 있는 그 빚, 그걸 지금 여기서 죄()라고 하니깐, 다른데서는 빚이라고 번역을 하거든요. 그런데 여기서는 굳이 죄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둘 다 같은 뜻이에요. 그걸 먼저 확인해야 되겠죠? 그 빚, 그것을 갚지 않고, 그것에 대한 의무를 행하지 않으면 죄라 그러니까, 반드시 그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규명하고 가야 된다 말이에요.

 

(로마서 1:13-15) 13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찾아 가려고 여러 번 계획을 세웠으나 지금까지 길이 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다른 이방인들에게서와 같은 전도의 성과를 여러분에게서도 거두려고 했던 것( 빚진 자)입니다. 14 나는 문명인에게나 미개인에게나 또 유식한 사람에게나 무식한 사람에게나 똑 같이 전도할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15 그러므로 로마에 계신 여러분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나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바오로가 빚진 자로서 갚아야할 빚이 뭐라는 거예요? ‘복음 전하는 거라구요. ‘오페이레테스(Opeiletes)’. 바오로는 반드시 그 빚을 갚아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15절에서, 그 빚이 복음의 빚이라고 분명히 밝혀줘요. 그러니까 성도는 반드시 복음의 빚을 갚는 자로 살게 되어있다는 그런 말이에요.

오늘 본문에 그 잘못을 용서하시고’, 압헤스도’, 앞에 동사들과 마찬가지로, 그 시제가 과거 명령형이에요. 그건 우리에게 반드시 완성이 될 수밖에 없는 어떤 것, 아니 이미 완성된 그것을 청유하는 거라 그랬죠? 그게 과거 명령형 시제라고 그랬잖아요? 따라서 성도는 반드시 빚을 갚아 용서를 전해주는 삶을 살아야 되는 거예요. 아니 살게 되어있다는 그런 말입니다.

바오로는 진리를 전해 받아서 그것을 마음으로 받은 자신을 빚진 자라고 표현을 했어요. 그리고 우리가 요즘 공부하고 있는 로마서 8장에서는 이렇게도 말을 합니다.

 

(로마서 8:12-13) 12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과연 빛을 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빛을 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육체를 따라 살 의무는 없습니다. 13 육체를 따라 살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

 

잘 보세요.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다.’ 그러면 당연히 빚을 갚아야 되는데, ‘육신으로 빚을 갚으면 너희는 반드시 죽는다.’ 이런 말이에요. 육신으로 빚을 갚으면 너희는 반드시 죽는다. 그러니 영으로 그 육신의 빚 갚음, 그것을 죽여라 이런 말이에요. 그런데 영은 프뉴마’, 올바른 말, 깨끗한 말, 진리의 말씀을 가리키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게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그냥 너무 쉽게 간과(看過)해 버리는 것 같아요. 여러분, 선악구조 속의 아담은요,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서 스스로의 자원과 열심과 애씀과 노력으로, 자신들의 몸을 활활 태우는 삶을 살게 되죠. 그런데 주님은 뭐라 그러냐하면, 너희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꽝이다.’ 이렇게 이야기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모든 인간이 자기의 그 빚, 그러니까 구원을 얻어내기 위해 자기의 몸을 활활 태워요. 이게 빚 갚는 거예요. 모든 인간들이. 안 그러면 불안해서 죽죠? 그래서 그들은 율법의 행위로, 자신들의 빚을 갚으려고 안간 힘을 쓰게 되어 있어요. 아니 인간들이 그거 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그게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보편적 아담들의 속성입니다.

그렇게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은 율법의 빚을 진 자로 평생을 살 게 돼요. 그래서 기부로, 선행으로, 선교로, 인격의 도야(陶冶), 자신의 빚을 갚아 나가요. 이걸 다 갚으면 구원에 이르겠지 라는 막연한 추측을 갖고. 그리고는 그러한 것들이 조금씩 눈에 보이게 성숙한 모습으로 발전이 되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괜찮은 평가를 받게 되면, 마치 채무자의 빚이 조금씩 탕감 되어가듯 좋아해요. 이 빚을 안 져본 사람은 몰라요. 그 기분이 어떤지. 그렇게 모든 인간들이 빚쟁이처럼 살아요. 그게 율법주의의 세상이에요. 거기서는 끊임없는 섬김, 빚 갚기의 행위만 난무(亂舞)하죠.

 

그런데 어느 날 하느님께서 친히, 당신의 빚을 갚겠다고 내려오셨어요. 땅으로. 모든 인간들이 자기들의 빚을 갚겠다고 열심히 채무자의 삶을 살고 있는데, 채권자(債權者)인줄 알았던 그 신이, 그 분에게 우리 모든 인간은 빚을 갚아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채권자에게 열심히 빚을 갚고 있었는데, 채권자가 내려오더니, ‘내가 채무자(債務者)’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내가 너희들에게 빚을 갚아야지, 네들이 나에게 빚을 갚으면 그거는 진리(眞理)가 아니다라고 이야기를 했단 말입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려 온 게 아니라, 내가 섬기러 왔다라고 이야기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자꾸 네들이 나를 섬겨, 내가 너희들을 섬기는 게 하느님 나라야!’ 그랬단 말이에요. 내가 너희들을 빚을 갚는게, 하느님 나라의 통치(統治) 방법이야. 하느님 나라는 너희들이 열심히 일해서, 나에게 빚을 갚음으로 말미암아 운영되고 통치되는 곳이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쏟아부어주는 그런 곳이 하느님 나라다라는 거예요.

그리고는 당신에게 구하라고 하세요. 그 단어가 아이테오(ατέω)’빚을 갚으세요.’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나에게 구하라는 건 뭐예요? ‘내가 채무자(債務者)’라는 거예요. 구하라라고 시킨 건. 그러면 내가 갚으리라!’ 그랬단 말이에요.

인간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것은 당연한 거예요. 우주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이 땅의 아담들은 피조물(被造物)이 신()에게 빚을 갚는 것이 마땅하고 올바른 신앙의 행위라고 철석같이 믿고 행해 왔어요. 그래서 모든 종교(宗敎)들이 그런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 분은 섬김의 대상(對象)! 두려움의 대상! 그거 안 갚으면 나에게 해코지 할지도 모르는 그런 분! 모든 종교의 신이 다 그렇죠, .

그런데 신이 내려오시더니, 내가 너희에게 빚을 갚는 것이 진리이거늘, 왜 너희가 나에게 빚을 갚으려고 그래? 그게 교만(驕慢)이다,’ ‘휘브리스(hybris)’, 너희들이, 너희들의 자리를 떠난 거야!’, 이렇게 이야기했단 말이에요. 그걸 휘브리스라고 그래요, 성경이 그걸 교만이라고 번역했다니깐요. 너희들이 아무리 열심히 무언가를 만들어 내어서 나에게 바친다 할지라도, 너희들이 심지어 예수와 방불한 자처럼 성숙해서 내 앞에 온다 할지라도, 이 세상 것은 내가 안 받는다는 거예요.

하느님이 대노(大怒)하셨어요. ‘이 독사의 새끼들아,’ 욕을 하시면서. 당연히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아담들의 속성은, 그 신에게 빚을 갚고 섬기는 건데, 하느님이 내려오더니 우리에게 빚을 갚는다하네? 그게 은혜(恩惠)잖아요? 그러니까 그 은혜를 이해할 수 있는 아담이 한 사람도 없었다니깐요. 그런데 이 역사 속 아담들 중에, 그 말의 뜻을 알아먹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오순절 이후부터, 그죠? 오십 이후부터. 희년(禧年)이죠.

 

우리는 하느님께 드려서 갚을 수 있는, 그런 채무변재의 능력이, 전혀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깨닫는 자들이, 이제 나타나기 시작한 거예요. ‘! 이걸로는 빚을 갚을 수가 없는 거구나,’ 이렇게.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께서 창세전부터 약속하신, 그 생명의 말씀을 받아먹고, 살아나기 시작했어요.

하느님이 주마하셨던 그 약속의 생명을, 마치 채권자(債權者)들처럼 거저 받아먹기 시작했단 말이에요. ‘준다고 했으니 주세요!’라고, ‘아이테오(aiteo)’하니까, 그 분이 주셨다니깐요. 진짜로 빚을 갚아 주셨단 말이에요. 그게 약속 아닙니까? 내가 원하기도 전에, 그 분이 주마하고 약속하신 그걸, 나에게 주면, 그 분이 나에게 빚을 갚는 거예요. 먼저 준다고 그랬으니까.

 

그게 하늘에서 내려 온 생명의 양식이었어요. 그 양식을 잘 받아먹고 나니까, 진리의 말씀을 복음으로 받아먹고 나니까, 그동안 자기가 갚아야만 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그 율법의 빚이, 하나하나 탕감(蕩減)되어 나가기 시작했어요. ‘, 이것도 아니네, 이것도 나에게 갚으라고 한 게 아니었네, 이 제사도 아니었네, 이 안식일 지킴도 아니었네!’ 이렇게 하나하나 탕감이 되기 시작한다 말입니다.

내가 갚아야 할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에게 쏟아 부어주시는 당신의 그 약속, 그 빚을 내가 받아야 살 수 있는 것이라는 진정한 자유가 그들에게 퍼부어진 거예요. 그것이 바오로가 로마서 812절 이하에서 말하고 있는 영으로써’, 진리의 말씀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 영의 말씀에 의해 내 빚이 이제 모두 갚아지는 결과가 나타나겠죠? 물론 율법의 빚이요.

내가 이거 안하면, 하느님이 날 죽일지도 몰라, 나에게 벌을 내릴지도 몰라, 해코지 할지도 몰라라고 열심히 행했던 그 율법의 빚! 이것이 진리의 말씀이 내게 들어오자, ‘! 아니네, 하느님이 나에게 그걸 요구 하신 게 아니었구나!’ 라고 하나하나 알게 되면, 나중에는 완전히 탕감될 거 아녜요. 그걸 용서(容恕)라고 한다니깐요.

그렇다면 일차적으로 내가, 빚을 탕감해 주어야 하는, 바오로가 자기보고 빚진 자라고 그랬잖아요? 그럼 내가 빚진 자예요. 그러면 내가 누군가에게 빚을 갚아, 그 빚을 탕감해 주어야 되는데, 일차적으로, 내가, 빚을 갚아 탕감(蕩減)해 주어야 할 대상이 누구예요? 납니다. ‘!’

내가 생명의 진리를 양식(糧食)으로 갖게 되면, ‘가 제일 먼저 그 빚을 탕감(蕩減) 받아요. 그래서 오늘 본문이,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인 거예요. 이 문장을 헬라어 원문으로 다시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하는 용서가 일어나게 해주세요, 우리 안에서.

우리의 그 죄들을.’ 다시. ‘우리의 그 죄들을 당신이 용서하셔서, 우리 안에서, 자유가 일어나게 해주세요.’ 이런 말이에요. 그리고 역시 우리가 우리를 용서합니다.’ ‘카이로 연결되어 있거든요. 우리가 우리를 용서합니다. 우리의 그 죄들을.’ 이런 말이에요.

이 문장을 아람어로 보면요,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합니다.’라는 그 어구가, 완료시제로 기록이 되어있어요. 아람어에서 완료형은 동시적인 것들을 가리키거든요. 예수님이 아람어로 말씀하셨을 거 아녜요?

그러니까 그리로 가서, 확인을 해 보면 금방 안다 말이에요. 따라서 이 구절은 이걸 먼저 할 테니까, 저 것을 해주세요라는 이런 순서적 청원이 아니라, 앞에 것과 뒤의 것이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얘기예요. 그래서 완료형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거죠.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나에게서 빚을 갚으셔서, 나의 빚이 탕감이 되면, 나는 나를 용서하고 있고, 용서할 수 있고, 나의 죄에서도 완전히 자유롭게 풀어 날 수 있다는 그런 말이에요.

 

어떠십니까? 우리 자신을 용서(容恕)했나요? 그게 구원 받은 자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깨닫게 되면, 제일 먼저 용서를 해야 하는 존재가 란 말이에요. ! 그래서 그가 자유로워지는 거예요. 그러면 그는 그 자유를 갖고 다른 이들에게 그걸 쏟아부어, 흘려주어, 그 용서를 그들에게 전해 주는 거예요.

그래서 마치 내가 그를 용서하는 것처럼, 성경이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니까요. 나는 단지 나를 용서한 그 말씀을 흘려 준 것뿐인데. 그러니까 우리자신이 용서하잖아요? 그러면, 정말 그 어디나 하늘나라예요. 늘 행복하고, 기쁘고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그건 미친놈이고. 그 자유로 살 게 된단 말이에요.

그 율법의 빚에서 풀려 난 자로 살 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하느님이 지옥에 보낸다 할지라도, 거기서 그 자유로 산다니깐요. 거길 천국(天國)이라고 그래요. 그 유치하게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게 다 구비되어 있는 그런 곳을 천국이라고 생각하면, 여러분은 아직도 하느님 말고 재물을 섬기는 사람들이에요. 세상을 섬기는 것이에요. 그것이요.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없어요. 물론 좋을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좋음이 아니라니깐요. 상상할 수도 없어요. 그래서 하느님께서 그 하늘을 텅 비워놓은 거라니깐요. 네들이 상상하는 그런 하늘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보편적 인간들이, 이 율법의 빚을 갚기 위해서, 일평생 그 짐을 지고 수고와 환란 속에서 사는 빚쟁이들이라면, 성도는 하느님의 그 빚 갚기의 섬김, 그 아가페, 사랑이라고 그러죠. 그 하느님의 빚 갚기, 그 섬김, 그 사랑에 의해서, 자신의 빚을 탕감 받고, 다른 말로, 자신의 빚을 스스로 탕감해 주고, 자유롭게 풀려난다 말이에요.

 

뭐 추수감사절, 이런 성경에 있지도 않은 것들, 뭐 성탄절, 부활절, 이럴 때 마다 이거 목돈해서 바쳐야 되는 거 아녜요? 교회의 대목 아녜요? 그러니, 없는 것들을 자꾸 만들어 낸다니까요, 교회에서. 교회에서 그거 없으면, 큰 교회는 재정이 왕창 흔들리게 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다하고 있으면 그거 안하면, 대개 불안하다니깐요. 혹시 하느님이 나만 미워하시면 어떻게 하지? 이렇게.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런 거 없어요. , 하느님이 절기 월삭 이런 것 갖고 아직까지도 논하는 놈들은 전부 저주받은 놈들이다 그랬는데, 그거는 다 찢어버린 것 같아! 그 사람들 성경책에서.

그러니까 성탄절, 그 날은 태양신의 축일이었다니깐. 그 날을 왜 우리가 기념하냐고요? 그리고 그 예수는 나를 설명하기 위해,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아들의 대표인데, 나를 축하해야죠, 그럼. 왜 그 예수가 오신 것을 축하해요? 답답해 정말.

, 그렇게 우리는 자신을 용서하고, 자신의 빚을 탕감해주고, 또 빚을 갚으세요! 하고 입을 벌리고 있는 이러한 이웃들에게, 그걸 전해주어, 또 빚진 자로서 내 빚을 탕감 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채무자는 거룩한 채무자예요. 거룩한 빚진 자! 그래서 바오로가 너희들은 서로 서로 빚지면서 살아!’라고 이상한 말을 한 거예요.

 

(로마서 13:8-10) 8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사랑의 빚)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라는 계명이 있고 또 그 밖에도 다른 계명이 많이 있지만 그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는 이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10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

 

만약에 다른 이에게, 너희들이 그 말씀을 그렇게 다른 이들에게 그 빚을 탕감해 주는 말로, 용서의 말로 전해주지 못하면, 너희들은 그 이웃에게 악을 행하는 거야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랑이 이웃에게 어떻게 악을 행하니? 그러잖아요? 사랑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하느님의 진리의 말씀을, 서로 흘려주는 것을 이야기해요. 서로서로 빚진 자로 사는 거예요. 이것이. 그러니까 빚진 자! 이게 나쁜 게 아녜요. 성경에서 말하는 빚진 자는.

서로가 서로의 율법의 빚을 탕감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게 성도란 말이에요. 서로서로 빚을 갚는 형국, 그것이 진리 안에서의 교제라는 거예요. ‘코이노니아.’ 이게 서로서로 빚진 자로 사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주어서, 율법의 빚을 더욱 가중시키는 자들은, 이웃을 사랑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게 악을 행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진리이신 하느님을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올바로 깨달아서, 그것이 하느님 사랑이죠,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이다, 그랬잖아요? 그러면 하느님을 사랑하라 라는 말은 그 사랑이신 하느님을 그 분이 어떤 분인지 내가 잘 깨달아 알면, 그 하느님을 사랑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것이요.

그런데 엉뚱하게 오해해가지고, 그 분을 나에게 빚을 받는 채권자로 만들어 버리면, 그건 하느님을 모독(冒瀆)하는 거라니깐요. 열심히 섬겨서 하느님을 모독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느님이 그렇게 분노(忿怒)하셨던 거예요. 그렇게 열심을 부려 제사 드리고, 열심을 부려 율법을 지켰던, 그 바리새인들에게 대노하셨잖아요. 왜 나를 모독해?

, 그렇게 그 하느님을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올바로 깨달아서, 그것을 구하는 자들에게 잘 전달해주면, 그것이 나에게 빚을 갚으세요! 하는 자들이니까, 내 빚을 갚는 일일 뿐만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율법의 빚도 갚아 주는 거죠. 서로서로 빚을 갚고, 갚아주고 탕감해주는 그런 빚진 자, 거룩한 빚진 자들의 삶이라는 거예요.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빚 갚으심의 일인, 그런 자기 계시, 하느님이 자기를 계시하신 게, 은혜를 우리에게 흘려주시는 거고, 그게 생명의 말씀이고. 그렇게 빚 갚으심의 일인, 자기 계시, , 진리의 수혈을 통해서 우리의 빚을 탕감 받고, 하느님을, 내가 그 탕감을 받는 즉시, 나의 하느님은, 나에 대해서 채무자의 자리에서 내려오시게 되겠죠, 그죠? 그게 내가 하느님을 하느님의 자리로 돌려드리는 거란 말이에요.

그 분이 나에게 그 은혜를, 빚을, 약속을, 언약을 주셨어요. 흘려주셔서 내가 알았어, 깨달아 알았어요. 그걸 모르면 그 분은 나에게 있어서 영원한 채무자라니까요. 그런데 내가 받았어요. 받아서 해결이 됐어! 탕감을 받았어요. 그러면 그 때부터 그 분은 더 이상 나에게 있어서 채무자(債務者)가 이니라 하느님이란 말이에요. 사랑이란 말이에요.

그렇게 하느님을 채무자의 자리에서 해방시켜 드리며, 우리 자신을 용서하고, 그 용서의 말씀을 다른 이들에게 흘려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율법적 채무를 변제받게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도 다른 이들에게 또 거룩한 빚진 자가 되어서, 빚을 갚는 사랑의 매개체로 살게 만들어 줄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들을 성도라고 한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18:35) 35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의 죄를 자유롭게 풀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면, 이게 아피에미(aphiemi)’예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용서의 이야기예요. 이것이. 자유롭게 형제의 죄를 풀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하면, 하늘의 아버지께서도 너를 못 풀어준다는 뜻이에요. 바꾸어 말해서, 하느님 아버지의 그 빚 갚기에 의해서 진리의 말씀을 받고서, 그 용서를 받은 자는, 그 용서가 무언지 반드시 다른 이들에게 설명해 줄 수 있다는 말이에요.

그럼에도 형제에게 자신을 용서하고, 이웃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랑할 수 있는 그런 말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율법으로 얽어매는 말을 전해주는 자가 있다면, 그가 어찌 하느님의 그 은혜, 하느님의 빚 갚기의 그 은혜의 그 사랑을 경험한 자이겠느냐? 이런 말이에요.

네 이웃이 너에게 해코지 한 거, 그거 용서 안하면, 하느님도 너 용서 안 한 대. 그러니 이를 악물고 용서해 버리는 거, 하느님은 그런 거 원하는 거 아녜요. 그렇게 이를 악문 자들이, 천국에 몽땅 다 들어간다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들은 평생 거기서 이를 간다니깐요.

 

, 이 말씀이 어떤 말씀의 결론인 줄 아세요? 너희들이 각각 중심으로 형제들을 용서하지 못하면, 성부께서도 너희들 용서 안 해! 이게 어떤 말씀의 결론인 줄 아세요? 일만 달란트 빚진 자. 그런데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을 멱살을 잡고 감옥에 쳐넣어버린 그 어처구니없는, 그 어리석은 종의 비유, 천국의 비유, 바로 밑에 결론으로 붙어 있는 거예요.

일만 달란트라는 것은 고대시대 때 아주 상상을 불허하는 액수라 그랬죠? 한 국가가,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이 로마에게 일 년 동안 바쳤던, 나라가 바쳤던 조공이 800달란트니까, 일만 달란트를 개인이 어떻게 갚아요? 못 갚는 돈이라는 것을 그냥 예수님이 예로 들은 거예요. 그 때 당시의 사람들이 상상을 할 수도 없는 돈, 그 일만 달란트! 그런데 그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어떻게 빚을 졌는지 모르겠지만, 그 빚진 자가 채권자인 주인에게 뭐라 그래요?

 

(마태복음 18:23-25) 23 '하늘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려 하였다. 24 셈을 시작하자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 왔다. 25 그에게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왕은 '네 몸과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 고 하였다.

 

이게 하느님이 욥에게서 빼앗아간 겁니다. 그리고 그에게 진리 주신 거예요. 그가 이 땅에서, 이 역사 속에서, 가치라고 갖고 있는 그것들 다. 이런 말이에요. ‘그걸 다 팔면, 너는 나에게 빚 갚을 수 있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지금요. 그거 팔아봐야 얼마 된다고. 아니 자식, 마누라 팔아 봐야 얼마 받아요? 그런데 그거 팔면, 다 팔아 오면, 빚 면제해 줄 게 이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 주님이 부자 청년에게 너 네가 가진 거 다팔아, ‘프토코스 (ptochos)’, 가난 한 자들에게 주고, 그리고 나를 따라, 그러면 영생(永生)이야.’라고 이야기했을 때에, 다 팔아’. 값진 진주를 찾아다니는 진주 장사가 값진 진주를 발견하면,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걸 사죠? 그 때 그 말이에요. 이게. 다 팔아’, 네가 여태까지 빚을 갚겠다고, 네 소유로 갖고 있는 그 모든 율법적인 열매들, 다 팔아 내 빚 갚아! 이런 이야기예요, 이게. 그럼 갚을 거야라고 이야기 하죠? 그 때 그가 뭐라고 그래요?

 

(마태복음 1826-27) 26 이 말을 듣고 종이 엎드려 왕에게 절하며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곧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애걸하였다. 27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다.

 

여기 가엾게 여겨불쌍히 여기다, ‘스플랑크니조마이(Splanchnizomai)’라는 것은 주님께서 병자들의 병을 고쳐 주실 때 있죠? 이게 스플랑크니조마이불쌍히 여기신다, 자비로 여기신다는 거예요, 자비의 마음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이 거반 죽은, ‘강도만난 자를 불쌍히 여겨할 때도 그 단어예요. ‘스플랑크니조마이’. ‘탕자를 기다리던 아버지가 탕자가 돌아왔을 때, 그를 불쌍히 여겨’, 이것도 같은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불쌍히 여기다, ‘스플랑크니조마이는 하느님의 마음이에요.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마음! 불쌍히 여긴다니깐요, 그래야 살아요. 그렇게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이 그 종에게 임하면, 그 종의 빚이 그냥 거저 탕감되는 거예요. 그걸 천국! 하느님 나라의 섬김이라고 그래요. 구원은 바로 이런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탕감을 받았다고 하는 자가 동관을 만나는데, 동관이란 같은 주인을 섬기는 종, 이런 말이에요. 그런데 그 동관도 빚이 있었어요.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은 종이, 그 동관의 목을 잡았다, 그러지요? 프니고라는 단어가 숨막히게 하다, 질식시키다는 말이에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 호흡이라는 것은 생명입니다. 그리고 그 라는 단어 자체가 이란 뜻이에요. 소리, , 이런 뜻이죠. 그러니까 숨을 못 쉬게 질식시켰다는 말은, 그 내면에 이런 말이 숨어 있는 거예요. 약한 말로 그를 숨 쉬지 못하게 죽이는, 그런 형국(形局)인 거죠. 목을 잡았다.

자신은 이미 구원에 이르렀다고 자신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는 자들이, 상대방의 빚을 탕감해 주기는커녕, 잘못된 말로 그의 숨통을 막아 버리고, 율법의 감옥에 처넣어버리는 그런 작태를 에피소드화 해 놓은 거예요. 주인이 나를 용서했대요. 일만 달란트 탕감을 해주었대요. 그런데 또 다른 빚진 자를 만나서는, 그의 목을 졸라 감옥에 처넣어 버려요. 율법의 감옥에. 프니고라는 단어가 여기서 쓰였어요.

 

(마르코복음 4:7)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율법) 속에 떨어졌다. 가시나무들이 자라자 숨이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율법에 의해 기운이 막히다가 프니고예요. 이게 질식해 버리는 거예요. 율법은, 사람들의 그 생명, 호흡, 진짜 호흡인 프뉴마가 아니고, 가짜 호흡이기 때문에, 그들이 숨을 못 쉬고 질식해 버리는 거예요. 율법으로. 그게 프니고예요.

하느님의 말씀이, 호흡을 주지 못한다는 거예요. 숨을 쉬지 못해요. 생명을 주지 못하고, 그를 질식시켜 버려요. 죽여 버려요 오히려.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았다고 하는 자가, 그런 악한 말로, 빚진 자를 감옥에 처넣어 버린 거예요. 임금이 그를 뭐라 그러죠? ‘악한 종이라고 그래요. 아까 우리 바오로 이야기 속에서도, 악하다라는 말이 나왔었죠? 같은 말이에요. 그건 악한 거예요. 그게 악이라는 거예요.

 

아무튼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서, 씨로 간직한 사람은 반드시 자신을 용서(容恕)하고, 이웃들에게도 용서를 전하며, 그 빚을 탕감해주며, 그들에게 빚진 자로서의 자신의 빚도 탕감 받는, 그런 서로서로 사랑의 빚을 진 자들로 살아야 되는 거예요. 그게 안 되면 그는 악한 자예요. ‘포네로스(Poneros)’. ‘다만 악에서 구해주세요가 그 악()이에요. 그거 못하면 그 악에서 못 나오는 겁니다. 다 연결이 되어 있다 말입니다. 이 용서의 이야기가 왜 주어지게 된 거죠? 베드로 때문이에요.

 

(마태복음 18:21-22) 21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22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490? 베드로가 주님께 형제의 죄를 얼마나 용서해 줘야 하냐고 물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헵토 메쿤투케스 헵타’.(ἑβδομηκοντάκις πτά) 이 말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말이 아니라, 일흔, 70이라는 부사예요, 그건요. 그리고 칠(7)이라는 명사를 쭉 붙여 놓은 거예요. ‘칠십으로의 칠이라는 거죠, 굳이 번역을 하자면, 칠십이라는 성격의 7, ‘아피미(Aphiemi)’, 오늘 본문에 그 단어랑 똑 같아요. 용서해, 자유롭게 해줘!’ 이런 말이에요. ‘쉬게 해 줘!’

칠이라는 건 안식의 숫자죠? 창세기의 칠, 그 숫자 이야기 하는 거예요. 당시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 그 칠을 어떻게 지켜내고 있었어요? 율법으로 지켜내고 있었죠? 그 칠을 율법으로 지켜내고 있었다니깐요. (10)으로, 율법으로 칠을 알아야 되는데, 이 칠이라는 걸 십으로 이해를 하고 있는 거죠? 거꾸로 이해를 하고 있는 거예요. 율법을 통하여 안식에 이르겠다는 아담들의 욕망을 나타내 보여 주는 거예요.

그래서 칠로 안식이 됩니까? 칠이면 됩니까? 라고 물은 거예요. 그 행간을 보면, 마침 베드로가 일곱 번이요?라고 하니까 주님을 그걸 받아서, 당신의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너희들은 그 안식을, 그 칠을, 율법으로 지키고 있잖아? 그 칠은 안 된다는 거예요. ‘칠십으로의 그 칠이어야 된다고 하시는 거죠.

그런데 이들은 구약에 능통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이게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았다니깐요. 칠십의 칠 이라는 게, 칠은 이레니까. 하루, 이틀, 닷세, 엿세, 이레? 칠십 이레라는 말을 하신 거예요. 칠십의 칠.

 

성경에 나오는 숫자. 창세기에 칠(7)이라는 언약의 수, 안식의 수가 나오죠? 그런데 이거를 하느님이 우리에게 설명을 해 주어야 되는데, 이건(7) 우리가 몰라요 뭔지. 그 안식이 뭔지. 그래서 출애굽기에서 십(10), 십계명, 율법을 주시는데, 이것을 갖다가 다섯 개, 다섯 개로 설명을 해주고, 주님은 이걸 두(2)개로 또 축약을 해주고,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산상수훈에서는 이걸 셋(3)과 넷(4)으로 설명을 해주죠? 살인, 간음, 거짓증거(3), 그리고 그걸 완성하는 게 사랑! 넷이야(4), 이렇게 설명을 해준다 말이에요. 그래서 요게 되면 그게 칠(7)이다라고 설명을 해주신다 말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안 사람들이 12이라는 거죠, 그들이 아들이란 말이에요. 아들. 열둘(12)은 아들의 숫자니까, ‘벤 야민,’ 이게 오른 손의 아들, 아들의 완성이라는 거고, 열둘의 첫 번째는 누구예요? 르우벤! ‘르우에서 온 거니까, ‘아들을 봐라. 내가 이제 아들을 설명해 준다.’ 그래놓고 열둘(12), 마지막에 벤 야민, 이것이 아들이야.

그런데 그 아들이라는 단어가요, 이 단어가 송아지라는 뜻도 있어요. 황소의 새끼, 이런 말. 그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황소의 새끼, 이 송아지, ‘’, 이걸 잡았다는 건 무슨 말이냐 하면, 하느님이 그의 육()을 잡아서 죽여 버리고, 예수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해요. 황소의, 진짜 그 소, 하느님의 아들이니까. 그가 죽고 탕자가 살아나는 거거든요? 그거는 그 안에서, 그 탕자, 둘째를 죽여 버리고, 아들로 살려내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벤 야민, 오른 손의 아들, 아들의 완성, 이게 열둘(12)이란 말이에요. 열둘! 그렇게 아들이 되면, 이들은 이 십(10)으로 이 칠(7), 안식을 안 자가 되는 거죠? 그래서 십(10)으로 칠(7)을 안 자가 되면 (10×7), 이게 칠십(70)이 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열두지파가 나와서, 거기에서 70원로가 서게 되는 거고, 열두(12) 사도가 나중에 70으로, 70명이 아녜요. 거기 보면, 원문에 보면 그들을 70으로 보낸다, 그래요. 둘 씩, 짝으로. 70으로 보낸다, 그런단 말입니다.

그러면 이 70이라는 건 이 십(10)으로 칠(7)이 되는 거지, 이 칠(7), 안식을, 이 열(10), 이걸로 도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그러는 거예요. 용서(容恕)라는 거, 안식이라는 건, (7)입니까? 그가 알고 있는 건 율법(10)으로 칠에 당도하는 안식일을 열심히 지키는 그것 밖에 없단 말이에요. 베드로가 알고 있는 건.

그때 주님이 그 이야기를 받아서, 우리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우리 교회에게. 아니지, 그 칠(7)이 아니라, 칠십(70)의 칠(7)이지, 그래서 부사(70), 명사(78), 이렇게 쓴단 말입니다. 그러면 칠십의 칠! 칠십 이레가 뭔지 알면, 주님이 저 용서를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알게 되겠죠?

 

다니엘서 9장에 보면 칠십 이레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데, 다니엘서는, 유다가 BC586년에 하죠?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하고, 하필 바벨론이에요. 바벨론이 바벨이에요, 바벨론의 바벨. 거긴 탑이라는 말이 없어요 그냥 바벨이에요. 바벨론, 바벨 같은 단어입니다. 그 바벨론에게 유다가 망하고, 다니엘서가 그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있을 때 기록된 거죠? 거기는, 이 세상에 포로로 잡혀와 있는 우리 생각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의 왕들은, 느브갓네살이 다니엘한테 뭐라고 그래요? “내가 무슨 꿈을 꾸었다. 그런데 생각이 안 나, , 내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도 맞추고, 그게 무슨 뜻인지 설명도 좀 해줘”. 그래요. 그런 황당한 요구가 어디 있어요? 그 말은, 꿈이라는 게,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면, 꿈이라고 그러죠? 그래서, 성경이 꿈, 환상, 그러면 우리에게 허락된 이 유한한 세상, 우리의 인생을 이야기해요. 그걸 꿈이라고 해요. 그런데 성령이 임하면 환상을 본다, 그러죠? 그게 뭔지를 안다는 뜻이에요. 이상한 걸 본다는 뜻이 아니라.

요엘서에 나오잖아요? 그렇게 이 꿈 같은 이 세상을 사는데, 이 세상 왕들, 모든 아담들 이야기하는 가예요. 그 왕들은, 그 꿈이 무언지도 모르고,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하느님의 사람이, 너는 지금 이런 꿈을 꾸고 있는 거고, 그건 하느님이 이런 이유로 준거야 라고 설명을 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나라에 유다가 잡혀와 있으니, 얼마나 속이 터지냐고. 답답한 거죠.

 

, 바벨, 그 바벨이라는 건 바랄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건데, ‘섞다라는 뜻이에요. 섞는 것은 항상, 그러니까 누룩이 어디에 섞이면 항상 술이 나오죠? , 그러면 성경에서 섞인 것이에요. 섞여서 창조된, 창작된 어떤 것, 인간 세상의 어떤 것. 섞으면 다 율법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느님이 이런 걸로 줬는데, 인간이 자기의 마음을 섞어 버리면, 인간의 소위 양심이라는 걸 섞어버리면, 그거 술이 된다니깐요. 인간들을 미혹하여 홀려 버리는 술! 섞은 것! 그걸 바벨이라 그래요. 그래서 거기에서 언어가 섞이는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상징적인 거죠. 그러한 곳에, 그렇게 섞이면, 거기가 심판이에요.

그곳에 하느님의 백성들이 들어갑니다. 들어가 가지고, 거기에서, 그 섞인 자들과 방불하게 살다가, 어떤 은혜에 의해 이제, 그들만 나오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그 안에서 사는 그 기간이 70이레예요. 그거는 이 역사 전체를 가리키는 겁니다. 다니엘서 9장에 보면. 그러니까 이 역사 전체가 우리가 포로로 사는 기간이에요. 여기가.

거기에서 하느님의 약속이 주어져요. 칠십 이레! 그 때가 되면 너희들이 풀려 날거야, 그 유다가 BC 516년에 완전히 풀려나죠? 조금씩, 조금씩 잡혀가다가, 조금씩, 조금씩 풀려나서, 나중에 계산해 보면 70년이에요. 그래서 70년 포로생활, 그러는 거죠. 하느님은 유다가 안식년을 지키지 않아서, 그 땅을 쉬게 만들기 위해, 70년의 포로생활을 그들에게 허락했다고 그래요. 성경은.

그러니 쉬어야 되는데, 너희들은 뭔가에 쫓겨서 쉬지 않고, 안식하지 않고, 열심히 달려 버리면, 하느님은 그걸 심판하신다, 그래요.그래서 70년을, 그 땅을 쉬게 하세요. 당신 백성들의 땅을. 그런데 안식년은 7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죠? 그러니까 70×7. 70이레가 거기서 나온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70번의 안식년을 너희들이 어겼다. 그러니 70년 동안을 내가 이 땅을 아예 쉬게 만들어버리겠다. 그러니 매년이 안식년이에요. 거기는 그 포로생활 전체가, 거기에서 그게 뭔지를 알면, 그들은 이 바벨론에서, 바벨에서, 안식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뭔지 알면. ? 그게 안식의 기간이거든요. 70이라는 것 자체가.

안식이라는 건, 너희가 열심히 율법을 지켜서, 너희에게 찾아오는 게 아니라, 내가 강제로 너희에게, 너희 땅을 혼돈과 공허로 만들어, 텅 비게 만들어서, 그 땅을 부정해 버림으로 너희의 안식이 오히려 완성이 되는거다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너희에게 허락한 시간이 바로, 70이레라는 거예요. 칠십으로의 그 칠이다. 율법이 아닌 은혜라는 이야기예요. 그러면 그 안식의 희년이 오는 거예요. 그 희년은 50일 해서, 오순절, 그 날 성령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간으로서의 역사가 끝나는 거예요. 육신으로서의 역사가 끝나는 거예요. 그게 70이레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러면 지금 주님께서 (7)로 용서할까요?’라고 묻는 베드로에게, ‘707로 용서를 하라라는 게 무슨 말이겠어요? 인생은 율법으로 용서 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로 용서가 되는 것임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에요. 이 모든 역사가 사실은, ‘용서의 역사라는 거예요. 용서하시기 위해 하느님이 주신 역사인데, 그걸 아는 자는 나올 것이고, 모르는 자는 그 바벨에 가서 죽는다, 그래요. 그 용서를 우리가 알아먹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는 이 바벨, 지긋지긋한 야차들의 세상에서, 안식을 하며 자유롭게 사는 이들이 있다니깐요. 누가 뭐라고 그러던 말던.

그래서 그 바벨이라는 단어가 섞다라는 뜻과 함께, ‘기름붓다라는 뜻을 함께 갖고 있어요. 그 바벨, 그 섞은 것 안에서, 하느님의 은혜가 임하면, 그에게 기름이 부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벨이 뭐 나빠요? 성도들에게는 거기도 천국이라니깐요. 거기서 기름 받으면 되는 거예요. 진리의 말씀을 받으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서 용서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심판 때에 왕 앞에서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기다려 주세요. 내가 갚을 게요.’라고 나선 거예요. 나는 7로 할 거예요, 끝까지 그런 거예요. 그러면 너는 용서를 모르는 거야!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 70이레에 쏟아 부어진 그 용서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인 거예요.

성경에 그런 말이 나오죠? ‘하느님은 모든 자가 구원 받길 원한다.’ 그게 그런 말이에요. 하느님은 이 역사를 그 용서를 위해 만드셨다. 당연히 모든 이가 구원 받길 원하는데, 하느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으면, 누구도 구원 못 받아, 그걸 설명해 주는 거예요. 모든 자가 구원 받길 원한다.

그러니까 뭐 하느님의 보편 구원론을 이야기하셨다고 이야기 하는데, 천만의 말씀. 성경은 그냥 그렇게 몇 구절만 뽑아 가지고, 자기 신학을 만드는데 사용하면 안 돼요. 사람이 만들어낸, 창작해 낸 엉터리 신학이란 말입니다. 그것은.

자 그래서 그 임금이, 70이레를 이해하지 못한, 그 종에게 빚 탕감을 선언해 주었음에도, 그것이 뭔지 모르고, 다른 이에게 빚 탕감의 복된 소식을 전해 주지 못하고, 그를 오히려 목 졸라 감옥에 가두는 자로 어떤 이들은 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듣는다고 해서, 다 진리가 됐다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바오로가 그런 말을 하죠. ‘, 내가 너희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고 혹시 버림을 받는 자가 될까 하노라라는 이런 말을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바오로가 진리를 알고 나서, 너희들이 다 듣는다고 해서, 그 듣는 것이 너희를 구원하지 못한다, 그런 말이에요. , 실제로 그렇다니까요. 사람은요 자기가 깨달았다고 하는 것을, 확신으로 막 말할 때는, 그 확신에 자기가 넘어갑니다. 내가 그걸 확신하고 있는 줄 착각해요. 자기가 그 얘기를 막 할 때는 그런대요. 내가 그 이야기를 하지 않고 멈추잖아요? 그게 자기의 마음이 되지 않은 자들은 그 때부터 불안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루터가 죽기 전에, 하느님 혹시 나 이렇게 써 먹기만 하고 지옥 보내는 것 아녜요? 이런 의심에 흔들렸다는 것이 그런 연유에서 그런 거예요. 그 단순히 우리가 이걸 듣고 있기 때문에, 나는 구원 받았다라고 착각하면 안 돼요. 그것으로 나를 용서했는가? 그리고 그 용서를 남들에게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가? 자꾸 자기를 묵상하고, 상고해 봐야 해요, 나를!

그렇게 동관, 백 데나리온 빚진 자, 그를 용서해 주지 못한 그 자는, 바벨에서, 그저 바벨이라는 섞은 재료로, 열심히 탑을 쌓고 있는 사람에 불과한 거예요. 그것을 하느님이 용서라는 것을 주었는데, 그것을 진리로 읽어 내지 못한 사람의 모형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 같은 처지의 동관을 자유롭게 풀어주지는 못할망정, 감옥에다 처넣는 자가 된 거죠.

바오로는 이 땅에서 그 바벨을 통하여, 다른 바벨, 기름 부음이라 그랬어요? 거기에 당도해야 하는 성도의 현실을 이렇게 설명해 줍니다.

 

(로마서 15:25-27) 25 그러나 지금은 예루살렘에 사는 성도들에게 구제금을 전하러 갑니다. 26 그것은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의 성도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에게 같은 교우로서 정을 나누려고 기쁜 마음으로 보낸 것입니다. 27 그들은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보냈지만 그들에게는 또한 그렇게 할 의무도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의 정신적인 축복을 나누어 가졌으니 이제는 물질적인 것을 가지고 그들을 도울 의무가 있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냥 얼핏 보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사람들이 신령한 것을 받았으니까, 그들이 어려울 때, 육신에게 필요한 구제 헌금, 돈을 보내는 게 마땅한 것 아니냐? 이런 말로 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이걸로 헌금을 착취하는데, 자주 쓰는데, 그렇게 보이죠? 여기에 무슨 구제 헌금, 돈이라는 단어도 없고, 무슨 동정했다 이런 말도 없어요. 그냥 교제했다라는 말이에요. ‘코이노니아란 단어예요.

그리고 여기에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자들이 페네스(penes)’가 아니고, ‘프토코스(ptocos)’입니다. 예루살렘은 율법의 중심이죠. 거기에 있는 프토코스’, 심령이 가난한 자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절대적 가난! 그들에게 이방적인 어떤 것들이 가서, 오히려 예루살렘 밖의 어떤 것들이 가서, 그들을 섬기는 그 일을 하는 거예요. ‘그 일을 위해 내가 가겠다.’라는 그런 말이에요.

이것은 헌금 들고 찾아가겠다는 말이 아니라. 그러면서 27절에서 섬김이 어떠한 방식의 섬김이 될 것인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요. 이걸 원문으로 보면요, ‘빚진 자들은 이방적인 것 안에서, 어차피 우리는 이 땅에서 살기 때문에, 그것이 진리로 해석되지 않으면, 그걸 이방적인 것이라, ‘에뜨노스가 여기선 중성으로 쓰인단 말이에요. 그러면 이방인이라 해석하면 안 된다니깐요.

그러니까 중성으로 쓰이면, 그건 이방적인 것이라고 해석해야 된단 말이에요. 이방적인 것 안에서, ‘프뉴마, 신령한 것으로 교제를 하는 자들이란 거예요. 우리는 그 아랫것들 갖고, 내 말 갖고, 성경을 가지고, 그 예수를 이야기 하면서, 그 안에서 그 신령한 것으로 전달해 주는 자들이란 거예요.

그게 빚진 자들의 마땅한이란 단어도 빚갚다라는 뜻이에요. ‘마땅하다, 당연하다란 뜻이 아니라니깐요. 빚진 자들은 그렇게 이방적인 것 안에서, 영적인 것들로, 신령한 것들로, 교제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 그 육신적인 것 안에서 진리로 전해주는 그 행위를 하는 그것이, ‘빚 갚는 거야라는 말이에요. 이 말이요.

그러니까 당연히 여기 안에서, 우리가 그런 것들을 가지고, 그 진리를 설명해 주면 그걸로 빚 갚는 거라니깐요. 그들이 용서받은 자요, 용서하는 자란 말이에요.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그 이야기란 말입니다. 내 안에서 그 빚이 탕감되게 해 주세요. 용서되게 해 주세요. 그리고 나도 그렇게 되면 나도, 나를 용서합니다. 나의 죄를 용서합니다.’ 이런 말이에요.

과거에 무슨 일을 했던, 뭐 어떤 사람으로 살았던, 너무 자부심 갖지도 말고, 거기에 너무 묶여 있지도 마세요. 그건 교만한 것 보다 더 나쁜 거라니깐요. 성도의 목적지가, ‘, 나는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라고 했더니, 그냥 주구장창 나는 죄인입니다. 죄인입니다. 내탓이오 내탓이오.’ 거기에 머물러 있어 그냥. 아니라니깐요!

그래요, 내가 죄인이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은혜와 사랑으로 나를 의인 만들어 주었다까지 가야지, 그냥 나는 죄인입니다, 죄인입니다. 그러구 앉아 있으면, 그래 너 죄인이야. 그래 네탓이야. 그럴 거예요, 하느님이. (웃음) 누가 뭐래?

아니 그래서 하느님이 나에게 그 은혜, 그 사랑을 퍼부어 주셔서, 내가 이렇게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까지 가는 거지, 내가 죄인 중에 죄인입니다. 하고 끝! 그래 너는 죄인이니까 지옥가라 그러실 거 아녜요.(웃음) 하느님이. 자 그게 오페일레테스’, 빚을 갚는 것이라는 거예요.

이라는 떡을, 예수라는 문을 두드려서 받아낸, 그 친구가, 자기를 그 떡으로 배불린 다음에, 용서한 다음에, 다른 그 떡을 필요로 하는 아이테오’, 구하는, 빚 갚으세요. 하는 또 다른 친구에게 전해주는 그 이야기가, 그래서 이 주님의기도문 밑에 붙어 있는 거란 말이에요. 그게 용서야. 그게 떡 이야기야, 이렇게.

그것이 바로 진정한 용서이고, 진정한 교제, ‘코이노니아이며, 그것이야 말로 성도의 사랑인 거예요. 그런 면에서 이렇게, 우리가 구역,반 같은 것 나누어 주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삼삼오오 모여서, 바로 그 사랑의 이야기를 하고, 하는 그런 것들, 이건 정말 바람직한 거예요.

그러니 자주 모여서, 서로서로 이렇게 빚진 자로서 그 사랑을 나누면 됩니다. 그냥 교회 온 사람들 나가는 뒷구멍 막는다고 어떻게 조직을 만들어서, 씨줄, 날줄로 엮어서 관리를 해야 돼 라는 의미에서의 구역 이런 것은, 하나도 필요 없어요. 그걸 관리해서 뭐할 거예요. 아닌 사람들은 빨리빨리 나가야지 뒷문으로. 그러니까 그 진리에 연합이 되는 그런 이들끼리 모여서, 그 사랑의 나눔을 하면 됩니다. 따른 건 필요 없어요.

 

그래서 주님이 주인의 것으로 다른 이들의 빚을 막 탕감해 주는 그 불의한 청지기를, ‘어 너 지혜 있다그러는 거예요. 그게 지혜야. 주님의 것!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걸로 자꾸 이렇게 용서해 줘, 탕감해 주는 거예요, 빚을.

그러니까 하느님이 지혜 있어 그러신 거예요. 그러니 우리도 그 일 하면 돼요. 많이 용서하며 사십시오. 많이 탕감해주며 사세요. 그걸 하느님을 빚쟁이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자리로 옮겨 드리는 삶이라고 하고, 그게 영광을 돌리는 삶! 영화롭게 하는 삶! 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진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겁니다. 엉뚱하게 섬겨서 사랑하려고 하지 마세요. ,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잘 아시겠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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