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마태6,24-3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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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 | 작성일2021-06-19 | 조회수5,119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2021년 6월 19일 토요일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마태6,24-34)
제1독서<나는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2코린12,1-10) 형제 여러분, 1 이로울 것이 없지만 나는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예 주님께서 보여 주신 환시와 계시까지 말하렵니다. 2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어떤 사람을 알고 있는데, 그 사람은 열네 해 전에 셋째 하늘까지 들어 올려진 일이 있습니다. 나로서는 몸째 그리되었는지 알 길이 없고 몸을 떠나 그리되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3 나는 그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나로서는 몸째 그리되었는지 몸을 떠나 그리되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4 낙원까지 들어 올려진 그는 발설할 수 없는 말씀을 들었는데, 그 말씀은 어떠한 인간도 누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5 이런 사람에 대해서라면 내가 자랑하겠지만, 나 자신에 대해서는 내 약점밖에 자랑하지 않으렵니다. 6 내가 설사 자랑하고 싶어 하더라도, 진실을 말할 터이므로 어리석은 꼴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랑은 그만두겠습니다. 사람들이 나에게서 보고 듣는 것 이상으로 나를 생각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7 그 계시들이 엄청난 것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8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9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10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화답송 시편 34(33),8-9.10-11.12-13(◎ 9ㄱ) ◎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그 둘레에, 그분의 천사가 진을 치고 구출해 주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 ◎ ○ 주님을 경외하여라, 주님의 성도들아.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는 아쉬움 없으리라.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뿐이리라. ◎ ○ 아이들아, 어서 와 내 말을 들어라. 주님 경외를 가르쳐 주리라. 삶을 즐기고 복을 누리려, 장수를 바라는 이 누구인가? ◎
복음<내일을 걱정하지 마라.>(마태6,24-3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26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27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28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30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31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32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제1독서 (2코린12,1-10)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어떤 사람을 알고 있는데, 그 사람은 열네 해 전에 셋째 하늘까지 들어 올려진 일이 있습니다. 나로서는 몸째 그리되었는지 알 길이 없고 몸을 떠나 그리되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낙원까지 들어 올려진 그는 발설할 수 없는 말씀을 들었는데, 그 말씀은 어떠한 인간도 누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24)
바오로는 코린토 후서 12장 2절부터 자신이 체험한 주님의 환시와 계시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설명한다. 바오로는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어떤 사람을 알고 있는데' 라고 언급하면서 코린토 후서 12장 2절부터 6절까지 환시를 체험한 주체가 자신이면서도 3인칭 주어를 사용하여 그 신비한 체험과 자신 사이에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 어떤 사람'에 해당하는 '안트로폰 엔 크리스토'(anthropon en Christo)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이라는 뜻이며,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보편적 표현이다. 그리고 '안에'에 해당하는 전치사 '엔'(en)은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일치가 곧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격을 규명한다는 것을 말해 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바오로는 왜 자신을 '나 바오로'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는 어떤 사람'이라고 지칭했을까? 그것은 자신이 여기서 펼치고 있는 주장이 어떤 이유에서든지 자랑에 속한다는 것을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고, 인간적인 자랑이 어리석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특히 영광스러운 자랑을 함에 있어서 자신을 숨기고 삼인칭적 서술로 표현했다고 본다.
어떤 이는 '신비 신학에서 경험 가능한 최고의 영역'이기에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체험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자신을 표면에 드러내지 않는 이유가 이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주축이 되시고 자신은 단지 수동적 위치에 머물렀기에, 이 일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만이 드러나야 한다는 겸손한 생각이 있었기 떄문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사람은 ~ 셋째 하늘까지 들러 올려진 일이 있습니다'
여기서 '들어 올려진'으로 번역된 '하르파겐타'(harpagenta; was caught up)는 본래 '잡아채다', '강제로 빼앗아 가다'라는 뜻을 지닌 원형 '하르파조'(harpazo) (마태11,12; 요한10,12)의 부정(不定) 과거 수동태이다.(테살4,17참조)
바오로는 자신의 계획이나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전적으로 하느님의 주도권에 의해 그분 손에 이끌려 이러한 신비를 체험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바오로가 불가항력적인 하느님의 힘에 사로잡혔다는 점을 암시한다.
그런데 이렇게 이끌려 들어 올려진 곳인 '셋째 하늘'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어떤 이는 바오로가 이러한 하늘의 수에 대한 관념을 히브리인들의 하늘에 대한 개념이나 유다고 묵시 문학에서 빌어온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실제로 유다인들은 하늘이 구름이 머물고 새가 날아다니는 첫째 하늘, 금속판으로 경계가 지워져 궁창 위의 물이 보관되어 있는 둘째 하늘, 하느님과 천사들이 머물고 있는 셋째 하늘과 같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유다교 후기 묵시 문학에서는 '칠층천' 혹은 '삼층천' 개념이 등장한다. 에녹2서 7장 1절에서는 "그리고 이 사람들이 나를 데려다가 둘째 하늘에 올려 놓았다"는 언급이 등장하고, 바룩3서 2장 2절에는 "그리고 그는 나를 데려다가 첫째 하늘로 인도했다"는 언급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대다수 현대 신학자들은 본문의 기록이 '비과학적인 우주 개념'에서 연유된 신화적인 산물로서 본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섣불리 바오로의 셋째 하늘 체험을 신화적 사상의 발현으로만 간주하는 것은 옳지 않다.
'셋째 하늘까지'로 번역된 '헤오스 트리투 우라누'(heos tritu uranu) 에서 '트리투'(tritu), 즉 '삼'이라는 숫자는 최고로 높고 가장 완전한 것을 나타내기 위한 최상의 방법에서 사용될 수도 있고, 그래서 존귀와 영광을 입으신 하늘의 구세주 대전에 들어 올려진 것이며, 시간과 공간을 나타내는 일상적 용어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고, 신비적이며 환상적인 황홀경과도 비교될 수 없는 초월적인 체험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에페소서 4장 10절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라는 언급이 단순히 승천의 의미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지각의 한계 밖으로 올라가셨다는 의미까지 나타낸다는 점에서 참고가 된다.
바오로는 자신의 이 체험이 열네 해에 있었던 일이라고 하는데, 대부분 학자들이 코린토 후서의 기술 연대가 A.D. 55년경으로 추정하므로 아마도 A.D. 41년 혹은 42년경에 있었던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때 바오로가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 이런 체험을 했는지는 알 수 없고 추정할 뿐이다. 어떤 이는 바오로가 회심 후 고향 타르소에서 은거하고 있던 중이라고 보고(사도9,30-11,25), 어떤 이는 바오로가 안티오키아에서 선교했을 때로(사도11,26) 보기도 한다.
여기서 바오로가 예외적으로 시간을 나타내는 표현을 하는 것은 자신의 이 신비 체험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고, 역사적 진실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몸째 그리되었는지 알 길이 없고 몸을 떠나 그리되었는지'
코린토 후서 12장 2절의 내용이 3절에 또 등장하는데,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라는 의미를 지닌 '우크 오이다'( I can not tell ; I don't know)가 2절에서는 두 번, 3절에서는 한 번만 나온다는 차이밖에 없다.
바오로의 셋째 하늘 경험이 몸 안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몸 밖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중복 사용한 것이다. 전자는 테살로니카 전서 4장 15-17절의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라는 표현을 고려할 때 타당하다.
바오로의 신학적 견해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인데, 당연히 주님께서도 당신 재림 때에 그리스도인들이 하늘로 들려 올라갈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마태24,40.41; 루카17,34.35; 요한14,3).
구약의 경우 에녹과 엘리야가 바로 이러한 예에 해당하고(히브11,5.6; 2열왕2,1-15), 신약에도 예수께서 이런 경험을 하셨다(사도1,9). 그리고 후자는 육체에서 분리된 영혼의 승천을 말하는 것인데, 필리피서 1장 23절이나 루카 복음 16장 19-31절의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에 근거할 때 몸을 벗어난 영혼도 의식적인 활동을 한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바오로는 여기서 자신의 경험이 전자인지 후자의 견해인지 자신은 알 수 없다고 언급하면서, 그 모든 판단에 대해서 하느님께 유보시키고 있다.
이같은 바오로의 태도에 대해, 우리는 바오로가 너무나 신비한 상태에 있었던 자신의 상황을 자세히 말할 수 없었고, 전자이든 후자이든 그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언어로는 표현하기 불가능한 영광을 체험했다는 선에서 놓아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2코린12,4).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신비한 영적 제험이 바오로로 하여금 그의 사도직을 수행함에 있어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모든 고난들을 인내하며 감당할 힘을 얻는데 탁월한 기여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로마8,18)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복음(마태6,24~3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24)
마태오 복음 6장 24절은 하늘 나라의 시민된 자가 재물에 대해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를 기록한 마태오 복음 6장 19~24절의 결론에 해당한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재물을 섬길 것인지, 아니면 하느님을 주인으로 섬길 것인지 양자택일해야 함을 가르쳐 준다.
여기서 '섬기다'에 해당하는 '둘류에인'(douleuein; serve)의 기본형인 '둘류오'(douleuo)는 '종', '노예'라는 뜻을 지닌 '둘로스'(doulos)와 같은 어근에서 비롯된 단어로서, '종으로서 예속되다', '노예처럼 섬기다'는 뜻을 갖는다.
즉 노예는 그 목숨이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으며, 주인의 명령에 대해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당시 상황을 염두에 볼 때, 이것은 종이 목숨을 바쳐 섬길 대상은 절대로 하나 이상이 될 수가 없다는 뜻이다.
한편, '재물'에 해당하는 '마모나'(mamona; mammon; money)의 원형 '맘모나스'(mammonas)는 히브리어로 '믿다', '신뢰하다'라는 뜻을 지닌 '아멘'(amen)과 같은 어근을 갖는 아람어에서 유래하여 '신뢰하는 자'라는 뜻을 갖는다.
고대로부터 재물은 사람들이 가장 신뢰하고 의지하며 집요하게 추구하여 왔던 것 중에 하나이므로, '맘모나스'(mammonas)는 '재물'과 동의어으로 쓰였다.
영어의 '재물'을 뜻하는 '맘몬'(mammon)이 이 단어에서 나왔다. 여기서는 이 '재물'이라는 단어를 의인화시켜 섬김의 대상으로 삼아 '재물'이 충분히 사람들의 주인이 될 수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 걱정 근심을 주님께 맡겨 드려라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 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6,25)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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