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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7.4.“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작성자송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21-07-03 조회수6,136 추천수1 반대(0) 신고

마르 6, 1-6(연중 14주 주일)

 

연중 14 주일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사람의 아들이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이들에게 보내진”(에제 2,4) 사실을 전해줍니다. 이는 오늘 <복음>의 배경 구실을 합니다. 곧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고향 사람들의 완고함이 드러납니다. 반면에,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힘은 오히려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고 말해줍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는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4)

 

혹 우리도 더러는 사회적으로는 존경받으면서도 가까이 있는 이들, 곁에 있는 이들, 곧 내 남편, 내 아내, 내 형제, 내 자식으로부터는 존경받지 못하고 있는 않는지요?

다른 한편에서, 반대로 질문을 해 봅니다.

나는 왜 내 곁에 있는 이들, 곧 내 부모 형제들, 내 동료들을 존경하지 못할까요?

너무도 잘 알아서 그럴까? 그런데 나는 진정, 그를 제대로 아는 걸까요?

혹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사실, 오늘 <복음>에서도 그 이유가 고향 사람들에게 있음이 드러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우리 곁에 있는 내 동료, 내 형제를 존경하지 못한 이유를 내 형제에게서 찾기에 앞서, 먼저 나 자신에게서 찾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지혜와 기적을 보고 ‘놀라워하였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놀라워하였다’는 이야기는 보고 알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곧 그들은 그분의 신적 권위와 지혜와 능력에 대해서는 알아보고 놀라워하였지만, 동시에 그분이 목수이고 마리아의 아들이고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안다’는 것이 오히려 믿음의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마르 6,3).

왜일까요? 왜 우리는 가까운 이나 함께 살고 있는 이를 존경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기기까지 할까요? 그것은 내가 ‘그를 안다’는 자기 생각에 빠진 결과가 아닐까요? 있는 그대로의 그가 아닌 ‘내가 아는 그’라는 선입감을 믿어버린 것이 아닐까요? 사실, 그것은 그에 대한 하나의 편견이요, 고정관념이요, 고착일 뿐인데도 말입니다. 아니, 그것은 자신이 아는 것, 그것을 섬기고 따르고 마는 하나의 우상숭배일 뿐인데도 말입니다. 그것은 진실을 아는 것이 아니라, ‘안다’는 생각에 가려 진면목을 알아보지 못한 무지와 곡해와 왜곡과 몰이해일 뿐인데도 말입니다. 거기에는 질투와 시기, 비교와 경쟁, 이해타산의 이해관계와 계산이 있고, 신뢰가 아닌 의혹이 있을 뿐인데도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안다’는 것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오히려 나는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일입니다.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을 이른바 무지의 지라고 말합니다.

사실, 자신이 ‘안다’는 생각, 우상을 벗어나야, 진정한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갖고 있는 지식을 뛰어넘는 일입니다. 곧 하느님을 자신의 앎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앎으로부터 해방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더 심하게 말하면,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제거해버리는 일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의 하느님을 없애버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신 하느님, 주님이신 주님이요, 비록 자신이 아는 그러한 주님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타인에게 자신을 개방하는 일, 개방을 넘어서 타인을 수용하는 일, 수용을 넘어서 타인으로 하여 자신이 변형되는 일, 그것은 바로 자신의 앎을 비워내고 자신의 앎을 넘어서는 그분을 믿고 받아들임에 달려 있는 일일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습니다.”(마르 6,6) 마치,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데도 의사를 믿지 않고 수술을 거부하는 환자 앞에 선 것처럼, 당혹해하시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의사는 치유의 능력이 있건만 환자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야말로, 진정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입니다. 오늘 우리의 불신 때문에 예수님께서 당혹해하시지 않으시도록, 믿음으로 그분 앞에 나서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4)

 

주님!

스승을 곁에 두고도 존경하지 않은 저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 데도 의사를 믿지 않아 수술을 받지 못한

어리석은 환자입니다.

제 앎을 뛰어넘는 당신을 믿지 못하는 저는

안다는 제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주님, 존경을 겸손의 표지로, 믿음을 응답의 표지로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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