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18(녹) 연중 제16주일 ... 독서, 복음서 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7-17 조회수3,790 추천수0 반대(0) 신고

한국 교회는 주교회의 1995년 추계 정기 총회의 결정에 따라 해마다 7월 셋째 주일을 농민 주일로 지내고 있다. 이날 교회는 농민들의 노력과 수고를 기억하며 도시와 농촌이 한마음으로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 맞갖게 살도록 이끈다. 각 교구에서는 농민 주일에 여러 가지 행사를 마련하여 농업과 농민의 소중함과 창조 질서 보전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1독서< 나는 살아남은 양들을 다시 모아들여 그들을 돌보아 줄 목자들을 세워 주리라.>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23,1-6

1 불행하여라. 내 목장의 양 떼를 파멸시키고 흩어 버린 목자들! 주님의 말씀이다,

2 그러므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내 백성을 돌보는 목자들을 두고 말씀하신다. - 너희는 내 양떼를 흩어 버리고 몰아냈으며 그들을 보살피지 않았다. 이제 내가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벌하겠다. 주님의 말씀이다.

3 그런 다음 나는 내가 그들을 쫓아 보냈던 모든 나라에서 살아남은 양들을 다시 모아들여 그들이 살던 땅으로 데려오겠다. 그러면 그들은 출산을 많이 하여 번성할 것이다.

4 내가 그들을 돌보아 줄 목자들을 그들에게 세워 주리니,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 잃어버리는 양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5 보라,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6 그의 시대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살아남은 양들을 다시 모아들여 그들이 살던 땅으로 데려오시고, 그들을 돌볼 목자를 세워 주시리라고 한다.

 

 

2독서<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2,13-18

형제 여러분,

13 이제, 한때 멀리 있던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15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16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17 이렇게 그르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18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독서 주해(해제,역주 김영남 신부님)

13

바로 앞 12절의 그리스도 없이와 대조를 이룬다.

누구에게서 멀어졌다가 누구에게 가까워졌는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문맥상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가 하느님과 가깝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하느님께 까까워짐뿐 아니라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서로 가까워졌음도 함축한다. 12절은 17절에서 암시되는 이사 57.19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14

14-18절은 초대교회 전례문이나 교리교육 표현을 이용해서 엮은 것으로 보이는데, 전체가 평화하나라는 두 주제어로 집약된다. 이 두 단어는 분열과 적대관계이나 반대계념들이다. 인간들은 율법 때문에 갈라졌고 율법이 그들을 갈라놓는 장벽이 되었는데, 그들이 하나로 만나는 곳은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다. 그 몸은 십자가상 자기증여를 통해 평화와 화해의 원천이 되었다. 앞의 5절과 8절에서 언급된 구원의 내용이 평화.일치.화해로 설명된다.

 

아 단락에서 거의 구절마다 불필요하다고 할 만큼 반복되는 안에서”.“통하여”.그 안에서“,”그분을 통하여이 전치사구들은 화해와 평화의 일치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특히 십자가상 죽음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강조한다.

 

평화는 예언자들이 예고한 메시아 시대의 충만한 구원을 표현하던 말이었다. ”그리스도께서 평화를 이루셨다라는 생각은 이미 골로 1.20에 있었다. ”평화에 대한 생각은 화해라는 주제와 연결된다. 인류 전체의 평화 수립을 여기 14절에서는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의 관계에 적용하는데, 늘 교회를 염두에 두고 있다. 1989년 서울에서 열린 44차 세계 성체대회의 주제였던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는 바로 여기 에페 2.14에서 따온 말이다.

 

은 직역하면

이방인 출입을 엄금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 영역에서 유다인들의 뜰이방인들의 뜰아이를 가르고 있던 난간을 염두에 둔 표현일 수 있다.

 

15

웜문에서 14절 끝에 나오는 자신의 몸 안에서를 여기 15절에도 연결시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율법과 철폐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이루어졌다는 것이다. 15ㄱ절은 14절 끝을 보충 설명한다. ”율법은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을 갈라놓고 적대감을 갖게 했다. 11절에도 언급된 할례를 비롯하여 수많은 율법규정이 사회적으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을 분리시키는 역할을 했다. ”규정들로 된 계명들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지만 율법의 철폐는 매우 강한 표현이다. 에페소에서는 율법이라는 단어가 여기만 나온다.

 

골로 3.10.참조. 에페소서에서는 새 인간그리스도의 몸과 동일시한다. 그리스도의 몸에서 유다인과 이방인은 차별없이 유다인도 이방인도 아닌 오직 그리스도인으로, ”하나인 새 생명을 살게 되었다.

 

16

한 몸 안에서어떤 이들은 여기서 십자가에 달리신 몸을 생각하고,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생각한다. 그러나 이 두 해석이 상반되는 것은 아니다. 문맥으로 보아 저자는 둘다 염두에 두고 있다.

 

17

이사 57.19의 말씀을 일차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복음선포에, 이차적으로는 이와 불가분인 사도들의 복음선포에 적용한다.

 

18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는 신앙인을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게 만든다. 로마 5.2에 따르면 이 하느님께 다가감이 의화의 결정적 결과다.

 

19

거류자는 잠시 머물다 가는 외국인과 달리 비록 해당 도시의 주민이 가지는 권리를 전적으로 누리지는 못하지만, 합법적으로 그 지역에 눌러사는 사람이다.

 

19절은 11-12절처럼 교회가 이스라엘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전제하고 유다 백성의 특권적 위치를 긍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가 옛 이스라엘을 뛰어넘는 새 창조물임을 보여준다.

 

20

구약 예언자가 아니라 원시교회 예언자들을 가리킨다. 4.11에 열거되는 직무 중 예언자사도바로 다음에 나온다. 사도들과 함께 이들은 하느님 신비의 계시에 참여하며 그리스도 공동체의 기초 역할을 한다.

 

22

에페소서에서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결합되고 성령으로 활성화하는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몸이요 하느님의 성전이다. 따라서 교회는 삼위일체 신비 자체를 반영하며 또 참여하고 있다.

 

 

복음<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0-34

그때에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하고 말씀하셨다. 오고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서 주해(해제.역주 정양모 신부님)

30

30절에서 보고하는 내용은 지극히 추상적이다. 마르코는 아무런 전승사료 없이도 오직 열두 제자를 파견하신 이야기를 참작하여 쉽게 이처럼 추상적인 보고 내용을 엮을 수 있었다.

 

31

따로는 마르코가 즐겨 쓰는 표현.

예수께서도 외딴 곳으로 가신 적이 있다. 마르코는 35절에서 암시를 받아 6.31.32에도 외딴 곳을 내세웠을 것이다.

 

3.20과 흡사하다. “군중이 다시 모여와서 그분 일행은 빵을 먹을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마르코는 예수께 군중이 모여든다는 소재를 무척 좋아한다.(2.2.3.7.8.20;4.1-2;6.31.33)

 

34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사화는 본디 34절부터 시작되었으리라. 그런데 백성을 불쌍히 여기신 동기를 들어 8,2에서는 그들이 ... 먹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하고 여기서는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과 같았기 때문입니다한다. 구약성서를 보면 야훼는 목자시다. 모세는 목자 같은 지도자를 주십사고 하느님께 간청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대부분 목자처럼 처신하지 앖았다. 하느님께서는 참 목자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제 참 목자 예수께서 오셔서 백성을 불쌍히 여기신다.

 

마르코는 예수의 가르침을 두드러지게 부각시킨다.(1.21-22.27;2.13;4.1-2;6.2.6.30.34.7.7. 8.31;931;10.1;11.17;12.14.35;14.49)

 

 

 

 

 

 

200주년 신양성서 주해/분도출판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