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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연중 제16 주일
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21-07-17 조회수3,890 추천수11 반대(0)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에 대한 다큐를 보았습니다. 부유한 나라는 권력이 분산 되어 있고, 공정한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세금은 가난한 이와 아픈 이를 위한 복지를 위해서 사용되었습니다. 부유한 나라는 부정과 부패가 적었습니다. 기업의 독점을 막았고, 경쟁을 통해서 생산성을 향상 시켰습니다. 특허를 통해서 창의성을 보장하였고, 국가 발전의 토대를 만들었습니다. 가난한 나라는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되었습니다. 집중된 권력은 공정한 기회를 박탈하였습니다. 부정과 부패가 생기고, 세금보다는 뇌물에 익숙해졌습니다. 뇌물은 가난한 이와 아픈 이를 위해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뇌물은 부유한 이를 더욱 부유하게 하였고, 가난한 이는 더욱 가난하게 만들었습니다. 통신사가 독점하니 통신비가 비싸고, 핸드폰이 있어도 공중전화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수도가 들어오지 않으니 물동이를 들고 물을 얻으러 다녀야 했습니다. 소수의 부유한 사람은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유했던 나라가 추락하는 모습을 역사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공정과 정의가 사라질 때입니다. 소수의 탐욕이 사회의 조직과 질서를 무너트릴 때입니다. 공화정에서 황제의 통치로 바뀌었던 로마가 그랬습니다. 왕실의 부와 명예를 위해서 엄청난 세금을 부과했던 스페인이 그랬습니다. 엄청난 석유 매장량을 보유했던 베네수엘라가 그랬습니다. 잘 살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탐욕은 경쟁력을 잃어버렸고, 다수의 국민들을 헤어날 수 없는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자원이 많아도, 국토가 넓어도 권력이 독점되면, 재벌과 권력이 유착하면, 소수의 탐욕이 기승을 벌이면 가난한 나라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원이 적어도, 국토가 좁아도 공정과 정의가 보장되면, 기회가 균등하면, 부정과 부패가 자리 할 곳이 없으면 나라는 부유해 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를 통해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작지만 강한 나라가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영적으로 충만하게 성장하는 신앙이 있습니다. 여름 날 메말라 갈라진 논바닥처럼 생기를 잃어버리는 신앙이 있습니다. 시련과 고통을 디딤돌로 삼아서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가는 신앙이 있습니다. 시련과 고통이 걸림돌이 되어서 하느님과 점점 멀어지는 신앙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충만한 신앙은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샘이 깊은 물과 같습니다. 매일 기도하는 사람,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는 사람, 내면의 삶을 성찰하는 사람, 책을 가까이 하는 사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 해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메마른 신앙은 자갈밭에 뿌려진 씨와 같습니다.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와 같습니다. 세상의 명예, , 권력을 향해 나가는 사람입니다. 삶은 풍요로울지 모르지만 영혼은 고독한 사람입니다. 이웃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말은 있지만 행동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그의 시대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 것은 공정과 정의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세상의 것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권력이 독점되었고, 소수의 탐욕이 다수를 희생시켰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돌아온다면, 공정과 정의를 실천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을 주실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비록 나라를 빼앗겼고, 유배를 가는 신세가 되었어도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고향 땅으로 돌아 올 수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영적으로 충만한 신앙은 공감에서 시작됩니다. 공감은 연민이 되고, 연민은 조건 없는 나눔이 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바로 공감과 연민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은 공감과 연민이 희생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공감과 연민이 함께 한다면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더는 슬픔과 울부짖음이 없는 세상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재물과 권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희생과 한없는 연민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신앙은 영적으로 충만한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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